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몹시 난폭하고 제멋대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 이유를 '신'한테서 찾았다. 신들의 자손이자 피조물로 일컬어진 인간이 변덕스럽고 우발적이기에, 원형인 신 또한 '인간적'일 것이라 판단했고, 그 신들이 지배하는 세상이 혼돈인 건 당연한 이치였다. 이후 인본주의의 도래로 신들은 권좌에서 차츰 물러서게 되었지만, 인간이 아직까지도 신들의 세계에 갇혀있다고 보는 이들이 있다. 20세기 그리스 영화를 대표하는 '코스타 가브라스'와 '테오 앙겔로풀로스'부터, 현대 그리스 영화 사조인 '이상한 물결'에 속하는 '요르고스 란티모스', '아디너 레이첼 창가리', '알렉산드로스 아브라나스' 등은 여전히 가련한 인간들을 영화로써 고찰한다.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은 민주주의 체제에서 자유롭게 사고하고, 주체적으로 제 삶을 결정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신화적 세계관의 현대적 풀이인 '구조주의'에 의한다면 인간의 삶은 그리 무제한적으로 열려있지 않다. 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행위와 선택, 심지어 사고 그 모든 것을 구성원을 에워싼 구조가 좁게는 제한하고 넓게는 결정한다. '코스타 가브라스'는 바로 그 구조주의의 피해자로서 자신의 사적 경험을 영화에 투영해왔다. 사회주의자였던 가브라스의 아버지가 그리스 왕정에 의해 축출되어 가족 모두가 프랑스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던 유년기를 말이다. 이에 영화감독으로서 가브라스는 그리스를 직접 비추진 못했지만 프랑스, 알제리, 미국 등지에서 촬영하더라도, 그 이면에 그리스의 정치적 상황을 숨겨놓았고, 이후 2019년에는 비로소 그리스로 되돌아가 <어른의 부재>(2019)를 연출하였다.
가브라스의 영화는 표면상으론 실화에 얽매여있다. <Z>(1969)는 그리스 군사 쿠데타를 앞둔 혼란한 정국, <어른의 부재>에선 그리스 경제 위기로 인해 선출된 청년 정치인들의 수난을 묘사한다. 겉으로는 두 영화는 소재도 배경도 판이하지만, 그 배후엔 그리스인들과 그리스 구조 모두를 지배하는 그리스 신화의 영향력이 공통적으로 꿈틀거린다. 바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부친 살해 모티브가 말이다. 가브라스의 작품에서 '빌런'은 대개 부와 명예를 모두 갖춘, 나이가 지긋이 든 중년·노년의 파시스트들로, 이들이 바로 구조를 이루는 신이다. 이들과 직면한 아들들에게 그리스 신화는 늘 이렇게 전해왔다, "구조가 갑갑하지 않느냐, 그렇다면 그 구조를 지배하는 아버지를 죽여라!"라고 말이다. 그래서 신들 조차도 우라노스-크로노스-제우스로 내려오는 부친 살해의 비극을 피해갈 수 없었고, 인간 역시 페르세우스 및 오이디푸스 등에게 부친 살해가 예언으로 점지되었다. 가브라스의 작품에서 그 아들들은 평범한 시민이자 인간, 청년 등으로 바뀐다. 현대를 살아가는 아들들이 아버지들을 죽이고 찾아오려는 것은 신화의 종말이자 인간의 권리, 곧 민주주의다.
하지만 늙은 아버지들은 권력을 놓을 생각이 없다. 그래서 부자간 치열한 반목이 오가는 현장에서 또 다른 신화적 모티브가 끼어든다. <Z> 속 '핍박받는 공산당 지도자'와 '공정한 판사' 등은 권력자임과 동시에 아들들에게 권력을 나눠주려는 인간 친화적인 신 '프로메테우스'를 의미한다. 이들은 정의를 바로잡고 '병원'을 늘리겠다고 주장하며, 그리스 시민들에게 필요한 '불'을 공유하려 한다. 또 이들은 미국의 비대한 군축에 반대하는데, 그것은 곧 신들에게 바쳐지는 과도한 '제물'이다. 그 제물을 향해 혀를 날름거리는 신들은 당연히 그 몫을 나누려는 프로메테우스를 처단한다. 프로메테우스들의 조용한 혁명이 실패한 이후, 그리스는 신들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는 군사정권이 도래했다.
