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철은 영지에게 이별 통보를 받고 자신의 거처였던 컨테이너 작업실로 향한다. 오랜만에 찾은 작업실의 문은 잠겨 있고, 보관해 둔 열쇠도 보이질 않는다. 작업실로 들어가길 포기한 윤철은 차에 몸을 싣고 핸들을 감싸안으며 탄식한다. 이내 그는 차를 타고 어디론가 달린다. 강을 끼고 있는 한적한 숲에 도착해 갓길에 차를 세운다. 어느 오후, 윤슬이 비치는 강과 바람에 흩날리는 숲의 풍광이 화면을 메우더니, 어느새 달빛만이 구석을 비추는 밤하늘로 디졸브 된다. 밤중에 낚시터를 물색하는 듯한 행인은 갓길에 세워진 차와 그 안에서 의식을 잃고 있는 윤철을 발견한다. 행인은 겨우 차 문을 열어 윤철의 몸을 붙잡고, 뺨을 때려대고, 호흡을 확인한다. 하지만 그는 눈을 뜨지 않는다. 장면이 전환되면 구름이 떠다니는 맑은 하늘이 보인다. 그 인서트를 뒤따라오는 숏은 하늘을 올려다보는 진아의 얼굴이다. 윤철은 진아가 수행하는 산 중턱에서 나무에 물을 주고 산나물을 손질하며 잡일을 돕고 있다. 행자 진아를 맡고 있는 승려 금우는 윤철에게 이제 산을 떠나라고 이야기한다. 윤철은 진아와 인사를 하고 차를 타고 떠난다.
<절해고도>는 아버지가 딸을 절에 보내는 이야기다. 혹은 예술가로 태어났지만 세상이라는 곳에서 어떻게든 살아가려는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다. 불교적 소재를 지닌 영화가 종종 그렇듯, 윤철은 속세(세상)와 산(절)을 수시로 오간다. 금우의 조언에 따라 속세에서는 술을 팔지 않는 식당을 하며, 가끔 산으로 돌아와 잡일을 돕는다. 근데 여기서 속세와 산을 '오간다'는 표현은 이상하다. 물론 윤철은 영화 내내 두 공간 사이를 이동한다. 하지만 앞서 설명한 장면에서, 위치를 파악하기 어려운 난데없는 강가에서 진아가 수행하는 산으로 이동하기까지의 시공간적 경로가 불명확하고 비약적이다. 객사의 위험을 오가는 의식불명의 상태였던 윤철은 건강한 모습으로 일을 하고 있고, 파란색으로 염색을 하고 있던 진아의 머리는 수행자에 걸맞게 말끔히 밀려 있다.
앞 장면에서 오랫동안 방치되어 낙엽과 먼지가 쌓여있던 윤철의 자동차는 새것으로 바뀌어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시간이 흘렀다. 몇 시간 혹은 며칠일지 모르는 시간이 먼지 더미인 윤철의 차 안에서 흘렀고, 며칠 혹은 몇 달일지 모르는 시간이 산에서 흘렀다. 단순히 영화가 시간을 뛰어넘었다고 설명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산이라는 새로운 공간적 배경을 설명하는 이 씬에서, 왜 영화는 윤철이 산으로 올라가 진아를 만나러 가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진아의 숏으로부터 시작해 이제 곧 떠난다고 말하는 윤철로 이어질까. 이 생략이 말하는 것은 뭘까. 과장해서 말해보자면, 윤철은 왜 온 적이 없는데 떠나야 하는 것일까. 혹은 오자마자 떠나야 하는 것일까.
또 다른 장면. 윤철은 진아가 미대 입시를 관두고 절에 들어가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혼란스러운 감정에 복받친 그는 바닷가로 향한다. 밤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윤철의 얼굴을 뒤따라오는 숏은 갑작스레 화면을 밝히며 녹색으로 물들이는 산의 풍경이다. 프레임 오른편에서부터 삭발한 수행자 차림의 진아가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간다. 이내 장면은 윤철과 영지가 이불 위에 누워 잠들어있는 한밤중으로 돌아온다. 윤철이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자, 화면은 페이드 아웃된다. 화면이 다시 밝아지면 동료의 전시회를 방문하기 위해 대낮부터 전시관으로 향하는 윤철이 보인다. 전시관 안에서 나누는 대화로 보아 윤철은 오랜 시간 타국에 있다가 한국에 돌아온 듯하다.
