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챌린저스' 이 영화의 힙함은 무엇인가
'챌린저스' 이 영화의 힙함은 무엇인가
  • 이상용
  • 승인 2024.05.10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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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구아다니노, 미국 시대의 구아다니노"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그랜드슬램의 경기 중 하나인 'US 오픈'의 우승을 원하지만, 연패를 겪으며 좌절을 겪는 '아트'(마이크 파이스트)와 그의 아내 '타시'(젠데이아)가 새로운 도약을 위해 챌린저스 경기에 와일드 카드의 자격으로 참가한다. 챌린저스급 경기는 상대적으로 랭킹이 낮은 선수들이 참여할 수 있는 경기다. 이곳에서 부부는 '패트릭'(조쉬 오코너)을 만난다. 영화의 시작은 아트와 패트릭의 결승전 경기다. 두 남자 사이에 랠리가 오가고, 기묘한 카메라 워킹이 펼쳐지는 가운데, 두 남자를 지켜보는 타시의 시선이 끼어든다. 영화는 자연스럽게 현재의 경기에서 이들이 가까웠던 과거의 시절로 플래쉬백 된다.

플래쉬백은 단순한 과거가 아니다. 플래쉬백 장면들은 코트의 바깥이자 생활의 세계이다. 또한 한 여자를 둘러싼 두 남자의 승부이며, 현재 경기의 긴장감을 만드는 여전한 동력이다. 아트와 패트릭은 절친이었고, 복식팀을 꾸려 대회의 승리를 경험하기도 했다. 단식 경기를 앞두고는 승부에 저달라고 말한말큼 허물없는 사이이였다. 하지만 당시 가장 잘나가던(여러 측면에서) 테니스의 여제  타시를 눈앞에 두고 사랑의 경쟁을 펼치는 가운데 균열이 일어난다. 타시의 애정을 먼저 쟁취한 것은 패트릭(그는 경기의 승자이기도 했다)이었다. 하지만, 바람둥이 기질이 넘쳤던 패트릭은 테니스 경기에만 관심을 두고, 자신의 경기 스타일을 가르치려고 하는 연인 타시를 부담스러워한다. 두 사람은 다툼을 벌이고, 급기야 패트릭은 타시의 중요한 경기 관람에 불참한다. 타시는 이 경기에서 큰 부상을 당한다. 코트 위로 뛰어가 그녀를 돌본 것은 아트였다.

뒤늦게 병원을 찾아온 패트릭은 쫓겨나 버리고, 이때의 부상으로 인해 타시는 더 이상 경기장에 서지 못한다. 시간이 흘러 아트는 잠재력을 발휘하면서 승리를 쌓아간다. 아트가 자신을 찾아온 타시에게 제안한다. 이제 다른 선수의 코치를 하지 말고, 자신의 부코치가 되어 달라고. 타시는 아직도 자신을 사랑하는지 묻는다. 그러자 아트는 "어떻게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냐"고 말한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선수와 코치로 이어지는 동시에 부부가 되어 경력을 쌓아간다(경력을 쌓는 과정은 거의 생략되어 있다). 아트는 타시의 도움으로 호주오픈, 프랑스오픈, 윔블던을 모두 차지했지만, 그랜드 슬램의 마지막 조각인 US오픈 승리가 빈번히 좌절되었다. 어느새 아트는 자신감이 저하되었고, 신체능력도 내려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타시는 여전히 그랜드 슬램 혹은 US오픈의 승리를 희망한다. 이에 다시 도전하기 위해, 이기는 감각을 되찾는 방법으로 챌린저스급 경기 대회에 참여하기를 아트에게 권한다. 

타시는 아트에게 펼쳐질 앞날 앞에서 사업가와 선수 중 어떤 길을 택하겠는냐고 묻는다. 아트는 선수를 선택한다. 그것은 자의적으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선수의 선택만이 타시와 함께 할 수 있는(그녀는 진정으로 테니스만을 생각하는 인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챌린저스 대회에 참한 두 사람은 부랑자처럼 보이는 패트릭과 조우한다. 현재 그는 200위권 밖의 선수이며, 메이저 대회라면 만날 수가 없던 선수급이었다.

