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여흥 민씨 어머니의 딸, 민세이 그리고 우츠미 세이코
[Interview] 여흥 민씨 어머니의 딸, 민세이 그리고 우츠미 세이코
  • 홍상현
  • 승인 2024.06.24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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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국제영화제 초청작 <렌탈 파파> 주연 우츠미 세이코 배우 인터뷰
「렌탈 파파」가 첫 주연영화였던 우츠미 세이코 배우의 한국이름은 민세이, 한국인 어머니와 일본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 Ohta Production
「렌탈 파파」가 첫 주연영화였던 우츠미 세이코 배우의 한국이름은 민세이, 한국인 어머니와 일본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 Ohta Production

아틀리에.

천정에서 내려다보는 카메라의 시선. 앞에 선 여배우가 모델이 앉을 소파를 정리하다 주위를 둘러본다. 25초 길이의 컷. 편안하고 안정적인 느낌이다. 다음 컷으로 넘어오면 카메라가 뒤로 물러나 연극의 무대처럼 보이는 아틀리에의 그녀를 찍고 있고, 다시 문이 열리자 사내가 들어오면서 “렌탈 아버지”라는 업체에서 왔노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아주 잠깐 미세한 긴장감이 느껴지지만 이내 균형감을 유지하는 여배우. 사내를 소파에 앉힌다. 롱테이크. 포즈를 잡게 하고 몇 발짝 뒤로 가 구도를 살핀다. 사내가 '모자를 벗어도 되느냐'고 묻자 흔쾌히 허락하고 캔버스 앞에 앉았다. 1분 2초 동안 카메라는 오른쪽으로 한번 을 했을 뿐이다.

“저를 계속 보고 계세요.”

여배우가 스케치를 시작한다. 그림을 그리면서 사내 쪽을 바라보는 그녀. 어느새 어깨 뒤로 넘어간 카메라가 두 사람 사이를 오간다.

“말씀하셔도 돼요.”

“모델이란 거... 힘드네요. 아무 말도 안하고 가만히 있는 게...”

어색한 침묵이 부담스러웠을까. 여배우가 살짝 느슨해진 톤으로 대사를 건네자마자 쑥스러운 웃음을 머금고 말을 받는 사내. 뜻밖의 반전이 일어난 건 그 직후다. 그녀가 자신과 그의 위치를 바꿔보자고 제안한 것. 자신을 딸이라 생각하고 그림을 그려보란다. 대화가 이어질수록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타이틀 롤인 나카무라와 리카의 첫 만남 장면, 두 배우는 실제로도 이 촬영이 이루어지기 직전까지 만난 적이 없었다. ⓒ 2023 Gap Father Film Partners
타이틀 롤인 나카무라와 리카의 첫 만남 장면, 두 배우는 실제로도 이 촬영이 이루어지기 직전까지 만난 적이 없었다. ⓒ 2023 Gap Father Film Partners

총 10분 35초 분량의 이 신을 몇 번이고 돌려보았다. 전주국제영화제 월드시네마 부문 초청작 <렌탈 파파>에서 주인공 리카(우츠미 세이코 분)와 상대역인 아버지 대행업체 직원 나카무라(사이가 마사카즈 분)의 첫 대면. 자신의 작품에 전문연기자를 캐스팅하길 꺼렸던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 같기도 하고, 같은 선상에서 기성배우와 아마추어배우의 구분을 허물어뜨린 스와 노부히로와 통하는 느낌도 있다. 하지만 필자가 이 신에 빠져들었던 이유는 따로 있다. 프레임을 감싸고 있는 공기가 '사실적'이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 선입견일 뿐이라고 공격당할지 모른다는 우려를 잠시 접어두고 힘을 실어 말해보면 ― 비전문연기자 특유의 거친 느낌이 없었기 때문이다. 탄탄한 기본기가 배어나오지만 매너리즘 내지는 전형성은 느껴지지 않는 신선함이 깊은 여운을 남겼다.

신의 내용인 즉, 아버지 대행업체에 미대에 다니는 주인공이 서비스를 의뢰한 것인데 요구사항이 범상치 않다. '완전한 생물학적 타인'에게 초상화에 등장할 '친아버지' 역할을 부탁했다.

