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자기들만의 세계인 것처럼 보이는 서울의 골목에서 이상한 그림자 연극이 펼쳐진다. 이야기는 계속해서 스스로의 논리를 포기하고 수시로 역할을 바꾸는 인물들은 목적지를 알 수 없는 미로를 헤맨다. 남는 것은 어둠뿐이다. 여기서 어둠은 무(無)가 아니다. 2차원이라는 평면. 영화라는 스크린. 카메라라는 암실. 또는 암흑이라는 우주. 극 중에서 화령이 말했던 것처럼, 그 검은 어둠 속에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세계가 있다. 혹은 그 안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가득하다.
베를린 국제 영화제 포럼 부문에 초청되고, 전주국제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언급 상을 수상한 <우리와 상관없이>는 유형준 감독의 첫 장편이다. 쉽게 말하자면 영화는 현실 세계의 1부와 그 속의 이야기인 2부의 액자식 구조를 취한다. 익숙함에서 멈출 수 있는 구조이지만 영화는 파편적인 사건들과 단서들의 불일치와 진실의 균열을 통해 그만의 독창적인 형식을 유지하면서 관객의 두뇌를 카오스에 가까운 상태에 이를 때까지 시험한다.
표면적으로는 창작 또는 연기라는 허구에 대한 메타적인 접근처럼도 보이지만, 정작 영화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유형준은 자신의 작업이 프로그래밍과 유사하다고 말한다. 그는 그저 기계에 흥분하는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카메라라는 기계장치와 영화라는 알고리즘을 배치하고, 뒤섞고, 명령어와 변수들을 입력하고,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지켜본다. 끝내, <우리와 상관없이>라는 도발적인 실험을 지켜보는 일은 그의 말처럼 일상과 극영화의 패턴화된 주파수를 깨뜨리고 인식의 한계를 들춰보는 새로운 주파수의 경험일 것이다.
김민세
첫 장편 데뷔작인 <우리와 상관없이>가 작년 베를린, 전주를 거쳐 영화제에서 좋은 성적을 얻고 올해 극장 개봉을 맞았다. 극장에서 관객을 만난 감회가 어떤가.
유형준
첫 작품이니까 각별하다. 무슨 말씀을 해주시든 감사하고, 정신없게 일정을 소화 중이다.
김민세
작년부터 올해까지 GV들을 몇 번 거쳤을 텐데, 관객들과 직접 대면하면서 기억에 남는 순간은 있는가.
유형준
질문 주실 때 깊게 봐주시는 분들이 있으면 감사하다.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여쭤 봐주시는 분들이 있으면, 그것에 대해 단순히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도 생각이 확장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김민세
베를린에서의 경험은 어땠나. 재밌는 순간들이 있었나.
유형준
첫 작품이었고 스스로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간 느낌이라 정신이 없었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바빴고. 심사위원분들이랑 초청된 포럼 섹션 감독들이 같이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서로 어떤 부분이 좋았는지 이야기할 때가 기억에 남는다. 자리 바로 앞에 '제임스 베닝'이 있었는데 정말 영광이었다.
김민세
영화 자체가 한 영화를 찍은 배우들의 뒷이야기에 대한 내용 아닌가. 영화 결과물과 영화제 성적에 대한 배우들의 반응은 어땠는가.
유형준
너무 익숙지 않은 방식으로 촬영한 영화다 보니까 현장에서는 다들 당황을 하셨다. 걱정하시던 부분들도 있었을 텐데, 영화제에서도 불러주니까 다들 고마워하시고 좋아하시더라.
김민세
영화 상 1부와 2부 사이 촬영 기간 자체의 텀이 길었다고 알고 있는데, 배우들이 그것에 관련해서 당황해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했던 점들도 있었나.
유형준
전혀 없었다. 시간 걸릴 때는 아무 말 없이 기다려주셨다. 9개월 정도 걸렸는데 이후에 연락을 드리니까 흔쾌히 좋다고 하시고 바로 와주셨다.
김민세
촬영 기간은 어느 정도 걸렸나.
유형준
약간 헷갈리기는 하는데. 1부를 3회차, 2부를 2회차로 촬영했던 것 같다.
김민세
관객분들이 주로 영화가 어렵다는 말들을 하신다. 극영화이긴 하지만 실험적인 측면이 들어가는 영화다 보니까 해석이나 간략한 설명들을 자주 요구 받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스스로 이 영화를 소개할 때 어떤 말들을 반복적으로 하게 되는가.
유형준
이야기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정육면체의 도형을 먼저 생각했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말하게 된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정확한 표현 같지도 않은데 전달을 하기 위한 표현으로서는 가장 근접한 표현인 것 같다. 계속해서 모양이 바뀌는 어떠한 물건을 만드는 것에서 출발을 했고 그 다름에 이야기를 끌어 갖다 붙이는 식이다. 그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김민세
1부와 2부의 구조를 취한다. 시나리오를 쓸 때 구조를 염두에 둔 채 쓰는 편인가.