챌린저스는 영화의 제목이자 단순한 도전의 의미만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세 사람의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장소이며, 두 남자의 첫 대결을 재현하는 무대가 되며, 이들 사이에 존재했던 여전한 (성적) 긴장감과 은밀한 제안으로의 회귀를 가리킨다.

세 사람 사이의 욕망은 각자의 방식으로 불붙기 시작한다. 코트 밖의 긴장은 자연스럽게 코트 안으로 이어지며, 두 남자의 파이널 결승전이 이어진다. 그것이 은밀한 제안 때문인지, 타시를 지키려는 자와 빼앗으려는 자의 대결때문인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모든 것이 뒤섞인 채 숨 가쁘게 전환되는 코트 위의 경기와 플래쉬백 장면(후반으로 갈수록 몇 일전 주변에서의 일들이 펼쳐진다)이 숨 가쁘게 이어지고 반복된다. 남아있는 라운드의 숫자가 줄어들수록 두 남자는 네트를 향해 질주하며 랠리를 이어간다. 그것이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파국의 모든 것

<챌린저스>는 세 사람이 지닌 각자의 열정과 모호한 욕망을 표현하지만, 꽤나 친절한 영화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반복되는 구조는 전작들에 비해 단순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30분을 넘어 1시간 정도에 달하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플래쉬백 장면의 구성에 피로감이 오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플래쉬백의 영화라는 점에서, 남녀의 엉키는 관계를 다룬다는 점에서 조셉 L. 맨키비츠의 <이브의 모든 것>(1950)이 떠올랐다. 1950년대를 전후로 한 시기에 맨키비츠는 유명한 감독이었는데 그의 형은 <시민케인>(1941)의 각본가였다. 그를 다룬 핀처의 영화가 넷플릭스에 올라와 있는 <맹크>(2020)다. 아무튼 <이브의 모든 것>은 쇼비즈니스 세계의 앞면과 이면을 다루는데 잦은 플래쉬백이 활용될 뿐만 아니라 사건들의 본질을 담고 있는 것은 이면의 세계임을 보여준다. 또한, 베일에 가려진 모든 상황이 결국 여주인공 이브의 면밀한 계획이었음이 드러나는데 이 또한 타시라는 캐릭터와 비교할 수 있는 설정이다.

<챌린저스>에서도 경기장 실제 지배하는 것은 코트 밖의 관계들이자 과거의 사연들이다. 13년 전 두 남자를 동시에 침대 위로 끌어들일 수 있었던 타시는 여전하다. 챌린저스 대회의 참여한 두 남자를 자신의 방식대로 이끌고 있다. 그 가운데 아내에게 충실한 남자라 할 수 있는 아트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아내의 요구에 최대한 맞추고자 애를 쓴다. 이 과정은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기도 하다. 패트릭과 아내의 은밀한 만남을 직접 목격하였으면서도 침묵한다. 그는 경기 전 딸의 방에서 잠든 채 파이널의 전야를 보낸다. 그가 잠든 밤사이에 타시는 패트릭을 만나기 위해 호텔을 나선다. 

패트릭은 특유의 뻔뻔함과 능글거림으로 타시를 유혹한다. 타시가 그를 만나러 온 것은 결승전에서 아트에게 져 달라는 요구를 하기 위함이다. 그러자 패트릭은 하룻밤의 정사를 허락하면 경기에서 지겠다는 식으로 나온다. 두 사람 사이에 실랑이가 오가고 끝내 카섹스를 벌이기에 이른다. 그런데 이 장면이 패트릭의 일방적인 승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타시의 능력과 매력이 두 남자를 끝내 조정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그녀는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과감하게 이끌기도 하고 일부러 내어주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타시는 패트릭의 매력을 거부하지는 않는다. 막상 세 인물 가운데 누가 승리자이고, 누가 패배자인지 명확히 판단하기는 어렵다. <챌린저스>는 경기의 결과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경기의 전개에 충실하기 때문이다(실제로도 경기의 결과는 등장하지 않는다).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챌린저스>가 구아다니노 영화 중 가장 유사함을 보여주는 것은 <비거 스플래쉬>(2015)다(이 영화의 제목은 거대한 물결, 즉 파국이라는 뜻을 지녔다). 튀니지가 보이는 이탈리아의 남쪽 섬에서 펼쳐지는 네 남녀의 이야기는 현재의 상황과 과거의 사연이 교차하면서 욕망을 위협하고, 은밀한 정사를 기대하게 하며, 수영장에서의 살인사건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비거 스플래쉬>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네 남녀가 자신의 욕망과 질투와 시기심에 취해있을 때, 아프리카(튀니지)의 난민들이 섬으로 유입되는 외부의 현실이다. 텔레비전의 뉴스로도 등장할 뿐만 아니라 경찰서 앞의 시설을 통해서도 이러한 현실은 강조된다. 난민 혹은 불법 이민자들의 문제는 이탈리아(유럽)의 가장 큰 이슈 중 하나였다. 구아다니노는 자크 드레이 감독의 프랑스 영화 <수영장>(1969)을 리메이크하면서도, 장르적 관습에 충실하기보다는 외부의 현실을 영화 안으로 끌어당긴다. 섬의 현지 경찰은 이민자들이 일으키는 문제를 처리하느라 이들 사이에 벌어진 '살인사건'에 대해 심층적인 조사를 하지 않는다. 서장이 조사가 끝난 후 안심하고 돌아서는 마리안을 갑작스럽게 불러세워 요구하는 것은 유명 록스타의 사인 한 장이다. 그것은 코미디 같은 현실이다.

