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용의 메타 코멘터리 #4] 청소(세차)하는 영화의 위생학
[이상용의 메타 코멘터리 #4] 청소(세차)하는 영화의 위생학
  • 이상용
  • 승인 2024.07.29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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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과 함께 살아가기 위한 청결함의 요구"
ⓒ 영화 <새벽의 모든>

1.

두 편의 일본 영화를 보다가 눈에 들어온 것이 있다. 엄밀히 말해 두 작품 중 하나는 완전한 일본 영화가 아니다. 하지만 주연을 맡은 배우 '야쿠쇼 코지'가 아니었다면(그가 이 영화의 투자뿐만 아니라 프로듀서를 포함한 주변의 많은 이들을 동반했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을 통해 이러한 상황이 짐작된다), 불가능해 보이는 영화로 보인다. 사실 연출자 '빔 벤더스' 감독에게 일본 혹은 도쿄는 낯선 장소는 아니다. 벤더스는 '오즈 야스지로'에 대한 존경심으로 <도쿄가>(1985)를 만들었고, <베를린 천사의 시>(1987)의 마지막 장면에서 세 명의 영화 천사를 언급하며 '오즈'를 꼽은 적이 있다. 다른 천사(감독)는 프랑수아 트뤼포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였다. 자연스럽게 야쿠쇼 코지와 벤더스의 협연인 <퍼펙트 데이즈>(2023)에는 오즈 야스지로의 그림자가 짙게 배어 있다. 야쿠쇼 코지가 연기하는 히라야마는 오즈 야스지로의 대표작 <동경 이야기>(1953)와 유작 <꽁치의 맛>(1962)에 사용된 주인공 혹은 가족의 '성씨'였다. 이 영화의 기획은 '더 도코 토일렛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벤더스에게 수리한 공중화장실을 보고 관련된 작품을 제작해 달라는 요청을 하였고, 히라야마는 도쿄 신주쿠 지역의 화장실을 청소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작년 칸 영화제를 통해 소개되면서 야쿠쇼 코지는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이와 더불어 눈에 들어온 작품은 미야케 쇼의 신작이자 올해 베를린 영화제에서 소개된 <새벽의 모든>(2024)이다. 국내에서는 아직 미개봉 작품이고, 올해 전주영화제 개막작으로 소개된 바 있다. 이 영화는 PMS 증후군 때문에 생리 기간이 되면 분노를 통제하기 어려운 후지사와라는 여성과 2년 전 공황장애 진단을 받고 종종 발작 증세를 보이는 아마조에가 과학 교보재를 제작하는 작은 회사에서 만나 서로의 증세를 알고 돕게 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처음에는 서먹한 사이였지만 아마조에는 우연히 머리 자르는 것을 도와준 후지사와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주치의인 정신과 의사로부터 PMS에 관한 책을 잔뜩 빌려온다. 회사에서 근무하던 중 그녀가 증세를 보이자 세차를 하도록 이끈다. 처음에 후지사와는 화를 내지만 어느새 그녀는 세차를 하며 마음을 가라앉힌다.

젊은 세대를 대변하는 두 주인공이 각각 PMS와 공황장애를 앓고 있다는 설정은 작위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미야케 쇼의 작품 중 여전히 흥미로운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2018)로 돌아간 듯 젊은 세대를 담은 카메라에 눈길이 간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가 미래에 대한 특별한 꿈이나 희망 없이 아르바이트로 연명하며 살아가는 세대를 보여줬다면, <새벽의 모든>에서는 각자의 정신 질환을 품은 채 버티고 극복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두 영화를 일본 저널의 용어를 빌려 단순화해 보자면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가 2010년대에 등장한 사토리 세대(사토리는 깨닫다는 뜻의 사토루에서 파생된 말이지만 불교적인 깨달음의 의미보다는 모든 것에 달관한, 어찌 보면 포기했다는 의미가 강하게 깔려 있다)를 다룬다면, <새벽의 모든>은 코로나 세대를 대변한다.

<퍼펙트 데이즈>와 <새벽의 모든>은 직업적인 이유이든 병적인 이유이든, 기성세대이든 젊은 세대이든, 처한 상황은 다르지만 청소(세차)를 하며 일상을 보낸다(견딘다). 인문학적인 성찰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들이라면 두 영화를 묶어 '포스트 팬데믹 영화'라고 진단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에게 거리를 두는 상황, 사적인 공간을 침범할 수 없는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돌보기 위해 다가가고 청소를 해야 하는 현실은 두 영화가 관통하는 시대성이다.

 

2.

우리는 질병의 세기를 통과했거나 여전히 통과 중이며, 그 가운데 위생은 영화의 중요한 화두가 된다. 영화나 예술에 무슨 위생학이 필요하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위생은 20세기 예술의 중요한 화두 중 하나였다. 뒤샹이 변기를 갖다 놓은 「샘」(1917)이라는 작품을 두고 통상적으로 기성품(레디메이드)을 가져와 미술관(박물관)에 전시함으로써 전시 가치를 앞세운 20세기 예술의 표상이라고 설명하지만(여기에 원본성의 파괴 등등 여러 말을 덧붙일 수 있다), 수많은 기성품 중 하필이면 '변기'인가라는 질문도 수반되어야 한다. 뒤샹은 불쾌하게 여기는 변기를 전시함으로써, 관람자의 불쾌감을 미적으로 바꾸는 작업을 시도했다. 