앞서 기술한 일련의 장면은 네 개의 씬으로 이루어져 있다. 바다 앞의 윤철을 담는 밤의 씬(S1). 산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진아를 담는 낮의 씬(S2). 방에서 잠들어 있다가 뒤척이며 일어나는 윤철을 담는 밤의 씬(S3). 타국에서 돌아와 동료의 전시회를 찾은 윤철을 담는 낮의 씬(S4). 이 네 개의 씬 사이의 연결이 만드는 리듬은 아무리 보아도 불분명하고 이질적이다.
먼저 하나의 숏으로 이루어진 S2는 시간적 논리에 맞지 않는 숏이다. 윤철은 진아가 절에 들어가기로 했다는 말만을 들었을 뿐이며, 그다음으로 이어지는 S3는 S1과 시간상으로 이어지는 하루 중의 밤이기 때문에 그사이에 난데없이 낮의 숏이 끼어드는 것은 맞지 않다. 따져보자면 영화는 S1에서 가정적인 미래인 S2로 뛰어넘은 다음에(플래시 포워드), S3에서 다시 현재의 시간대로 돌아왔다고 말해볼 수 있겠다. S3에서 S4로의 전환 또한 과도하게 비약적이다. 표면적으로는 하룻밤 사이 밤에서 낮이 되는 장면처럼 보이나, 이후의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윤철은 그사이에 타국을 방문했고 오랜만에 한국에 돌아온 상황이다. 물론, 영화에게 그가 한국을 떠나있던 시간을 생략 없이 보여줄 의무는 없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주춤할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이유는 영화가 의도적으로 그가 떠나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고 돌아오는 장면만 보여주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 생략이 말하는 건 뭘까. 윤철은 왜 떠난 적이 없는데 돌아와야 하는 것일까. 혹은 떠나자마자 돌아와야 하는 것일까.
낮과 밤
이렇듯 <절해고도>를 보고 있다 보면 갑작스러운 숏의 생략과 침입에 길을 잃고, 이상한 리듬에 시선을 맡긴 채 영화의 시간을 그저 따라갈 수밖에 없다는 기분에 사로잡히게 된다. 김미영 감독은 이 영화의 생략적인 부분에 관하여 "특별히 시간을 건너뛰어 연출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내가 만든 인물들이긴 하지만 그들의 모든 시간을 묘사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이 말 앞에서 돌이켜보면 모든 영화는 항상 선택하고 생략한다. 다시 말해, 카메라의 프레임 내부의 무언가를 본다는 촬영의 행위와 필름을 잘라내고 이어 붙이는 편집의 행위가 모두 선택과 생략의 문제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므로 감독이 이것을 큰 생략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식으로 하는 말의 의미는 관습적 영화에 있어서 시간의 생략은 불가피하다는 당연한 사실의 증언이거나, 비관습적으로 시간을 과도하게 뛰어넘는 것 또한 인물의 역사를 묘사하기 위한 작가적인 태도라는 뜻일 테다.
하지만 <절해고도>의 생략(또는 틈입)이 단순한 시간의 뛰어넘음 그 이상의 감흥으로 다가오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먼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영화가 시간의 흐름을 교란할 때 의도적으로 낮과 밤의 이미지를 충돌하는 방식으로 이어 붙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영화는 윤철이 자동차를 세운 강가의 오후에서 한밤중의 밤하늘로 디졸브 한다. 표면적으로는 하루 사이 시간의 경과를 나타내는 연결처럼 보이지만, 먼지와 나뭇잎으로 뒤덮인 자동차와 의식을 쉽게 찾지 못하는 윤철의 모습으로 보아 그 사이에 긴 시간이 흘렀을 수도 있겠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또한 영화는 윤철이 잠에서 깨는 한밤중의 방안에서 한국으로 돌아와 전시회로 향하는 대낮의 걸음으로 컷한다. 하룻밤 사이 밤에서 낮이 되는 것처럼 보이는 장면이지만, 사실 그 사이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많은 시간이 흘렀다. 이렇듯 <절해고도>의 낮과 밤은 하루가 지나간다는 시간의 감각을 시험한다.
