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의 검색은 어제의 검색과 다르다. 차이는 검색에 의한 결과물과 관련을 맺는다. 더 이상 문자(문서)화된 결과를 보기 위해 검색하지 않는다. 오늘의 검색은 보기를 요구한다. 어제의 검색이 '읽기 위한' 검색이라면, 오늘의 검색은 '보기 위함'이다. 어제의 검색 결과가 숙고의 과정을 필요로 한다면, 오늘의 검색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도록 모든 것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검색에 따른 노출이야말로 필수적이다.
빵(요리)을 만들기 위한 검색은 레시피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레시피를 따라 만들고 있는 빵(요리)을 직접 볼 뿐이다. 레시피를 읽고, 그에 따른 상상은 불필요하다. 상상(imagination)은 빠르게 현실로 환원된다. 상상력은 조금씩 자신의 영토를 잃어버린다. 그런데 이러한 검색 결과는 종종 이상한 효과를 만들어 낸다. 밀가루, 물, 소금, 버터, 효모 등의 간단한 레시피가 등장한 후 빵이 만들어지는데, 종종 빵이 아니라 다른 것이 시선을 끈다. 반죽기는 어떤 제품인지, 빵을 자르는 칼은 어떤 브랜드인지가 시선을 모은다. 그리고 '이 빵'을 만들기 위해 무엇을 검색했는지가 사라지기도 한다. 빵의 밀가루보다, 완성된 빵보다 반죽기와 오븐이 더 중요해진다. 친절하게도 검색된 영상 아래에는 관련된 제품의 링크가 올려져 있다. 자본주의의 링크는 친절하게도 빵으로부터의 시선을 돌려버리기도 한다.
그 결과, 최초의 검색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누구나 경험했을 것이다. 무엇을 검색했는지를 망각한 채 알고리즘을 따라 전혀 다른 것을 보고 있는 자신을 말이다. 검색은 원하는 것을 찾는 과정이 아니라 검색의 알고리즘이라는 무한 루프 속에 갇히기 위한 자발적 유폐다. 그 결과 검색의 목적은 검색의 목적을 망각하기 위함이 된다. 무엇을 검색했는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최초의 검색 행위는 알고리즘의 코키토(cogito)가 되어 희미한 주체성의 기반으로 작동할 따름이다. "나는 검색한다. 고로 존재한다." 눈앞에 펼쳐지는 수많은 결과의 순환만이, 다량으로 노출된 엇비슷한 이미지의 물결만이 존재를 압도할 따름이다.
2.
다량의 노출로 인한 망각의 작용은 역사적으로 이미 경험한 것이다. 피상적으로 암기되는 '3S 정책'의 본질이 망각이었음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1980년대의 문화 행정을 가리키는 3S는 스포츠(Sports), 스크린(Screen), 섹스(Sex)를 일컫는다. 스포츠 정책으로는 프로야구의 출범을 꼽는다. 스크린에서는 오늘날에 보기 힘든 소프트 포르노가 제작되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도 꽤 기이한 제목들이다. 1996년 13편까지 이어진 <애마부인> 시리즈가 유명하지만, 그에 못지않았던 <산딸기>도 1982년에 시작하여 1994년까지 6부작이나 선보였다.
대다수의 포르노 산업이 그러하듯이 에로 영화의 제작은 공장의 형태에 가까웠다. 1981년 <애마부인>으로 주가를 올렸던 안소영은 곧바로 <산딸기 1>(1982)의 주인공이 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노출의 요구는 새로운 히로인을 필요로 하였으며 2편과 3편의 주인공으로 낙점된 이는 선우일란이었다. <산딸기2>(1984)에 선우일란이 캐스팅된 계기는 당대 유행하던 청소년 잡지의 표지모델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영화를 촬영할 당시 미성년자였다. 요즘이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1980년대의 기이한 쇼비즈니스 세계를 들여다보면 그녀에게만 해당되는 특별한 상황은 아니었다. 1980년대의 새로운 스타는 1970년대 후반에 등장한 '하이틴 스타'(십대 스타를 가리키는 말이다)의 흐름과 연결되어 있었고(영화로는 '얄개'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1980년대 성인 영화의 붐이 일면서 서로 이어진다. 자본의 필요와 논리에 따라 하이틴에서 주목받는 이들이 성인물의 주인공이 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일어난 셈이다.