유형준
더 근원적으로 들어가서 이야기를 하자면, 스스로가 선형적으로 누적되는 이야기를 쓰는 것을 굉장히 힘들어한다. 학생 시절 때도 이리저리 시도를 해봤는데. 사실 모든 영화는 다 각자의 구조를 갖고 있지 않나. 구조를 벗어나서는 작동할 수 없는 게 영화니까. 근데 우리에게 익숙한 기승전결 구조를 갖춰서 달려가거나, 통제된 정보들이 누적되어 가면서 그것을 순서대로 볼 수밖에 없는 선형적인 구조의 영화들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게 영화가 벗어날 수 없는 어떤 형태이겠지만 그걸 이용해서 좀 다른 방향으로 벗어나 보자, 이렇게 장면들과 정보들이 체계적으로 누적되면서 얻는 체험에서 벗어난 체험을 할 수 있게 해보자는 생각이었다.
김민세
이전에 작업한 두 편의 단편에 있어서는 어떠했는가. 이전부터 그런 방식과 의식 안에서 대본을 쓰고 작업을 해왔는가.
유형준
어떤 일관성을 갖추면서 해나가자는 생각은 없다. 변덕이 심한 편이다. 글을 쓸 때 나름의 원칙 아닌 원칙이 있다면 항상 1고에서 마치고 촬영하는 것이다. 글을 쓸 때도 항상 계산하고 수정하는 게 잘 안되더라. 영화의 최종 결과물의 모양은 다르겠지만 글을 쓸 때는 그냥 무책임하게 일단 쏟아낸다. 내가 그때 처한 상황이나 매여 있던 생각들이나 같이 하기로 한 배우분들을 보면서 그런 것들을 모두 섞어 쏟아내다 보면 거기서 연결되는 것들이 있고 안 되는 것들이 있지 않겠나. 근데 안 되는 것들이 또 자기들끼리 따로 모이기도 하고, 아예 버려야 될 건 버리고 이런 식으로 글을 썼던 것 같다.
김민세
촬영 때 시나리오가 반영이 안 되거나, 촬영했지만 편집 과정에서 삭제가 되거나 하는 장면들도 있는가.
유형준
쓰인 그대로 수정 없이 가고, 그대로 찍고 다 담겨 있다. 따로 버리는 장면은 없다.
김민세
필름 메이커스에 캐릭터에 대한 정보만 올려놓고 각 배역을 캐스팅했다고 알고 있다. 각 캐릭터에 대한 아이디어의 출발점은 무엇이었나.
유형준
어떠한 각을 잡고 구상을 하는 것이 잘 안되는 편이다. 이런 이야기를 해야 되니까 이런 인물이 나와야 한다는 식의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냥 그때그때 찍을 때 매여 있던 생각이나 상태가 있지 않나. 그 상태에서 충동적으로 쏟아내는 스타일이다. 사실 이번 구인 글을 올릴 때는 장편을 찍을 수 있는 상황 자체가 안 됐었다. 돈도 없고 시간도 없고, 어디에 지원을 내서 뽑히려면 이 영화가 어떤 카테고리에서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 지의 최소한의 논리가 필요한 것 같은데 몇 번 해보다 보니 잘 안되더라.
그래서 일단은 남녀노소로 섞어서 6명이 있으면 장편 영화가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6명을 어떻게 만들지에 대한 정확한 생각도 없었다. 젊은 남자, 젊은 여자, 나이 먹은 남자, 나이 먹은 여자, 그리고 좀 애매한 나이대의 남자와 여자 이 정도로 생각을 했다. 근데 내 머릿속이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배우분들께 최소한의 인식은 제시해야 하니까 나름의 캐릭터를 만들어서 인물 소개를 올렸다. 그 캐릭터에 관해서는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젊은 남자의 평균적인 정신 상태라고 해야 할까. 불안정하고. 내가 주관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들 갖고 있는 상태들을 반영했다.
김민세
배우와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더해보자면, 특히 2부에서는 배우들이 어떠한 캐릭터를 연기하고 있기보다 풍경의 일부에 있는 특정한 조형물로서 놓여있다는 생각이 드는 때가 있다. 각 캐릭터가 갖고 있는 전사나 감정 자체가 중요하게 비치지도 않을뿐더러, 밤의 이미지 자체도 마치 그림자 연극을 보는 듯하다. 연기연출을 할 때는 배우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떠한 지시를 했는가.
유형준
1부랑 2부랑 디렉팅에 임하는 태도가 달랐다. 아무래도 첫 장편이다 보니까 1부를 찍는 시점에서는 뭔가 의식적으로 많이 컨트롤하려고 했다. 인물들의 연기에 대해서도 인위적이었던 것 같고 힘을 주고 있는 상태였다. 그때 내가 많이 집착했던 부분은 정말 대사만 외워서 현장에 와달라는 것이었다. 어떤 분석이나 계획 같은 것 제발 준비하지 말아달라, 나만 믿고 그냥 대사만 외워 오시면 된다고 부탁했다. 그래서 현장에서는 일단 리허설 돌려보고 거기서 내가 보았을 때 아닌 것 같은 부분들이 있으면 말 토시나 뉘앙스나 이런 것들을 만져주었다. 1부 때는 테이크를 거의 한 10 테이크, 20 테이크 씩 갔던 것 같다.