그 늙은 신들이 2010년대까지 권좌에서 떠날 생각을 않고 그리스나 EU를 주름잡고 있으며, 이들의 부조리와 무능력에 염증이 난 청년들이 전복을 꿈꾼다. 그것이 <어른의 부재>의 배경이다. 시민들이 투표로써 젊은이의 호기로움에 손을 들어주자 청년 정치인들은 단번에 경험해보지 못한 높은 자리를 꿰찬다. 거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능력과 경험은 아직 인간 수준에 머물러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에 버금가는 위상에 다다르자 이들은 오만방자해진다. 여신 레토를 비웃은 니오베처럼, 페가수스를 타고 올림포스를 넘보던 벨레로폰처럼, 베 짜기로 신들을 능멸한 아라크네처럼 이들 또한 주제를 모르는 거만한 청년 정치인들은 교활한 노인들에게 농락당하며 철저하게 실각한다. 정리하자면, 가브라스는 그리스 정치라는 구조에 더해, 그리스의 역사 전체를 오랜 시간 관통해온 그리스 신화의 힘을 고찰한다. 안타깝게도 그리스 신화가 경고하던 내용만이 반복되고, 이로써 신들의 폭정만 연이어지는 참담한 형국이다.
그리스 신화와 구조주의를 인용하는 또 다른 감독은 '테오 앙겔로풀로스'다. 그는 <율리시스의 시선>(1995)에서 『오딧세이아』를, <키테라 섬으로의 여행>(1984)에서 아프로디테의 섬을 언급하며 그리스 신화를 직접 차용하기도 하고, 간접적으로는 그리스 신화의 '절대성'과 '비극성'을 영화 문법에 반영한다. 신화의 절대성은 앙겔로풀로스의 '롱숏'에서 찾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롱숏은 열려 있다. 롱숏에 비해 닫혀 있는 형식이 '클로즈업'이다. 물론 클로즈업으로 포착한 단 하나의 것이 무한한 여지를 지닐 수도 있지만, 롱숏에 비하면 포착되는 것이 단 하나이기 때문에 비교적 제한적이다. 이와 달리 롱숏은 멀리서 거대한 자연, 세계, 우주를 굽어보기에 숏 자체가 함의하는 것도, 감상자가 취사선택할 수 있는 것도 무궁무진하다. 이 롱숏 가운데에 똑 떨어진 모래 알갱이처럼 작디작은 인간은, 그 무수한 갈림길에서 어떤 선택을 내릴지, 이후 숏이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하기 어렵다. 그런데 앙겔로풀로스의 롱숏은 열려 있다는 인상보다는 닫혀 있다거나 육중한 느낌을 준다. 그 이유는 후술할 비극적 상황에 처한 인물들에게 롱숏은 그 숙명의 '무게'이기 때문이다. 롱숏을 가득 채우는 것은 '안개'와도 같은 모호하고 불안한 것이어서 인간은 미아가 되고, 때로는 거대한 '강물'이어서 두 연인을 갈라놓는다. 그것이 곧 신화 속,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거룩한 신의 변덕이자 예언으로, 인간은 거대한 세계에 가로막혀 늘 좌절한다.
인물들을 좌절과 죽음으로 이끄는 롱숏에서 그리스 신화의 비극적 특성이 발견된다. 그리스 신화 속 영웅들의 말로가 좋은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 이유는 앞서 언급한 오만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해서 그리스 신화 세계관은 "인간이고자 하면 죽고, 인간일 것을 포기한다면 살 수 있다"라고, 인간성·영웅심·고결한 의지를 지킬 기회를 극단적으로 주기 때문이다. 그 딜레마는 딸의 목숨과 군사들의 운명 중 단 하나만 선택할 수 있었던 아가멤논, 인간이기 위해서 근친상간의 벌을 자살로 씻을 수밖에 없었던 이오카스테, 자신의 목숨을 바쳐 형제의 장례를 치러준 안티고네 등이 겪었다. 즉 그리스 비극은 단순히 인간이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환기하기에 슬픈 것이 아니라, 진정 고결한 인간이라면 때론 죽음으로써 인간성을 지켜야 한다고 당부하기에 슬픈 것이다. 인간성은 내 숨결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목숨을 포기해서라도 지켜야 하는 사명이자 의무인 것이다. 그리고 앙겔로풀로스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것이 죽음으로써 사수하는 인간성이다. 그의 작품 속에 떨어진 인간 역시 늘 위태롭지만 아름다운 길을 떠난다. 그 목적지에 다가서면 다가설수록 서늘한 칼날이 목을 겨누어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인간이기에 고결하고도 숭고한 순례를 멈추지 않는다. 끝끝내 죽을 수밖에 없었던 그들에게 앙겔로풀로스는 그리스 신화 속 고결한 영웅들의 영혼이 잠든 '엘리시온'을 피날레에 선사한다. 목숨보다 인간다움을 중시하는 이들에게 진정한 영원이 열려 있는 것이다.
이 두 선배들의 그늘 아래서, 21세기 그리스 시네아스트들은 '이상한 물결'이라는 사조를 발전시켜간다. 현대 그리스 영화는 사조명이 선수 쳐서 경고하듯 아주 기괴하다. 물결의 토대를 닦은 란티모스의 <송곳니>(2009), 창가리의 <아텐버그>(2010)를 공통적으로 관통하는 기괴한 몸동작과 춤사위, 노골적인 성애나 극단적인 폭력을 적나라하게 포착하는 카메라를 보자면 이들을 왜 '이상하다'라고 지칭하는지 단번에 느낄 수 있다.