그런데 1980년대 성인 영화 혹은 에로 영화의 등장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유럽과 미국의 성혁명(68혁명, 히피의 등장)의 물결이 범람하던 외부와는 달리 정치적 억압으로 일관했던 한국 사회의 통치 방식이 만들어 낸 활로였다. 모든 게 갑작스러웠다. 1970년대를 대표하는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1975)을 보면 주인공 병태와 영철이 광장을 달리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주인공 병태가 '스트리킹이다'라고 외치기 시작한다. 스트리킹(streaking)은 나체로 사람들 앞에서 달리는 행위를 일컫는 말인데 여전히 미국의 대학이나 일부 행사에서는 이러한 퍼포먼스가 펼쳐진다. 이 행위에 대한 여러 논거가 있겠지만 헝가리의 감독인 미클로시 얀초의 <붉은 시편>(1972)에 등장하는 장면처럼 집단적 벌거벗음이 보여주는 행위(스트리킹 또한 개인적이기보다는 집단적인 형식이 일반적이다)는 저항의 정치와 깊은 관련을 맺는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등장하듯 장발 단속과 치마 길이를 재던 한국의 유신 시대에서 개인의 신체적 자유는 제한되었다. 병태가 "스트리킹이다"라고 외치자, 영철은 옷을 입고 달리는 스트리킹이 어디있냐고 반문한다. 그러자 병태는 "한국적 스트리킹이다."라고 수정한다. 이 말은 곧장 시대를 가리킨다. 스트리킹의 자유가 허락될 수 없는 사회, 내 신체의 자유가 구속당하는 시대를 병태는 '한국적 스트리킹'이라는 말로 폭로한다(나름 저항한다). 그리고 이들이 달리는 장소는 오늘날 관객이라도 쉽게 파악할 수 있는데 여의도 광장이다. 원래 이곳은 비행장이었다가 이전을 하면서 새롭게 광장으로 조성되는데, 당시 붙여진 명칭은 유신의 시작이었던 '5.16 광장'이었다. 병태와 영철이 "스트리킹"을 외치며 달리는 장소가 남달라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젊은 날에 시인이었고, 프랑스와 미국의 1960년대 말의 문화를 경험했던 하길종 감독이 그리고자 한 것은 홀딱 벗고 뛰는 젊은이다. 하지만 한국적 스트리킹으로 마무리되어야만 했다. 그런데 1980년대에 스크린의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성적 욕망을 드러내거나 노출하는 것에 대한 단속이 이전과는 다르게 완화되었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미클로시 얀초의 영화처럼, 동유럽의 상황처럼, 구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시대를 드러내기 위한 노출이었을까. 서유럽이나 미국으로부터 온 성해방의 물결을 수용한 결과였을까.
<애마 부인>, <산딸기> 시리즈는 민중을 생각나게 하지 않는다. 주연 여배우의 가슴 타령을 하는 세속적인 어그로를 끌었을 뿐, 갑작스럽게 일어난 스크린의 노출은 영화가 성을 묘사한다는 것에 관한 기원을 생각하도록 이끌지 않았다. 대량의 노출은 '영화와 성'의 관계를 저렴한 것으로 인식하도록 이끌었고, 그 부정적인 생각은 현재까지도 한국 영화의 집단적 무의식으로 작용하고 있다. 1980년대에 일어난 스크린 속 노출은 몸의 이미지를 추락시킨다.
