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등장하는 해변, 호수, 개천과 같은 장소는 대한민국의 지정학적 특성을 공유할 뿐만 아니라 영화를 유영하는 파동 같은 이미지다. <해변의 연인>(2006), <다른 나라에서>(2011), <도망친 여자>(2020), <인트로덕션>(2021), <물 안에서>(2023) 등이 그러한 영화들이다. 물론 홍상수가 이 장소를 적극적으로 고려해서 영화를 찍는다고 생각하기엔 미심쩍은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의 몇몇 인터뷰를 들어보면 대부분의 로케이션은 우발적으로 선정되기 때문이다. 그에게 장소란 개념은 영화를 건축하는 기본적인 단위가 아니라 언제든 변형될 수 있는 물과 유사하고, 그의 특성 자체를 공유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가 전날이나 당일 날 완성하는 대본도 이런 특성을 공유한다. 최근작인 <물 안에서>는 아웃포커싱을 기반으로 물의 가변적이고 모호한 속성을 통해 홍상수 영화의 새로운 페이지를 엿보게 했다.
한편으로, 논리적으로 규정할 수 없는 물은 '술'과 '여자'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참도 지난 이야기지만, <하하하> 인터뷰 때 홍상수는 여자를 사귀다 보면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는 것이 아닌 어느 순간 확 알게 되는 순간을 담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의식을 지배하는 술, 그리고 이어지는 취기는 무언가 모자라고 찌질한 남성들을 대변하기도 한다. 술의 힘을 빌려 의식의 불응을 촉발하는 영화에서 캐릭터는 감각이 마비된 채 우발적인 행위를 숙주로 삼는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그의 영화에서 과도한 취기가 잘 보이지 않는다. 여성에 안달 나 있는 남성상은 없고 도리어 절제된 톤으로 영화가 이어진다. 노골적인 성관계 장면도 아예 종적을 감추었다. 이런 변화가 김민희와의 만남 혹은 특정 영화 이후라고 추정해 볼 수 있겠지만, 아예 홍상수 월드에서 배제된 것이라 섣불리 말할 수는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흥미롭게 관찰할 수 있는 것은 '과거와 현재에서 영화를 대하는 태도가 어떻게 변화되었느냐'이다. 지금을 홍상수 영화 후기로 지정한다면 <그 후>(2017)에서 등장한 대사가 이를 잘 대변해 준다.
"정말로 실체가 우리가 알 수 없는 거라면 사실은 없는 거 아닌가요" (김민희)
"말로 정리가 안 되는 거지 느낄 순 있는 거야, 그게" (권해효)
이 대사는 두 종류의 개념을 대비한다. '존재하는 것은 지각된다'는 조지 버클러의 말과 '달을 내가 보지 않는다면 없다는 것인가'라고 반문하는 아인슈타인이 있다. 인식을 주체의 토대로 삼느냐는 관념론, 혹은 인식과 상관없이 관계하고 있다는 존재론은 미학적으로도 흥미로운 주제 중 하나다. 특히 원격으로 언제 어디서든 접촉이 가능한 지금의 세계에서 대중들은 그 실체를 인식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사물이 맺는 다양한 관계와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지위를 소유하게 되었다. 저 대사와 이 개념은 홍상수 영화의 특성을 잘 드러낸다. 이것이 온전한 실체가 없는 영화일지언정 현실에서 구축된 일상은 우리에게 기억을 환기하고 감정을 체현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후>(2017)라는 영화의 제목처럼 '그 후'의 기점은 어디일까. 그 기점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조건이 되는 영화는 <도망친 여자>와 그다음 작품인 <인트로덕션>(2021)이다. 김민희가 극장에서 스크린이 반사되는 바다를 응시하고 끝나는 장면<도망친 여자>와 수영을 하러 바다에 뛰어드는 장면<인트로덕션>은 어떤 의미를 총체 하는 것일까. 나는 그것이 자신을 담대히 드러내려는 모종의 결의처럼 느껴진다. 지켜보는 시선으로 정체하지 않고 바다를 향해 자신을 투신하는 모습 말이다. 그리고 그 맥락에서 <수유천>이 갖고 있는 홍상수가 자신을 인식하는 태도를 보게 된다. 그는 어디로 가는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수유천>의 영어 제목은 By the Stream이다. 직역하자면, 개울 옆이나 개울을 지나, 개울로 등, 다양한 가능성이 존재한다. 특정 장소를 함의하는 <수유천>이라는 제목하고 그 뉘앙스의 차이가 있다. 왜일까.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존재하는 영어 제목과 다르게 존재하지 않는 명칭인 '수유천'은 실제로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본래 이 천의 이름은 우이천이다. 정확한 명칭을 사용하지 않는 감독은 마치 자신의 이름을 바꿔 영화에 등장시키는 것과 같은 용법을 이 제목에서도 활용한다.
