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또 다른 영화의 기억을 소환한 끝에, 관심을 그 작가에게까지 소급시켰던 경험.
1996년,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던 모스크바국립영화학교 유학이라는 이력을 가진 신인 감독 김응수가 서강대학교 총학생회장에 남북학생판문점회담 전대협대표라는 '거물 학생운동권 출신' 김중기 배우를 캐스팅해 만든 학생운동 후일담 영화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1996)를 보았다. 장편영화제작비로는 턱없이 부족한 3억 원의 예산을 들여, 모스크바 올 로케로 촬영한 이 작품은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되어 '1980년대의 이상이 할퀸 상처를 1990년대의 일상 속에 옮겨 놓아'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한편, '흑백 이미지의 시적인 아름다움이라는 미학적 성과'를 거두었다는 찬사를 받았다.
그 기억이 특별한 것은 부산에서 가까스로 표를 구해 영화를 보고난 필자가 미국에서 보았던 장편독립영화 한 편을 떠올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1980년 작 <시코커스 7인의 귀환>. 4만 달러라는, 역시 엄청나게 적은 제작비로 4주 동안, 뉴햄프셔의 시골집에서 촬영한 이 영화는 1960년대에 학생운동 진영에서 활동하며 "시코서스 7인"이라 불렸던 친구들의 후일담을 다룬다. 히피주의에 물들었던 청년문화에 대한 백래시(backlash)로 1970년대 들어 급격히 보수화한 미국사회에서 더 이상은 낭만적인 이상주의자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없게 된 주인공들의 씁쓸한 인간군상은 필자에게 깊은 여운을 남겼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 영화의 시나리오와 연출을 담당한 존 세일즈의 이력이 김응수 감독이나 김중기 배우 이상으로 파란만장하다는 사실.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촬영할 수 없었기에 공간적 배경을 한 군데로 제한하고, 의상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시간적 배경은 그곳에서의 사흘간으로 설정, 출연료도 거의 지불할 수 없었던 까닭에 자신의 친구들로 캐스트를 꾸린 세일즈는 제작비의 75퍼센트에 해당하는 3만 달러를 홀로 부담했는데, 이 돈을 벌기 위해 시나리오를 쓴 작품이 B급 장르영화의 고전으로 연출을 맡은 조 단테의 할리우드 메인스트림 진출의 발판이 되었던 <피라나>(1978)와 역시 후에 어드벤처액션대작을 연달아 내놓으며 흥행감독으로 등극하는 루이스 티그의 초기작 <레이디>(1979). <엘리게이터>(1980) 등이었다.
이후에도 <리아나>(1983), <다른 별에서 온 형제>(1984), <메이트원>(1987), <꿈꾸는 도시>(1991) 등을 거쳐 <론 스타>(1996)에 이르기까지 인종화합이나 경제정의 같은 민감한 사회적 이슈를 심도 있게 다룬 장편독립영화를 선보인 세일즈는 장편상업영화 시나리오를 써서 만들고 싶은 영화에 필요한 돈을 모았다. 물론, 그렇다고 발휘된 재능이나 결과물에 있어 연출을 맡은 장편독립영화와 시나리오를 쓴 장편상업영화 간에 차이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예컨대 <아폴로 13>(1995)이나 <미믹>(1997)처럼 단순히 '오락(entertainment)'의 범주로 뭉뚱그릴 수 없는 문제작들이 그의 손을 거쳤고, 특히 스필버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이티>(1982)의 경우 그가 써두었던 <나이트 스카이즈>라는 시나리오에서 영감을 받았을 정도이니까.
그리고 3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 다시 존 세일즈의 이름을 떠올리게 하는 사내를 유키사다 이사오 감독의 손에 이끌려 간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만찬에서 만났다. 바로 모두에 존 세일즈를 소환하는 계기가 된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처럼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되었고, 그 초청이 다시 국내개봉으로 이어진 <리볼버 릴리>(2023)의 시나리오 작가 고바야시 타츠오. 그와 이 '묘하고도 반가운 연상 작용'의 실마리를 좇아가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홍상현
장편영화 데뷔작인 야기라 유야 주연의 <합장>(2015)이 몬트리올세계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신 경험도 있으시지만 메인 스태프로 제작에 관여하신 작품이 부산국제영화제에 오셨던 건 처음이신데요. 즐겁게 지내셨나요?