스포츠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프로야구의 출범은 군중들이 모이는 것을 두려워하며 계엄령을 내렸던 유신과 군부독재의 정치를 생각하면 확실히 놀라운 면이 있다. 1982년 3월 27일. 동대문야구장에 대규모 군중을 모아 시구를 한 대통령은 거의 2년 전 광주에 모인 사람들을 무력으로 진압한 인물이었다. 두 이미지를 겹쳐놓으면, 대규모 군중 동원이 가능한 스포츠를 통해서 어떻게 망각을 일으켰는지를 돌아보게 만든다. 초기 프로야구팀이었던 MBC 청룡과 삼성라이온즈가 대결을 벌이는 장면은, 2년 전 민중과 군인의 대치를 다른 양상으로 뒤바꾼 이미지의 도배이자 망각 쇼였다.
섹스는 통행금지의 해제와 깊은 관련을 맺는다. 한국의 야간 통행금지조치는 1945년 9월부터 1982년 1월 5일까지 37년간 유지되어 왔다. 1982년 심야에 영업하는 술집이 등장하고, 팬데믹으로 인해 확실히 줄어들기는 했지만, 유튜브를 통해 그토록 칭송하는 한국의 밤문화가 열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과연 억압되어 있던 인권(자유)의 회복이었을까. 요즘은 좀 달라지기는 했지만 1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유럽의 작은 마트들은 8시가 되면 문을 닫는다. 그런데 밤의 문화가 열리면서 한국의 대형마트들은 자연스럽게 자정까지 영업을 하기에 이른다(한때 24시간인 적도 있다). 그뿐만 아니라 새벽배송이라는 이름으로 12시가 넘어서 달리기 시작하는 대형차량들을 쉽게 목격하게 된다. 1982년 우리는 밤을 되찾은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밤을 잃어버린 시작을 맞이한 것은 아니었을까.
스포츠, 스크린 그리고 섹스로 대변되는 3S 정책을 우민화 정책으로 언급되고는 하지만, 우민화에 쉽게 속을 정도로 사람들이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3S 정책은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것을 대거 노출함으로써 망각의 현실로 이끈 기폭제가 되었다. 전면적인 밤의 개방, 전면적인 집단적 스포츠의 관람, 전면적인 스크린의 신음 소리는 1980년대의 군부독재가 유신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망각시킨다. 여전히 억압적이라는 사실을 망각시킨다. 이토록 자유로운데, 최소한 이전보다 자유로워졌는데, 억압적이거나 폭력적이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논리가 형성된다. 많은 이들이 총탄을 맞고 무덤 아래 있는 가운데 자유를 가장한 대규모 문화적 노출이 시행되었고, 그것은 뿌리 깊은 망각으로 시대로 이어졌다. 우민이냐, 망각이냐의 차이는 사소하지 않다. 우민이 개구리 왕자를 향한 키스처럼 다소간의 계몽만으로도 흔들거나 깨어나게 할 수 있다면, 망각으로부터의 부활은 무덤 속을 파헤쳐야 할만큼 많은 시간과 사유의 깊이를 필요로 한다. 오늘날 망각의 뿌리는 더욱 깊은 골을 드러낸다.
3.
사회심리학자인 조너선 하이트는 『불안 세대』에서 노출된 세계가 성장하는 아이들에게 일으키는 불안을 진단한다. 스마트폰을 켜고 어디든 연결되어 있는 시대, 놀이 기반의 아동기가 스마트폰 혹은 소셜 네트워크로 노출된 아동기를 보내야 하는 세대들에게는 "현실 세계의 과잉보호와 가상 세계의 과소 보호"의 충돌로 인해 낮은 자존감과 이 괴뢰감을 해결하지 못하는 불안 세대가 등장했다고 진단한다.
