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오브 인터레스트' 감금되고 전시된 죽음을 기리며
'존 오브 인터레스트' 감금되고 전시된 죽음을 기리며
  • 이현동
  • 승인 2024.06.05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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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과 음향을 이념의 배출구로 사용한다는 것"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말하기 전에 '조나단 글레이저'가 처음 시작한 작업이 영화가 아니라는 점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대표적으로 자미로 콰이의 <버추얼 인세니티>(1996)를 비롯하여 라디오헤드, 매시브 어택 등의 뮤직비디오 감독으로 명성을 쌓았던 그는 이후, 영화에서도 독보적인 스타일을 구사하며 비주얼 아티스트의 면모를 드러냈다(이번 영화와 관련지어 생각해 보자면 우연하게도 '감금'이란 주제와 <버추얼 인세니티>의 뮤직비디오와 가사가 제법 잘 어울린다). 두 번째 장편 영화 <탄생>(2004)으로 제61회 베니스 영화제 경쟁부문 초청작에 선정되면서 감독으로도 인정받기 시작했다(한편, 장편 영화도 물론이지만 단편 영화와 광고 작업을 지속하여 진행하면서 무한한 창작욕과 시대정신을 결합하여 완성한 영화가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그가 제작했던 단편이나 뮤직비디오에서 이전부터 차용했던 형식이기는 하다).

스칼렛 요한슨을 기용하여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전작 <언더 더 스킨>(2013)에서 인간과 외계 생명체의 묘한 간극(공간을 활용하는 방식)을 떠올려보면 소거된 시각성에 대한 깊은 사유의 여백을 이번 <존 오브 인터레스트>과 대조해 볼 수 있다. <언더 더 스킨>에서 외계인 로라(스칼렛 요한슨)는 미모를 뽐내며 손쉽게 남자 사냥을 실행한다. 이때 로라는 나체로 남자를 유혹하는데 모든 배경이 암전된 상태로 어둠의 늪에 빠지는 남자를 묘사한다. 그렇다면 과연 영화에서 로라는 주체적인 존재일까. 그녀의 활동이 마무리되는 시점은 역으로 로라가 남자에게 강간을 당하는 장면에서 발생한다. 이 장면에서 인간의 표피를 벗고 나온 외계인의 몸은 가차 없이 남성에 의해 불태워진다. 이 영화의 주체는 로라도 남성도 아닌 어둠 자체이며 어떤 고어와 폭력이라는 자극적인 제스처도 없는 영화적 요소는 어둠 앞에서 무용해 질뿐이다.

욕망이 해소하고자 할 때, 남성의 '말'은 신체의 표피를 수단으로 사용하기 위한 거짓으로 추동되며 결과적으로 그 행위 뒤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가령 하마구치 류스케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2023)와 마찬가지로 살해의 동기는 차이가 있을지언정 내부에서 표상하고 있는 악의 정체는 적확하게 규정될 수 없는 것과 유사하다. 여기에서 <언더 더 스킨>은 외계인 로라와 인간이란 형상을 '인간적'으로 구분 짓지 않고 '반인간적'인 풍경 속에서 이미지로만 형식화한다. 그러므로 로라의 얼굴과 몸은 아름답다기보단 이질적이고, 어둠이 내려앉은 프레임과 그녀와 한 남자와의 정사 장면에서의 감정은 온전히 교환되지 않는다. 영화를 구동하는 형식은 제목과 같이 피부 안을 표상하고 있는 '무언가'다. 불순하고 모호한 이 '무언가'는 알랭 바디우가 말한 것처럼 '이념'을 다루는 특수한 방식이기도 하다. <언더 더 스킨>은 그러한 인간의 욕망과 어둠을 직관적으로 드러낸다.

 

더 나아가 홀로코스트라는 역사의 궤적으로 잠입한 조나단 글레이저는 일반적으로 캐릭터의 관계를 상보적으로 모색하려는 영화적 시도를 배제하며 '공간'의 의미를 집요하게 볼 것을 요청한다. 한 가정이 함께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는 첫 장면에서는 전작과는 다르게 높은 채도를 사용해 목가적인 풍경을 강조한다. 영화에서 줄곧 사용하는 Leitz M 0.8 렌즈는 초점을 명확하게 잡아주어 정밀한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는데, 이는 자연스럽다기보다 되레 인위적이며 가공된 느낌이 강하다. 또한 대칭이라는 구도를 감지하게 될 때 인물과 공간보다 외부적인 감각이 돌출되기 시작한다.

이 영화가 표상하는 주체-중심주의는 결국 시각에서 청각으로 환원되면서 공간은 하나의 기믹으로 작동한다. 흥미롭게도 소설이 영화로 각색되면서 가장 판이하게 바뀐 점은 나치에 대한 환멸이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도 이를 부각한다. 조나단 글레이저는 정서적, 정치적으로 가해자 문화에 얼마나 더 가까이 있는지를 보여줌으로 "안전하지 않다"고 느낄 수 있는 영화를 상상했다고 말했다. 즉, 전 세계 누구나가 알고 있는 비참한 사건을 굳이 파격적으로 묘사하지 않고도 악이 구현되던 잔혹한 현실을 관객들로 하여금 지각하게 하는 것이다. 기능적으로 이 영화의 카메라는 녹화 시뮬레이션을 위해 기능적인 도구로 세팅되어 가구나 벽에 숨겨서 연속 촬영이 가능한 카메라를 곳곳에 배치하였고, 이에 따라 연기자는 카메라의 구속 없이 자유롭게 연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어떤 극적인 서사로의 고양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밀한 주택 외부와 내부 공간과 담장 너머 거치된 철창, 이상적인 가정의 모습, 계율과 규범으로 구성된 조직인 군인 등이 빼곡하게 영화의 프레임을 채운다.