<챌린저스>는 오히려 자크 드레이의 <수영장>에 가깝다. 세 사람을 제외한 외부의 시선이나 뉴스의 논평들은 최소한으로 활용된다. 그리하여 <챌린저스>의 파문은 외부의 현실과 연결된 흔들림이나 살인이 아니라 안전한 수준의 치정극이라고 할 수 있다. 타시와의 관계를 지탱하려는 아트와 자신의 코치가 되어 달라며 뻔뻔하게 유혹하고 흔드는 패트릭이 있다. 이들의 모습은 각각 <비거 스플래쉬>에서 폴과 헨리를 떠올리게 한다. 타시는 모든 것을 손에 쥔 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려는 모습은 <비거 스플래쉬>에서 틸다 스윈튼이 연기하는 마리안과 닮았다. 마리안은 성대를 다쳐 휴양차 이곳에 왔고, 이때문에 대부분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거나 하지 못하는 것처럼 행세를 한다. 그에 반해 타시는 두 남자 사이를 오가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욕망이 무엇인지를 명백하게 드러내지는 않는다. 목소리를 잃었고, 더 이상 테니스 선수로 뛸 수 없다는 공통된 상황(욕망의 상실) 속에서 두 인물은 주변(모두 남자들이다!)을 이용해 자신을 유지하려고 든다.

그런데 두 영화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다. <비거 스플래쉬>에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유부남 폴을 유혹하고, 해리의 딸인지조차 의심스러운 페넬로페가 있다. 그녀는 폴과 해리 그리고 마리안이라는 과거와 현재가 이어지는 삼각관계를 뒤흔드는 인물로 등장한다. <챌린저스>에서는 다른 인물이 끼어들 틈이 없다. 마지막 장면에서 랠리를 주고받으며 네트를 향해 돌진하는 두 남자의 박진감을 통해 모든 것을 상쇄하려고 한다. 두 남자의 화끈한 대결을 지켜보다 일어서서 박수를 치는 타시의 모습은 코트의 지배자가 코트 바깥에서 관전하는 타시임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다. 어쩌면 그녀를 흥분시키는 것은 경기 밖 침대 위의 한 여자와 두 남자가 아니라 이로 인해 촉발되는 경기의 팽팽함과 박진감이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그녀는 이러한 경기를 보기 위해 챌린저스급 대회에 왔고, 자신을 두고 경쟁을 벌이는 수컷들의 팽팽한 싸움을 지켜보며 절정을 느낀다.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할 수 있다. 강렬한 충돌만이 모든 것을 만족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챌린저스>가 다루는 은밀함은 주로 말들을 통해 다뤄진다. 챌린저스 결승전에서 진다면 당신을 떠날 것이라는 타시의 말과 이번에 US 오픈에 참가하면 결과에 상관없이 그만둘거라는 아트의 말은 완전한 진심인지 아닌지 판단하기는 어렵다. 인물 간의 대화는 선수로서의 언어와 부부(연인으)로서의 언어가 뒤엉켜 있으며, 서로의 마음을 떠보고 흔들기 위한 미묘함으로 가득하다. 여기에 패트릭의 노골적이고 직선적인 언어가 더해지면 이들의 말은 진실이나 사실보다는 획책, 속임수, 회유, 고백 등으로 엉켜져 있다.