김민세
그 긴 대화들로 이루어진 롱테이크를 10 테이크, 20 테이크 씩 찍은 것인가.
유형준
그렇다. 배우분들이 고생을 많이 하셨다. 어떻게 할까, 어떤 식으로 가기를 원하냐 이런 질문들 없이 그냥 현장에서 맞닥뜨리면서 다 해주셨다. 다른 생각 하지 말고 대화 간에 상대방의 눈을 계속 봐달라, 눈만 보면 알아서 될 거라는 얘기들을 많이 했다. 근데 2부를 들어갈 때 중간의 텀이 많이 되기도 하였고, 1부를 찍어둔 걸 보면서 내가 인위적으로 뭔가를 통제하는 게 과연 맞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또 컨트롤을 너무 많이 해서 찍힌 결과물들이 뭔가 지나치게 의미심장한 영화적인 이미지로 남는 것에 대해서 고민을 했던 것 같다.
영화적으로 의미심장하다는 게 어떤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그런 느낌이 들었고. 2부에서는 컨트롤을 덜 해도 그 두 개를 붙여놓으면 어떤 하모니가 생기지 않을까 이런 생각도 했다. 2부는 정말 그 어떤 디렉션도 없었고, 그냥 대사 외워 오시면 카메라 돌리고 상황이 돌아가는 식이었다. 배우분들도 1부에서 나의 방식을 경험한 상태에서 2부를 찍는 거니까 이제 정말 큰 준비 없이 마음 편하게 오셨다. 그래서 2부 때는 테이크를 많이 가지 않았다. 한 번에 그냥 간 것도 있고 리허설에서 쓴 것도 있다. 편하게 즐기면서 찍었던 것 같다.
김민세
눈을 마주쳐달라는 디렉팅은 어떤 의미인가.
유형준
연기를 할 때 어떤 방어 기제라는 게 작동을 안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카메라 앞에서 어떤 장면을 연기한다는 상황에 있다면, 다들 그런 의식에서 자유로워지는 걸 원하지만 사실은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냥 내 눈앞에 있는 사람에 집중하고 서로에게 빨려 들어가기만 하면 자기 자신이 어떻게 보여야겠다는 의식에서 제일 실용적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김민세
최근의 한국 독립영화 안에서 인물들의 대화를 롱테이크로 담아내는 형식의 비슷한 영화들이 있지 않나. 이런 형식의 영화들은 때로 즉흥을 발휘한다는 측면에 있어서 대사의 리듬이 풀어지거나, 자연스러움이나 사실적인 것을 위해 대사 간의 행간이 잦은 경우가 있는데, <우리와 상관없이>의 대화 장면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다가왔다. 특히 화령과 피디가 처음으로 대화하는 씬에서 대사의 리듬이 독특하다. 많은 양의 대사가 쉴 새 없이 빠른 리듬으로 오가다가 하다가 갑자기 말을 멈춘다든지. 그 장면에서 별도의 디렉팅이 있었나.
유형준
그 리듬에 대해서는 굉장히 의식을 했었다. 그 장면에서 대사를 멈추는 것은 애초에 시나리오에 있었다. 리듬에 있어서는 매 테이크마다 계속 달라졌다. 길게 롱테이크로 한 장면을 만든다고 치면 사실 많은 걸 할 수 있지가 않다. 정말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만한 디렉션을 잘 전달하고 그게 배우분들 안에서 효력을 발휘하길 기대하면서 계속 베팅하듯이 가는 거다. 그러다 보니 찍힌 결과물에도 별의별 리듬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음악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가사 없는 어떤 멜로디나 흐름, 리듬 같은. 그중에서 내가 제일 보기 좋았던 리듬을 선택했다. 그리고 영화라는 건 앞장면이 있고 뒷장면이 있으니 앞뒤가 계속 붙어 나가는 걸 벗어날 수 없지 않나. 그런 앞뒤의 덩어리들이 갖고 있는 리듬 간에 하모니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면서 테이크를 골랐다.
김민세
대화 장면에 있어서 가장 흥미로운 장면은 암전된 채 남녀 커플의 목소리만으로 영화가 진행되는 순간이다. 시각적인 이미지가 정지한 상태에서 대사를 담고 있는 사운드만이 둥둥 떠다니며 여러 층위의 상상을 하게 한다. 이런 암흑 이미지와 거기에 흐르는 사운드에 대한 선택에는 어떠한 과정이 있었는가.