놀라운 점은 이 신이 실제로도 두 배우의 첫 대면을 담았다는 사실이다. 사전에 각각 시나리오를 전달받았지만 상대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다. 서로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없이 그저 주어진 배역의 캐릭터로만 파악하고 있는 상태. 그나마 촬영 분량의 일정부분은 애드리브로 채우고 감독이 사인을 주면 다시 대본으로 돌아가는 디렉션이 진행되었다. 필자는 특히 데뷔 22년차 베테랑인 사이가 배우와 완벽한 케미스트리를 보여주는, 채 스무 살도 안 돼 보이는, 그러나 주연 작품을 보았던 기억은 없는 배우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그리고 일상에서는 (끝내 극복하지만) 보통사람과 다른 그늘을 안고 살아가는 <렌탈 파파>의 리카와 달리 3개 국어(일본어, 한국어,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감독과 둘이서 전주국제영화제에 와 일주일이라는 긴 기간 동안 한국 관객과 함께하는 적극성을 어필했던 그녀를 '인터뷰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유창한 한국어와 일본어를 동시에 사용하며 대답했다. ※ 주)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호나카 료스케 감독(왼쪽)과 함께. ⓒ 2023 Gap Father Film Partners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호나카 료스케 감독(왼쪽)과 함께. ⓒ 2023 Gap Father Film Partners

홍상현

영화배우 데뷔 3년 만에 주연배우로 캐스팅되고 그 작품이 국제영화제에 초청되어 높이 평가받았습니다. 감회가 깊으실 것은데요.

우츠미 세이코

(한국어) 이렇게 훌륭한 큰 무대인 전주국제영화제에 참가 할 수 있게 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귀중한 경험이 되었어요. 상상조차 못했던 따뜻한 배려와 친절, 그리고 사랑을 듬뿍 받았습니다.

 

홍상현

전주국제영화제는 그간 스와 노부히로나 아오야마 신지, 구로사와 기요시, 사카모토 준지, 미시마 유키코 감독 등 일본영화계의 거장들이 함께해 온 영화제이기도 한데요.

우츠미 세이코

거리 전체가 영화제 분위기애 술렁이는 걸 본 건 배우 데뷔 이후 처음 아닐까 싶어요. '영화'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북적이며 활기가 넘쳐난다는 것 자체가 무척 신선했습니다.

다양한 나라의 문화와 그와 관련한 주제들을 다루는 독립예술영화에 둘러싸여, '오늘은 무슨 영화를 보지?'하며 행복한 고민을 하던 일도 그렇지만, 상영이 끝난 뒤에도 질의응답이 이어지면서 창작자들과 관객들이 작품의 제재는 물론 각각의 장면이 갖는 의미까지 뜨겁게 토론하는 광경을 지켜볼 수 있었던 건 배우로서 더할 나위 없는 값진 경험이었어요. 오래토록 잊지 못할 추억을 일일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이 만들 수 있었습니다.

 

홍상현

평소 한국영화에 대한 애정이 특별하시다고 들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우츠미 세이코

(한국어) 저의 피 속에는 진한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한국인이세요. 한국영화와 한국에 관한 모든 것을 사랑하는 건, 딱히 이유를 들 필요조차 없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냥 엄연한 사실이니까요. 당연히 제 조국을 사랑하는 것일 뿐입니다.

 

홍상현

대단하시네요. (웃음) 어머님께 정확한 한국어 구사능력까지 너무 잘 배우신 것 같아서 보기 좋습니다. 혹시 한국영화 중에 좋아하시는 작품이나 감독, 배우 등이 있다면 소개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우츠미 세이코

저한테는 대단히 어려운 질문이네요. 꽤 오래전부터 한국영화를 꼬박꼬박 챙겨 보고 있어서 좋아하는 작품도, 배우도 정말 많거든요. (웃음) 그래도 실문을 해주셨으니 작품을 한 편만 꼽아보자면 일본에서도 개봉했던 <아저씨>(2010)가 있고요. 연기자들 중에서는 김고은 배우와 오정세 배우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영화작가는... 어느 분을 고르기가 힘드네요. 그렇다고 모두 언급해드리면 인터뷰시간이 다 지나가 버릴 것 같아서. (웃음)

 

스무 살도 채 안 되어 보이는 앳된 외모의 우츠미 세이코 배우는 「렌탈 파파」에서 도저히 신인으로 보이지 않는 탄탄한 연기력을 보여주어 화제가 되었다. ⓒ 2023 Gap Father Film Partners
스무 살도 채 안 되어 보이는 앳된 외모의 우츠미 세이코 배우는 「렌탈 파파」에서 도저히 신인으로 보이지 않는 탄탄한 연기력을 보여주어 화제가 되었다. ⓒ 2023 Gap Father Film Partners

홍상현

그럼 이 질문은 이쯤에서 마무리 짓도록 하고, 혹시 롤 모델로 삼고 계신 배우도 있으신가요?