고바야시 타츠오
일본의 국제영화제보다 젊은 관객의 많아 돋보였고, GV에서의 적극적인 자세에서도 열기가 느껴졌습니다. 너무 즐거웠어요. 부산국제영화제가 아시아 최대의 영화제로서 퀄리티를 유지하고 있어 아시아의 영화인으로서 늘 격려가 돼요.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도 매년 참가하고 싶은 영화제입니다. 지난해 리산드로 알론소 감독의 <유레카>(2023)를 만난 것도 큰 감동으로 남아 있어요.
홍상현
오늘 고바야시 작가와의 인터뷰는 제게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통산 140회에 육박하는 일본영화인 인터뷰 가운데 시나리오작가로서는 최초라는 타이틀이 붙거든요. 그런데, 고바야시 작가께서는 이미 학생시절부터 교토국제학생영화제 대상을 수상하시고, 문화청 청년영화작가육성프로젝트에 선발되시는 등 감독으로도 활약해오셨습니다. 앞으로 한국의 관객의 여러분과 자주 뵙게 될 것 같은데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고바야시 타츠오
아 네, 감사합니다. (웃음)
영화감독ㆍ각본가 고바야시 타츠오입니다. 무엇보다 '영화감독ㆍ각본가'라는 타이틀로 저를 소개하고 싶어요. 두 가지 롤(role)을 명확하게 구분해 놓은 건 예전에 연출을 맡았던 장편영화들의 경우, 제가 시나리오를 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컨트리 걸>(2012)과 <합장>은 모두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2003)과 <메종 드 히미코>(2005)의 와타나베 아야 작가가 시나리오를 썼어요. 그런데 제가 시나리오를 썼던 단편영화를 맘에 들어 하셨던 감독님의 제안으로 작가 일을 하게 된 이래, 최근에는 그쪽 일이 더 많아지고 있지요. 좀 있다가 정보가 해금될 텐데, 얼마 전엔 장편애니메이션의 시나리오도 썼습니다.
연출을 맡는 작품은 독립영화로써의 성격이 강하지만 일로써 시나리오집필을 의뢰받는 경우에는 인디, 메인스트림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독립영화감독으로 활동하면서 대작영화의 각본을 많이 썼던 존 세일즈와 알렉스 로스 페리를 롤 모델로 삼고 있거든요. 서로 다른 두 가지 선택지를 가질 수 있다는 건, 만나는 사람이나 가치관이 제한을 넘어설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기에 바람직한 자극을 많이 얻을 수 있어요. 창작을 위한 긴장감도 유지할 수 있고요.
홍상현
다음은 "홍상현의 인터뷰"를 통해 뵙는 분들게 항상 드리는 질문인데요. 한국영화, 즐겨보시나요? 좋아하시는 작품이나 감독, 배우 등이 있으시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고바야시 타츠오
가장 경애하는 분을 꼽으라면 단연 이창동 감독 아닐까 합니다.
모든 의미에서 특별한 표현자세요. 당신의 영화를 처음 본 게 고등학교에 다니던 15살 무렵 <박하사탕>(1999)의 일본 개봉 때였는데, 보고나서 엄청 흥분해서는 영화에 관심이 없는 친구들에게조차 몇 번이나 "엄청난 영화를 봤다"고 얘기했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당시로서는 아직 그 영화의 감독이 향후 수십 년 간 제 인생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인물이 되리라는 것까진 상상하지 못했지만요.