유형준
개인적으로 너무 밝거나 시각적인 정보가 너무 많은 이미지를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에게 가장 지배적인 감각이 시각이지 않나. 청각이랑 촉각, 후각은 자기 내부의 일인 것 같은데 시각은 이상하게 항상 자기 내부를 못 보게 하고 외부로 빨려 들어가게 하는 게 있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우리가 TV를 켜면 뭔가 바깥이랑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지 않나. 깜깜한 방에서 창문을 열면 뭔가 밖이랑 연결되는 것 같고. 근데 우리가 음악을 듣거나 어떤 촉각을 느끼거나 후각을 느끼거나 하는 건 정말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인 것 같다. 그래서 시각이 주는 바깥으로 빨아들이는 느낌을 경계하게 된다. 뭔가 계속해서 우리 안에 일어나는 일들을 못 들여다보게 한다는 것 같달까.
그 장면도 처음에는 경치 좋은 곳에서 찍으려 했다. 근데 그 대화들이 사실은 굉장히 내밀한 대화들이지 않나. 그냥 빈말하는 이야기들이 아니니까. 경치 좋은 곳에서 두 분이랑 찍었는데 집중이 잘 안되고 서로 빨려 들어가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한번 깜깜한 곳에서 불 꺼놓고 찍어보자 해서 찍었다. 결국 원하는 어떤 효과를 얻어낸 것 같다. 뭔가 이렇게 바깥으로 빨려 들어가게 하는 시각이라는 게 영화의 속성과도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스크린을 볼 때 그냥 스크린일 뿐인데 거기에 어떤 시각 정보들이 나열되고 우리가 그걸 보는 순간 또 저절로 빠져들어 가지 않나. 근데 동시에 우리 안에서도 뭔가를 계속 느끼고, 내부랑 외부 사이에서 계속 진동하는 거다. 그런 게 영화의 체험일 텐데, 만약에 시각적인 정보로 지탱되고 유지되는 게 영화의 환영이라면 시각 정보를 다 차단했을 때도 그게 지탱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 장면을 찍었던 것 같다.
김민세
방금 이야기한 암전 장면과 마찬가지로, 흑백이나 1부와 2부의 구조, 2부에서 비선형적으로 연결되는 씬들, 일반적인 영화 문법을 떠나 실험적이고 작가적인 선택이 돋보인다. 스스로의 미학적인 의식 안에서 이루어지는 선택인가. 혹은 현실적 선택의 비중이 큰가. 사실 영화 현장이라는 것 자체가 뭣 하나 마음대로 되는 곳이 아니고, 결국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선택을 무조건적으로 필요로 할 텐데, 그 두 선택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맞추려 했는지 들어보고 싶다.
유형준
절대적으로 둘 다 계속 갖고 가야 하는 일이다. 저글링 하듯이. 내가 원하는 게 정말 선명하고 명확한 게 아니니까. 이런 생각들을 자주 하게 된다. 어떤 한국적인 현실의 조건이 있지 않나. 예를 들어 한국적 공간이라 하면 한옥 이런 게 아니라 우리가 정말 한국에 살면서 느끼는 어떤 공간이나 이 땅에서 우리가 적응해야 할 수밖에 없는 어떤 한계들이 있지 않나. 항상 에어컨 소리에 시달린다든지 오토바이 소리에 시달린다든지. 공간들이 작고 협소한데 사람은 북적거리고. 마냥 그렇게 아름답거나 역사가 오랫동안 유지된 공간들도 잘 없다. 사실 상업 영화들이 하는 방식으로 그런 걸 돈과 시간을 써가면서 찾아서 모으면 가능하겠지만. 그래서 싫다 싫다 하면서도 그 현실적인 조건들에 적응하고 이용하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영화는 결국 공간 안에서 찍는 거니까 한국이라는 땅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은데. 그 공간이 우리에게 주는 답답하고 성에 안 차는 느낌이 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로컬로서 살아왔기 때문에 외국인이나 외지인은 느낄 수 없는 그런 감 같은 게 있지 않나. 서촌에 있다가 신림이나 건대 앞에 가면 힘들고 스트레스받는 것처럼. 대답이 원래 질문에서 멀어진 것 같긴 한데.
김민세
현실적인 선택과 미학적인 선택에 대한 질문이었다. 이야기를 들으니 또 떠오르는 건 영화 안에서 에어컨 소리라던가 오토바이 소리 등의 소음이 수음된 것이 그대로 들리더라. 독립 방식의 영화를 찍을 때 현장 통제의 한계가 있다 보니까 발생하는 일일 텐데, 그 소음들을 그대로 둔 선택의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더라.
유형준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의 문제일 것이다. 지금도 구조나 형식 같은 이야기들을 하고 있지만, 이런 식으로 만들게 된 것 자체가 사실 이 땅에서 적응한 어떤 결과물일 거라고 생각한다. 진주를 보면 불순물을 껴안고 있다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내가 의식하는 것보다 더 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러니까 한국이라는 어떤 시공간이 주는 스트레스들을 끌어안고 그것을 압축시키고 소화하다 보니, 결국 지금 미학이라고 말하고 있는 선택들에 영향을 주는 게 아닐까. 땅이 가장 큰 영향을 줄 것이다.
