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코의 평형추>는 다큐멘터리 감독 유코(타카우치 쿠미)를 중심으로 두 축의 사건을 다룬다. 이 사건들은 서로 무관한 듯 미묘하게 영향을 끼치는 데다 선과 악, 앎과 모름, 진실과 거짓, 이성과 감성, 판명과 모호, 정의와 탐욕 등의 경계에서 ‘평형’을 유지하며 좀처럼 기울어지지 않는다. 때문에 하나가 풀리며 다음으로 나아간다기보단 이 관계가 거듭 뒤집히며 발생하는 힘으로 운동하는 영화다. 유코의 아버지 마사시(미츠이시 켄)가 운영하는 학원생 메이(카와이 유미)는 "나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어?"하고 묻는다. 이 대사는 끝없이 어그러지는 영화의 암담한 현실과 역설을 이룬다. 유코 역시 질문에 쉬이 답하지 못한다. 그것은 단지 자기 아버지와 메이의 임신 사이에 명확한 단어를 배치하지 못하는 하나의 상황 때문만이 아니다. 3년 전, 어느 여고생과 남교사의 자살 사건을 좇으며 진실과 믿음 따위의 보편어들이 누군가의 삶 안에 깊숙이 자리할 때, 외려 현실을 얼마나 비관하게 만드는지 목격해 왔기 때문이다. 대치됨으로써 필연적으로 엮이는 두 사건 가운데 놓인 경계를 논한다.
그 경계에서, 이면을 직시하려는 서사를 전개하며 카메라, 그 장치와 가깝게 붙은 인물 설정은 어쩌면 당연하게 연상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저는 누구의 편도 될 수 없어요. 다만 빛은 비출 수 있어요"라는 유코의 말처럼 <유코의 평형추>는 매 순간 무언가를 힘주어 응시하는 인물의 눈, 본다는 것의 본질을 영화적으로 숙고하게 만드는 카메라를 전면화해 시선의 물질적인 층위를 사유케 한다. 그 과정에서 카메라가 지닌 중의성, 이를테면 가려진 실상을 기록하며 은폐된 무언가를 밖으로 꺼내는 것인지, 전체를 프레임 틀로 규격화해 바깥으로 밀어내는 것인지 등에 관한 가치 판단은 윤리적인 것의 일부가 되고자 하지만 정의롭다는 말로 단언 불가한 주체의 애매성(ambiguity)을 드러내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유코가 유족의 집을 촬영하는 대목을 보자. 아들이 누명(가르치던 학생의 불온한 관계)을 쓰고 자살했음을 주장하는 유족은 사건 이후 거의 죽은 듯 생활한다. 신상이 알려지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유족의 요청과 달리 유코는 집의 외관을 카메라에 담는다. 은둔의 생활을 가시화하는 실내 역시 이미지로서의 가능성을 지닌 부분만을 선별해 담는다(예컨대 유족의 잠자리는 카메라에 담기지 않는다). 말하자면 특정 이미지의 필요성을 제3자의 눈으로 판단하거나 인터뷰 대상자의 반응을 도출하는 일종의 연출적 상황을 부정하지 않는다. 전체를 포괄하려는 시선은 불가피하게 전체를 파편화하게 된다는 점, 그 파편을 재구성할 때 진실이 형상을 갖추게 된다는 점, 거기엔 일관된 축으로 규정할 수 없는 인간의 태도 또한 개입됨을 부인하지 않는다.
영화는 촬영된 영상물의 원본, 곧 어떤 ‘사실’을 훼손 또는 변형하는 것은 다큐멘터리 송출권을 거머쥔 언론 세력의 압박뿐만이 아님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는 유코가 진실이라는 강력한 외부를 응시하려 함과 동시에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는 것, 내적인 신념의 충족을 욕망하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양쪽 세계 어느 곳으로도 ‘자신’ 전체를 포함시키지 않는다. 두 사건과 연관성을 가지고 인식하지만 어느쪽으로도 더 깊숙이 기울지 않는다. ‘누구의 편’을 들어서는 안 된다는 말은 점점 이 애매한 경계가 강화되는 모습을 보충한다. 사실상 우리는 유코 자체에 대해 분명히 알기 어렵다. 영화엔 자살 사건의 유족들에 몰두하는 유코 그녀의 경위가 모조리 제거되어 있다. 관객은 인물의 어떤 구체적인 계기와 목적, 삶의 입체성 안에서 만들어진 심연의 깊이를 따라간다기보단 무작정 영화의 세계와 부딪히는 쪽이다(유코가 메이의 문제를 대할 때, 여기 자살 사건이 미치는 무의식적 영향을 고려하면 더 분명해진다). 그녀가 합리성을 거부하고 다수의 시스템이 거짓이라고 믿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에 관해선 차라리 유코의 본능을 논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무리에서 소외된 메이의 곁에 다가선다. 메이가 성매매를 자처했다는 소문은 죽음의 위협이 다가오는 순간 무력해진다. 아버지의 과오에 대한 유코의 뒤늦은 고백은 ‘죽음-피해’라는 본능적 인식과 단단히 결부된다. 이 영화가 애초에 죽음과 은닉된 진실 사이의 끈끈한 관계성을 의심하지 않게 만들며 시작한 건 차라리 인간의 무의식적 발로를 건드는 방법이다.