20세기에 부상한 모더니즘 예술의 주요한 태도 중 하나는 쾌락이 아니라 불쾌감을 예술로 전시하는 일이었다. 쇤베르크의 음악도 여기에 한 몫을 거든다. '과연 불쾌한 것은 예술이 될 수 있는가?'에 관한 예시는 20세기 예술 작품에 넘쳐난다.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 중 여성의 얼굴에 몸과 성기를 붙인 「능욕」(1934)과 같은 작품을 비롯하여 장난감을 전시하는 제프 쿤스에 이르기까지 전통적인 쾌락의 대상에서 벗어난 것을 미적인 대상으로 전시하는 것은 모더니즘의 자연스러운 전시 방식이자 불쾌감을 미로 바꾸는 위생에 관한 물음과도 연결된다.

변기는 알프레드 히치콕의 <싸이코>(1960)에서도 주요하게 다뤄진다. 돈을 훔쳐 도망친 마리온이 베이츠 모텔에서 난도질 당하는(슬래셔 무비) 장면이 등장하기 전까지 영화는 마리온을 따라 중요한 장면들을 보여주고 있다. 빗줄기를 피해 베이츠 모텔에 도착한 마리온은 저녁식사를 청하는 노먼과 대화를 하면서 자신이 박제된 새이거나 새장 속 새처럼 갇혀 있음을 자각하기에 이른다. 그녀는 도피나 도주가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방으로 돌아온 마리온은 '훔친 돈' 중에 자신이 사용한 비용을 계산한다. 이 장면은 중요하다. 아침이 오면 마리온은 돈이 필요한 연인인 샘을 향해서가 아니라 사무실로 돌아갈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이 장면에 대해 많은 이들이 지나쳐 버린다). 

마리온은 비용을 계산한 후 종이를 찢어서 변기에 버린다. 그리고 변기의 물을 내린다. 여기까지는 평범할 수 있으며 마리온의 변화된 모습을 슬쩍 노출하는 수준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히치콕은 이전 영화들에서는 보기 어려웠던 노출을 선택한다. 변기는 현실을 재현하는 영화에서 금기의 대상이었다. 동영상으로 변기를 클로즈업한다는 것은 뒤샹의 수준을 뛰어넘는 비위생적인 것의 전면적 노출이다. 하지만 히치콕은 양변기의 구멍 속으로 물줄기가 회전하며 종이조각들이 빨려들어가는 것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어쩌면, 마리온이 찢어버린 종이는 똥덩어리의 이미지다. 돈을 계산했던 종이는 마리온의 더러운 욕망이 만들어 낸 부산물이며, 범죄의 잔해물이다. 그것을 노출한다는 것은 이어지는 샤워 살인 장면보다 훨씬 더 노골적이다.

 

ⓒ 영화 <싸이코>

변기의 클로즈업을 두고 히치콕이 뒤샹의 후계자라는 식으로 갖다붙이지는 않겠다. 대니 보일의 영화 <트레인스포팅>(1996)을 통해 똥구멍에 좌약을 넣고, 더러운 화장실로 뛰어들어간 젊은 날의 이완 맥그리거가 변기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환상(약물의 작용) 장면으로 인해 더 이상 변기의 등장이 충격적이지 않은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싸이코>의 변기 장면이 놀라운 것은 변기를 클로즈업하여 보여주든 회전하는 물줄기의 이미지를, 샤워를 하던 마리온이 난도질을 당하고 난 후의 물줄기와 그녀의 핏줄기가 하수구의 구멍으로 흘러들어갈 때의 이미지로 연결함으로써 욕망과 죽음(살해)이라는 상상계를 노골적인 영화의 현실화 묘사했다는 데 있다. 심지어 살해당한 마리온의 눈동자를 보여줄 때에도 카메라는 회전을 하며 동일하게 반복된다. 변기의 구멍, 욕실의 구멍, 마리온의 눈동자 그리고 변기 속으로 사라지는 비밀스러운 회전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현상은 미국 모더니즘 작가의 시조새 중 하나로 언급할 수 있는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1898)의 영화적 비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려나 <싸이코>의 마지막 장면에서 돈과 함께 늪에 빠트린 마리온의 자동차가 건져올려지는 모습은 중요하다. 이 영화는 변기 속으로, 늪 속으로 모든 것이 빨려들어갔지만 영화를 통해 관계성을 모두 폭로하는 이야기이다. 그 가운데 가장 비밀스럽고 외설적인 장면은 노먼과 엄마의 관계이다. 노먼의 살인이 문제가 아니라 이 영화는 노먼과 엄마 사이의 근친성을 바탕에 깔고 있다. 유심히 보면 짐작할 수 있는 모자 관계의 근친성은 이 영화에서 끝까지 건져올리기 두려워하는 '비위생성'이다. 과연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수면 밑 빙하의 어느 정도까지일까. 엄마의 목소리에 빙의된 노먼의 모습을 통해 근친성은 잠식성으로 대체되면 흐려진다. 그것은 끝까지 말하기 두려웠던 위생성은 극한이다. 