김민세
한국에서 오래 지낸 곳이나, 사는 곳이나, 애정이 가게 되는 그런 공간이 있는가. 볼 때마다 어떤 의미심장한 것을 느끼게 된다든지.
유형준
서울 사람이다. 어릴 때 잠실 쪽에 살다가 나이 먹고 강북 쪽으로 넘어왔는데 용산에서도 살았고 지금은 부암동에 산다. 일단은 부지 넓고 사람 별로 없으면 행복한 건 모든 사람이 다 그럴 것이다. 한국이 워낙 뭔가를 보존하거나 유지하려는 게 잘 없다 보니까 지속가능성이라는 게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다. 절대적으로 사람 정신에 굉장히 안 좋다고 생각한다. 역사가 오래된 공간, 나 하나 개인 보다 더 오래되고 나이테가 누적된 그런 공간들이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김민세
서울 공간 속에 있는 골목과 거리, 걸음을 담고 있는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들을 프레임 안에 담는 데 있어서 어떤 점을 유의했는가. 레퍼런스가 되었던 작품이나 작가들은 있었는지.
유형준
데이빗 핀처의 영화를 굉장히 좋아한다. <소셜 네트워크>(2010)의 오프닝을 보면 걸어가는 인물을 계속 패닝하면서 담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 볼 때마다 그냥 찍어 놓은 것 같은데 그 효과들이 너무 좋더라. 그가 어떤 의도를 했는지는 궁금하지 않다. 패닝하고 걸어가고. 그 전에 단편을 찍을 때부터 항상 패닝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첫 장편에서 움직이고 패닝하는 것을 제대로 써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패닝에 관련한 질문도 많이 받았고, 스스로도 왜 그런가 생각을 해봤는데, 일단은 모르겠다. 어린애가 그냥 계속 움직이는 거 보면서 좋아하는 것처럼 정말 좋아한다. 생각을 해보면 컷이 끊어지지 않으면서 패닝을 한다는 게, 어떤 시공간적인 착시 혹은 시공간을 찢는다는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근데 그게 또 그냥 한다고 그런 느낌이 드는 게 아니라 어떤 리듬이나 속도가 중요한 것 같다. 패닝이 줄 수 있는 효과가 무궁무진하다는 생각은 드는데 개인적인 생각은 그러하다.
김민세
특정 작품이나 작가에게서 그런 것들을 느낄 때가 있는가.
유형준
그런 식으로는 작업하지 않는다. 저거 보고 좋다는 생각으로 하려고 하면 잘 안 \된다. 핀처의 영화에서 팬이 많이 나오지 않나. 그 사람은 어떤 시점에 실시간적인 이동을 통해서 정보를 통제하고 우리가 받아들이게 되는 것을 환기하는 용도로 많이 쓰는 것 같다. 그런 것들을 보면 그 효과도 좋지만 나는 다른 측면으로도 써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에게는 팬이 우리의 인식 작용을 이상하게 건드리는 것 같다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근데 별생각 없이 패닝을 그냥 막 하면 그게 안 오는 것 같더라. 핀처는 로봇 삼각대를 써서 리모트 컨트롤로 그 타이밍 속도나 흔들림을 완전히 통제한 채로 패닝을 하는데, 나도 이리저리 실험해 볼 때 패닝 속도가 불규칙하거나 움직임이 떨리거나 흔들리면 그런 느낌을 받지 못한다.
김민세
영화 속에서 종종 골목을 걷는 인물을 따라가며 패닝을 하는 장면이 등장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근데 그 똑같은 공간을 아무도 없을 때 패닝으로 담으면서 반복하는 이상한 숏 또한 있다. 보이지 않는 유령이 왔다 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런 숏은 어떻게 찍게 되었는가.
유형준
일단은 그냥 재밌을 것 같아서가 제일 컸다. 사실 영화라는 게 공간 안에서 사람이 계속 나오고 활동해야 하지 않나. 카메라의 프레임 또한 항상 사람 중심으로 모든 것을 찍는 것을 벗어날 수가 없다. 중간에 인서트로 공간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사람을 보여주다가 환기하는 것들이고. 굉장히 많은 영화들을 보다 보면 카메라를 잡고 있는 사람의 손길이 느껴질 때가 많다. 우리는 그것들을 절대적인 시선인 것처럼 받아들이는데 그런 것들이 지겨웠던 것 같다.
김민세
영화의 로케이션은 어떻게 선정하게 되었나.
유형준
1부가 안국동 쪽이고 2부는 혜화 성대 후문 쪽에서 찍었다. 강남 쪽에서 찍는 건 옵션에 없었고 내가 자주 다니는 동네에서 찍으려고 했다. 일단은 협조가 가능한지가 제일 컸는데 다행히도 그쪽에 보기 좋은 골목들이 많고 방해받을 것도 없었다.
