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토스를 자극하는 곡조가 영화의 대미를 장식하고 이내 극장은 밝아진다. 남자는 직전의 영화에 대해 생각한 것을 사뭇 진지하게 내뱉지만, 옆의 여자는 그것에 반응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것 같은 이들 사이로 때마침 누군가 끼어들어 대략 이렇게 조언한다. "말을 멈추고 그냥 입을 맞춰!" <찬란한 내일로>에서 그리 큰 비중을 지니지 않는 이 남녀는 따지자면 주인공의 내면을 비추는 일종의 거울로 존재한다. 하지만 '난니 모레티' 감독 자신이 직접 출연하고, 영화 안에 자신의 실재계를 거리낌 없이 침투시켜 온 그의 또 다른 작품 <찬란한 내일로>에서, 이 두 남녀가 어느 '계' 안의 존재인지를 구분하는 일은 어느덧 무의미하다. 중요한 건 극장의 남녀를 논리 체계에서 빼내 오로지 감정에 압도되는 순간으로 몰아넣은 이 상투를 조언한 누군가가 다름 아닌 난니 모레티 자신이란 점이다.
극의 중반부 찾아온 위 장면은 1956년, 이탈리아 공산당에 관한 체제의 문제를 다룬 조반니(난니 모레티)의 영화가 전혀 다른 길을 맞이하리란 신호 중 하나다. 인물이 자살하는 결말을 혁명의 형식으로 응시하고자 한 조반니의 영화는 그러한 거시적인 틀을 가질 뿐, <찬란한 내일로>는 정작 그 내부로 진입하지 못하는 감독의 곤경을 펼치는 데 집중한다. 영화보기를 '의식'처럼 여기는 그와 달리, 각종 매체가 장악한 현실은 녹록지 않다. 그중에서도 여배우와 줄곧 부딪히는데, 상대와의 각별한 상호작용을 강조하며 '때에 맞지 않는' 남녀의 감정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조반니에게 있어 사랑은 (그가 대사의 정확성에 대해 가지는 강박과 같이) 단어의 미묘한 차이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것이 되는 정치적 결정의 심오함을 희석하는 무언가이다. 또한 그런 파토스의 자극에 일일이 붙잡히는 것은 (늘 타인을 설득하고 설교하는 조반니의 말과 사고가 보여주듯) 표면 이상을 못 보며 생각하기를 낮잡는 세속과 나태함을 경계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점이 그의 영화를 구성하는 주된 힘이었다. 그리고 짐작하건대, 파토스가 부적절하다기보단 그것은 다른 곳에도 늘 존재하므로 무신경해도 된다는 것이 그의 무의식이었을지 모른다. 마치 아내 파올라(마르게리타 부이)가 영화와 일체된 조반니의 결말에 나타난 자살을 두려워하고, 딸이 조금 더 깊이 누릴 사랑을 원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이 영화의 주된 숙제이듯 말이다.
난니 모레티는 변함없이 스크린 바깥을 의식한 듯 가파른 속도로 방대한 생각을 쏟아내고, 일상의 대화를 긴 시간 사유한다. 탈 것을 이용해 도로를 달리면서 거기서 마주한 풍경을 보고, 그리움을 토로하고, 온갖 사람들을 만나 그것을 그리워하지 않음에 한탄한다. 또한 대화 중간 뜬금없이 식탁을 들어 옮기는 행위처럼, 특유의 무목적적 몸짓을 바삐 그려내며 끝없이 평면적 화면을 움직이게 한다. 사적인 일상 활동에서 안이함을 잃음으로써 삶을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 '영화'가 주는 고유한 매체성의 경험을 타진하려 한다. 그리고 (<찬란한 내일로>에서 두드러지는 건) 더 나아가, 윤리와 정치와 에토스의 영역에 집착함으로써 볼 수 없던 영화의 역량이 무엇인지 찾으려 한다. 생각하고 이해하는 능력이 중시되던 "말을 멈추고" 관념과 체제가 무미해져도 상관없는 영화적 경험은 무엇인가. 그간의 엄청난 말들이 주어진 상황에 비해 현학적으로 느껴지고, 생각이 더 이상 감정을 절대적으로 앞지를 수 없는 것이 되고, 영화와 삶을 둘러싼 이론, 체제, 신념, 이성보다 더 중요한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난니 모레티는 <찬란한 내일로>를 통해 강조한다.