이창동 감독의 작품을 볼 때마다 영화 만들기의 어려움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영화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에 대한 희구를 느끼며 감동하게 됩니다. 얼마 전에도 한국의 젊은 필름메이커와 대화를 나누는데 이창동 감독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마치 오래전부터 같은 비밀을 공유해 온 공범자를 만난 기분이 들더라고요. (웃음) 이처럼 당신과 그 작품의 존재에 고무되는 젊은 크리에이터들이 세계 곳곳에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이건 영화와 관련된 분에 관한 이야기는 아닌데요. 일본에 책이 많이 번역돼있는 편은 아닌데 김금희 소설가의 작품을 대단히 좋아해요. 예술이나 문화, 그리고 그 주변 사람들의 기억의 퇴적에 관한 이야기가 제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들과 닿아있다는 느낌이 들어서요. 특히 『경애의 마음』에 나오 영화에 대한 고찰을 읽으면서 탄성을 연발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홍상현
지금부터 몇 가지의 키워드를 정해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인터뷰를 진행해볼까 합니다.
첫 번째 키워드는 "신념"인데요. 단편영화인 <소년과 거리>로 교토국제학생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하신 게 2007년, 장편데뷔작을 만드셔서 국제영화제에 초청되신 게 2015년, 다음 작품인 <미국음악>의 공개가 2023년, 그리고 같은 해 <리볼버 릴리>가 일본에서 개봉했는데요. 물론 사이사이에 단편영화를 제작하시긴 했지만 그게 생계에 도움이 되지는 않잖아요. 한국의 동세대 영화인들과 마찬가지로 경제적인 어려움이 크셨을 거라 생각하는데 어떻게 '영화인'으로 살아남으실 수 있었나요.
고바야시 타츠오
장편영화를 연출하지 않았던 지난 10년을 돌아보면, 우선 처음 몇 년은 NHK드라마 시리즈를 두 편 연출했습니다. 모두 시대극이었으니까 <합장>과 연장선상에 있었고, 다이쇼시대를 무대로 한 이번 <리볼버 릴리>의 시나리오 작업과도 이어지지요.
그리고 감독 데뷔 이후 참여하는 경우가 거의 없어졌지만 다양한 감독들의 현장에서 그들의 연출스타일을 지켜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유키사다 이사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작품의 메이킹 필름을 당당했어요. 그 인연으로 하마구치 감독의 <아사코>(2019)에 배우로 출연했고요. 이 일은 제게 무척 뜻깊은 경험이었는데, 그 현장에서 또래의 영화인들을 많이 만났고 그 중 몇 사람은 제 단편영화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거든요. 그 외에도 공동작가나 감독보로 여러 작품에 참여했습니다. 나머지 5년은 시나리오 쓰는 일을 주로 했어요. 시나리오를 쓴 두 편의 장편상업영화가 개봉했고, 아직 제작중인 것들도 있지요.
마지막으로 지난 10년 동안 조금씩 진행해온 제 연출작 프로젝트를 소개해드리고 싶은데요. 3년쯤 전부터 국제공동제작 파트너를 찾기 위해 일본의 프로듀서와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제 프리프로덕션을 마무리 하고 촬영에 들어가야죠.
홍상현
실로 '파란만장'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10년 이었네요. (웃음)
두 번째 키워드는 '교토'입니다.
교토 출신으로서 현지에서 개최되는 국제영화제에서 입상하셨던 이력도 주목할 만하지만, 천년의 고도로서 메이저 제작사들의 황금시대를 상징하는 스튜디오들이 자리해 있는 교토의 문화적 환경 또한 고바야시 작가에게 대단히 큰 의미를 지니지 않을까 싶어요. 아울러, 놀라운 것은 이러한 영향이 고바야시 작가의 필모그래피에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컨대 <컨트리 걸>은 교토의 전통예술인인 '마이코'에 대한 이야기고, <합장>은 막부시대 말기가 배경인 시대극이었죠. 그리고 시나리오를 쓰신 2022년 작 <퓨어 재패니즈>는 교토의 스튜디오에서 촬영되는 활극에 모던액션의 융합을 시도한 퓨전 장르영화였는데요. 이런 작풍에 대해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고바야시 타츠오
방금 키워드를 듣고 정말 놀랐는데요. 별 생각 없이 지나쳐왔는데 말씀을 듣고 보니 정말 그랬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웃음)
말씀하신 것처럼 교토를 무대로 영화를 찍고, 교토에 소재해 있는 스튜디오에서 시대극을 연출, 그밖에 연장선상에 있는 작업을 해나가는 걸로 변천해 온 과정이 분명히 존재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건 각 작업의 성과에 따라 다음 기획의 내용이 정해진 거라기보다 '우연하게(accidentally)' 스튜디오시스템을 경험하면서 이후의 선택지 또한 자명해졌다는 게 정확하지 않을까 싶어요.
