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미술작가이자 영화감독인 벤 러셀은 종종 자신의 작업을 유토피아를 찾는 과정이라 설명한다. 그도 그럴 것이, 2022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되었던 <보이지 않는 산>은 말 그대로 미완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보이지 않는' 유토피아를 찾아 헤매는 시네마적 여정이었다. 그리고 올해 <다이렉트 액션>으로 전주를 다시 한번 찾은 그는 어김없이 유토피아에 관해 말한다. 그는 영화가 소재로 하는 급진적인 환경단체 '자드(ZAD)'가 점령하고 있는 공간에서 실존하는 유토피아의 가능성을 보았고 프랑스 감독인 기욤 카이로와 수십 일 동안 그곳을 카메라로 담기로 한다.
<보이지 않는 산>이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유토피아 주변을 맴돌며 그것을 상상적으로나마 그려보고 매만지는 영화였다면, <다이렉트 액션>은 이 땅 위에 실재하는 유토피아의 내부를 끊임없이 들여다보고 세상의 단면을 아카아브 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이렉트 액션>이 주인공으로 삼고 있는 것은 프랑스 근본주의 환경운동가들로 이루어진 비타협적 환경단체인 자드와 자디스트(Zadist), 그리고 그들이 거주하는 청정 구역이다. 경찰의 과격한 진압 아래에서 벌어지는 시위 실황 영상을 노트북 스크린 너머로 지켜보는 것으로 시작할 때, 영화는 정치적 이슈의 한가운데서 현장을 기록하는 강력한 정치적 기록물로 작동할 것을 예고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벤 러셀은 그 예상을 무색하게도 비켜 나간다. 경찰의 진압을 성공적으로 저항한 당시의 기록 영상과, 후반부에 다시 한번 펼쳐지는 또 다른 저항의 순간을 제외하면, 영화는 특정 구역 내에서 공동체의 평화롭고 소소한 일상을 담는 데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한다. 이를테면 뒹굴거리는 돼지 앞에서 책을 읽거나, 야외 식탁에 아이들을 앉히고 밥을 먹거나, 체스 게임을 즐기는 지극히 일상적인 모습들 말이다. 대체로 픽스(fix)된 카메라가 아무런 개입없이 그저 이들의 일상을 지켜보는 이 영화는 흡사 다이렉트 시네마의 한 계보를 잇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카메라가 담고 있는 지극히 일상적인 모습들의 디테일이나 그 긴 시간의 이미지에서 푼크툼을 경험하게 만드는 슬로 시네마의 집요함, 그리고 그 속에서 반복되는 특유의 리듬은 <다이렉트 액션>을 단순한 관찰 일기가 아닌 고유한 또 하나의 시네마의 가능성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영화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 중 하나는 5분 혹은 그를 넘어 수 분 동안 진행되는 롱테이크의 픽스숏들이다. 이 숏의 집합 앞에서 난감해지는 것은 각 숏이 너무 오랫동안 지속된다는 것과 그 안에서 특정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고 그저 지극히 일상적인 몸짓과 풍경을 담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에게 주어진 숏 안에서 이루어지는 형상의 몸짓만으로는 그 숏이 언제부터 시작해서 언제 끝날지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영화의 초반부, 카메라는 바람개비가 달린 전망대와 그 뒤에 펼쳐진 하늘을 로우 앵글로 하염없이 올려다본다. 그 숏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조금씩 삐걱거리며 움직이는 바람개비의 움직임과 하늘을 배경 삼아 천천히 흘러가는 구름의 움직임이다. 다른 말로, 이 숏에 남아있는 것은 지리적 감각을 벗어난 영역의 초현실적인 풍경과 바람, 즉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감각뿐이다. 그렇다면 카메라는 어떤 순간에 놓였는가. 혹은 어느 순간을 기다리는가. 이미 말했듯이, 숏은 언제 시작해서 언제 끝날 것인가. 벤 러셀의 카메라는 그 숏의 문법이 지목해야 할 어떠한 의미와 의도의 차원에 괄호를 치고, 그저 시간의 감각만이 존재하는 풍경을 담는다.