또 다른 의문을 품게 만드는 전환들. 하나, 영화는 밤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윤철의 얼굴에서 대낮의 산의 풍경으로 컷한다. "미대 입시를 준비하다가 관두고 갑자기 절에 들어가겠다고 한다"는 윤철의 내레이션이 그 전환을 잇는다. 그리고 산의 길 사이로 수행자 차림의 진아가 걸어갈 때, 윤철의 내레이션이 이어진다. "내가 그려보았던 길이었다. 머릿속에만 있었지만 분명 내 인생이었다." 그러므로 그 산의 숏은 윤철의 내레이션이 그려낸 반응 숏인 셈이다. 하지만 여기서 영화는 다시 윤철이 잠들어있는 밤으로 돌아온다. 여기서 윤철이 눈을 뜨는 것은, 정확히 말해 산의 숏 이후에 윤철이 잠에서 깨는 숏으로 이어지는 이 연결은, 마치 낮에 산을 거닐고 있는 꿈을 꾸었다가 밤중에 깨는 것처럼 보인다. 이때 산의 숏은 잠든 윤철의 머릿속에 있는 꿈의 숏이다. 즉, 두 개의 밤사이에 놓인 낮의 숏은 앞선 숏의 상상적인 반응이자, 뒤따라오는 숏의 꿈이다. 혹은 윤철이 한때 상상했던 자신의 미래의 또다른 투영이다.
둘, 영화는 의식을 잃은 윤철이 발견되는 한밤중에서 진아가 바라보는 대낮의 맑은 하늘로 컷한다. 진아가 있는 곳은 산 중턱에 놓인 길이다. 그렇다면 이 갑작스럽고 생략적인 씬의 전환에서 다다르는 곳이 앞선 장면에서 윤철이 꿈속에서 보았던 (혹은 상상했던) 그 산 중턱에 놓인 진아라고 보았을 때. 윤철은 그제야 꿈속으로 들어간 것이 아닐까. 또는 윤철은 그곳에서 나무를 기르고 잡일을 하며, 자신이 상상했던 미래였던 그 숏으로 안착한 것이 아닐까. 이쯤에서 불안해지는 것은 의식을 잃은 윤철이 행인의 부축을 받던 그때, 그는 끝내 눈을 뜨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다시 찾아오는 낮의 맑은 하늘과 함께 윤철은 눈을 뜬 것일까, 아직 눈 뜨지 못하고 꿈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일까, 혹은 그 숏 이후로 죽어버린 것은 아닐까. 프레임 안에 죽음의 공기를 불러온 뒤 그것을 해소하지 못한 채 덩그러니 남겨진 그 이미지. 그 뒤에 따라오는 상상이자 꿈의 장소라고 할 수 있는 산은 다시 찾아온 생의 활력으로도 느껴지지만, 그 평온한 고요함 속에서 역설적으로도 어떤 죽음을 떠올리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마치 스크린이 눈을 깜빡이듯이 낮과 밤을 오갈 때, <절해고도>의 분절된 씬(숏)들은 꿈과 죽음을 오가는 경로를 그리며 시간을 떠돌고 윤철이라는 개인의 역사를 더듬는다. 그리고 우리는 교묘한 영화의 전략에 따라 낮과 밤 사이에 놓인 생략된 시간을 망각함으로써 개인의 역사와 정체를 잊은 채 떠도는 행자(行者)의 감각을 체화한다. 그렇기에 윤철은 한곳에 머무르지 않으며 시공간을 뛰어넘는다. 오자마자 떠나고, 떠나자마자 돌아온다. 오고 감에는 왕복의 경로가 있어야 할 터인데 영화는 둘 중 하나에 괄호를 친다. 중요한 것은 경로와 편집의 논리가 아니라 시간을 불연속적으로 뛰어넘고 떠도는 이동의 감각 그 자체다. 혹은 산, 즉 꿈과 죽음 주변의 시간은 현실의 시간과 다르게 흐르는 법이다.