우츠미 세이코

음. 물론 롤 모델을 세우는 것도 좋겠지만 제 경우는 의식적으로 정해놓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연기라는 면에 있어서 롤 모델을 선택하는 건 왠지 흉내를 내는 것 같다는 생각이 있거든요. 사람을 특정해서 목표를 정하면 결국 그 사람을 뛰어넘지 못하니까요. 배우라는 일은 많은 선택에 직면하게 되는 직업이고, 이는 제게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이런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평소 많이 하고 있어요. 조금 구체적으로 표현해보면 어떤 공이 날아오더라도 홈런으로 받아치는 타자처럼 다양한 작품을 소화할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홍상현

한국어와 영어가 대단히 유창하셔서 놀랐습니다. 혹시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이라든가 구미에서의 활동도 생각하고 계신 건가요?

우츠미 세이코

(한국어) 그렇습니다. 일본에만 머무르지 않고 어느 나라에서든, 어떤 작품에서든 함께할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연기에는 국경이 없으니까요. 말씀처럼 제가 어학공부에 공을 들이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홍상현

그런 의미에서 잠깐 한국 관객 여러분들을 위해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웃음)

우츠미 세이코

(한국어) 한국 관객 여러분, 안녕하세요? 원래 가지고 있었던 한국이름으로 인사를 드리고 싶어요.

민세이입니다. 여흥 민씨에요. 아직은 미숙하지만 조금씩 좀 더 나은 연기자로 성장해 갈 수 있도록 경험과 노력을 거듭하고 있어요. <렌탈 파파>이후로도 많은 작품으로 인사드릴 수 도록 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나카무라로 분한 사이가 마사카즈 배우(왼쪽)는 데뷔 22년 차의 베테랑. 하지만 우츠미 배우는 시종일관 조금도 위축되지 않으며 완벽한 케미스트리를 보여준다. ⓒ 2023 Gap Father Film Partners
나카무라로 분한 사이가 마사카즈 배우(왼쪽)는 데뷔 22년 차의 베테랑. 하지만 우츠미 배우는 시종일관 조금도 위축되지 않으며 완벽한 케미스트리를 보여준다. ⓒ 2023 Gap Father Film Partners

홍상현

작품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이번 전주국제영화제 초청작인 <렌탈 파파>가 첫 주연 영화이시기도 한데요. 개인적으로 영화라는 장르의 매력은 뭐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우츠미 세이코

많은 분들과 마찬가지로 팝콘을 먹어가며 유쾌하게 즐기는 엔터테인먼트로서의 영화도 무척 좋아합니다. 하지만 제가 영화라는 매체, 혹은 장르에 있어서 그에 못지않게 주목하는 면은, 때로는 나라를 움직이고, 법이나 제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정도의 '힘'이에요. 그 '힘'이 좋은 방향으로만 쓰인다면 정말 많은 일을 이뤄낼 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영화작가들이 영화를 통해 구원과 치유를 경험할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영혼을 깎아가며 작품을 만들고 있습니다. 물론 구원이나 치유를 가능하게 만드는 제재도 우리가 평생 다 경험하지 못할 만큼 많겠죠. 이런 모든 생각과 고민을 영상에 담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영화라는 장르의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홍상현

처음 시나리오를 읽고 어떤 느낌이 드셨는지요.

우츠미 세이코

초고를 읽었던 당시, 아직 배우로 데뷔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 '내가 정말 이 캐릭터를 연기해낼 수가 있을까' 조금 불안한 마음도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다만, 그 한편으로 '리카'라는 캐릭터를 어떻게 구축해서 카메라 앞에서 구현해 나갈 수 있을지를 생각하다 보니까 설레는 마음도 들더라고요. 제가 신인인 만큼,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했던 영역에 발을 들인다'는 의미 또한 있는 거니까요.

 

홍상현

처해있는 환경이 보통의 사람과는 대단히 차이가 있는 리카라는 인물을 연기하려면 많은 준비가 필요했을 것 같은데요.