영화의 위생학은 단순히 변기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두려움과 공포와 내재된 욕망 그리고 타자를 향한 불안을 건드린다. 타자라는 말이 어렵다면 손쉽게 '타인'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백 년을 조금 넘긴 영화의 역사에서 타인이 미국 대중영화에 전면적으로 등장한 것은 1950년대다. 2차 세계대전의 동반자였던 미국과 구소련이 이념의 전쟁을 벌이면서 반공주의에 관한 열풍이 불어닥치기 시작한다 매카시즘의 열풍과 함께 색출 작업이 곳곳에서 전개되면서 타인 혹은 타자적인 것의 불안함과 불쾌함을 사회뿐만 아니라 영화가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괴물, 외계인 등은 하나의 유행이 되었다. 예를 들어, 돈 시겔의 <신체강탈자들의 침입>(1956)에서 외계인들은 식물의 포자를 이용해 인간을 복제하고 대체한다. 인간과 동일하게 생겼지만 실제로는 외계인이라는 사실은 이념을 통해 인간을 식별하는 당대의 사회적 분위기와 고스란히 맞물린다. 위생학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식물의 끈적함, 실타래와 같은 줄기, 갓 만들어진 누에고치 속 형상이다. 인간과 동일한 존재가 탄생하지만 만들어지는 과정은 불쾌하다. 이 형상은 리들리 스콧으로 이어져 '에이리언 시리즈'의 형상이 된다(혹은 조나단 글레이저의 <언더 더 스킨>(2013)까지 이어진다. 글레이저 또한 타자성에 예민한 감독이다). 에이리언은 인간을 숙주 삼아 기생한다. 에이리언이 기생하는 인간은 물론이고, 에어리언에게 동화되었거나 감염된 존재는 모두 끈적거리고 질척거린다. 이러한 태도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영화가 기예르모 델 토로의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2017)이다. 아마존에서 데려온 생명체를 두고 여전히 괴물로 취급하는 군인과 정치인들이 있지만 청소부인 주인공은 음악과 삶은 달걀을 줄 뿐만 아니라 생명체의 점액질과 끈적거림을 사랑한다. 표면적으로 비위생적이라고 여기는 것을 전복하는 단순한 상상력이 발휘되기까지 무려 60년이라는 영화사의 시간이 필요했던 셈이다. 

이처럼 1950년대 영화의 위생학은 냉전 시대 혹은 이데올로기와 긴밀하게 연결되는데, 그것은 2차 세계대전이 생물학적인 폭력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인간이라면 동물들과는 달리 깨끗하고 위생적이어야 하는데, 점액질은 너무나 비인간적인, 비위생적인 형태로 재현되기 마련이다. 타자를 불쾌하게 여기는 것은 히틀러가 선도한 인종차별주의와도 관련이 깊다. 민족적 분류를 시도하면서 히틀러는 한 민족을 수용소에 가둬버린다. 그곳은 위생성과는 거리가 멀다. 자연스럽게 유대인은 더럽고 미개한 종족으로 변모해 버린다. 어쩌면 수용소의 역사는 인간을 구별하기 위함만이 아니라 비위생적이고 비인간적인 대상으로 변모시키기 위한 장소의 기능으로 대두된다. 이러한 2차 세계대전은 인간성을 회복하려는 민주주의 국가 진영의 승리로 끝이 났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냉전의 시대가 이어지면서 비위생성을 향한 혐오는 민주주의 국가를 잠식하는 영화 이미지의 극단이 된다. 히틀러의 우생학을 대신하여 사회적 우생학이 등장한 셈이다. 

 

ⓒ 영화 <설국열차>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한 것이 있다. '영화의 위생학이 타자적인 존재들을 비위생적으로 그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계인과 괴물 같은 존재들은 오늘날까지도 영화의 주요한 캐릭터가 되어 매혹의 대상이 되었는가?'

영화의 괴물은 사라지지 않았다. 1960년대에 좀비를 비롯하여 시기마다 새로운 괴물들이 추가되고, 늘어가기만 했다. 그것은 타자성을 끌어당기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설명하는 것일까. 쉽게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타자들을 향한 매혹의 근거를 이야기 할 수 있다. 아브젝시옹(abjection)은 사전적으로 불쾌한 것을 가리키지만 인간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지독히 인간적인 것을 가리키는 크리스테바의 철학적 용어이기도 하다. 흔히 인간의 변은 더럽다고 여기는 것의 대표적인 표상이지만 그것은 인간의 대장으로부터 배설된 것이다. 그리고 변은 작물 재배나 다른 용도로 사용되기도 한다. <마션>(2015)의 식물학자가 감자를 키우기 위해 활용하는 것이다. 우리가 더럽다고 여기는 많은 것이 실제로 인간의 일부에 속한 것임을 크리스테바는 강조한다. 이러한 역설은 타자성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열어준다. 

봉준호의 <설국열차>(2013)에 등장하는 단백질 블록처럼 그것은 꼬리칸 사람들을 생존시킬 수 있었던 해결책이었지만, 근본은 곤충을 갈아 만든 불쾌한 것이었다. 생명인 동시에 불쾌한 것일 수 있는 아브젝시옹은 봉준호를 비롯한 수많은 영화들이 사랑하는 요소다. 사람들은 낯선 타자를 구별하려고 든다. 외국인, 난민, 장애가 있는 사람들, 노인들, 젊은 세대들, 남자와 여자 등. 이에 대해 여러 혐오의 언어를 구사하면서 불쾌한 것으로 구별짓고자 한다. 하지만, 틀딱, 한남, 된장녀 등의 언어를 제거하고 나면 그들은 평범한 이웃일 따름이다. <기생충>에서 지하에 숨어 있는 근세는 더럽게 등장한다. 하지만 인물들 간의 대화 속에서 기택(송강호)은 자신과 다르지 않은 존재임을 의식한다. 근세가 언급한 '대만 카스테라' 사업의 실패담을 들으며 자신의 과거를 떠올린다. 결국, 근세는 기택 자신일 수 밖에 없고, 영화의 마지막에 근세를 대신하여 지하실을 차지하는 것은 기택이다.  