조반니가 다른 감독의 촬영장에서 훈수를 두느라 8시간을 꼬박 새우던 장면을 떠올리자. 파올라는 조반니가 그녀를 따라나서기 전까지, 마지막 촬영을 서둘러 마친 뒤, 뒤풀이에 갈 예정이었다. 거기서 조반니는 인물이 총을 겨누고, 그 최후의 일격에 죽음을 맞으며 끝나는 두 배우의 몸짓을 보며 충격에 빠진다. 그리고 자신이 이방인인 걸 망각한 채 촬영을 중단시킨다. 하지만 지칠대로 지친 파올라와 스태프들은 이 원로 감독이 열성을 다해 쏟아내는 말이 끝나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끝끝내 (그의 표현대로) "제대로 된" 게 아닌 이 장면은 "너무 많이 봐 왔던 것" 그대로, 심지어 초 단위로 작동하는 총알의 시간관에 맞춰 너무도 간단히 완성된다. 그 현장을 등지며 걸어가는 조반니는 어떤 심경이었을까. 그를 제외한 모두가 서로 손뼉을 마주치고 탄성을 터트리는 아이러니한 순간이다. 다른 이의 의견 따윈 상관없다는 듯 한 치의 의심 없는 기쁨을 누린다. 그런데 과연 이 장면에서 어두운 표정으로 돌아선 조반니에게 찾아온 건 더 이상 깊은 생각이 먹히지 않고 의미를 잃은 것들에 대한 실망과 고독감뿐이었을까. 총성이 일순간 사고를 마비시키면 마비시키는 대로, "너무 많이 봐" 온 죽음이 감정을 흔들면 흔드는 대로 영화와 마주하면 잘못된 것일까. 조반니가 그저 고개만 돌리면 보이는 현장을 부러 외면하고 돌아서지 않을 때, 오히려 그가 누리지 못한 것이 있는 건 아닐까. 그러니까 내달려 온 모든 것을 '끝'내고 '내일로' 나아가는 이들의 비상함. 혹은 그 순간에, 그 안에만 있어서 황홀하고 매료를 일으키는 것, 자기 안에서만 일어나는 순간적인 것에 집중하는 것을 어리석다고 여기는 동안 놓쳐버린 무수한 순간들은 없는가. 감독이 아무리 펼쳐놓아도 관객의 순수한 직관, 직감적 인식이 저마다의 내면 어딘가와 상호작용하지 않으면 발생하지 않는 감정의 '찬란함'도. 시종 조반니와 어긋나던 여배우는 어쩌면 믿어온 세상과 다른 것을 믿어보라는 자기 내면의 목소리였을지 모른다.
조반니는 그의 영화가 죽는 장면을 구상하며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돌이켜 보면 <찬란한 내일로>는 그렇지 않다. 어느 소도시에 처음 전기가 들어온 날, 그것을 경사스럽게 여기고 환호하며 기뻐하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구성된 오프닝 시퀀스는 영화란 찬사와 희망을 외치며 축배를 들 만한 거라고 말하는 듯하다. 물론 조반니는, 아니 난니 모레티는 환영과 몽상에 전적으로 의식을 맡겨버리는 이는 아니다. 죽음을 떨치고 예기치 않은 순간 찾아온 사랑과 행복이 혁명으로 향하는 또 다른 길임을 깨닫는 것은 그가 리허설을 핑계 삼아 직접 목을 매다는 제스처를 시도한 다음 찾아온 결과다. 그런 결말이 자기에게 있었음을 말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직접' 몸을 움직여 보고, 카메라로 찍어 보여준 뒤에야 "말이 너무 많아!"라는 말을 (극장의 두 남녀가 나오던 허구 속에서 꺼내) 비로소 자기 영화에 안착시킨다. 그렇다면 그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춤이 있다. 모조리 지운 대사를 대신해 영화를 채우는 건 공간을 휘적이는 인물들의 춤사위이다. 단지 두 팔을 벌리고 스핀을 그리는 그 단순한 춤사위는 단순하므로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자신 안에 있는 감정과 온전히 일치된 것이며, 말해야 하는 건 아무것도 없는 '목적 없는 수단(아감벤)'으로서의 몸짓이 '영화'의 요소를 이룬다. "사실 내 꿈 중 하나가 춤을 추는 것이다 (...) 영화 속에서 춤을 익히는 장면을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지만 실제 춤을 배우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나의 즐거운 일기>)". 그의 막연한 상상은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 안에서, 그렇다 해도, 즐거움을 놓치지도 말자는 확신으로 충만한, 실제의 몸짓이 영화가 되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저 이 단순한 몸짓이 "우리는 지금도 행복하다"라는 <찬란한 내일로>의 상투 어린 구절을 외려 거대하게 만든다.
[글 변해빈 영화평론가, limbohb@ccoart.com]
찬란한 내일로
A Brighter Tomorrow
감독
난니 모레티Nanni Moretti
출연
난니 모레티Nanni Moretti
마르게리타 부이Margherita Buy
실비오 올란도Silvio Orlando
바보라 보불로바Barbora Bobulova
마티유 아말릭Mathieu Amalric
배급 에무필름즈
제작연도 2023
상영시간 95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4.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