<수유천>의 첫 장면은 수유천 옆 콘크리트 바닥에 앉아 김민희가 노트에 무언가를 그리고 있는 모습을 부감으로 찍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두 번 더 등장 하는데, 이때 우리는 그녀가 무엇을 쓰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이런 비슷한 장면은 <풀잎들>(2018)에도 있었다. 김민희가 카페 안에서 인물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노트북에 무언가를 작성하는 장면이 있는데, 마찬가지로 그 텍스트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인물의 대화가 창작자인 홍상수로부터 매개된다는 것을 고려할 때, 이는 김민희를 통해 자신을 재호명하는 형식적 도구처럼 보이기는 한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재론하면서 무의식과 의식을 표출하는 의도를 가진 홍상수 영화는 '거울'처럼 자신을 반사한다. 홍상수 영화에서 자신을 자학하는 방식의 유머가 나타나는 건 굉장히 흔한 형식이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남성 캐릭터 시인, 감독 등은 홍상수를 형상화하고 있다는 유사성과 관련하여 앞선 글([홍상수 #8] '여행자의 필요'와 조건에 대한 해답)에서 논의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영화의 긍정적인 요소보다 유독 더 신경 쓰였던 것은 감독 자신을 옹호하려는 모습 때문이었다. <수유천>이 과거와 현재의 홍상수가 공존하는 데에서 이 점은 크게 극대화된다.
이후, 촌극을 위해 연출을 담당했던 젊은 연출자가 3명의 여학우를 사귀고 퇴출을 당한다. 그는 전임(김민희)에게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일이 잘못이냐고" 묻는다. 학교 출입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지만, 그는 퇴출을 당하고도 두 번씩이나 학교에 출입한다. 또 한번은 자신이 미국에 유학을 가려고 하는데, 같이 갈 수 있냐고 3명 중 한 명에게 청혼하기도 한다. 실제로 홍상수는 미국에서 영화학을 전공했었다. 그리고 삼촌 시언(권해효)은 이 학교에서 연출자로 활동한 경력이 있는 사람이다. 그는 전임에 부탁을 받아 연습이 시작되기 전날에 대본을 썼다고 말한다. 그리고 촌극이 끝나고 난 뒤, 학생들에게 이 학교에서 있을 때 과거와 동일한 연출을 했다고 말한다(필자는 이 말이 홍상수 자신의 영화에 대한 태도라 느꼈다).
시언은 전임이 소개한 정 교수(조윤희)와 잠자리를 갖고 이제는 편한 사람을 만나겠다고 말한다. 이혼이라도 할 거냐고 따지는 전임에게 삼촌은 이미 10년째 별거하고 이혼을 인정받았다며 너스레를 떤다. 이때, 이 두 명의 연출가가 동시에 표명하고 있는 인물이 홍상수 자신이라는 점에서, 나아가 홍상수라는 인물에 대한 정서적인 측면에서 웃으며 넘기기 어렵다는 생각이 문뜩 들었다. 다시 말해, 자신을 긍정하려는 어쩌면 불순해 보이는 태도가 영화를 통해 아름답게 치장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학생들에게 무엇이 되고 싶냐는 시언의 물음에 '저는 제가 아닌 제가 되고 싶다'는 발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노골적인 의도는 마지막 장면에서도 이어진다. 개가 짖는 소리를 듣고, 무엇인지 보고 오겠다는 전임은 시간이 지나 시언과 정 교수가 부르는 소리에 이렇게 대답한다.
"아무것도 없어요"
이때 미소 짓는 전임의 모습은 기묘하게 다가왔다. 이제는 괜찮다는 것일까. 아무것도 없는 그곳이 수유천의 끝이라면 결국 홍상수와 김민희는 완전한 사랑을 이루었다는 표시일까. 추측이긴 하지만 <수유천>에 흐르는 비유는 홍상수 영화를 보며 예민하게 관찰했던 이들에겐 실망감으로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수유천>에서 돋보이는 요소가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겠다. 특히나 낮과 밤의 대비를 보여주는 숏, 그러니까 시간의 관성을 미학적으로 표출한 장면은 이 영화가 갖고 있는 시간성에 대한 고찰을 지시한다. 물의 흐름도 유사하다. 시간의 관성과 중력에 따라 움직임이 설정되기 때문에 그렇다. 각각 시간의 변화에 따라 촬영한 빛의 강도는 이 영화에서 어떤 인위적인 것을 배제하는 촬영을 선보인다. 예를 들어 초반부와 마지막 장면에서 반복되는 야외 장어구이 식삭 장면에서 밝기가 다르고, 학생들과 조명 앞에 모여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최소한으로 빛을 활용하여 실루엣 정도만 인식할 수 있도록 촬영됐다.
홍상수가 폴 세잔의 영향을 받은 것을 유념하면 그렇다. 원근법을 개혁한 세잔은 사물의 모습이 각도에 따라서 다른 모양을 발견할 수 있다고 여겼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인물, 장소, 사물, 배경은 관계 맺으며 해석될 준비를 한다. 다만 <수유천>에서 시간성은 정물의 특성을 온전히 유도하는지는 큰 의문이 붙여진다. 작가의 삶을 전적으로 내포한 이 영화의 미학은 결코 각도에 따라 규명될 여지가 별로 없다. 결국 마지막 전임의 대사를 인용하면 '아무것도 없는' 영화가 아니라, '아무것도 있는 영화'로 흐르고 있는 셈이다. 아쉽게도 <수유천>에서 홍상수는 시간과 장소를 자신의 마음대로 다루는 마술사처럼 관객들에게 풍광이라는 최면을 걸어 놓았다. 자신의 의도를 옹호하기 위해서 말이다.
[글 이현동 영화평론가, Horizonte@ccoart.com]
수유천
BY THE STREAM
감독
홍상수
출연
김민희
권해효
조윤희
하성국
제작 영화제작전원사
배급 영화제작전원사, 콘텐츠판다
상영시간 111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4.0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