우츠미 세이코

한 사람의 인물을 제대로 연기해내기 위해서 말씀하시는 것 같은 환경이나 처지를 깊이 이해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번 작품을 준비하면서도 사전 리서치 과정에서 관련 문헌을 읽거나 사람들의 체험담을 취재했는데요. 호나카 감독께서 작중의 긴장감과 신선도를 유지해야 하니까 실제로 아버지 대행업체 이용만큼은 하지 말아줬으면 하시더라고요. 시나리오상의 설정 때문이었는데, 저도 프리프로덕션 단계부터 제가 참여하는 전 과정이 마무리되는 순간까지 리카와 일체화하는 게 목표였기 때문이 말씀에 맞춰 촬영을 준비했습니다.

 

자신의 남다른 한국사랑에 대해 우츠미 배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딱히 이유를 들 필요조차 없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냥 엄연한 사실이니까요. 당연히 제 조국을 사랑하는 것일 뿐입니다.”ⓒ 2023 Gap Father Film Partners
자신의 남다른 한국사랑에 대해 우츠미 배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딱히 이유를 들 필요조차 없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냥 엄연한 사실이니까요. 당연히 제 조국을 사랑하는 것일 뿐입니다.”ⓒ 2023 Gap Father Film Partners

홍상현

그 과정에서 리카라는 인물에 대해 어떻게 파악하셨는지요.

우츠미 세이코

빛과 어둠의 틈새에서 살아가는, 언제나 아이인 채로 머물러 있는 자신과 어른인 자신이 갈등하는 내면을 가진 인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민한 면과 여린 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기도 하고요.

 

홍상현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릭터 자체가 주는 인상이 대단히 강렬하던데요.

우츠미 세이코

아미 그렇게 느끼셨을 거라고 생각해요. 지난한 삶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거기서 금방 빠져나올 수 았는 상황이 아니잖아요. 따라서 그만큼 강인하게 살아가는 모습 또한 연기해야겠다고 생각했거든요.

 

홍상현

갑자기 본인께서 생각하시는 리카라는 인물과 호나카 감독의 연출의 방향을 어떻게 조화시켜 가면서 촬영해 임하셨는지 궁금해지는데요. 작업방식 면에서 개성이 워낙 강하신 분이잖아요.

우츠미 세이코

오히려 제가 신인이어서 좋지 않았나 싶습니다. (웃음) 촬영이 이루어지던 당시 일반적인 연출의 방식이 어떻다고 비교를 할 만큼 경험이 많지 않은 입장이었거든요. 그래서 일단 촬영을 할 때마다 제가 출연하는 장면의 의도를 전달받은 후에, 제가 이해해 준비한 표현들을 제시하고 스태프는 물론 다른 캐스트와 의견을 나누는 과정을 거쳤어요. 알고 계시다시피 <렌탈 파파>의 연출 방식이 대본을 숙지하고 카메라 앞에서 그대로 재연하는 방식과는 좀 차이가 있었으니까요. 물살에 몸을 맡기고 자유롭게 헤엄치는 중간 중간에 방향을 체크받는 느낌이라 최대한의 역량을 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전주국제영화제 「렌탈 파파」 GV에서 발언 중인 우츠미 배우. 일본어 외에 한국어와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그녀는 일주일이라는 긴 기간 동안 전주에서 지내며 한국 관객들과 함께했다. ⓒ JIFF
전주국제영화제 「렌탈 파파」 GV에서 발언 중인 우츠미 배우. 일본어 외에 한국어와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그녀는 일주일이라는 긴 기간 동안 전주에서 지내며 한국 관객들과 함께했다. ⓒ JIFF

홍상현

타이틀 롤을 맡으신 사이가 마사카즈 배우는 커리어 면에서도 선배고 상당한 베테랑의 연기자이신데 전혀 위축되지 않으시던 모습의 인상적이었습니다.

우츠미 세이코

첫 촬영이 떠오르는데요.