광대한 네트워크, 광대한 노출이 '이제 막 성장하는 이들에게 새로운 해방감을 줄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라고 할 수 있다. 과잉보호되는 현실은 뭐든 괜찮다고 하지만 과소 보호되는 세계의 이미지들을 보면 경제적, 계급적, 문화적 박탈감에 손쉽게 노출되어 있다. 이 괴리감으로부터 타자가 지닌 것을 부러워하거나 현실과의 괴리를 해결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공포가 개인을 짓누르기 시작한다. 과거 놀이 기반의 작은 네트워크는 일정한 충만함으로 개인을 채울 수 있었던 것에 반해 무한한 연결은 오히려 공포와 불안을 손쉽게 형성한다. 너무 많은 노출, 너무 많은 정보가 개인에게는 부담이고 불안인 셈이다. 비단 아이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종종 4대 중증질환에 해당하는 환자가 큰 병원의 의사를 만나게 되면 듣게 되는 이야기 중의 하나가 '인터넷을 너무 찾아보지 마세요'일 것이다. 그토록 대기해야 하지만 그토록 짧은 미팅 시간에 의사가 정보 노출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너무 많은 거짓 정보가 인터넷의 바다에 표류하고 있으며, 그것이 '아픈 환자'라는 개인을 얼마든지 뒤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 대규모 노출 속에 살아가는 인간은 기본적으로 불안 세대일 수밖에 없다.
과도한 노출은 본질을 망각시킨다. 『반딧불의 잔존』의 저자 디디위베르만은 오늘날 "반딧불이 소멸된 것은 '사나운' 서치라이트의 눈부신 광명 때문이다. 즉, 감시탑, 정치인의 대중집회, 축구장, 텔레비전 세트 등이 가준 서치라이트 때문이다. 그리고 "서로를 겨냥하고 발사되는 이상한 폭탄들"은 단지 과도한 조명을 받는 신체들일 뿐이며, 그들의 욕망은 상투적이다. 그들은 시트콤의 충만한 빛 속에서 서로 대립한다. 그들은 차분하고 주저하며 순결한 반딧불, 이런 "과거에 대한 다소 비통한 기억"과는 매우 동떨어진 신체들이다."(『반딧불의 잔존』, 디디위베르만, 길, 31쪽, 『봉준호의 영화언어』, 254쪽 재인용.)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반딧불은 민중 혹은 개인들이 내는 불빛이라면, 서치라이트는 스포츠, 미디어를 비롯하여 3S의 정책으로부터 나오는 온갖 노출과 자유와 해방을 흉내내는 제스츄어들에 해당한다. 종종 이러한 서치라이트는 개인의 죽음을 거대한 정치 연극으로 만들어 버리고, 논쟁을 빌미로 희화화하며, 죽음에 대해 숙고하는 것을 망각시킨다. 그 결과 과거의 역사를 망각시킨다.
오늘날 대량의 노출은 반딧불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조차 의식하기 어렵다. '노출되지 않으면 무의미하다'는 표어가 일상이 된 시대에 할 수 있는 선택이란 고작해야 자발적 맹목과 자발적인 망각의 상태로 들어가는 길뿐이다. 그런데 제아무리 깊은 자연 속이라도 새어 나오는 캠핑장 램프의 불빛을 회피할 수가 없다. 캠핑장의 불빛은 자연의 어둠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별빛을 차단한다. 우리는 불빛에 이끌려 자연의 빛들을 스스로 차단하는 삶에 익숙해진 상태다.
촌철살인의 통찰을 선보이는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철학자이며 동시에 에세이스트인 '파스칼 브뤼크네르'는 최근에 국내에 번역된 『우리 인생에 바람을 초대하려면』에서 팬데믹과 스마트폰으로 점철된 현대의 풍경을 날카롭게 묘파한다. 그는 "스마트폰은 분주한 삶을 제공하면서도, 그 삶을 실제로 경험할 필요는 제거한다"면서 "인류학적으로 새로운 인간상이 나타났다. 웅크리고 있지만 고도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외부 세계도 타인들도 필요로 하지 않는 인간상이다. 현대 기술은 개방을 표방하면서도 실상은 감금 상태를 장려한다."고 말한다. 현대 기술의 개방이 너무 많은 것에 노출되는 바람에 동시에 갇혀버리게 되고, 수많은 경험을 구경하지만 직접 경험하지 않는 역설이 일상이 되는 시대의 등장을 설명한다.
4.