하지만 영화와 예술이 이러한 아브젝시옹의 양가성을 잘 전달한고 묘사한다고 해서 곧바로 수용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더러운 것 앞에서 인간은 마치 자신의 본능인 것처럼(실제로 본능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학습된 결과물일 확률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거부의 태도를 취한다. 이러한 거부를 거둬낸다고 해도 혐오나 불쾌의 근원을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가령 <설국열차>에서 단백질 블록을 만들기 위한 수많은 벌레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살고 있었던 것인지가 궁금해 지는 순간 우리는 아브젝시옹의 기원에 대한 거대한 공백을 의식하게 된다. 

이 벌레는 포획된 것일까? 어쩌면 양육된 것은 아닐까? 만일 양육되었다면 벌레를 키우기 위해 필요한 먹이는 무엇이었을까? 기차를 탄 이들의 배변이었을까. 이러한 맥락에서 크로놀의 존재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크로놀을 두고 산업폐기물 정도로 설명하는데, 그렇다면 기관차의 엔진을 돌리면서 일어나는 연소과정으로부터 배출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단백질 블록과 크로놀은 꽤 유사한 폐기물이다. 차이가 있다면 단백질 블록은 오로지 꼬리칸 사람들을 위한 생존의 아브젝시옹이었고, 크로놀은 앞 칸의 사람들을 위한 환각제(쾌락)의 아브젝시옹었다는 것이다. 생존과 쾌을 두고 두 개의 폐기물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 아브젝시옹은 끝내 혁명을 위한 도구가 된다. 단백질 블록이 먹을 것이 없어 죽어가던 꼬리칸 사람들을 생존하게 하는 것이었고, 혁명의 출발점이 되었다면, 크로놀은 기관실을 폭파시켜 꼬리칸의 혁명을 최종적으로 완수하는 인화물질로 쓰인다. 이들의 양가성이야말로 세계를 바꿀 수 있는 진지한 근원이었던 셈이다. 

더러움을 생각하는 것은 이러한 문제들의 복잡한 위계 속에 놓여 있다. 더러운 것은 종종 쾌락적이거나 생명적인 것을 유지하는 기원이며, 그것을 통해 세계는 유지되기도 한다. 인구 통계학이 등장하는 <설국열차>에서 꼬리칸의 인구를 조절하고 있다는 비밀이 폭로되는 순간 윌포드의 입장에서는 기관실까지 전진한 꼬리칸의 사람들이 결코 더럽지만은 않다. 꼬리칸의 아이들은 노화된 기관차의 부품으로도 쓰이고, 과거의 혁명을 통해 개체수를 조절하는 역할을 자임해 왔다. 달리 말해 더러운 꼬리칸 이 없다면 기차는 유지되기 어렵다. 최소한 <설국열차>의 위생학을 질문한다는 것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자 푸코의 후기작에 등장하는 '안전, 영토, 인구'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 영화 <퍼펙트 데이즈>

3.

공중 화장실이 자주 등장하는 <퍼펙트 데이즈>에는 변기와 관련한 흥미로운 장면이 몇 있다. 하나는 공중화장실에 사람이 들어가면 투명해 보이던 화장실이 불투명하게 바뀌는 장면이다. 투명한 화장실을 밖에서 보며 당혹스러워하는 외국인에게 히라야마는 사용법을 친절하게 알려준다. 외국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실천하여 보여준다. 그것은 영화의 출발점이었던 화장실 프로젝트의 선전으로 시부야 공중 화장실의 우수성(흥미로움)을 알려주는 장면이기도 하지만, 위생학 혹은 일본이라는 측면에서 이 장면은 좀 더 깊게 읽을 수 있다. 일본 혹은 일본의 화장실은 위생적으로 보이는 투명성을 지향하지만 사용을 위해 들어가 문을 닫으면 철저히 개인을 보호한다. 공적인 깨끗함(투명성)과 사적인 보호의 재빠른 전환이야말로 일본 공중 화장실 혹은 일본성이 지향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베네딕트 앤더슨의 『국화와 칼』(1946)을 비롯한 일본의 정체성에 관한 여러 저서들과 연결하여 말할 수도 있다. 앤더슨은 천황제 국가인 일본 사회의 순종적 성격을 국화로, 이와 상반되는 폭력적 성향을 칼로 설명한다. 도식적이긴 하지만 20세기 서구 사회가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알지 못했던 일본을 받아들이기 위한 프레임으로 쓰였던 분석은 지금까지도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어쩌면 <퍼펙트 데이즈>의 공중 화장실을 통해서도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이 나뉘는 일본 사회의 기질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흔히 이야기되는 혼네(본심)과 다테마에(겉으로 드러나는 태도)도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차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아전인수가 될 때가 많다. 그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영화가 히라야마라는 인물을 통해 어떻게 이 점을 그리는가에 있다. 

매일 성실하게 자신의 근무를 실행하는 히라야마는 표면적으로 보면 투명한 사람이다. 그는 동료인 절은 세대와 달리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갇혀 있는 불투명성은 무엇일까. 당연히 주인공 히라야마의 사적인 삶 또는 집이다. 어째서 그는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가 보유하고 있는 카세트 테이프나 책을 보면 교양의 수준이 높은 인물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가 살아온 방식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확실히 미스테리하다. 가장 신비로운 것은 그의 가족인데, 과거의 어떤 일로 인해 그가 이러한 삶을 살고 있음을 짐작케 하지만 분명히 알 수는 없다. 