그런가 하면, 인간성에 대해 다루고 있으나 무엇도 정의 내릴 수 없는 이유와 카메라는 어떤 상관성을 지니고 있을까. 말하자면 <유코의 평형추>의 카메라는 하염없이 나빠지는 쪽으로의 참극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그 내부에 빈틈없이 밀착되지 않으려는 의지로서 모종의 거리감을 확보한다. 먼저, 영화는 감정적으로 감당키 어려운 문제를 다루지만 정념의 폭발을 강박적으로 저지한다. 카메라가 거칠게 요동치거나(핸드헬드) 시야를 흩뜨리며(아웃포커스) 감정적 심도를 암시할 때면, 끝내 인물은 프레임을 벗어나고 장치는 사라지는 대상 앞에서 우두커니 서 있다는 사실만 생생해진다. 그것은 시각적 감각을 능가하는 범주로까지 이어진다. 영화는 인물보다 앞서 존재하며 의식불명의 메이를 만지려는 유코의 손을 저지한다. 불법 임신중절을 종용하며 메이의 눈을 가렸던 유코는 이제 그녀를 보는 것 말고는 무엇도 할 수 없다. 경계를 넘어 가닿지 못하는 손은 영화의 카메라 앞에서 죄책감의 제스처가 된다. 렌즈가 메이의 얼굴을 꼼꼼히 응시하며 ‘만지는’ 듯한 느낌(촉지적 감각)을 제공한다면, 그건 대상과 가장 가까운 유코의 손이 물리적인 근접성에도 그것을 만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렌즈 표면, 곧 카메라라는 장치는 죄책감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특히 얼굴이 제거된 채 촬영되는 유가족의 몸은 그 윤리적 의도와 달리 일면 섬뜩하다(화면 위 모자이크를 덧댄 형상이 아니라는 점). 프레임 밖으로 목이 절단된 형상은 정념을 수용하지 않는다. 인물 사이엔 적막감이 자주 형성되고 애매한 광도로 비춘 공간은 대부분 가능한 소수 인원으로 구성되어 텅 비어있다. 무척 이성적이지만 그 이면을 알 수 없단 점에서 그만큼 불안하기도 한 것이다. 이는 생기를 상실한 인물들의 삶을 현실적으로 가시화하는 요소일 뿐 아니라 가시적 진술의 불가능성을 암시하는 카메라의 제스처가 충돌한 결과이기도 하다.
대상을 보고 있으나 그것이 ‘볼 수 없는 무언가’에 불과하단 점, 혹은 그 반대의 관계는 어떻게 형상화되고 있는가. 감독 유지로 하루모토는 (영화와 유코의) 두 개의 카메라 간 일치성을 강박적으로 저지하며 서로 다른 시선(관점)을 나란히 제시한다. <유코의 평형추>는 유코가 직접 카메라를 손에 쥘수록 촬영한 그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카메라를 든 유코의 몸짓을 보는 이 영화의 시선이 존재할 뿐이다. 유코는 진실을 물으며 아버지의 앞에 카메라를 작동시킨 채 대화하지만 그들 중 카메라를 응시하는 이는 없다(상대의 얼굴을 똑바로 보거나, 차마 얼굴을 들 수 없는 몸짓). 그것은 마치 흔들리는 이성을 붙잡기 위한 장치로 기능한다. 하지만 이러한 강박적인 위치에도 불구하고, 신체성과 떨어질 수 없는 건 카메라일 것이다. 아버지와의 대화 다음으로 이어진 컷에서 그녀는 화면을 등진 채 욕조를 닦고 책상에 가만히 앉아있다. 책상 모니터에는 얼굴이 지워진 채 녹화된 유족의 인터뷰 영상이 재생된다. 상대를 향하던 유코의 목소리("가족으로서 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는 노골적으로 화면에 흐른다. 동떨어진 두 세계의 이미지와 사운드는 시공간적 간격을 뚫고 (그것도 우연성에 기대) 영화의 카메라, 하나의 화면 안에서 포개어진다. 얼굴 없고 말 없는 몸짓은 무언가를 감추려는 쪽에 가깝지만 카메라는 신체를 기민하게 포착하며 장치와 결부시킨다. 영화의 강력한 물질로서 인간의 신체성이 장치를 완벽히 벗어나는 일이란 가능한가. 카메라는 거듭 사라지고 무력해지는 진실과 믿음을 붙잡기 위한 장치로서 끊임없이 역설적 관계를 반복한다. 결국 <유코의 평형추>는 현상하는 것을 파헤치는 구조 안에서 시점(관점)을 넘어, 비가시적 인간의 종합적 역량을 묻는다.