그것은 구아다니노 특유의 자연적 장면으로의 전환(<본즈 앤 올>(2022), <콜미 바이 유어 네임>(2017), <아이 엠 러브>(2009) 등 전작에서 흔히 볼 수 있는)이 아니며, 인물들의 망설임이나 기다림도 아니다. 멘키비츠의 <이브의 모든 것>(1950, 맨키비츠는 이 영화에서 마릴린 먼로를 캐스팅하여 등장시키기도 했다. 그녀는 미국 스크류볼 코미디의 대명사가 되었다)이나 미국 스크류볼 코미디의 에피소드를 보는 것처럼 훨씬 미국적인 영화로 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각색자인 저스틴 커리츠케스와의 협업 결과이기도 하다. 두 사람은 이미 <퀴어>에서도 함께 하기로 되어 있는데, 커리츠케스는 2019년에 소설 『페이머스 피플』을 내놓은 작가이기도 하고, <패스트 라이브즈>(2023)를 연출한 샐린 송 감독의 남편으로도 알려져 있다. 파국의 액션을 대신하는 말들의 향연은 곳곳에서 넘쳐난다. 그리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카메라 워킹은 훨씬 현란해졌고, 언어를 통한 대사들은 본 경기에 오르기 전에 주고받는 전희(그것이 스크류볼 코미디가 추구하는 본질이기도 했다)처럼도 보인다.

코트(court)에는 법정이라는 뜻이 있는데, 13년 전 침대 위의 세 사람이 테니스가 무엇이냐는 정의를 나눌 때 등장한 대사는 영화 전체를 함축한다. "테니스는 관계야!" 이들의 관계는 코트의 안과 밖을 오가는 관계이며, 세 사람 사이의 판사처럼 보이는 타시는 연인의 길보다는 코트 위 승자의 편에 설 것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판사는 판결을 내리기 위해 이들의 경기(코트)를 보아야 하고, 코트(법정) 밖에서 협상을 벌여야만 한다. 

 

이 영화의 힙함은 무엇인가

<챌린저스>를 보고 난 직후, 한 지인과 대화를 했다. 후반으로 갈수록 떨어지는 밀도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을 피력했다. 일부에서는 "힙한 영화로 칭송받고 있다"는 이야기도 전해 들었다. 돌아오는 길에 여러 리뷰를 읽어봤다. 루카 구아다니노의 친절함이 좋았던 것일까. 아니면, 이 영화에 다른 무엇이 있는 것일까. 서치하던 손가락 끝을 멈추고, 다시금 영화를 생각했다.

이 영화에는 분명 최근 영화에 볼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욕망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이다. 정치적 올바름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이슈로 21세기 할리우드 영화에서 퇴출된 것 중의 하나가 '섹스'다. 더 정확히는 섹스의 표현 수위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런데 구아다니노는 가장 핫하다고 할 수 있는 세 명의 선남선녀를 캐스팅해 그들의 치정극을 보여준다. 수위도 높였다(단순히 성기 노출 장면 때문이 아니다).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이 영화의 젠데이아는 연기를 제대로 하는 배우처럼 보인다. 분명 구아다니노의 능력이다. 타시는 자신의 욕망을 감추지만, 종종 과감하게 드러내는 인물이 되어 아트를 종용하고, 패트릭을 설득한다. 음흉하면서도 신비롭게 이들의 시선을 획득하고 시선의 주인이 되어 바라보며 때로는 모든 시선을 거부한다.