현재 일본영화계에서 젊은 영화작가가 시대극의 연출을 맡게 되는 경우가 무척 드뭅니다. 아마도 제작비 문제가 가장 클 텐데요. 아무리 특정 장르에 대한 집착이 강한 영화작가라 할지라도 교토의 스튜디오에서 전문조감독으로 영화계에 입문하지 않는 이상, 그 시스템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어요. 그런 것을 보면 제 커리어와 관련해서는 '교토라는 도시의 자기장에 의해 우연히 생겨난 흐름 속에 있었다'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을까 합니다. 다만 그 안에서 수동적으로 작풍을 형성해갔던 건 아니고요. 스튜디오시스템이나 교토의 지역영화사를 엿보는 일에 강한 동경과 매력을 느낀 끝에 자발적으로 흐름을 따라간 거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홍상현
마지막 키워드는 '음악'인데요. 제작에 관여하신 작품의 내러티브가 전반적으로 음악이 주는 영감에 기초해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만, 특히 <미국음악>에서는 CD라는 음악적 오브제에 마치 퀸의 "Radio Ga Ga"같이 상념을 투영해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놀라운 발상을 보여주셨는데요. 본인의 영화세계에서 음악은 어떤 의미인가요.
고바야시 타츠오
우선은 제가 영화에 뜻을 두는 가운데서도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세대의 공통 언어가 되는 시대에 젊은 시절을 보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처음 감독 일을 시작했을 때 위성방송 음악채널에서 뮤지션의 다큐멘터리나 라이브 촬영을 연출했던 경험이 있는데, 이 또한 영향을 미쳤고요. 그렇게 음악과 얽혀 있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제 시그니처(signature)의 하나가 되었죠. 또한 '보이는 것'을 전제로 하는 영화를 만드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음악처럼 '보이지 않는' 예술을 하고 계신 분들에 대해 항상 경외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영화에서도 음향, 그리고 음악과 관련한 디렉션은 대단히 중요한 요소죠. 그러나 단지 소리만으로 완결되는 표현을 접하면 언제나 기억과 직결되는 영성(spirituality) 같은 것을 느끼는 가운데, 이것들이 망령처럼 시간 속에 퇴적되며 잊혀 진 순간들을 표상하고 있음을 깨닫게 돼요.
홍상현
사실 이번 인터뷰를 몇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전개했던 이유는 이번 <리볼버 릴리>라는 작품이 마치 이 모든 키워드를 뒤섞은 "고바야시 타츠오 종합판"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네오느와르의 스타일을 활용하지만 액션장면에서는 마치 존 우의 작품에서 총격전이 경극의 표현법의 베리에이션이었던 것처럼 시대극의 표현을 자유자재로 활용하고 있거든요. 장르의 변증법이랄까.
고바야시 타츠오
시대극의 시간성은 '그려져 있는 시대'와 '제작하고 있는 현대'의 곱셈에 의해 태어난다고 생각합니다. 1930년대 스튜디오에서 만들어진 시대극의 사운드트랙으로 재즈가 사용되었던 예도 있지만, 2020년대에 1920년대의 정서ㆍ감정을 그려내는 데 적확한 표현을 활용하는 작품이 되었으면 했거든요. 물론 다양한 표현의 방식과 관련해서는 유키사다 감독의 의지 또한 반영되었지만요. '장르의 변증법'이라고까지 평해주시니 너무 기쁜데요. (웃음)
홍상현
여기서 다시 한 번 음악에 관한 화제로 돌아가야 할 것 같은데요. <리볼버 릴리>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안개 속에서의 총격전 장면의 경우, 단순히 OST 레벨을 넘어 아서 프리드가 제작한 1950년대 MGM 뮤지컬영화를 연상시키는 톤 앤 무드(Tone & Mood)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고바야시 타츠오
<리볼버 릴리>의 주인공은 무력에 의해 실현되는 일들에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못하는 인물입니다. 그런 까닭에 저는 총격전 장면에서 그녀가 '무언가를 성취해 가는' 느낌이 아니라 액션 자체에 음악이 깃들어 있는 표현주의적인 스타일이 도드라지기를 바랐어요. 아마 이 지점에서 뮤지컬 영화의 작법을 떠올리신 것 같습니다.