전생
윤철이 의식을 잃고 눈을 뜨지 못하는 와중에 컷이 바뀌면, 마침내 밤이 끝나고 스크린이 눈을 뜬 듯 맑은 하늘에 구름이 떠다닌다. 절을 떠나라는 금우의 말에 윤철은 가파른 길을 올라 산책로에 있는 진아에게로 다가간다. 윤철과 진아가 만나는 두 번째 장면이다. 영화상 둘이 처음으로 만나는 초반의 장면에서 "난 아빠가 무슨 머리를 하든 신경 안 써" 또는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라고 쏘아붙였던 진아와 "안 될 건 또 뭐냐" 또는 "내가 문제냐 네가 문제지"라며 응수했던 윤철의 신경질적인 모습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둘은 마치 남인 것처럼 서로 존댓말로 대화한다. "행자님. 저 다음 주에 나가요."라는 윤철과 "거사님이 해준 밥 맛있었어요."라는 진아. 상반되는 태도의 두 장면에서 윤철과 진아는 서로 다른 의미로 부녀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 앞의 장면에서는 다소 과격하고 허울없으며 뒤의 장면에서는 남인 것처럼 예의를 차린다. 이런 관계의 변화를 보았을 때, 윤철이 의식을 되찾아 산으로 도착하는 전환의 과정에서 윤철과 진아는 다시 태어난 것만 같다. 다른 말로, 술에 취해 노래를 부르고 담배를 피워대며 겨우 하루하루를 살아 나가던 윤철과, 피투성이인 그림을 그리고 방황하던 진아의 모습을 그리던 앞선 장면들은 마치 그들의 전생인 것만 같다.
<절해고도>의 특징적인 이미지 또는 발화가 어떠한 과거를 다시금 현재의 시간 속으로 불러올 때, 어느 순간 전생의 감각을 떠올릴 수밖에 없게 된다. 가령 영화는 주요하게 등장하는 세 인물의 인생에서 큰 변곡점을 설정하는데, 그때 이들의 외적인 형상, 특히 머리카락이 그 시간의 흐름과 전환을 뚜렷하게 표상한다. 파란색으로 염색된 진아의 머리카락은 절에 들어가겠다는 결심과 함께 한 가닥도 남겨지지 않은 채 말끔히 밀린다. 곱슬머리를 덥수룩하게 기르고 있던 조각가 윤철은 식당을 새로 차리는 시점에서 짧고 단정하게 머리를 자른다. 긴 머리를 세련되게 기르고 있던 영지의 머리카락은 암이 재발한 이후로 천 모자로 감춰진다. 여기서 변곡점과 함께 맞이하는 머리카락의 변형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것이 곧 개인의 정체성의 변화와 관련하고, 무엇보다 생물학적 여성인 진아에게 있어서 삭발을 한다는 것은 어떠한 사회적 정체성의 포기와 동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대 입시를 준비하다가 관두고 갑자기 절(산)에 들어간다'는 선택은 한국에서의 사회적 죽음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죽음은 새로운 삶의 시작이기도 하다.
과거를 향한 그들의 발화 또한 마찬가지다. 영화에서 이들은 종종 자신의 과거에 대해 설명하곤 하는데, 감독은 그것을 플래시백으로 보여주려는 욕망을 내려놓고 그저 과거의 일을 현재의 시간에서 길게 발화하도록 한다. 유방암 투병 끝에 완치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영지가 그러하고, 진아의 평범하지 않았던 유년 시절과 자신의 과거를 서술하는 윤철의 내레이션이 그러하다. 영화의 이러한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는 때는 진아가 자신의 중국 여행 시절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장면이다. 윤철, 진아, 그리고 영지 셋이 식사를 하는 장면에서 영지는 진아가 찬 팔찌에 관해 묻는다. 그러자 진아는 다짜고짜 중국으로 배낭여행을 갔던 과거를 길게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팔찌에 대한 사연이 드러나는 때는 그 씬의 끝자락이다. 진아의 발화가 긴 호흡으로 이어질 때, 윤철과 영지가 그 발화를 오롯이 듣고 있을 때, 그리고 과거의 이야기가 현재의 시간 위로 쌓여갈 때, 행자 차림의 진아가 말하는 그 과거는 마치 전생의 이야기 같다. 현재의 진아에게 차 있는 팔찌라는 유물이 과거의 이야기를 불러오듯이, <절해고도>는 현재의 시간에서 과거를 계속해서 호명하고 그 간극을 벌려놓음으로써 전생의 감각을 되살린다. 앞서 언급한 낮과 밤의 숏 또한 그 전생을 뛰어넘는 숏이 아니었을까.