그들의 괴이한 연출은 배경에 당위성을 둔다. <송곳니>와 <은밀한 가족>(2013)의 '집',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2018)에서는 일반적인 집보다 조금 더 넓은 '궁전', <더 랍스터>(2015)의 '호텔' 및 <아텐버그>의 '병원' 등 이상한 물결의 공간 배경은 모두 폐쇄적이다. <슈발리에>(2015)와 <가여운 것들>(2023) 속 '망망대해에 떠 있는 크루즈'도 빼놓을 수 없다. 나갈 순 있어도 그 바깥을 감히 인간이 감당할 순 없다. 이들이 젠더를 부각할 때 '여성', 구조주의나 신화성을 강조할 때 '인간'은 공간 바깥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없다. 내·외부를 자유로이 오갈 수 있는 존재는 젠더로서 남성, 구조적 관점에서는 초월적인 절대자뿐이다. 나약한 피지배자들은 초자연적인 힘을 지닌 신들의 지배에 맹목적으로 순응할 수밖에 없어 폐쇄적인 세계에 수감된다. 이 좁다란 공간을 지배하는 신들의 법령은 매우 뜬금없거나 기괴하다. <슈발리에>에서 대뜸 스피커 너머로 들려오는 지시는 남자들의 경쟁을 부추기고, <킬링 디어>(2017)에서 아버지는 예언에 따라 식구 중 한 명을 죽여야 하며, <송곳니>에서 가장은 자녀들에게 이치에 어긋난 지식을 가르친다. 거대한 권위 밑에선 조금도 의심해볼 수 없는 부조리함이 몸과 정신, 모두를 첨예하게 지배하며 이상한 이미지들을 생성한다. 하지만 그 이상함은 신들의 세계 내부에서는 매우 당연하고도 정상적인 것이다. 그렇기에 이 기괴한 주장이 통용되지 않는 외부 감상자의 시선만이 부조리를 감지한다. 하지만 감상자 또한 특정 구조에 몸담고 있는 실정이니 간담이 서늘해진다. 우리의 행동 역시 구조 바깥의 시선에서 객관적으로 관찰한다면 오류투성이이지 않을까.
하지만 여러 이유로 인간은 신들의 세계를 떠날 수 없다. 보통 여성으로 대변되는 피지배자들은 두 형태로 양분된다. 한쪽에서는 <킬링 디어>에서처럼 의심하고 이후 <송곳니>나 <알프스>(2011)처럼 구조 바깥을 매개하며 가장의 왕국에 균열을 낸다. 그들은 구조 바깥의 진짜 진리를 조금이나마 들여온다. 다른 한쪽의 여성들은 탈출하려는 의지가 전무하다. 아브라나스의 <은밀한 가족>에서 여성들은 가부장제의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내부고발자 여성을 축출하며 훼손된 가부장제를 보완 및 수리하는 노역자로 그려진다. <아텐버그>의 수업도 처음에는 전복적이었으나, 끝으로 갈수록 새로운 신을 떠받들 수 있는 '신부 수업'임이 탄로 난다. 그 이유는 전자의 여성들이 끝끝내 의심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거나, 그 일탈이 가장에게 진압당하는 등 인간의 나약함에서 비롯된다. <알프스>에서 다시금 좁디좁은 자택으로 돌아가려는 주인공, <더 랍스터>에서 구조 없이 독립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사람들처럼 인류는 신 없이 사유하고 실천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구조 바깥의 망망대해는 그들에게 너무나 가혹하다.
란티모스는 최근 <가여운 것들>에서 절대자에게 대항할 수 있는 강인한 육체, 신 없이 스스로의 욕구만을 따르는 주체적인 프랑켄슈타인을 그려보았다. 오직 그런 존재만이 구조 바깥으로 탈출하고 새로운 구조를 개척하며 스스로의 지배자가 될 수 있다고 말이다. 이런 허무맹랑한 사례를 제외하고 살펴보자면, 가브라스, 앙겔로풀로스, 그리고 이상한 물결에 속한 젊은이들 모두 다 유사한 한숨을 내쉬고 있는 셈이다. 촬영된 국가가 다르고, 사용하는 언어도 다르며, 영상 문법도 상이하지만 이들은 공통적으로 가부장제의 신화와 독재의 그늘을 아직까지 타파하지 못한, 여전히 그들의 손에 놀아나는 나약한 인류를 비관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운명에 마냥 울적해할 필요는 없다. 그리스 영화는 예나 지금이나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늘 현실을 반영하는 카메라의 역할에 충실해왔으므로, 만약 인간이 노예 상태를 자각하여 신들에게 반란을 꾀할 수 있다면, 그땐 신화가 아니라 비로소 인간이 주인이 된 이야기가 스크린에 펼쳐질 것이다.
[글 박정수 영화평론가, green1022@ccoar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