그의 은밀한 삶과 관련한 장면들은 집이나 집의 주변과 관련을 맺는다. 집으로 돌아온 히라야마가 머리맡의 조명을 겨둔 채 조용히 책을 보는 장면은 주변의 어두움을 통해 불투명하게 바뀌는 화장실처럼 히리아먀의 사적 공간을 차단한다. 더욱 흥미로운 장면은 단골 술집 여주인의 전남편인 토모야마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다. 그는 자신이 죽기 전에 헤어졌던 아내를 만나고 싶었다면서 자신의 시한부 인생을 고백한다. 그것은 사적인 삶의 폭로다. 하지만 이 폭로가 히라야마의 삶을 직접적으로 끌어내지는 않는다. 토모야마는 느닷없이 질문을 던진다. 두 개의 "그림자가 겹치면 더 어두워질까요?" 그러자 히라야마가 실제로 해보자고 제안을 한다. 겹쳐진 그림자를 보며 토모야마는 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히라야마는 변했다고 한다. 

두 사람의 선문답은 이 영화를 꽤나 고결하게 만든다. 하지만 선문답은 주인공의 사적인 삶을 불투명성에 가둬버린다. 두 남자의 대화는 죽음을 앞둔 남자의 상실감과 아내가 부재한 상태로 등장하는 히라야마의 삶이 공명하는 순간임에도 그 이상 나가지 않는다. 잠시 후 두 남자는 그림자밟기 놀이를 시작한다. 그 순간 진짜 두 남자는 하나가 되고, 두 남자의 인생 자체가 겹쳐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놀이 속에 히라야먀의 구체적인 삶이나 사적 기억은 등장하지 않는다. 

 

ⓒ 영화 <퍼펙트 데이즈>

화장실과 관련하여 눈에 들어오는 또 하나의 에피소드는 메모를 통해 익명의 누군가가 두고 간 XO 게임(세 가지 그림을 이으면 되기에 오목이나 사목 게임이라 부르기 보다는 삼목 게임이 적절해 보인다)에 히라야마가 동참하는 장면이다. 화장실에서 우연히 발견한 종이에는 삼목 중 하나가 표시되어 있었다. 히라야마는 표시를 한 후 종이를 제자리에 둔다. 다음번에 청소를 하러 와서 확인해 보면 다음 게임이 진행되어 있고, 히라야마 역시 게임을 이어간다. 익명의 타인을 위한 위생을 관리하는 히라야마의 소명에는 타인과 연결되고 싶다는 욕망이 들어가 있다. 그의 사적인 공간들은 불투명하지만 이러한 불투명성을 짊어진 채 누군가와 소통하고 싶다는 열망이 영화 곳곳에 등장한다. 직장 동료이지만 꽤나 불성실한 타카시에게 데이트 비용을 빌려주고, 그가 사귀려고 하는 여인 아야에게 즐겨듣는 테이프를  알려주기도 한다. 아야는 그러한 히라야마에게 감사의 뜻으로 갑작스레 뺨에 키스를 던진다. 히라야마는 휴식 중인 공원에서도 자주 마주치는 여인과 눈인사를 나눈다. 그렇지만 화장실을 청소하던 중 여성들이 등장하면 철저하게 거리를 둔 채 엄격한 거리를 유지한다. 어쩌면 이 거리감이 그가 사람들과 연결할 수 있는 유일하면서도 가장 편안한 방식일지도 모르겠다. 

영화에는 이러한 히라야마의 태도가 침범당하는 순간이 있다. 어릴 때 보았던 어린 조카(여성)가 가출을 하여 그의 집에 침범하는 순간 집 안의 곳곳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처음에 히리아먀의 집은 사적인 화장실처럼 보였지만 혈육이 등장하는 순간 책을 비롯한 여러 가지 개인성들이 드러난다. 이제 청소년이 된 조카는 그의 집 중심을 차지하고 히라야마는 짐들이 들어선 쪽방에서 잠을 청한다. 이 역전의 관계는 조카가 돌아간 후에야 비로소 안정화 된다. 그렇다면 조카의 등장은 불편하게 잠자리를 청해야 하고, 새벽에 일을 나설 때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하는 평화롭지 않은 순간이었을까. 조카와 함께 공중화장실을 청소하는 장면에서 히라야마가 행복을 느끼는 것 같은 순간들을 엿보게 된다. 나무를 찍는 히라야마를 향해 말을 걸어줄 때, 이로 인해 나무라는 책을 사서 읽게 될 때, 조카로부터 하이스미스의 소설이 좋다는 말을 듣게 되었을 때 우리는 삶의 본질이 공중화장실처럼 타인과 섞일 때, 사적인 공간과 공적인 공간이 나란히 쓰일 때 비로소 인간이라는 존재성이 확립됨을 깨닫게 된다. 

공중화장실은 언제든 타인이 사용하는 공간이다. 타카시와 같은 청소부는 사람들이 더럽게 사용하는 것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지만 더럽지 않은 것은 최소한 공중 화장실이 아닐 수 있다. 이 말의 의미는 영화 전체를 통해 여러 번 강조된다. 애초의 기획도 그러하다. 도쿄의 공중화장실을 개선하려고 했던 프로젝트의 목표도 더러움, 무서움, 냄새, 어두움으로 사용하기 꺼려했던 공중화장실을 바꾸려는 것이었고, 이 프로젝트는 5년의 기간을 통해 진행되었다. 그 시작은 2020년이었고, 화장실의 개선은 2023년에 건축물을 통해 완성되었다. 실제적 사용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화장실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 일이었고, 이를 위해 예술가들을 선택했다. 빔 벤더스가 이 프로젝트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공공성이 무너졌던 펜데믹 사태를 겪으면서였다고 한다. 펜데믹은 독일을 비롯한 유럽 곳곳에서 더 이상 공적인 공간이 가능하지 않도록 차단해 버렸다. 벤더스는 공중 화장실이 무수한 인종과 여러 사람들이 교차되는 장소임을 의식하였고, 이곳을 지탱하는 것이 하나의 세계를 유지하는 일임을 인식했다.