패트릭을 연기하는 조쉬 오코너는 종종 비루하고 비열하게 보이면서도 수염도 깎지 않은 채 매력을 발산하는 더러운 남자 혹은 나쁜 남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와 다른 편에 있는 마이크 파이스트가 보여주는 범생이 스타일의 눈동자와 미소는 또 다른 긴장감을 형성한다. 과거 두 남자는 '불과 얼음'이라는 별명으로 환상의 복식조를 이뤘다. 두 남자를 향해 누가 불이고 누가 얼음이냐는 타시의 질문에 대한 답을 듣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패트릭이 불이고, 아트가 얼음이다. 문제는 이들의 관계가 파국으로 치달은 것은 불과 얼음을 모두 갖고자 했던 테니스 여제의 욕망 때문이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그녀의 통제는 단순한 조절의 결과만이 아니라 이 사태를 일으킨 모든 것의 원인이기도 하다. 이러한 관계망을 통해 세 인물의 캐릭터와 욕망을 구체적으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그 수위가 꽤나 노골적이라는 점에서 <챌린저스>는 최근 영화의 흐름을 부수며 간다.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그것은 루카 구아다니노 영화의 특징이기도 했다. 부자집을 박차고 나와 아들의 친구와 연인이 되는 <아이 엠 러브>의 결말은 상투적인 부르주아 계급의 탈출기처럼 보이지만 아들의 장례식에서 결단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도발적이다. <콜미 바이 유어 네임>을 거쳐 가장 최근 영화이자 그의 영화 중 실패작이라 불릴 만한 <서스페리아>(2018)는 시대의 저항의식으로 충만해 있다. 1970년대 베를린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서스페리아>는 구독일 세대의 종말을 보여주는 작품이자 미국인이자 이방인인 수지가 최고의 마녀 서스페리오룸의 현신임이 밝혀지면서 구세대를 처단해 버리는 결말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 은근히 깔린 1970년대에 대한 향수는 <챌린저스>에서도 오코너의 모습과 스타일을 통해 연상되기도 한다. 그의 모습은 도널드 서덜랜드와 같은 1970년대 반문화의 상징이었던 남성 캐릭터를 연상시킨다. 젠데이아는 70년대적이기보다는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뒤 등장한 <귀여운 여인>(1990)을 벗어던진 줄리아 로버츠의 변신작 <에린 브로코비치>(2000)처럼 똑똑하고 현대적이며 자신이 주도하는 여성상을 보여주고 있다.

'반문화의 감수성과 캠프적 감수성이 뒤엉켜 있는 구아다니노의 세계가 어떻게 미국 영화 속으로 편입될 것인가' 하는 것은 미국에서 작업하는 그의 영화에 있어 중요한 핵심일 것이다. 미국으로 진출한 구아다니노의 첫 작품이 사회에 편입하지 못한 채 정체를 숨기며 살아가야 했던 잇터를 그리는 <본즈 앤 올>(2022)이었다면, <챌린저스>는 주류 사회에서 서로의 욕망을 잡아먹는 부르주아들로 차원을 옮겼다. 아마 가장 어려운 지점은 전작처럼 욕망의 파국을 통해 상대의 뼈까지 어떻게 씹어 먹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겠지만, 이번 작품은 부르주아의 세계를 다루는 만큼 수위가 약해졌다. 그럼에도 반문화의 코드를 수용하는 감독이라는 점에서 최근 할리우드의 흐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음은 분명하다.

아메리칸 뉴 시네마로 대변되는 미국 뉴웨이브 시기의 영화들과의 유사성은 이야기에 충실하기보다는, 스타일의 과잉이나 잉여의 장면을 통해 영화 전체를 환기시키려는 시도를 보여주는 것인데, <챌린저스>는 동시대 관객들에게 감정의 과잉, 언어의 과잉, 그리고 시각적 과잉을 통해 일정한 호소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덧붙여 영화에 사용된 음악들은 팝 일색이 아니라 이탈리아의 노래와 가사들이 뒤엉켜 등장하면서, 긴박한 상황을 스타일화하고 즐기려는 전략이 뚜렷하게 느껴진다. 단순히 비교하자면 마이클 니콜스의 아메리카 뉴 시네미의 대표작 <졸업>(1967)에서 주인공 벤자민이 부모님의 친구인 로빈스 부인과 깊은 불륜에 빠져 있을 때 나오는 음악 중 하나가 사이먼 앤 가펑클의 경쾌한 음색이 담긴 "미시즈 로빈슨"이 활용되는 것과 유사하다. 앞으로 등장할 <퀴어>와 같은 영화에는 이러한 요소들이 훨씬 노골적이고 보다 철학적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작품의 원작자가 1950년대와 60년대의 문학적 아이콘이자 반문화의 표상이라 부를 수 있는 '윌리엄 버로스'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조금 더 깊어질 수밖에 없는 원작의 선택은 구아다니노가 걸어갈 선택의 폭을 예상하게 한다.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코트 위의 연인들 

많은 이들이 공통적으로 상찬하는 것 중의 하나가 테니스 경기를 가장한 로맨스물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스포츠 영화의 역사가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고, 많은 스포츠 영화 경기의 박진감을 구현하기 위해 영화를 만드는 것도 아니다. 스포츠의 세계를 다룬 다큐멘터리가 늘어나는 것은(넷플릭스는 (스포츠) 다큐가 주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경기 자체를 보여주는 것 이상의 현실적 박진감은 없기 때문이다.

