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빈의 랜덤 플레이 무비 #2] 누군가의 죽음으로 이루는 산 사람의 소원
[이우빈의 랜덤 플레이 무비 #2] 누군가의 죽음으로 이루는 산 사람의 소원
  • 이우빈
  • 승인 2024.06.21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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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심귀>(Happy Ghost, 1984, 고지삼)
왓챠, '죽음' 키워드 7번째 줄 왼쪽에서 1번째 영화

'죽음'이라는, 그 직접적인 표현이 꽤 당돌해 보이는 태그를 선택하며 생과 사에 대한 진중한 드라마 한 편을 기대했건만, 이게 웬걸 모니터에 나타난 영화는 이제껏 한 번도 접하지 못했던 90년대 홍콩의 하이틴물이었다. 마치 <꿈꾸는 열 다섯>(1980) 같은 80년대 일본의 학원물이나 타카하시 루미코와 아다치 미츠루의 이름이 즉각 떠오르는 일명 '서비스 신' 가득한 당대의 청춘 만화를 떠올리게 하는 생기 충만의 시공간이 펼쳐진 것이다. 다만 언제나 그랬듯 이토록 밝아 마지않은 당대의 영화적 유행의 내부엔 꽤 겹겹이 얽힌 욕망의 파고가 잠들고 있단 사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욕망이 대중 영화에선 이토록 화사하게 표현될 수 있는 것인지 알려 주는 <개심귀>의 시작은 그래도 꽤 어두운 화면이다.

 

폭풍우가 치는 밤의 어느 오두막, 얼굴과 형체가 잘 보이지 않은 사람 한 명이 나무 천장에 밧줄을 묶어 목을 매단다. 아마 이 사람의 최후란 무언가에 떠밀린 죽음이거나 회한 가득한 선택인 듯하다. 죽음을 택하는 사람치고 그의 행동은 다소 느릿느릿하여 죽음이란 목적보단 오히려 이 목매달기의 고통을 천천히 음미하려는 것처럼 느껴지기에 이르기 때문인데, 여하튼 과감한 결단에 성공한 이 사람은 밧줄에 매달려 아등바등하고 결국 죽은 듯하다. 영화의 어둡고 어두운 오프닝 시퀀스는 막을 내린다.

오프닝 크레딧이 오르며 영화는 자신이 언제 누군가의 죽음을 대놓고 보여줬냐는 양 다섯 여고생이 해변에 놀러 온 이야기를 생기 넘치게 그린다. 대화를 엿들어 보면 이들은 꽤 고압적인 분위기의 기숙 학교에 다니는 듯하고, 연애 목적의 교제 역시 금지당한 상태이므로 더욱더 이성에 대한 호기심에 가득 차 있다. 이 호기심은 곧바로 눈앞에 현현하는데 같은 학교의 남자 반에 있는 다섯 남학생이 같은 해변을 찾아왔기 때문이고 심지어 이 남자들은 여자들이 해변에 놀러 온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나서 쫓아온 것임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여자와 남자들이 해변에 텐트를 세워 놓은 채 고기를 굽고 기타 치고 노래하며 서로의 눈빛을 은근히 교환하거나 서로의 상황을 재보는 바로 그때, 영화는 다시 짓궂은 장난을 쳐 밤하늘에 폭풍우를 몰아치게 한다. 텐트가 몽땅 날아가 버리고 여학생들은 급히 산속으로 대피하는 찰나 역시 그렇지, 이들이 당도한 곳은 오프닝 시퀀스에 나왔던 그 죽음의 오두막이다. 귀신이 나올 것 같단 으스스한 이야기가 오가는 와중 남학생들도 오두막에 도착하고 열 명의 중학생은 괴담을 기반으로 장난치며 즐겁게 시간을 보낸다. 이곳에서 무언가 일어나겠구나, 오프닝 시퀀스의 죽음이 비로소 그 진실을 드러내겠구나, 라는 생각에 다소 들뜰 수밖에 없는 이 흐름에서 다시금 이게 웬걸, 귀신은 잠시 즐겁게 노는 인간들의 뒤에서 아주 잠시 그 모습을 비출 뿐 제대로 자신을 밝히지 않는다. 귀신의 정체를 밝혀나가는 오컬트물로 이야기가 흐르는 것일지 하고 의문이 들 무렵 남자들이 먼저 겁먹고 오두막을 벗어난 뒤 이 영화의 주인공인 여학생 청청이 오프닝 시퀀스에 등장했던 자살용 밧줄을 들고 기숙 학교에 돌아가 버린다. <개심귀>의 진정한 장소는 어둑한 오두막이 아니라 밝고 화사한 학교였다. 이야기는 이제야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청청이 밧줄을 들고 복귀한 학교에선 학원 청춘물에 으레 등장하는 이런저런 사랑, 학업, 가족, 성장, 질투, 화해의 서사가 진행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당연히 그 밧줄의 존재이겠다. 밧줄에 혼을 담아둔 귀신이 어느 날 청청 앞에 나타나고, 귀신은 자신을 주 방안(과거 시험에서 장원 뒤의 급제)이라 소개하며 청나라 사람이라 설명한다. 청청은 자신(밧줄)을 오두막에 돌려 달란 주 방안의 부탁에 대해 절반쯤 협박이라도 하듯 대신 본인의 학교생활에 도움을 요청한다. 여학생의 요청이란 시험에서 컨닝을 돕게 해달라거나 운동회에서 상대 팀을 방해해 달라거나 하는 것들이며 이 행동들은 진정 노력하는 주변 학생들을 기만하는 일임에도 청청과 친구들은 이러한 행위에 아무런 죄책감을 지니지 않는다. 사실상 어떠한 윤리적 기제도 작동하지 않는 이 귀신과의 협업 속에서 더하여 고민의 똬리를 트게 하는 것은 주 방안의 사연이기도 한데, 그는 몇십 년을 공부하여 간신히 관직에 올랐건만 부인과의 문제나 삶에 대한 어려움으로 죽음을 택했다는 것이다. 나중에야 진실이 밝혀지는데 사실 주 방안은 몇십 년을 공부했으나 결국 과거에 붙지 못해 아내마저 떠나 버렸고 100%의 비참한 마음으로 자살을 선택했단 것이다.