경험하지는 않지만, 보는 것은 좋아하는 현대의 기술과 현대인의 관심은 유명해지기 위해서는 스스로 노출해야 한다는 사실에 직면해 있다. 그 결과 노출을 직업으로 삼는 이들이 대거 생겨났다. 넷플릭스의 새로운 시리즈인 <더 인플루언서>는 노출이 직업인 사람들, 노출로 인해 먹고 사는 이들의 세계를 엿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보여주기 시리즈다. 1회와 2회 초반이 다루는 첫 번째 과제는 77명의 인플루언서를 모아 놓고 두 시간 동안 '좋아요'와 '싫어요'를 얼마나 받는가를 경합하는 일이었다. 이들은 한 시간 동안 서로에게 좋아요를 공유하며 자신이 소유한 횟수를 소진하는데 주력한다. 하지만 인플루언서 중 하나인 '진용진'이 이 게임의 본질을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그는 기꺼이 싫어요를 받는데 주력하고, 이에 동조한 이들이 동참하여 살아남는다.
인플루언서임을 증명하는 첫 번째 과제가 보여주는 것은 '관심=영향력(influence)'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좋아요'만이 아니라 '싫어요'도 적극적으로 포함된다. 인플루언서의 행위에 있어 중요한 것은 노출에 따른 결과(반응) 자체다. '싫어요'라도 상관없다. 소셜 네트워크의 누르기는 두 가지로 나뉘어져 있지만, 실상 인플루언서의 영향력을 증명하는 데 있어서 좋아요와 싫어요는 동일하게 값으로 매겨진다. 형식적으로는 좋아요와 싫어요라는 이진법을 가장하고 있지만, 실상은 영향력이라는 일진법임을 이 과제는 폭로한다.
1980년대와 90년대 초반을 풍미했던 에로 영화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를 향해 좋아요인가 싫어요인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세간의 화제를 일으키는 것만으로 충분히 자본력을 모으고 재생산할 수 있었으며, 시리즈가 거의 전무한 한국 영화사에 13편까지 이어지는 행보를 만들어 냈다. 종종 저널에서 관습적으로 한국영화에는 시리즈물이 없다고 말하지만(이때 의식하는 것은 할리우드의 '007 시리즈'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틀린 것이었다. 한국영화사는 1980년대에 유규한 시리즈물(물론 이전에도 시리즈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유신의 산물인 <팔도사나이> 등을 떠올릴 수 있다)을 만들어 냈다. 좋아요와 싫어요를 모두 끌어안는, 영향력과 관심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스크린의 시대를. 이러한 영향력의 효과는 오늘날 '인플루언서'라는 공식적인 명칭까지 따르게 되면서 어그로가 일상이 되는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더 이상 좋아요와 싫어요의 구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관심(좋든, 싫든)과 무관심"이 자본의 경계를 나누는 기준이 되었다.
7부작으로 제작된 <더 인플루언서>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회차는 4화 '시선'과 5화 '증명'이다. 첫 번째 과제를 거쳐 77명 중 30명이 생존하게 되었고, 계속 탈락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씩 짝을 지어 사진으로 평가받는 미션에 돌입하게 된다. 여러 연령과 나이가 뒤섞인 백명의(익명의) 심사단이 어떤 사진에 오래 시선이 머무는가가 평가의 기준이 된다. 이때 사용된 기술이 '아이트래킹'이다. 시선과 증명이라는 각 화의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성향이 다른 두 사람이 만나 합의해야 하는 것은 어떻게 사람들의 시선을 오래 끌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과 의견의 공유와 조율이다. 4화와 5화가 명확히 보여주는 것은 육감적이고 직접적으로 시선을 사로잡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시선을 머물게 하는 아이디어야말로 한 차원 높은 영향력이라는 사실의 증명이다.