 

ⓒ 영화 <아사코>

하지만 <퍼펙트 데이즈>와 관련된 벤더스의 인터뷰를 읽으면서 생각해 보게 된다. 도쿄가 아니라 독일에서 이 프로젝트를 실행하거나 영화화하였다면 어떠했을까. 과연 이 영화와 같은 감각이 나올 수 있었을까. 종종 어떤 장소는 그 자체로 하나의 시대성이나 변화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일본의 영화 감독이 하마구치 류스케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 <아사코>(2018)에서 료헤이의 집으로 돌아온 아사코가 집 앞에 흐르는 강을 연인과 함께 바라보는 마지막 장면이 등장한다. 료헤이는 빗물로 인해 불어난 강물을 보여 더렵다고 말하지만 아사코는 "그래도 아름답다"고 말한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바쿠와 헤어진 후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해 새롭게 생겨난 센다이 방파제에 올라 파도를 응시하는 아사코의 모습과 호응한다. 과거를 벗어나지 못했던 아사코는 비로소 타자(자연)를 응시하기 시작한다. 

그녀가 료헤이의 집으로 돌아와 쫓겨난 후 잠시 옛친구의 집을 찾았을 때 듣게 되는 이야기는 친구의 어머니가 과거에 들려주었던 사랑의 이야기였다. 진실은 뒤늦게 등장한다. 어머니는 말한다. 여러 번 말했던 한 남자와의 뜨거운 사랑 이야기가 실은 죽은 남편의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남자와의 이야기였다는 것을. 현실의 표면 밑에는 이면이 있고, 이면은 통념적으로 짐작하던 깨끗한 것이 아니라 타락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친구의 어머니를 통해 전달되는 이야기의 핵심은 더럽고 깨끗함의 식별이 아니라 현실은 타자(사물, 이야기)로부터 기인하는 더러움과 깨끗함을 모두 품고 있다는 사실이다. 너무나 위생적인 것도, 너무나 비위생적이기만 한 것도 현실이 아니다. 현실은 적당히 더럽고, 유지를 하기 위해서는 꽤나 열심히 청소를 해야만 한다. <아사코>가 포스트 동일본 대지진 영화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사코와 료헤이가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난 날이었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던 아사코는 센다이 방파제 올라서 뒤늦게 깨닫는다. 세상이 바뀌었음을, 과거와 달라졌음을, 지금의 파도는 과거의 파도와 다른 소리를 내고 있음을. 위생학을 앞세우는 많은 영화들은 동일성과 자기 관리의 측면에서 더러운 것을 정화하려고 하는 태도를 보여주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은 더러움을 승인하는 태도다. 그것은 청소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일 수 있다. 

 

4.

개인은 얼마든지 위생적인 환경을 꾸릴 수 있다. 우리 시대에 위생학이 문제가 되는 것은 공공성 혹은 공동체 내부에서다. <새벽의 모든>에서 두 주인공이 처한 증세로 인해 일을 하게 되는 곳은 구리타 과학이라는 작은 회사다. '과학'이라는 거창한 이름이 들어가 있지만 실상은 과학용 교보재를 제작하는 문구류 회사에 가깝다. 이 직장에는 젊은 세대가 없다. 후지사와와 아마조에가 일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젊은 세대가 들어왔다며 호의적인 반응을 보낸다. 전직장에서 PMS 증세로 인해 사표를 낸 후지사와는 어떻게든 적응해 보려고 애쓰지만, 아마조에는 간식을 나눠 먹으며 소일하고, 업무의 속도가 매우 느린 이곳의 분위기를 싫어한다. 그는 전직장 상사에게 자주 전화를 건다. 여러 안부를 묻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전직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전직장 상사의 태도인데 그는 시간이 흐르면 가능할 것이라는 희망을 던진다. 영화의 말미에 아마조에가 구리타 과학이라는 직장과 사람들을 마음에 들어하기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간식을 사오고 변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과거 상사에게 전직장으로 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난  인상에 남는 것은 하마구치 류스케의 <열정>(2008)에도 나온 바 있는 전직장 상사의 한결같은 태도였다. 그는 결코 아마조에에게 실망스러운 답을 하지 않는다(어쩌면 그도 이미 알고 있지 않았을까. 아마조에와 같은 공황장애 인물이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을). 과연 그것은 얼마나 가능한 현실일까. 

이 영화의 기성세대는 상적이다. 두 젊은이의 질환에 대해 어떠한 이의도 제기하지 않는 구리타 과학의 직장인들은 오기가미 나오코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공동체의 단면처럼 보인다. 물론, 나오코의 영화 속 공동체는 도시로부터 떨어져 있고, '카메모 식당'이든 <안경>(2007)의 펜션이든 주요 등장인물은 모두  소외된 사람들이다. 하지만 구리타 과학의 세대들은 도시인들이며 현실과 떨어져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그들이 보여주는 젊은 세대를 향한 애정은 꽤나 이상적이다. 특히 회사의 사장이 아마조에와 일을 하던 중 자신의 아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면에서 - 죽은 아들이 살아있다면 아마조에의 나이라고 언급하는 장면에서 - 명확히 드러난다. 구리타 과학은 영화가 상상하는 '신뢰의 공동체'에 가깝다.