어떻게든 이 땅에서 '산다'는 것은 사람의 거처와 무관할 수 없다. 그렇기에 전생을 건너 새로운 삶을 산다는 것은 그 거처의 변경을 동반한다. <절해고도>의 산은 그런 전생의 거처라고 할 수 있는 장소다. 집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컨테이너 작업실에서, 또는 연인 영지의 집에서 살면서, 자유로운 영혼처럼 정처 없이 떠도는 윤철은 산에 와서야 집에 온 것 같다. 윤철이 식당을 차린 뒤에도 영화는 그의 온전한 집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마치 식당 자체가 그의 새로운 거처인 것처럼, 혹은 산에 있는 절이 그의 집이어서 그곳을 매일 같이 오가는 것처럼 묘사한다.
<절해고도>에서 산은 전생 이후의 삶에서 집이 된다. 그리고 그곳은 속세의 집과는 다른 의미로서의 집이다. 그래서 영화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 아름 껴안고 있는 산과 길, 한옥과 들판의 풍광이 드러나는 순간이 오면, 밤의 좁은 방에 누워 한낮의 산의 꿈을 꾸었던 윤철처럼, 한국이라는 땅이 꿈꾸고 있는 비현실적인 공간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혹은 산이라는 장소는 자체가 한국이라는 땅의 전생이다.
죽음, 그리고 꿈
영화에서 윤철은 두 차례 죽음의 위기를 겪는다. 무턱대고 강가에 세운 차 안에서 객사할 뻔하고, 산에서 갑작스레 멧돼지를 마주한다. 여기서 후자의 장면은 여러 면에서 미심쩍다. 영지가 산책하러 간 길에 멧돼지가 다닌다는 사실을 알게 된 윤철이 급하게 뛰어가 영지를 찾을 때, 영지의 모습은 끝내 보이지 않고, 산 한편에서 짐승의 숨소리가 들려온다. 윤철이 고개를 돌리면 그곳에는 어미 멧돼지가 그를 정면으로 마주 보며 미동도 없이 서 있다. 윤철은 다리를 움직이지 못한 채 공포에 떨며 멧돼지와 마주 본다. 뒤늦게 윤철을 찾는 진아의 목소리가 들리고, 윤철은 그 소리의 방향으로 도망치면서 주저앉는다. 멧돼지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 자리를 떠난다. 죽음의 위기 앞에 있는 장면이지만, 이 예상치 못한 윤철과 멧돼지의 조우에는 단순한 죽음의 공포로 설명할 수 없는 숭고함이 가득하다.
<절해고도>의 산은 새로운 생의 활기를 머금고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죽음과 관련한 사건들로 둘러싸인 곳이기도 하다. 윤철은 (상상적인) 죽음을 거쳐 산에 도착하고, 진아는 산으로 들어오는 동시에 (사회적으로) 죽으며, 죽음 앞에 놓인 암 투병 중의 영지는 치료와 요양을 위해 산으로 들어온다. 그러니까 우리가 산을 보면서, 다른 말로 한국 사회를 떠난 곳의 풍경을 보면서 얻는 어떠한 충만함 속에는 어쩔 수 없이 죽음의 공기가 어른거린다. 그렇기에 평화와 안식의 한가운데서 갑작스레 등장하며, 그 공간을 위협하는 멧돼지는 죽음과 전생으로 윤회의 궤적을 그리던 서사가 끝내 당도한 이미지다. 그렇다면 왜 멧돼지는 왜 그때 그곳에 서 있을까. 공격하거나 위협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어 보인다. 그곳에 놓인 멧돼지가 하는 행동은 그저 윤철을 '본다'는 것이다. 이 응시하는 이미지의 숭고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윤철은 멧돼지에게서 무엇을 보았을까. 그리고 반대로 멧돼지는 윤철에게서 무엇을 보았을까.