이미 성공한 인플루언서들이기에 기존에 자신들이 해왔던(관심을 끌었던) 방식에 안주하기도 한다. 하지만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현재 9개로 분할된 위치 중 어느 부분을 차지해야 하는지, 예술적이거나 공들인 사진의 완성도보다 어떻게 관심을 끌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대거 등장한다. 3라운드에 걸친 경합 과정에서 처음에는 여성 인플루언서 가슴 노출이 중요한 듯 보였지만, 결국 2라운드에서 떨어진 경우도 가슴만을 강조했기 때문이었다. 순간을 넘어선 관심은 가슴 노출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하고, '문자의 활용', '오히려 모호한 화면', '호기심의 강력한 제시' 등이 중요한 생존의 가치로 자리잡는다. 3라운드에서 승리한 오킹, 장지수의 경우는 아예 촬영 이미지 없이 자극적인(거짓된) 문자의 나열만으로도 충분히 1등이 될 수 있었다. 문장을 읽느라 오랜 시간 동안 시선이 머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이 현실의 콘텐츠 제작에서 얼마나 강력한 영향력으로 활용될 수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3라운드에 걸친 경합은 관심과 영향력의 특성을 다양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시리즈에서 파이널 라운드는 오히려 심심했다. 무대 위에서 펼쳐진 사람들의 이동 방식은 '쇼미 더 머니' 시리즈의 파이널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익명을 대상으로 펼쳐야 하는 '인플루언서'의 본성과 가장 어긋난 경합의 방식이자 기존 쇼프로의 방식을 맘편히 들여온 패착이 아니었나하는 생각이 든다.
5.
영화는 이 시리즈와 얼마나 닮아있을까. 아니면, 얼마나 달라진 곳에 있을까. 떠올리게 되는 동시대의 중요한 개봉 영화들은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존재들, 반딧불'에 주목하는 작품이다. <퍼펙트 데이즈>(2023)의 청소부 히라야마와 주변 인물들이 그러하고, <존 오브 인터레스트>(2023)의 네거티브 화면으로 등장하는 폴란드 소녀의 모습이 그러하며, <이오 카피타노>(2023)의 소년들이 그러하고, <더 원더스>(2014)의 소녀들이 그러하다.
마테오 가로네의 <이오 카피타노>는 세네갈의 16세 소년 세이두와 사촌 무사가 사하라 사막을 건너 리비아에 당도하는 첫 번째 여정과 지중해를 타고 이탈리아로 향하는 두 번째 여정을 그린다. 사하라와 지중해에 스펙터클(구경거리, 서치라이트)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가로네의 국제적 프로젝트인 만큼 소년들의 여정에 산업적인 때깔(그것은 사하라의 작열하는 태양빛이기도 하다)이 드리워져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세네갈의 십대 소년이라는 점을 최소한 망각하지는 않는다. 세이두는 수술을 받아야 하는 무사를 위해 직접 배를 몰고 항해를 시작한다. 그가 이끌어야 하는 수많은 난민들을 실은 채 말이다. 이 말도 안 되는 현실의 이야기에서 종종 세이두의 환상이 등장한다. 그것은 사하라 사막을 되돌아가 고향의 어머니를 만나는 여정이기도 한데, 그리움인 동시에 살아남기 위한 환상적 몸부림이 펼쳐질 때, 이 스펙터클을 만끽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주인공의 영웅적 행위마저 근사한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몸부림과 환상으로 등장할 따름이다.
알리체 로르바케르의 <더 원더스>의 소녀도 꿈을 꾼다. 이탈리아 움브리아주의 시골에서 양봉을 하는 소녀 젤소미나는 동생들을 대신해 온갖 궂은일을 도맡는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꿈이 있다. 과거 이탈리아 중부의 국가였던 에트루리아(토스카나, 라치오, 움브리아)에서 열리는 '전원의 기적'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일은 고대로의 회귀인 동시에 소녀에게는 새로운 미래의 희망이 된다. 이 도전은 실패로 끝이 나지만 소녀는 아버지와의 관계에서도, 사람들의 관계에서도 조금은 성장한다. 벌과 꿀 이외에 세상에 만나야 할 많은 것이 있음을 목격한다. 성장의 현실에서 실패를 보여주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을 것이다.