김민세
영화의 숏 안에서 그 공간의 장소성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순간들이 있다. 도로에 붙어있는 주소표지판에서 숏이 시작하거나, 식당이나 가게의 여러 표지판 등. 서울의 골목과 거리를 담고 있는 많은 영화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감추는 것이 많은 영화다 보니 드러나는 것 하나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우게 되더라. 그것들을 화면 안의 요소로서 어떻게 고려했는가.
유형준
로케이션에 가서 카메라를 대보고 모니터를 볼 때면 어떤 정보들을 들어오고 나가게 할지, 프레임 안의 공간을 자를지 넓힐지 고민하게 되는데 항상 직감인 것 같다. 스스로 어떤 일관된 도그마 안에서 이것은 무조건 잘라낼 것이다, 혹은 이것은 무조건 보여줄 것이라는 생각은 오히려 피하는 편이다. 그냥 현장에서 직감으로 하는 편이다.
김민세
그런 공간들을 담아내는 데에서 사적인 기억이나 경험이 투영되는 부분도 있나.
유형준
그런 건 쓰지 않는 것 같다.
김민세
아무래도 흑백으로 화면이 구성되어 있다 보니까 영화 안에서 낮에서 밤이 되어가는 것이 단순한 시간적 흐름 이상으로 다가온다. 특히, 어둠의 미로 안에서 헤매는 것처럼 느껴지는 밤의 골목들이 인상적이다. 밤의 이미지를 담을 때 주의 깊게 생각한 부분이 있는가.
유형준
어떻게 언어화해야 할지 모르겠다. 일단 내가 공간에 예민한 편이다. 살면서 공간이라는 게, 성에 안 차거나 마음에 안 들 때가 훨씬 많다. 어둠이나 밤의 거리를 찍는다는 것은, 한국의 수많은 공간이 주는 어떤 지긋지긋함이나 스트레스들이 있지 않나. 그것을 나름대로 승화시키려 하다 보니까 그런 판단을 계속하게 되는 것 같다. 1부를 찍을 때는 정말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흑백으로 했다. 내가 혼자 해야 하는데 일단 색이라는 게 들어가게 되면 컨트롤해야 될 게 너무 많아진다. 2부는 1부에서 흑백 촬영으로 너무 밀어붙이지 않았나 싶어서 컬러로 찍었다. 그래서 그걸 합쳐볼까 생각을 했는데 막상 붙여보니까 이상하더라. 여러 가지 느낌이 있었겠지만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흑백으로 다 빼버렸다.
김민세
흑백 화면이 이 영화에서 가장 빛을 발하는 장면은 마지막 직전의 이미지라고 생각한다. 물론 계획된 흑백의 이미지는 아니지만, 골목을 바라보는 화령의 코트에 주름진 그림자가 맺히는 그 이미지에는 이전의 장면에서는 기대하지 않던 그 자체로 아름다운 미장센으로 다가온다. 그 이전의 이미지 자체에는 사실주의적인 촬영이 주가 되었다고 느꼈는데 그 숏 하나로 굉장히 미적이고 초현실적인 무드의 순간으로 뛰어넘어간다는 생각이 들더라. 이 숏에서 어떤 것을 보아내고자 했는가.
유형준
내가 뭔가를 계획적으로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어떤 것을 생각하고 실행에 옮기는 데 있어서 불안정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 장면도 어떻게 도달하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시나리오상에는 그냥 어두운 공간에서 그림자 진 부분을 바라본다는 내용의 지문이었다. 근데 밖에서 제대로 어둠이 지는 공간을 찾기가 어려워서 현장에서 즉석으로 로케이션이 구해지지 않았고, 그냥 그 주변을 막 뛰어다녔다. 그러다가 깊게 되어있는 주차장에 땅거미가 진 곳이 있어서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그 장소에서 카메라를 돌렸다. 여기서 어둠이라고 하면 보통 사람들은 그것을 무(無)라고 많이 생각하는 것 같다. 그리고 사람이 항상 무언가 꽉 차 있어야 덜 불안해하는 것처럼 다들 무라는 것에 대해서 두려움이나 혐오감 같은 것을 느끼는 것 같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어둠이 뭔가를 비워내는 것이라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오히려 거기에 모든 게 다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뇌 작용 자체가 오히려 어둠이 있어야 뭔가를 더 볼 수 있다고 느낀다. 원래 생각은 어두운 곳을 바라보는 장면을 찍자는 것이었는데, 생각한 것보다 마치 파묻히듯이 어둠이 꽉 차게 되더라. 이렇게 어둠에 파묻히는 이미지가 영화적으로 좀 위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일단은 찍어본 거다. 그러고 나중에 붙여보니까 이런 위험함을 긍정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민세
영화의 마지막 이미지는 골목의 시선에서 화령을 바라보는 숏이다. 멀리서 전신을 담다가 얼굴로 디지털 줌인 하는데 그 와중에 필름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가 보고 있는 이미지가 영화인 동시에 디지털 이미지임을 들추는 소격효과다. 한편으로는 CCTV의 이미지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 여러모로 영화에 대한 메타적인 감각을 일으키는 숏이라 생각한다. 이 숏이 관객에게 어떠한 질문 혹은 감각으로 닿길 바랬는가.