무심코 한 영화를 떠올리게 된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열대병>(2004). 이 영화의 서사 구조가 전생의 감각을 따라가게 만든다는 것은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정면을 바라보는, 혹은 정확히 인간과 시선을 교환하는 짐승의 이미지다. <열대병>의 호랑이와 <절해고도>의 멧돼지. 이들 앞에 선 남성은 겁에 질려 다리를 움직이지 못한 채 몸을 떤다. <열대병>의 호랑이는 소년의 환생으로서 군인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이 순간 호랑이의 이미지는 며칠 간의 사랑을 나누었던 소년과 군인의 전생을 호출한다. 끝내 그 이미지의 숭고함은 시공간과 영화적 구조를 뛰어넘어 공포로서 떨림으로서 다가오는 사랑의 감각에서, 그리고 인간과 짐승이 숏과 역숏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응시의 교환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절해고도>의 멧돼지는 영화의 어떤 시공간을 호출하는가. 나아가 대자연의 현현이나 수호자인 것처럼 보이는 멧돼지의 이미지가 곧 산의 이미지로 수렴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 산은 어떤 숏의 기억을 불러오는가.
영화에서 산이 처음으로 등장한 숏. 윤철의 꿈, 상상, 또는 영화적 플래시백으로서 떠오른 산의 이미지. 진아는 프레임 오른편에서부터 산을 가로질러 천천히 걸어간다. 그 위로 윤철의 내레이션이 흐른다. "내가 그려보았던 길이었다. 머릿속에만 있었지만 분명 내 인생이었다." 내레이션이 덧씌워진 이 산의 이미지는 진아의 미래와 동시에 윤철의 과거를 불러온다. 반복해서 돌아오게 되는 윤회로서의 산의 이미지. 당연하게도 부모는 자식의 전생이고 자식은 부모의 환생이다. 새끼 멧돼지 근처에는 항상 어미 멧돼지가 있으니 주의하라는 금우의 말은 우연이 아니다. 윤철이 멧돼지를 보고, 멧돼지가 윤철을 보는 이 마주 봄의 주체는 누군가의 아버지 혹은 어머니, 즉 부모라는 공통 분모로 묶여있다. 그러므로 이때 윤철과 멧돼지는 인간과 자연이 이어진 삶의 순환으로서, 자식이라는 환생을 끊임없이 돌이키는 존재로서, 그리고 서로 전생이자 환생인 속세와 산으로서 바라본다.
낮과 밤을 오가며 시간과 이동의 감각을 무너뜨리고, 전생과 환생의 궤적을 연상시키는 이야기를 이어 나가며, 죽음과 꿈이 내재한 공간으로 반복해서 돌아오는 <절해고도>는 끝내 어느 순간을 보여주고야 마는가. <절해고도>에서 가장 숨 멎을 듯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는 때는 낮에서 밤으로 지나가는 그 사이, 매직아워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순간이다. 가령 윤철이 노가다 현장에서 작업을 하다가 다리를 다쳐 몸을 가누지 못하고 주저앉을 때, 그리고 갈 곳 없는 그가 강가에 차를 세워두고 잠에 들 때, 그 이미지가 보고 있는 것은 실연 이후의 삶의 고통이라기보다는 그 뒤에 펼쳐진 아득한 석양이며 그것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정성'이다. 이런 매직 아워의 순간은 멧돼지와의 조우 이후에 펼쳐지는 장면에서 빛을 발한다. 멧돼지가 서서히 걸음을 옮기며 사라지면, 진아가 나타난다. 윤철은 그제야 몸을 가누고 진아와 함께 길을 걷는다. 씬이 바뀌고 함께 걸어가는 윤철과 진아를 카메라가 백팔로 우하며 따라갈 때, 낮에서 밤이 되어가는 그 사이 매직아워의 순간이 찾아온다.
아버지 윤철이 자신의 전생이자 환생의 현현, 혹은 자신의 거울상 그 자체인 어미 멧돼지를 떠나보낸 직후의 씬에서 윤철을 거사님이라 부르던 진아와 진아를 행자님이라 부르던 윤철은 서로를 낮춤말로 부르며 대화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그들이 영화상에 처음 만난 장면에서 그런 바 있으며, 산에서 다시 만나 존댓말로 대화한 이후에 처음으로 다시 서로를 낮춤말로 부른다. 이 둘은 산에서의 새로운 정체성을 잃고 그 순간에 비로소 아버지와 딸이 된 것일까. 진아가 대학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윤철은 그에게 대학을 갈 것을 권유한다. 계속되는 권유에 진아가 답한다. "생각 좀 해봐. 진짜 뭐가 나은 건지." "모르겠어." "알 수 있어. 이미 죽었다고 생각해 봐." "안 죽어. 안 죽었잖아." "한 번만 해봐. 나도 해봤어." 이 대화에서 부모인 윤철과 자식인 진아의 위치는 뒤바뀐 것만 같다. 윤철은 그저 '모르겠다'고 답하고, 죽음을 가정한 진아의 말에 마치 죽음이라는 단어조차 두려워하는 아이처럼 보인다. 반면 진아는 '알 수 있다'고 말하며, 죽음에 대한 생각에 두려워하지 않으며 윤철에게 조언한다.