이탈리아로 향하거나 이탈리아의 시골에서 벗어나려는 소년, 소녀가 어떤 미래를 맞이하게 될지는 알 수가 없다. 오히려 불안하다. 세이두가 시칠리아를 발견할 때 "나는 선장이다(이오 카피타노)"를 외치는 벅차오름은 영화가 끝난 후 더 큰 불안으로 밀려온다. 북아프리카 이민자로서의 삶이 이탈리아에서 안온할 이유가 없다. 움브리아의 소녀도 마찬가지다. 그녀가 선망하며 바라보았던 여성 스타도, 그녀가 참여했던 텔레비전 프로그램도 새로운 희망이 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탈출의 몸짓은 중요하다. 최소한 살아있다는, 살아있음을 보여주려는 행위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디디위베르만은 『민중들의 이미지』에서 첫 문장을 "민중들이 노출된다"고 적은 후 이 문장을 곧바로 "민중들은 사라질 위험에 노출된다."고 다시 적는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인플루언서가 되고, 기꺼이 노출되기를 희망하지만 오늘도 새로 개설되는 SNS와 문을 닫는 SNS의 숫자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너무 많은 것이 등장하는 시대는 결국 많은 것을 지우고 사라지게 할 시대임을 가리킨다. 이때 사라지는 것은 내가 아니라 타인들, 타자들이다. 수많은 콘텐츠와 SNS가 소통을 표방하지만 정작 소통을 사라지게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중요하다.
<더 인플루언서>의 1화를 보면서 놀랐던 사실 중의 하나는 아주 유명하다고 할 수 있는 77명의 영향력 있는 유명인 중에 바로 알아볼 수 있었던 경우는 대략 10퍼센트가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인플루언서의 어떤 측면을 가리키는 것인가. 아니면 틱톡과 같은 매체를 전혀 소비하지 않는 나의 문제점을 보여주는 것인가.
일찍이 노출로 점철되는 관종의 문화적 현상을 성찰했던 '곡사'의 김곡 감독은 『관종의 시대』에서 "노출증자는 빛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빛에 비칠 자기를 사랑해서 노출한다."는 나르시시즘의 도래를 정확히 포착한다. 그는 이러한 모습을 과잉자기성애라고 설명하는데 "이게 아니면 우리가 왜 좋은 음식, 좋은 장소를 보면 셀카를 찍지 않으면 못 배기는지, 정작 그 음식과 장소는 제대로 즐기지 못했더라고 셀카를 포스팅하고 나면 배가 부른지 해명할 길이 없다. 아이스버킷 챌린지에 쓸 얼음을 살 돈으로 왜 차라리 기부를 하지 않는지 해명할 길이 없다."고 말한다.
이와 더불어 얼굴을 따라 노출의 역설이 등장한다. 누구나 노출되려고 인스타그램을 사용하지만, 자신의 초상권을 당당히 주장하는 역설을 보고 있노라면 이 권리는 어디에서 속하는 것인지 반문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어디서나 얼굴을 노출하면서 동시에 소유권을 주장하는 초상권의 주장은 오늘날 이슈가 되는 수많은 자기주장들과 마찬가지로 역설적이다. 최대한 노출되기를 희망하지만, 최소한 함부로 노출되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혹은 최소한 노출되기를 희망하지만 최대한 내 얼굴의 사용은 금하고자 한다. 얼굴만 그러한 것일까. 내 언어, 내 팔과 다리, 내 리포트 등. 도대체 노출과 소유는 얼마나 가까우면서도 먼 것인가.
최소한 영화의 중요한 이미지는 이미지의 자기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드러내기 위한 것만으로도 이미 숨 가쁘고 힘들기 때문이다. 『민중들의 이미지』에 등장하는 "예술은 보편적 '인생'이 아니라, 이른바 하나의 생명과 접촉하고 있다는 것을, 마무리를 위해 강조하고자 한다."는 디디위베르만의 문장은 그래서 중요하다. 예술이 하나의 생명과 접촉하는 순간은 그 자체로 소유권도, 영토도, 권리도 없는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지가 베르토프의 <카메라를 든 사나이>에서 거지, 어린아이 또는 젊은 여인이 잠에서 깨어날 때의 내밀한 몸짓이 도시의 삶 전체를 춤추게 만든 몽타주로 만개하는 방식을 생각한다. 나는 라디오가 오늘의 운세를 지껄이는 동안, 그 역시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에, 그러나 삶이 부과했을 모든 충돌과 불행에 지쳐 있는 그를 보여주는 색다른 리듬으로 촬영된 그 남자를 생각한다(아닉 블로의 <사생활>). 나는 요한 반 데르 퀴켄이 촬영한 맹인 청년 헤르만 슬로부가 동시대의 소용돌이 운동과 소리에 문자 그대로 자신의 고독을 '접속하는' 방식을 생각한다.