정리하자면 주 방안에게 오프닝 시퀀스의 죽음이란 과연 어쩔 수 없이 택한 도피의 길이었으며 그는 누구보다 삶에 대한 의욕과 한이 강해 이승을 떠돌게 됐단 의미다. 아주 흥미로운 점은 이 도피의 길 끝에서 그가 맡은 책무다. 학교라는 사회적 압제와 개인의 한계로 인해 온갖 욕망(시험 잘 치기, 운동 잘하기, 연애 잘하기, 대학 잘 가기 등)에서 탈락할 위기에 처한 여학생들의 바람을 아무런 대가 없이 이뤄주는 기능이 그에게 부여됐다. 도식화하자면 과거 급제라는 주 방안의 출세욕은 그의 지난한 삶에 의해 거부당했고, 그로 인해 택한 죽음은 소녀들이 지닌 해맑은 삶의 욕심을 채우는 도구로 사용됐다. 누군가가 행한 죽음의 욕망이 타인이 지닌 삶의 의지를 실현한다는 생사의 꼬리 물기로 의미화되는 아이러니. 누군가의 사회적 입신을 위해선 필연적으로 누군가의 죽음과 노력해도 삶을 이룰 수 없는 이(주 방안)의 무제한 동력이 필요하단 서글픈 고리가 드러난 것이다.

<개심귀>가 다소 처절할 정도의 사연을 지닌 주 방안의 비극을 동력으로 여학생들의 욕망을 뒤틀리게 실현한 것처럼 보이는 와중, 여기엔 욕망에 대한 몇 가지의 층위가 더 존재한다. 이는 전술했듯 <개심귀>가 당시 하이틴 로맨스의 이른바 '서비스 신'들, 직역하자면 계속하여 여학생들의 신체를 찬찬히 훑는 카메라를 당연시한다는 것에서 발견된다. 영화 속 소녀들은 그 카메라의 욕망을 내재화하거나 대리하도록 명령받은 듯 자신들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이성을 욕망한다. 여학생들이 지닌 욕망의 진실 공방을 떠나 그들의 정욕을 즉자적으로 확인한 관객의 눈알은 관음에 대한 일종의 면죄부, 영화 속 인물들도 모두 남을 몰래 보니 나도 괜찮겠다 싶은 당위를 획득하게 된 셈이다.