 

ⓒ 영화 <새벽의 모든>

이상화된 모습은 후지사와와 아마조에의 관계 속에서도 드러난다. 영화 후반 아마조에의 연인은 런던으로 간다며 자연스럽게 이별을 통보한다. 처음에는 서로를 오해했지만 어느새 가까워지고, 우주에 관한 발표를 함께 하게 된 후지사아와 아마조에가 보다 친밀해질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지만 영화는 철저하게 두 사람의 사적인 관계에 거리를 둔다. 이 거리감은 회사의 기성세대들처럼 개인의 선택이나 자유에 간섭하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여준다(그것은 펜디믹을 통해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기도 하다). 상대적으로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에서 주인공은 서점에서 함께 일하는 사치코와 사귄다. 사치코는 서점의 점장과 불륜 관계였고, 주인공은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그녀를 수용한다. 그리고 영화의 말미에 이르면 사치코는 나의 절친이자 함께 자취를 하던 시즈오와 사귀기로 했다며 떠나기에 이른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가 지독히 얽혀있는 관계들을 폭로하면서(연인들끼리의 관계나 직장에서 관계뿐만 아니라 성적인 관계와 가족 관계에서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에 있어 선택하지 않았던 주인공의 결정적 선택을 지켜보게 되는 영화라면, <새벽의 모든>에서는 정결함을 유지하며 끝내 뒤엉키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은 달라진 세대를 그리고자 했던 미야케 쇼의 선택일까.

그렇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도 <아사코> 이후 달라졌음을 보여준다. <드라이브 마이 카>(2021)의 주인공 가후쿠는 아내의 외도를 목격한 후 끝까지 거리를 두며, 결코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바냐 아저씨를 통해 토로하는 모습은 현실과 거리를 두고 대화 하려는 '의지와 표상'으로 채워져 있다. 1부에 해당하는 아내의 이야기에서 가장 큰 충격은 아내의 외도가 아니었는가.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이 충격에 대한 직접적인 해답주지는 않는다. 모든 것은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간접적인 실마리로 풀어질 따름이다.  아내와 외도를 벌인 바냐 아저씨 역의 배우가 폭력을 저지르는 바람에 경찰에 잡혀가버리거나 가후쿠가 그 역할을 대신하거나 공연을 중단해야 하는 기로에 놓인다. 이러한 가후쿠가 정말로 아내를 용서하거나 이해할 수 있을까. 세 시간에 달하는 영화의 길이는 이해를 구하기 위해 연극 무대와 연극의 연습 과정 그리고 언어에 있어서도 외국어, 수화 등을 동원하면서 소통의 어려움을 전제로 한 뒤 그것을 끝내 무대 위에 올리는(소통에 성공한 듯한 제스츄어) 모습으로 귀결된다.

여기에 주요하게 덧붙여지는 것이 가족(엄마)으로부터 상처를 입은 운전기사 유나와 공유(연대)하는 것이다. 자신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가후쿠는 자신의 집이나 아내의 무덤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운전사와 함께 차를 끌고 훗카이도로 향한다. 거기에는 운전사의 무너진 집 터가 여전히 남아 있다. 이와이 순지의 <러브레터>와 같은 훗카이도의 설원을 향한 제의의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이 연대는 가후쿠의 근원적 문제를 비켜가는 위생학적 전략으로도 보인다. 그는 철저하게 타인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해소해 버린다. 질문은 이어진다. 그것은 정말 타인을 수용한 것일까. 어쩌면 타인과의 연대, 감염과 접촉이라는 것을 신비화 하는 전략은 아닌가. 청결함의 강조가 문제가 되는 것은 통상적으로 이 요청이 타인에게 청결함을 요구하면서 폭력으로 번지기 때문이다. 위생의 문제가 공종 장소나 타인에게 요구할 때 서로 다른 태도와 이해의 방식에 스파크가 일어난다. 그런데 가후쿠는 끝까지 이 문제를 자신의 위생함 속에 가둬놓는다. <퍼펙트 데이즈>의 히라야마도 마찬가지다. 그는 타인에게 청결함을 요구하지 않은 채 자신만의 화장실에서 오늘도 위생성을 드러낸다. 그것은 진정한 타인과의 접촉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일까. 

 

5.

신비화는 위생성과 함께 대두된다. <퍼펙트 데이즈>의 히라야마가 보여주는 젊은 세대를 향한 조력이나 도를 닦듯이 화장실을 청소하는 장면들은 현실적이기보다는 이상화된 기성세대의 모습이다. <새벽의 모든>에 등장하는 구리타 과학의 직장인들 역시 절은 세대의 정신 공황에 대한 지켜봄으로 일관한다. 이러한 이상화는 펜데믹 이후 오늘날의 공동체가 상실한 모습이기에 공교롭게도 두 영화에서 강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비화가 강조되면 타인과 주인공을 맺는 관계는 손쉽게 안전성이라는 테두리에 갇힌다. 하지만 위생학이 끌어올리는 안전성의 문제는 단순히 깨끗함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통치성이라고 하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전반을 아우른다. 쉽게 말하자면 안전성의 강조, 위생학의 강조는 순응주의를 불러일으킨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에 따르면 위생과 관련한 근대의학을 발전시킨 것은 서구의 절대 왕정이 무너지면서 통치 방식이 변화하였고, 근대 국가의 탄생과 함께 인구의 관리를 위한 여러 장치들의 필요성 속에서 위생의 문제가 국가를 통치하는 문제로 제안된다. 그것은 가장 폭력적인 사례는 전체주의의 등장과 히틀러의 세력화다.