홍상현
그렇게 해서 "무력"이라는 "가공할 힘"을 가진 주인공이 그 "힘"으로 인해 맞이하는 비극적인 결말(시나리오를 쓰신 <퓨어 재패니스>처럼)을 넘어, '평화를 위해 몸을 던지는 히어로의 반전 액션영화'라는 희유의 작품이 태어났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역시 타이틀 롤의 캐릭터 구축일 텐데요. 시나리오를 집필하시는 과정에서 어떤 부분에 역점을 두셨는지 궁금합니다.
고바야시 타츠오
영화 전체의 목적을 설정해 놓고, 그곳을 향해 가는 관객들의 카타르시스는 담보되어야하지만 무엇보다 주인공이 무력(수단) 자체에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않는 인물이라는 점을 가장 의식했습니다. 그런 주인공의 감정을 움직이게 하는 포인트가 되돌릴 수 없는 과거, 즉, 성장하는 모습을 볼 수 없었던 자신의 아이에 대한 기억이죠. 여행을 함께 하는 소년의 성장에 주인공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도 자신이 지켜보지 못했던 아이의 성장에 대한 추가적 체험이라는 것을 전제해두고 시나리오를 써나갔어요.
홍상현
연출을 맡으신 유키사다 이사오 감독과는 이번 시나리오집필 작업을 함께 하신 것 외에도 평소 여러 가지 작업을 함께 해 오신 걸로 압니다. 촬영 중에도 여러 가지로 소통을 하셨을 것 같은데요.
고바야시 타츠오
스파이이며 킬러이지만 역설적으로 폭력의 연쇄를 통해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진 주인공이, 그럼에도 무력을 통해 갈등을 해결해 나가야한다는 건, 대단히 모순적인 이야기죠. 인물에게도 상당한 고민의 여지를 던져주는 것임에 틀림없고요. 이처럼 여러 가지 요소들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드라마 속에서 어떻게 최대한 거짓 없는 인간상을 그려낼까에 대해 유키사다 감독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우리의 이런 고민이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게 바로 주인공 오조네 유리의 첫 총격전을 장면이에요. 주인공의 내적 고민도 고민이지만 세트도 대단히 비좁은 골목으로 이루어진 구역을 복원하다 보니 액션이 없는 장면을 찍기 쉽지 않은 곳이었거든요. 그 안에서 고뇌하는 액션히어로가 무의미한 살상을 최대한 억제해가며 상대와 맞서는 모습을 재현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인물의 움직임이나 동선을 수 없이 체크하고 다듬으면서 촬영을 진행했습니다.
홍상현
<리볼버 릴리>는 단지 남성관객만이 열광하는 기존 액션영화의 특성을 넘어 강인한 여성성이 드라마에서의 갈등을 극복하는 열쇠가 된다는 점에서 여성관객에게도 충분히 어필할 수 있는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바야시 작가의 초기작품에서 나타나는 여성캐릭터의 입체적 성격묘사를 보면 이 또한 본인의 터치가 반영되어있는 부분 아닐까 싶은데요.
고바야시 타츠오
여성 스파이라는 캐릭터를 단순히 선정적인 취향 내지 기호 차원에서 풀어가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영화에서 대립을 거듭하는 양대 집단은 군부, 구체적으로 육군과 해군이라는, 당시로써는 특히나 남성 중심적이었을 조직이죠. 뿐만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 또한 대단히 남성 중심적이었을 테고요. 이런 환경 속에서 <리볼버 릴리>의 서사를 구성해나가 위해, 당대 여성의 의식과 감성을 유추해내는데 상당한 공을 들였습니다.