뿐만 아니라 카메라의 활용은 관음(영화의 표면을 강조한다는 측면에서)보다 '감시'에 가까운데, 먼저 '관음'하면 가장 상기되는 영화 중 하나인 히치콕의 <이창>(1954)을 생각해 보면 그렇다. 은밀한 공간 안에서 그 밖을 몰래 응시하는 관음이란 행위는 주체인 사진작가 제프(제임스 스튜어트)를 객체인 공간에서 활약하게 한다. 반면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카메라는 공간 밖을 나가지 못한다. 아까 언급했듯이 카메라는 특정한 위치에 설치되어 있거나 스테디 캠으로 트래킹 숏을 제외하고는 움직임이 없다. 특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모든 것을 감시하는 듯한 카메라는 모든 이가 알고 있는 이 비극적인 역사를 하나의 밀실로 만드는 효과를 부여한다. 밀실은 관객의 시선을 제한한다. 이 영화가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프레임이라는 한계, 국지적으로 제한된 운동성, 저 멀리서 들리는 여러 청각적 요소가 공간의 관계를 끊임없이 교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안에서 작동하던 주객의 위계가 붕괴하면서 공간은 영화의 주인이 된다.

 

사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인물이 등장하지 않고 공간만 앵글에 담기더라도 문제가 없는 영화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공간감을 형성하고 있는 주요한 요소에는 한 가정의 주택이 홀로코스트가 발생했던 장소와 인접한 배경에서 비롯된다. 실제 아우슈비츠에서 촬영한 이 장소의 배경은 독일이 점령한 폴란드에 위치한 가족 주택에서 학살 목표를 수행하며 개인적 유익을 얻게 된 루돌프 회스의 생활을 주목하며 이어진다. 가정의 풍경은 어떤 위기도 포착할 수 없는 평온하고 화목해 보이지만, 영화는 곳곳마다 불행을 암시하곤 한다. 가령 수영장 파티가 벌어지는 장소에서 소각장의 연기가 피어오르거나 수영을 하고 있는 회스 옆으로 잿물이 서서히 흘러 들어오는 장면이 그러한 이미지다.

그럼에도 아우슈비츠를 떠나기 싫다는 아내 헤드비히 회스는 정원을 가꾸며 유토피아를 꿈꾸며 살아간다. 식물은 그 유토피아를 상징하는 요소로 주택 밖에 뜰과 (식물원)정원으로 디자인되어 있다. 영화의 주제와 더불어 식물은 주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동이 불가능한 식물은 지배의 산물이며 오로지 카메라의 영향 아래 노출될 수밖에 없다. 또한 정원 안에서 식물에게 해로운 담배를 태우는 헤드비히 회스의 모습과 형이 남자 동생을 강제로 정원에 밀어놓는 장면은 장난으로 치부하기엔 영화에서 너무도 관계가 연결되어 보이는 장면 중 하나다. 가정 안에서도 위계의 구조가 드러나는 이 영화는 점차 권력이란 구조를 감시 속에서 드러낸다.

특히, 유일하게 클로즈업되는 대상은 식물인 꽃임을 생각해 보자. 한없이 아름다워 보이지만 <언더 더 스킨>에서 주로 사용하였던 어둠이란 색체가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선 붉은색으로 전환된다는 것을 관측한다면 그 의미는 결코 긍정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감시가 주창하는 통제성을 단순히 시각적으로 전개하지 않고 도리어 미세하게 감지되는 사운드를 통해 영화의 풍경을 붕괴한다. 명료하게 들리는 자연의 소리가 점차 미세하게 총소리와 폭격, 경보와 신음들로 변조되는 장면 속에서 영화는 공간을 양가적으로 규정한다. 밖에서 노동하는 이들에게 양식을 나눠주기 위해 나온 한 소녀를 열화상 카메라로 촬영한 장면은 흥미롭게도 어둠 속에서 가장 '선'한 행위로 드러난다. 영화의 반전은 바로 이러한 시각을 소격효과로 해석해 내면서 어둠을 선으로 빛을 어둠으로 직조함에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주립 박물관을 청소하는 청소부들과 연회를 나와 구토하고 지하로 내려가는 루돌프 회스 모습을 교차로 조명한다. 우리는 이때 폐허가 된 공간, 희생자들의 신발과 옷, 초상화를 모아놓은 공간을 목격하게 된다. 곧이어 멀리서 그것을 응시하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회스를 포커스한다. 역사를 저 멀리서 응시하고 있는지 모를 회스의 표정에는 두려움으로 일그러져 있다. 점차 어두워지는 지하로 내려가는 회스의 모습을 결국 형체를 잃어버린다. <언더 더 스킨>의 로라에게 사로잡힌 남성들처럼 어둠속으로 포획된 인간은 여전히 욕망이란 공간 안에서 '말'과 '공간', 그리고 심지어 사랑이란 감정을 은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전시된 역사 뒤에는 그러한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글 이현동 영화평론가, Horizonte@ccoart.com]

 

존 오브 인터레스트
The Zone of Interest
감독
조나단 글래이저
Jonathan Glazer

 

출연
크리스티안 프리델
Christian Friedel
산드라 휠러Sandra Huller
랄프 허포트Ralph Herforth
스테파니 페트로비츠Stephanie Petrowitz
마리 로자 티티엔Marie Rosa Tietjen

 

수입 찬란
배급 더콘텐츠온
제작연도 2023
상영시간 105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4.06.05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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