영화의 이미지나 이야기를 통해 등장하는 위생학적 장치는 '안전'에 대한 강조다. 오늘날 연애를 하는 비율이 줄어든 것도 경제성의 문제도 있지만 나의 사랑이 당신에게 안전함을 증명해야 하는 시기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가족을 형성하기 위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력을 포함한 안전함이다. 그 가운데, 영화는 이러한 타자들에 안전함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여주는가. 더군다나 코로나 사태를 직면한 이후 영화는 불안한 이웃에 대한 어떤 위생학을 등장시켜야 하는가. 무조건적으로 바라보고 기다리는 기성 세대의 모습이 해답이 될 수 있는가? 과연 어떤 것이 적절하고 적절한 타인의 개입인가. 그것은 위생적인가 아니면 안전한 것인가.

 

ⓒ 영화 <새벽의 모든>
ⓒ 영화 <퍼펙트 데이즈>

기본적으로 <퍼펙트 데이즈>나 <새벽의 모든>은 함께 살아가는 것, 타인과 공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퍼펙트 데이즈>에는 과거에는 존재했던 화장실의 클로즈업이 없다. <새벽의 모든>에는 젊은 세대들을 향해 꼰대질 하는 기성세대가 없다. 오히려 이 점은 불안하다. 그것은 현실의 모든 것이 아니라 '반쪽의 나날들'에 불과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청소를 해야 하는 것은, 세차를 해야 하는 것은 더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 더러움에 대해 영화가 선택한 청소는 얼마나 클린할 수 있겠는가. <퍼펙트 데이즈>에 가려진 히라야마의 불투명성은 그가 반복하는 청소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새벽의 모든>이 그려내는 기성 세대는 꽤 가족적인 기업을 만들 수 있지만 자본주의의 냉혹함에서 살아남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냉전의 시대는 지나갔다고 하지만(여전히 일부에서는 기승을 부리지만) 새로운 클린함을 요구하는 PC주의는 영화의 위생학을 근거로 영화를 자체 검열하기에 이른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더러움을 응시할 필요가 있다. 시부야의 공중화장실은 히라야마가 함께 일하는 다카시처럼 제멋대로인 것 이상으로 더러운 똥으로 가득찰 수 있고, 삼목게임 종이를 내밀며 대화를 청하는 것 이상으로 침묵과 폭력이 일어나는 장소다. 이러한 것들이 제거된 것은 '완전한 날'이 아니라 이상한 날이다. 우리는 새벽의 모든 기운을 얻을 수 있지만 황혼의 모든 어둠을 응시해야 하는 날도 있다. 물론 이들 영화가 이 지점들을 외면했다고는 결코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영화라는 장치가 위생학을 통해 청소하는 순간을 강조하는 순간 끝내 지워지지 않는 영화의 얼룩이 있음을, 락스의 향기 속에 스며있는 불쾌한 기운이 있음을 더욱 응시할 필요가 있다.  

영화를 보고 난 후에도 여전히 머리 속에는 얼룩이 남는다. 히라야마가 과거에 무슨 상처를 입었는지, 아마조에는 계속해서 구리타 과학을 잘 다니고 있을지,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간 후지사와의 선택은 얼마 행복한 선택인가를 돌아보게 된다. 이들을 고결하게 보여주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들의 청소에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지점들이 현실 속에 남아있음을 응시한다. 청소된 자리에는 결코 청소될 수 없는, 결코 깨끗해 질 수 없는 현실의 저항(얼룩)이 있다. 

최근에 이를 보여주었던 영화가 <존 오브 인터레스트>(2023)다. 아우슈비츠의 수용소에서 현재의 박물관으로 바뀌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주인공이자 아우슈비츠의 관리자였던 독일 장교 루돌프 회스가 구토를 한 직후의 과저 장면과 연결되어 등장한다. 이 교차 편집은 사유를 던져준다. 이 박물관은 역사의, 진실의 토사물 위에 세워진 것이다. 청소부들이 깨끗하게 관리를 하고, 수용자들의 신발이 유리 상자 안에 클린하게 쌓여 있지만 이곳은 결단코 위생적인 장소가 아니다. 이 영화는 끝까지 토사물(죽음, 가스, 시체, 연기 등)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찾는 다크 투어라는 이름의 아우슈비츠 박물관을 신기(비)하게 볼 것이 아니라 그 밑에 깔려 있는 시체들의 신발과 루돌프의 구토를 기억하라고 말한다. 현실(박물관)은 토사물 위해 청소된 위생공간이다. 우리가 응시해야 하는 것은 깨끗한 화장실만이 아니라 더러움이 배설될 수 밖에 없는 화장실의 본질이다. 그럴 때 우리는 아사코처럼 더러워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인식의 전환을 맞이할지 모른다. 최소한 살아있는 영화들은 이 잔여물 위에 세워질 필요가 있다. 

[글 이상용 영화평론가, poema@ccoart.com]

이상용
이상용
 1997년 『씨네21』 2회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영화 비평을 시작했다. 부산국제영화제와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를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 『봉준호의 영화 언어』, 『영화가 허락한 모든 것』, 공저로 『씨네쌍떼』 『30금 쌍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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