유형준
어떤 질문을 던져야겠다는 생각으로 영화를 찍지는 않는다. 이런 장면을 보면서 어떤 호기심이나 질문을 느꼈으면 좋겠다는 식으로는 사고가 잘 안된다. 사람이 뭔가 한눈에 파악할 수 없는 복잡한 것을 생각하고 그것을 분석해야 할 때 층위를 나누는 방식을 많이 쓰지 않나. 여러 레이어들이 종합체를 이루는 식으로 사고를 하게 되는 것 같은데. 영화라는 것도 우리가 흔히 보고 즐기는 체험 이상으로 굉장히 복잡한 종합체라고 생각한다. 방금 이야기했던 구조나 형식 같은 것들을 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영화라는 게 너무 복잡해서 그런 거다.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삶이 만약에 10차원, 15차원 정도이고, 우리의 감각을 넘어서는 어떤 초과하는 값이 우리의 삶이라면 영화는 그 초과 값을 평면에 담아서 납작하게 눌러버리는 거라고 생각을 한다. 10차원, 15차원을 2차원 안에 가둬버리는, 그 평면 안에 갇혀 있으면서도 그 안에서 어떤 복합체의 층위 같은 건 느낄 수 있게 하는 게 영화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영화를 볼 때 그걸 굉장히 많이 까먹는다. 그걸 느끼고 있으면서도 스토리 따라가느라 바쁘고 인물에 몰입하느라 바쁘지 않나. 우리가 잊고 있던 층위들, 그리고 영화가 우리의 삶을 캡처해서 가둬버리는 작용을 보여주고 싶었다. 우리의 능력을 벗어나 버리는 삶의 복잡한 층위를 영화가 전달할 수 있다는 것 말이다.
삶의 많은 부분은 눈으로 볼 때는 이게 뭔지 인식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사람 많은 곳을 가서 어떤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하루를 잘 보냈다고 하자. 근데 나중이 되면 그 하루가 정리가 잘 정리가 안 되고 복잡하지 않나. 그 정신없게 느꼈던 것이 15차원의 정보량이라면 그것을 층위를 나눠서 납작하게 눌러버리는 것이 영화 매체의 힘이다. 앞서 대사의 리듬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일상 혹은 일반적인 극영화가 갖고 있는 패턴화된 주파수가 있을 텐데, 대사의 리듬이 갖는 고유의 주파수로 그 주파수를 깨뜨리고 싶었다. 마지막 숏의 이미지도 삶의 인식의 한계를 벗어나게 하는 주파수가 되길 바랐다.
김민세
크레딧마다 배경색이 녹색이더라. 녹색에 어떤 상징적이거나 감각적인 부분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영화 자체가 흑백이고 밤이 나오다 보니까 네온사인 빛처럼도 느껴졌다.
유형준
크레딧을 만들 때, 처음에는 이것저것 다 해봤다. 원래는 배우들의 손바닥 사진을 보여주는 걸로 해보려 했는데,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서 그냥 컬러 매트로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색 저 색 다 해봤는데 녹색이 제일 좋더라. 개인적으로 상징으로 사고하는 것은 잘 안되는 편이고, 뒤의 영상이 흑백인 것을 생각 안 해도 녹색이 좋았다. 그렇게 작업을 하고 영화 전체를 돌려보니까 1부가 끝나고 녹색 화면으로 들어갈 때 뭔가 이상하더라. 현기증 같은 게 나는 것 같았다. 다른 색은 또 그런 느낌이 안 나는 것 같고. 흑백 영상을 계속 보고 있다가 초록색 화면으로 바뀌니까 그냥 납작한 화면인데 3D처럼 느껴졌다. 그게 재밌어서 그렇게 결정했다.
김민세
크레딧마다 신디사이저 사운드로만 이루어진 미니멀한 음악이 나왔던 기억이 있다. 그 음악은 어떻게 작업해서 삽입하게 되었는가.
유형준
조동진의 ‘겨울비’라는 노래가 있는데, 그 앨범의 사운드가 정확하게 나온 초판 버전의 레코드를 갖고 있다. 그 노래에서 비슷한 신디사이저 사운드가 나오는데 처음 듣던 당시에 아예 분석이나 설명이 안 될 정도로 그 사운드에 너무 꽂혔었던 적이 있다. 그 음악을 들었을 때의 느낌을 재현해 보자는 생각으로 만들었다.
김민세
단조로운 롱테이크가 대부분인 영화다 보니 그 안에서 무언가를 통제하기보다는 우연이나 즉흥이 발생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현장에서 우연이 프레임 안에 개입하거나 거기서 즉흥적으로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내고 조율했던 에피소드들은 없는가.