이 대화를 카메라가 지켜보고 있을 때, 낮게 지고 있는 햇빛이 카메라 주변을 어른거린다. 정확히 말하자면 윤철과 진아를 담고 있는 각각의 단일숏과 투숏의 프레임 위에 주황색과 녹색의 광선이 기묘하게 흩날린다. 여기서 카메라는 윤철과 진아를 보고 있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변화하며 점멸하는 석양의 빛을 본다. 낮과 밤의 경계, 삶과 죽음의 경계, 그리고 부모와 자식 사이의 경계를 문지르는 이상한 대화와 점멸하는 빛. 이 환각의 빛이 만드는 마법 같은 순간에서 우리는 꿈의 각각을 경험한다. 첫 번째 산의 장면이 멀찍이서 (익스트림 롱 숏으로) 바라보는 꿈이었다면, 이 산의 장면은 길을 따라 (백팔로우 하며) 그들과 함께하는 꿈속의 시선에 놓이기 때문이다. 이들을 끝내 그 첫 번째 산의 장면을 재현한다. 윤철이 진아를 따라 함께 산을 가로질러 걸어가고 카메라는 이들에게서 점점 멀어지며 산 전체의 풍경을 담는다. 그렇기에 끝내 도달하는 산의 이미지는 <절해고도>라는 영화가 꾸는 꿈이 된다. 이제 길에는 진아뿐만이 아니라 윤철이 함께 놓인다. 그 순간 윤철은 꿈꾸는 자가 아니라 산이 주인인 꿈속으로 진입한 것이다.
<절해고도>는 불화하는 부모와 자식의 이야기를 빌려 전생과 환생, 꿈과 죽음의 감각에 따라 시공간을 떠돌면서 한국이라는 땅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예술이라는 행위가 곧 사회적 죽음이 되는 한국이라는 땅. 그러므로 진아와 윤철이 산으로 간다는 것은 죽음이 운명인 그들의 자살행위이며, 죽음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겠다는 결심이다.
하지만 김미영 감독은 그 산과 두 사람의 걸음의 풍경이 합치되는 아름다운 풍경에서 영화를 끝내지 않는다. 영화는 산에서 내려가는 윤철의 모습을 차 안의 시점 숏으로 보여주면서, 매직 아워의 이미지를 다시 한번 반복한다. 눈앞에 놓인 산과 길의 풍경에는 어김없이 햇빛이 어른거린다. 산에서 내려온 윤철은 식당으로 돌아와 일을 하고, 밤이 되자 텔레비전과 전등을 차례로 끄고, 문을 닫는다. 전등의 소등과 문을 닫음으로써 영화가 정말로 막을 내릴 것만 같을 때, 식당 안에 있는 카메라가 밖으로 나온다. 안에서 밖으로 이루어지는 이 찰나의 이동에는 어떤 기적 같은 태도가 있다. 불을 끄고 문을 닫는 것으로 삶은 끝나지 않는다는 태도. 윤철은 문을 걸어 잠그고 골목을 걸어 나간다. 홀로 한국이라는 땅 위에서 이루어지는 걸음. 부모와 자식이라는 전생과 환생을 걷어낸 삶은 결국 혼자이다. 그 숭고한 걸음으로 윤철은 '볼 수 있다고 해서 갈 수는 없으며 꼭 가야 하는 곳도 아닌' 외딴섬, '절해고도(絶海孤島)'가 된다.
[글 김민세 영화평론가, minsemunji@ccoart.com]
절해고도
A Lonely Island in the Distant Sea
감독
김미영
출연
박종환
이연
강경헌
제작 보리와 오디
배급 아이 엠, 무브먼트
제작연도 2023
등급 12세 관람가
상영시간 110분
개봉 2023.09.27.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