이 영역에서 새로워야 하는 것은 '스포츠 이면의 세계가 어떤 새로움을 다룰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타시가 선수생활이 좌절된 이후 아트를 향한 집착과 열망이 무엇인지 은근히 비춰지기는 하지만 부부 사이의 은근한 갈등으로 깔아둘 뿐 더한 드라마를 구축하지는 않는다. 이따금 타시의 라이벌 선수였던 테니스 여제의 모습을 곳곳에서 전시하지만, 이들의 관계도 희미하게 던져진다. 아트가 사우나실에서 마주친 패트릭을 향해 성기를 치우라며 은근한 질투심과 경계를 드러내는 장면이 있지만 절친이었던 두 남자의 우정과 배신도 다가오지는 않는다. 

여러 측면에서 <챌린저스>는 꽤 노골적인 데 꽤나 은근하게 감추는 거나 다루지 않는 것이 많은 영화다. 이 기묘한 태도는 구아다니노가 예민하게 선택한 결과일까. 아니면 자신의 저항적 스타일과 미국 영화의 보수성이 만나 이뤄진 자연스러운 결과일까. 경기에서 승리를 거두는 것. 사랑에서도 승리하는 것. 그것을 위해 달려가야 한다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지만 그것을 드러낼 때의 인물들은 감정은 노골적인 장면들 이상으로 숨기고, 비밀스럽게 다룬다.

<챌린저스>에는 <콜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엘리오가 갑작스럽게 올리버의 성기 부분에 손을 대는 것 같은 것이 없다. 침대 위에 두 남자를 끌어올리는 장면이나 세 사람의 키스는 꽤나 노골적이기는 하지만 전작들에 비한다면 오히려 조심스러워 보인다. <아이 엠 러브>에서 산 레모의 산장에서 벌어지는 한낮의 정사와 같은 뜨거움은 없다. 이 영화는 전반적으로 차갑다. 한 여자와 두 남자의 관계를 허락하는 폴리아모리적인 요소가 깔려 있지만 그것은 일정한 저항선을 두고 있다. '나는 사랑이다'라고 외쳤던 <아이 엠 러브>의 탈출기에서 이 영화는 아주 멀리 나가지 못했다.

조금 센 척하며 "나도 사랑이고, 너도 사랑이고, 이것도 사랑이야."라고 말하는 것을 은근슬쩍 깔아놓은 채 확실한 마침표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저 한 여자를 두고 두 마리의 수컷이 13년 동안 이들의 욕망이 여전하다는 것은 얼마나 현실적인 세계일까. 13년 동안의 욕망이 여전하다는 것은 과연 어느 정도 구체화될 수 있는 세계일까. 타시의 제안대로 패트릭은 정말 승부 위에서 저 줄 수 있을까. 아트는 감정을 억누른 채 자신의 힘만으로 상대를 제압할 수 있을까. 이 모든 것은 또 다시 플래쉬백으로 밀려난다. 아마 해답을 보기 위해서는 미래의 플래쉬백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을 채우는 것은 욕망의 대답이 아니라 욕망의 열정을 향한 박수와 환호다.

[글 이상용 영화평론가, poema@ccoart.com]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챌린저스
Challengers
감독
루카 구아다니노
Luca Guadagnino

 

출연
젠데이아 콜먼
Zendaya Maree Stoermer Coleman
조쉬 오코너Josh O'Connor
마이크 파이스트Mike Faist

 

배급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제작연도 2024
상영시간 131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4.04.24.

 

이상용
이상용
 1997년 『씨네21』 2회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영화 비평을 시작했다. 부산국제영화제와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를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 『봉준호의 영화 언어』, 『영화가 허락한 모든 것』, 공저로 『씨네쌍떼』 『30금 쌍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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