유형준
스스로는 계획과 우연 그 중간에 있는 사람이라 느끼는데, 요즘에는 그것 또한 어떤 카테고리로 묶이지 않나. 프레임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고 의견을 수용하는 방식은 또 싫더라. 이번 장편을 만들었던 과정을 생각해 보면 우연의 수용이라기보다는 내 머릿속을 카오스로 두고 최종적인 선택을 어떻게든 내려서 그것을 흔들림 없이 밀어붙이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연기에 있어서도 우연이나 외부의 요소가 틈입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을 안 했고 오히려 그 부분을 빼내려 했던 것 같다. 배우분들의 애드리브 등 다 통제하고 그냥 쓰인 그대로 찍었다. 물론 혼자 책상에 앉아서 글을 쓸 때랑 현장 로케이션에 가서 현실적인 조건 안에서 판단을 내려야 할 때의 간극은 있지만.
김민세
어떤 영화를 좋아하는가. 자꾸만 돌아가게 되는 감독이 있는가.
유형준
내가 시네필은 아닌 것 같다. 영화 매체를 무조건적으로 애정하는 편은 아니고, 공부할 때를 돌이켜보면 좋아하는 영화보다 싫어하는 영화가 더 많았다. 그것을 받아들인 다음에 내 나름대로 찾아보게 되더라. 학생 때 모리스 피알라를 처음 알게 되어 좋아했고, 로스 맥켈위라고 이상한 다큐멘터리를 작업하는 감독인데 그 사람 영화도 좋아했다. 루이스 부뉴엘이랑 마이클 스노우도 좋아한다. 다만 실험영화는 싫어하는 편이고 오히려 질리지 않는 극영화를 좋아하는 것 같다. 마이클 스노우의 영화도 <파장> 같은 영화를 좋아하지는 않고, <코퍼스 칼로섬>을 학생 때 보고 굉장히 감명받았던 기억이 있다. 앞서 계속 이야기했던 것처럼 인식의 확장 같은 걸 느꼈다. 요즘은 극영화 자체에 지겨움을 느낀다. <우리와 상관없이>를 찍을 때가 제일 심했고, 그래서 그때는 시트콤이나 축구를 많이 보곤 했었다. 그러다 최근 들어서는 영상 매체를 거의 보지 않는다. 소설이나 시를 자주 읽는다. 예이츠의 시를 좋아하고 심심할 때면 키에르케고르의 책을 자주 돌려본다.
김민세
스스로 시네필이 아니고 영화에 대한 애정으로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고 이야기했다. 비디오 설치 작품 같은 영화의 변두리에 있는 작업이나 영화 바깥의 작업에도 흥미가 있는가.
유형준
컨템포러리 쪽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나도 스스로 이상한 포지션이라 느끼는데. 극영화라는 게 어떻게 작동하고 그것으로 뭘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다. 근데 100년이 넘는 영화의 역사가 있다면 그 계보 안에서 어떤 애정이나 낭만을 느끼지는 못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에고가 세계를 바라보는 것에 있어 어떤 대차대조표를 세우고 싶은 욕구가 있지 않나. 그것이 나에게는 영화라는 매체이고 극영화일 뿐이다.
김민세
최근의 일상은 어떻게 보내고 있는가.
유형준
일에 대해서는 힘들어하지 않는다. 그냥 계속 움직이고 뭘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반대로 일상을 제대로 사는 걸 굉장히 힘들어한다. 하루하루를 알차고 건강하게 사는 걸 굉장히 힘들어하는 편이라 그런 규칙적인 생활에 대해 깊이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그러니까 사람이 삶에서 많은 게 가능하고 많은 것을 할 수 있다고 얘기하고 무궁무진한 것처럼 얘기들을 많이 하는데, 사실은 사람 인생이 계속 어떤 사이클에서 돌다가 다음 사이클로 넘어가는 과정이 전부인 것 같다. 특히 일상에서의 그 사이클을 인정하기가 힘들다. 그러면서도 사람이 살면서 그것에 또 적응하는 것 같더라. 우리가 도돌이표 안에 있다는 걸 인정하면서 그냥 하루하루 잘 버텨나가는 거다.
김민세
에정되어 있는 다음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구체적으로 계획 중인 작업은 없는가.
유형준
최대한 계속 만들자는 생각은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는 오가고 있는데 크게 조건이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첫 장편을 하나 찍었다는 것으로 조급해하거나 더 커질 생각들을 경계하고 있다. 나에게는 영화가 기계 장치 혹은 프로그래밍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명령어들과 코드들의 연속으로 뭔가를 프로그래밍해서 무궁무진한 걸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나만의 작동 방식 혹은 개발 언어라고 할만한 것을 정립하고 싶다.
아마 이후, 여성 인물이 굉장히 많이 나오는 영화를 찍을 것 같다. 보통은 여자 주인공이 나온다고 하면 그 인물이 갖고 있는 캐릭터나 드라마성에 함몰될 수밖에 없지 않나. 흔히 보는 극영화가 그러하듯 주인공의 에고 안으로 그냥 빠져들 수밖에 없을 텐데. 그것이 아니라 수많은 인물들이 각자 갖고 있는 에고의 지도나 별자리 같은 것을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고 있다.
[글 김민세 영화평론가, minsemunji@ccoart.com]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