전주국제영화제 측이 제공하는 리뷰에는 <다이렉트 액션>의 시간의 감각에 주석을 다는 듯한 두 문장의 추신이 붙어있다. "영화 중간에 쉬는 시간이 있으며, 그때에도 영화는 계속된다. 우리의 삶처럼." 216분에 달하는 해당 영화에 삽입된 인터미션에 대한 설명일 것이다. 물론 그것이 감독의 의도에 있든, 혹은 그 의도와 무관하든 간에 인터미션이 있는 (혹은 상영 측의 의도로 어쩔 수 없이 주어진) 영화가 흔치 않은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벤 러셀이 의도적으로 인터미션 간에 영화관 내부를 점등하지 않을 것을 요청하여 그 시간을 영화가 멈춘 순간이 아니라 '여전히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순간'으로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비가 내리는 흙길과 숲의 풍경이 있고, 길 한편에는 망가진 수레가 쓰러져 있는 것이 전부인 이 이미지는 5분가량의 시간 동안 지속된다. 이때 관객들은 상영관을 나가거나, 다시 들어오거나, 다시 들어오지 않거나, 영화관 안에서 각자만의 휴식을 갖는다. 이때도 숏 안에서는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대신 이 이미지에서는 어김없이 무엇인가 움직인다. 언제 멈출지 알 수 없는 비, 그리고 비의 운동이 만드는 흙과 풀의 사소한 몸짓들. 시간의 감각을 담은 움직임만이 존재하는 풍경.
이 숏은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라거나, '비가 그친다'는 어떤 숏의 시작과 끝을 결정하는 관습적인 문법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저 '비가 내린다'는 진행형의 운동만이 이미지에 존재하며, 그래서 우리는 어김없이 이 숏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혹은 언제 끝날지 예상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이 한 숏 분량의 인터미션은 앞서 하늘과 전망대를 올려다보는 숏과 긴밀하게 공명한다. 어찌 보면 자드가 점유하고 있는 청정 구역의 공간적 설정 숏처럼 느껴지는 이 풍경들은, 반복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시간의 흐름을 예고하는 시간적 설정 숏이다.
이러한 비관습적인 시간의 감각을 흡수한 채로 일상의 숏들을 바라보았을 때 느낄 수 있는 것은 일상의 반복적 행위를 오롯이 체득한 숏의 독특한 리듬이다. 가령 카메라는 나무 원목을 재단하거나, 수작업으로 포스터를 프린팅하거나, 녹음실에서 마이크에 랩을 뱉고 다음 테이크를 다시 시작하는 노동의 반복적 행위를 들여다본다. 한편 어느 한 장면에서 카메라는 한 남성이 일렬로 늘여진 대여섯 개의 프라이팬에 팬케이크를 굽는 행동을 생략 없이 지켜보는데, 이 아주 사소한 행동은 노동의 반복이라는 정치적 의미의 영역에서 한참 벗어난 것만 같다. 이때 남성은 카메라에서 가까운 쪽의 프라이팬부터 먼 쪽의 순서로 반죽을 따라 굽기 시작하고, 처음의 프라이팬으로 돌아와 반죽을 뒤집고, 이내 한쪽 구석에 하나씩 차곡차곡 쌓아간다. 그리고 그 수 분간의 행동을 행위 과정의 생략없이 그저 한 컷으로 바라볼 때, 카메라에서 가까운 쪽의 프라이팬부터 팬케이크를 굽는다는 절차에 따라 일련적인 행위가 차례로 행해지고 끝났을 때, 다시 말해 이제는 숏을 지탱하고 있는 가정할 수 있는 최소한의 움직임의 논리가 끝났다는 생각이 들 때, 카메라는 그럼에도 숏을 멈추지 않는다. 남성은 그 이전에 했던 행동과 다를 바 없는 행동을 다시 한번 반복하고, 그 두 번째 행위가 이루어진 뒤에야 숏은 끝난다.