당시 저는 나카무라 역을 맡으신 게 사이가 배우라는 걸 전혀 몰랐어요. 대본에 이름도 적혀있지 않은 데다 촬영준비도 각자 다른 장소에서 했거든요. 그리고는 서로 “처음 뵙겠습니다”라며 첫인사를 하는 실제상황을 컷 없이 단번에 찍어나갔죠. 장면에 필요한 긴장감이나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한 호나카 료스케 감독의 전략이었지요. 저는 오히려 서로에 대한 불필요한 정보가 배제된 상태에서 <렌탈 파파>의 리카와 나카무라로 만나 그 상황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홍상현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을 하나만 소개해주신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우츠미 세이코

나카무라와 리카카 해변을 걸어가는 라스트신을 꼽고 싶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갈등을 이어가던 리카의 내면에서 아이로서의 자아가 그대로 체현되고 있는 장면이라서요. 가장 애정을 필요로 하던 시기에 아버지가 체포되고, 어머니는 '증발'해버리면서 아이로서의 시간이 정지해버린 리카가 그 순간만큼은 잃어버린 유년의 시간을 되찾게 되는, 마치 시간 여행 같은 느낌을 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 스스로도 걸어가다 멈춰 서서 그 공간에서만큼은 '아버지'로 함께하는 나카무리를 바라보는데 '아, 이게 내가 진정 원하던 순간이었구나'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루어질 수 없는 리카의 꿈이 현실이 된 것 같은, 가장 원하고 있던 뭔가를 손에 넣은 것 같은 기쁨을 머금고 장면이기도 했고요.

 

홍상현

연기자로서 보는 호나카 감독은 어떤 분이신가요.

우츠미 세이코

자신의 세계관을 구현하는 데 있어서 결코 타협하지 않는 굳은 의지를 갖고 계신 한편, 동료들의 열정을 북돋울 줄 아는, 아울러 매 순간 유머러스함을 잊지 않고 장난기도 많은 감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존경스러운 점은 이 모둔 모습을, 딱히 노력한다는 생각 없이 태연하게 유지하고 계신다는 사실이에요.

 

우츠미 배우가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으로 꼽은 라스트 신. 마치 앞으로 그녀가 보여줄 무한한 가능성을 상징하는 것 같은 장면이었다. ⓒ 2023 Gap Father Film Partners
우츠미 배우가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으로 꼽은 라스트 신. 마치 앞으로 그녀가 보여줄 무한한 가능성을 상징하는 것 같은 장면이었다. ⓒ 2023 Gap Father Film Partners

"<렌탈 파파>는 제목이 암시하는 것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두 주인공의 서로 다른 각각의 가족과 사회적으로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엇갈리는 입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누구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에 따라 다양한 고민의 여지를 던져주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이토록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작품이 제 첫 주연 영화였다는 걸 지금 이 순간에도 감사드리고 있고요.

어서 빨리 다른 작품으로 한국에 돌아가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고 싶네요. 그러기 위해서는 더욱 노력해야겠죠? 부디 지켜봐주세요. 감사합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난 뒤 차기작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호나카 감독의 통역을 자처할 만큼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3개 국어와 한국, 일본, 두 나라의 문화에 대한 폭넓은 이해 그녀는 어떤 배우로 성장하게 될까. 추가 질문도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일단은 생략하기로 한다. 한일공동제작이 유례없이 활발해지고 있는 요즈음, 앞으로도 분명 많은 작품을 통해 자주 만날 수 있을 거라 확신하니까.

온 마음을 여흥 민씨 어머니의 딸. 민세이 그리고 우츠미 세이코를 온 마음을 다해 응원한다.

홍상현
홍상현
 《코아르》 운영위원, 고토부키홈빌더 영화영상사업부 프로듀서.
정치학과 영상예술학 두 분야의 학위를 소지. 인문사회과학과 영화이론을 넘나드는 전문적 식견으로 한일 양국 매체에 분석기사를 쓴다. 파리경제대 토마 피케티와 『21세기 자본』 프로젝트를 진행한 도쿄대 연구실 출신.
 프로듀서를 맡은 장편 다큐멘터리영화 <포 디 아일랜더스>는 2008년 제주영화제 개막작이었다.
 2013년부터 월간 《게이자이》에서 담당하는 경제평론지면이 에히메대 와다 제미나르의 교재로 쓰인다. 국제영화비평가연맹(FIPRESCI) 지부인 일본영화펜클럽 회원. 『마르크스는 처음입니다만』 등 다수의 스테디셀러를 소개해온 번역가로도 유명하다.
 일본국제교류기금이 선정하는 “세계의 영화인 7인” 중 1인이며 일본 TBS(채널 6) 주최 디지콘 6 아시아 심사위원, 《마이니치신문》 영화웹진 《히토시네마》 필진 및 마이니치영화콩쿠르 심사위원, 다카사키영화제 시니어 프로듀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어드바이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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