나는 1968년 6월에 IDHEC의 학생들이 촬영한 <원더 공장에서 노동의 재개>에서 더는 공장으로 되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는, 이 노동자들의 가슴을 에는 듯한 항거를 생각한다. 나는 <우리들>(아르타바즈드 펠레시안) 또는 샹탈 애커만에게서 형상을 취하고 있는, 고독하지만 서로 굳게 결속된 존재들을 생각한다. 나는 프레데릭 와이즈만의 <병원>에서 제도의 의해 망가진 인간성을, <산 클레멘테>에서 레이몽 드파르동 유심히 살핀 잊을 수 없는 몸짓을 생각한다. 나는 벨라 타르가 촬영한 굶주린 사람들의 딸을, 혹은 왕빙의 <철서구>에서 모든 것을 잃은 사람들의 존엄성을 생각한다."(일부 수정)
디디위베르만이 책의 말미에 주장하는 영화들의 리스트에 얼마든지 추가할 목록이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검색의 결과를 넘어서, 자기의 노출을 넘어서, 영화를 보아야 하는 이유가 된다. 영화는 타인을 향할 때, 희미한 존재들을 향할 때 빛이 난다. 켄 로치의 영화가, 다르덴의 영화가 여전히 중요하게 이야기되는 것은 감독 자신의 유명세를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타인을 향해 카메라를 내밀기 때문이다.
노출의 시대가 지우는 것은 타인들이다. 모두가 타인과의 소통을 위한다면 SNS를 채우지만 실상 채우고 있는 것은 빼곡한 '나' 혹은 콘텐츠라는 이름의 나일 뿐이다. 소통의 방향은 결국 나로 수렴된다. 종종 선한 영향력이라고 번역하고는 하지만 끝내 나의 영향력일 뿐이다(그마저도 아쉽다고 할 수 있겠지만). 동시대 영화의 수용방식은 얼마든지 변화하겠지만 영화가 지탱되는 이유는 더 이상 '영향력'에 있지 않다. 영향력을 필요로 하는 것은 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한 산업의 영역이다. '영화 예술'의 영향력은 인플루언서나 크리에이터들에게 뒤처진지 이미 오래다.
영화가 예술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좋아요와 싫어요를 받기 위한 경쟁이 아니라 타인의 살아있음과 살아남음을 담기 위한 경쟁일 수밖에 없다.
왕빙의 <이름없는 남자>(2009)처럼 계속 보여지는 40대 남자는 '좋아요'도 '싫어요'도 받을 수 없다. 90분 동안 그를 보지만 우리는 그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 또한 인간이고, 노동자이며, 살아있고, 살아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우리에게 그 이상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너무 많은 노출 속에서 망각되거나 사라지는 존재들을 양산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노출을 통해 기억하고 보듬어야 하는 순간으로 향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그것이 영화가 할 수 있는 최후의 영향력이라면, 과연 얼마나 많은 관객들이 이 영향력에 동참할 수 있을 것인가. 이름이 없다는 이유로, 남자는 스크린 너머로 사라져야만 하는 것일까.
문득 다시 질문한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이름들을 기억하거나 소유하고 있는 것일까. 다시금 시리즈를 떠올린다. 7부작의 <더 인플루언서>를 보았지만, 여전히 기억하는 이름은 얼마나 늘어나거나 달라진 것일까. 본다는 것이 이처럼 무심해진 노출의 시대에.
[글 이상용 영화평론가, poema@ccoar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