이 반복되는 리듬은 슬로 시네마의 분류에 속하는 영화들이 피할 수 없는 '숏의 경제학'의 문제를 떠올리게 만든다. 이 숏이 불러오고 있는 것은 반복의 측면에서 왕빙이 담아내고자 했던 노동의 감각인가. 혹은 운동의 측면에서 키아로스타미가 담아내고자 했던 무빙 이미지의 감각인가. 이 반복은 다시 한번 숏의 시작과 끝의 지점을 결정하는 것과 관련한다. 남자가 팬케이크를 쌓아두는 식탁에는 이미 이전에 만들어둔 몇십장의 팬케이크가 놓여있는 듯하다. 이 쌓여 있는 팬케이크가 생략된 시간과 지금 행해지고 있는 시간의 축적이라면, 이 생략 없다고 느껴진 수 분간의 숏조차 결국은 생략된 일상의 일부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지켜보는 것과 어느 한 지점에서부터 지켜보는 것은 어떤 차이를 갖는가. 일정한 패턴을 가진 행위를 의도적으로 반복하면서 완료형과 진행형의 시간성을 프레임 한켠에 축적하고 있는 이 숏은 과거와 미래의 가능성을 무한히 열어젖히는 우주의 시간과 평행하게 놓인다. 그러므로 카메라가 자디스트의 일상의 반복과 함께한다는 것은 이들의 공간을 작은 우주로 존중하는 일이다.
숏을 지속하고자 하는 시간과 관련한 카메라의 욕망이 자디스트의 유토피아를 지속 가능한 희망의 공간으로 요새화해 낼 때, 나아가 카메라가 무언갈 응시한다는 프레이밍의 행위는 무엇을 욕망하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것이다. 무언가를 응시하겠다는 포커스의 욕망이 거세된 듯한 <다이렉트 액션>의 딥포커스 숏은 피사체라는 대상을 보고자 하는가, 시간이라는 풍경을 보고자 하는가, 그것을 동시에 감각하고자 하는가, 혹은 소재들을 차별 없이 흩뿌려놓고 동일하게 감각하고자 하는가. 픽스숏으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믿고 싶은 영화는 어느 몇몇 순간에 형식적인 픽스숏의 규칙을 벗어나 대상을 들여다보거나(zoom in), 대상을 따라가는데(pan), 이때 단순히 카메라가 그것을 보고 있다고 단언해서는 안 될 것이다. 가령 카메라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숲에 놓인 길을 프레이밍 한다. 잠시 후 몇 명의 사람과 그들이 끌고 가고 있는 암소와 송아지가 멀찍이서 길을 따라 다가온다. 암소는 계속해서 길을 따라 전진하는 반면, 송아지는 자꾸만 멈추어 서려고 한다. 한 여성은 송아지가 암소를 따라가도록 돕고 송아지와 암소는 샛길로 방향을 틀어 탁 트인 들판으로 나아간다. 카메라는 그 소들의 이동을 따라 오른쪽으로 패닝 한다. 그리고 다시 길이 놓인 왼쪽으로 패닝 해 들판을 걸어 나가는 소를 지켜보는 남녀의 옆모습을 담는다.
정지해 있던 카메라가 이윽고 동물의 움직임을 따라 고개를 돌리고, 다시 인간에게로 돌아왔을 때, 풍경을 목격하던 픽스의 상태는 패닝의 몸짓을 위한 기다림의 태도였을까. 카메라가 움직이는 동물(動物)이 등장하기도 전부터 그 자리에 서서 정지와 정적의 순간을 견뎌내고, 자꾸만 다가오기를 멈추는 송아지를 기다리면서까지 제자리에 있다가 그에 맞추어 고개를 돌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픽스의 카메라가 현전의 차가운 기록이었다면, 살아있는 존재를 향한 온기가 느껴지는 패닝은 무빙 이미지를 긍정하는 따스한 붓질이다. 이때 <다이렉트 액션>의 카메라는 반복으로서의 노동의 이미지를 벗어내고 그만의 리듬으로 걸어가는 송아지의 운동을 나지막이 기다리고 그와 걸음을 함께 한다. 그때까지 형식화되었던 픽스숏의 규칙과 예상을 깨뜨리는 이 숏은 그만큼 이 영화에서 가장 생경한 활력을 지녔다.