욕망의 순환은 영화 바깥의 메커니즘으로까지 넓어진다. 스크린의 날뛰는 신체를 만끽한 당대 관객의 시각적 만족을 먹고 자란 대중 매체가 산업의 돈 벌기 욕망을 유지했단 연쇄 작용 역시 <개심귀>로 알 수 있는 것이다. 평소 걸작이라 칭해지지 않는 보통의 대중 영화는 이토록 직관적으로 영화 매체의 속성을 드러내는 좋은 예시다. 여하간 여기서 재론해도 큰 의미 없을 산업의 논리와 대중 매체로서 영화의 엄연한 잘잘못을 차치하더라도 <개심귀>의 이야기는 점차 어둡고 기괴한 지점으로 나아간다.

 

청청의 친구인 소화는 최초 해변에서 만났던 남자 한 명과 연애한다. 이 연애는 주 방안이 이뤄준 결실이다. 소화의 방에 찾아온 남자가 맥없이 귀가하려던 때 주 방안은 남자를 부추겼고, 소년 소녀는 잠자리를 가지는데 소녀가 아이를 가진다는 다소 어이없는 이야기가 나타난다. 더욱이 저돌적인 놀라움은 그 남학생이 소화를 뒤로 하고 다른 여학생과 연애한단 것인데, 어쨌든 주 방안의 도움으로 둘은 행복한 결말을 맞고 성인이 되어 아이를 낳게 된다. 이러한 전개를 90년대 홍콩의 문화적 맥락까지 고려하는 등 어떻게 봐야 할지도 여기서 모두 따질 법한 일이 아니지만, 아직도 꽤 충격적인 설정이 남아있단 것만은 영화 내부의 논리에서도 짚어야 마땅하다.

이 충격에 앞서 주 방안의 최후를 서술할 필요가 있다. 학교 선생들에 의해 소멸의 위기를 한번 겪은 주 방안은 소녀들에게 자신의 자살에 얽힌 진실을 모두 고백한 뒤 이제는 떠날 때가 됐다며 이승을 뜬다. 말하자면 소녀들의 학교생활에 얽힌 기괴하고 비윤리적인 욕망의 대리 실현을 이제는 끊어야겠단 도덕적 다짐과도 같으며, 주 방안의 능력이 없어진 뒤 소녀들은 각고의 자체적 노력으로 학업과 운동 등에서 성취를 거두게 된다. 빙빙 돌아오긴 했어도, 너무 뻔한 결말일지라도, 어쨌든 나름 정상적인 교훈을 주며 영화가 꿰매지는 듯한 이 서사에 큰 구멍이 퀭하게 뚫리는데 바로 소화의 아이가 주 방안의 환생임이 드러난단 것이다.

누군가의 죽음이 누군가의 생을 추동한다는 <개심귀> 전반의 논조가 주 방안이란 개인의 굴레를 통해 결국 연장된다는 이 결말은 그 어떤 이야기보다도 찌릿한 자극을 준다. 죽음으로 시작해 탄생으로 끝나는 이야기의 플롯이야 수많지만 <개심귀>의 유별난 점은 이 순환의 고리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영화 매체의 성격과 세상만사의 아픔이 너무도 비합리적이며 비윤리적인데, 심지어 아주 밝아 보이도록 그려졌단 것이다. 아무 대가 없이 우연히 얻은 주 방안의 힘을 통해 타인을 불행에 빠트리며 즐거운 소원을 이루던 소녀 소년들의 모습과 그것에 동조하며 그들의 행복해하는 신체를 보느라 함께 행복했던 이들의 웃음 그 아래엔 주 방안의 한 번의 죽음과 또 다른 고통을 맞이할 탄생의 연쇄가 주어졌다. 이토록 한이 많은 귀신의 또 다른 이름을 짓자면 영화 혹은 매체 예술로 하여도 크게 이상하지 않을 듯하단 생각이 드는 이유는, 죽고 싶어도 제대로 죽지도 못하는 이것의 생명력과 이것의 힘을 쪽쪽 빨아 먹으며 온갖 즐거움을 채우는 만든 이-보는 이의 모습을 수없이 봐왔기 때문이리라. <개심귀> 시리즈는 5편까지 잘 나오며 오랫동안 흥했다고 한다.

[글 이우빈 영화평론가, 731dnqls@ccoa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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