홍상현
재미있는 포인트가 나왔네요. 유추라면 바로 '상상'의 영역인데요.
고바야시 타츠오
그렇습니다. 어쨌든 저도, 유키사다 감독도 남성이니까요. 그렇게 당대의 현실을 바라보는 여성을 상상하고, 이것을 다시 관객을 위해 현대적 감성에 어필하는 코드로 풀어내는 게 <리볼버 릴리>의 제작에 있어서 가장 큰 과제 아니었나 싶어요.
홍상현
어느 정도는 성공적인 결과를 내지 않았나 싶습니다. (웃음)
마지막으로 시나리오작가로서 <리볼버 릴리>에서 가장 애정을 가지고 있는 장면의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고바야시 타츠오
변호사 이와미(하세가와 히로키 분)와 관료인 우에무라(후키코시 미츠루 분)가 담배를 피우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꼽고 싶습니다. 주인공 유리의 과거가 드러나는 중요한 대화인데, 액션 장면이 거듭되다 두 사람이 조용히 마주보고 있는 장면이 괘 오래 지속되죠. 몇 번 편집될 뻔 했지만 저로서는 영화의 질감을 전하는 중요한 장면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사수했어요. 평온해 보이는 분위기에서 잔잔한 대화가 이어지지만 실은 두 배우의 케미스트리로 인한 박력이 엄청난 장면이었죠. 작품을 보실 때 꼭 눈여겨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웃음)
"<리볼버 릴리> 유쾌하게 즐길 수 있는 활극이지만 2020년대 초의 불안한 세계정세를 바라보던 필름메이커들의 생각이 반영되어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아울러, '이것이 정의'라고 선언하기보다 모순을 안고, 끊임없이 고민하는 독특한 히어로가 등장하고요. 영화제에서뿐만 아니라 일반 상영관에서 한국 관객 여러분을 만나게 되어 정말 기뻐요. 흔히들 떠올리시는 대작 일본영화와 무척 다른 느낌의 작품일 겁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제 활동과 관련해서는, 일본영화의 전통과 혁신의 양 극단에서 그 진폭을 지탱하는 영화작가로 자리매김해 가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서로 인사를 트자마자 의기투합, 서울에서 <리볼버 릴리>가 개봉할 즈음 술이라도 한 잔하며 길게 수다를 떨어보자고 했던 고바야시 작가와의 약속을 다카사키영화제에 참석하느라 지키지 못했다. 이후 도쿄에서라도 만날 수 있겠지 했는데 그가 유키사다 감독이 한국에서 만드는 드라마 <완벽한 가족>의 촬영 일을 거들어주기 위해 서울로 향하는 바람에 다시 엇갈려버린 동선. 그래도 조만간 영화제에서든 극장에서든 다시 만날 수 있겠지. 분명, 공들여 써놓은 온갖 장르의 시나리오들이 와인셀러의 포도주처럼 쌓여있을 테니 말이다.
[인터뷰 홍상현 영화평론가, krpopper@ccoart.com]
정치학과 영상예술학 두 분야의 학위를 소지. 인문사회과학과 영화이론을 넘나드는 전문적 식견으로 한일 양국 매체에 분석기사를 쓴다. 파리경제대 토마 피케티와 『21세기 자본』 프로젝트를 진행한 도쿄대 연구실 출신.
프로듀서를 맡은 장편 다큐멘터리영화 <포 디 아일랜더스>는 2008년 제주영화제 개막작이었다.
2013년부터 월간 《게이자이》에서 담당하는 경제평론지면이 에히메대 와다 제미나르의 교재로 쓰인다. 국제영화비평가연맹(FIPRESCI) 지부인 일본영화펜클럽 회원. 『마르크스는 처음입니다만』 등 다수의 스테디셀러를 소개해온 번역가로도 유명하다.
일본국제교류기금이 선정하는 “세계의 영화인 7인” 중 1인이며 일본 TBS(채널 6) 주최 디지콘 6 아시아 심사위원, 《마이니치신문》 영화웹진 《히토시네마》 필진 및 마이니치영화콩쿠르 심사위원, 다카사키영화제 시니어 프로듀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어드바이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