영화에서 유독 기이한 감각을 지닌 숏 하나를 뒤늦게 떠올리게 된다. 초반부에 등장했던 전망대에서 시작하는 이 숏은 한 남성이 띄우는 드론 카메라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카메라가 하늘 높이 떠오르면 눈앞에 보이는 것은 하늘과 구름뿐이다. 카메라는 전 방향으로 자유롭게 회전하면서 구름 위와 구름 속을 유영한다. 우리는 그저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희미하게나마 연상되는 백색 스크린(들) 사이를 떠돌아야만 하다. 이때 드론 조종사의 목소리로 진행되는 내레이션만이 그 이미지들의 실마리나 이정표가 된다. 카메라는 이내 대부분이 들판인 자디스트의 점유 구역을 내려다본다. 한참을 떠돌고 드론의 배터리가 소진되면, 카메라는 그제야 활공하면서 지상 부근으로 내려오고 숏이 시작되었던 전망대에 착륙한다.
마이클 스노우의 <중앙지역>을 떠올리게 할 만큼, <다이렉트 액션>의 드론 숏은 실재하는 지역을 비추다가도 어느 순간 방향감각을 상실하며 추상의 풍경에 머무른다. 초반부에 전망대를 담는 숏에서는 지상의 시점에서 올려다보았던 것과 달리, 비일상적인 각도에 다다르면서 하늘과 구름을 다시 한번 담아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정체 모를 (유사-)안개, 연기, 혹은 백색의 스크린의 풍경은 어떤 형상으로 프레임 안에서 부활할 것인가. 무색한 일상의 풍경들로 가득한 영화가 끝을 향해 가다 보면, 어느 순간 초반부에 얼핏 보았던 시위의 풍경이 반복된다. 불연속적이고 파편적인 몽타주로 진행되던 영화는 시위의 경과를 포착하는 연속적 몽타주 아래에 놓인다. 수많은 인파의 자디스트들이 들판으로 모이고 경찰은 최루탄을 던져댄다. 드론 숏에서 보았던 구름의 풍경과도 같은 백색의 연기가 들판에 어른거린다. 그리고 우리는 이 시위의 현장에서 다시 한번 방향감각을 잃는다. 드론의 자유분방한 움직임이 공간의 방향감각을 교란했다면, 시위 현장의 안개는 시간의 방향감각을 교란한다. 이 들판이 가능적인 유토피아라면 우리는 이 반복되고 회귀하는 시위의 현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곳이 작은 우주들이라면, 우주의 시간 앞에서 길을 잃지 않는 방법은 무엇인가. 우주의 시간은 언제 시작했고 언제 끝날 것인가. 혹은 영화는 언제 시작했고 언제 끝날 것인가.
<다이렉트 액션>의 마지막 숏은 앞서 언급했던 전망대와 하늘을 올려다보는 숏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낮이 아니라 밤이다. 화창한 하늘과 구름의 풍경은 보이지 않고 어둠 속에서 회전하며 점멸하는 빛만이 전망대의 존재를 가늠할 수 있게 한다.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만 지니고 있던 이 전망대의 숏은 형태를 바꾸어 회귀한다. 그렇기에 이 마지막 숏은 시공간의 혼돈 속에서 유토피아를 찾아 헤매는 여정 끝에 '여전히 시간이 흐른다'는 것을 증명한다. 혹은 여전히 그 하늘은 그곳에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영화는 끝나지 않는다. 200분이 넘는 시간 끝에 점등하는 영화관은 조명, 혹은 그 영화관을 나오고서야 찾아오는 또 다른 세계의 빛은 어김없이 찾아올 또 다른 하루이자 그 뒤에 따라올 낮의 숏이다.
[글 김민세 영화평론가, minsemunji@ccoart.com]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