보는 행위가 방황하는 한편, 극의 후반부로 접어들수록 듣는 행위가 결정적 역할을 수행한다. 유코는 여고생의 아버지를 찾아가 설득하기 위해 촬영물 하나를 재생한다. 앞서 언급했던 남교사 어머니의 집을 촬영한 것인데, 실질적으로 남자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그 집의 풍경이 아닌 영상물에 녹음된 유족의 음성(사건 이후 숨어 사는 암담한 심정을 털어놓은 목소리)이다. 이것에 주목하고픈 까닭은 촬영이 이루어지는 그 현장에서 중요하던 요건은 공간을 에워싼 침묵이며, 녹음된 목소리는 현실을 기록하려던 인물들의 의도가 깨지면서 밖으로 나온 말이기 때문이다. 물론 목소리에 이끌려 여고생의 아버지는 직접 만든 빵을 건네고, 이를 받아든 남교사의 어머니가 그것을 음복하듯 먹는 순간 감도는 위무의 정서는 의심하기 어렵다. 하지만 개인의 심정이 과도하게 크기를 부풀리고만,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게다가 소리가 중요한 또 다른 장면은 남교사의 또 다른 유족이 새로운 진실을 털어놓던 대목이다. 남교사의 누나는 동생의 유서를 유리한 방향으로 조작했음을 고백한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남교사가 누군가를 성폭행했음을 안내하는 소리이다. 앞서 형성한 모든 과정과 관계와 신념은 찰나에 무의미해진다. 그리고 유코는 그 소리가 가리키는 진실이 아닌, 용서를 비는 유족의 고백, 그 고백에 알 수 없는 복잡함을 느끼면서 진실을 외려 묵인한다.
위의 소리는 장치를 몸체로 가질 뿐 특정 시공간에 결부되지 않는다. 달리 말해 재현된 시각적 이미지가 없다. 따라서 <유코의 평형추>의 소리가 자극하는 건 미확정적 영역이다. (시청각 요소가 결합된 복합적 감각 대상이 주어질 때보다) 감각 주체의 지각과 느낌이 보다 자유롭게 개입된다. 진실을 쉽게 조작해 버리는 지극히 인간적인 것들. 돌이키면 유코는 오프닝 장면에서 유족을 인터뷰하며 "여기서 무엇을 느끼나요?" 물은 적 있다. 죽은 딸이 자주 찾던 강변에서 아버지는 이렇게 답한다. "글쎄, 눈앞의 풍경, 차가운 공기. 히로미가 본 것, 느낀 것들". 영화의 카메라도, 유코의 카메라도 강변의 풍경을 담거나 그 온도가 어떤지 가늠하려 하지 않는다. 시간적 간격을 거친 ‘지금’, 불분명하고 실체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해당 인터뷰 물음의 목적 또한 이를 겨냥한다. 유족의 사라지지 않는 고통을 감정적으로 호소하려는 것. 다만 적어도 이 장면은 유코에게도 다큐멘터리에 ‘필요하다’는 의식에 의해 촬영된 것이며, 그런 느낌이 더 이상 동일하게 반복될 수도, 현재성을 가질 수도, 진실로서 기능할 수 없다는 것만큼은 분명한 쪽이었다. 유코가 아버지를 향해 카메라를 겨누며 강조하던 것도 추상성이 아닌 구체성이었다. 하지만 서서히 무엇을 느꼈는지가 중요해지려고 한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더 중요해지는 건 명확성이라기보단 가능성이다. 너무나 많이 열어젖혀 있어서 어떠한 진실과 믿음도 버티고 있지 못하는 불확정성. 이를 조금은 비관하자면, 세상에 영구적인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우리가 ‘본 것’ 그것에 대해 ‘느낀 것’을 믿어보는 것, 기준을 상실하는 것만이, 믿음이라 부를 만한 것이 아닐까. 무엇을 믿을 것인가의 문제에서 얼마나 제대로 믿을 것인가의 문제가 된다. 영화는 계속해서 확신을 주지 않는 쪽으로 치달으며 결국 다른 무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개입시키는 것이야말로 어떤 믿음을 추동시키는 방법임을 제시한다. 즉 불투명하고 미약한 것, 잠재되어 인식할 수 없는 것이 적극적으로 뒤섞일 때, 세계는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균형을 확보한다는 점. 이 영화가 비극적 사건을 멈추지 않는 건 자극성 때문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볼 수 없는 가능성을 확보하는 한 방법인 셈이다.
그 경험을 전적으로 제공하는, 이 영화의 엔딩에 대해 말해야 한다. <유코의 평형추>는 유코가 카메라 렌즈 뒤에 위치하는 것으로 시작해 카메라 렌즈 앞으로 이동하는 영화다. 아니, 정확히는 렌즈 앞으로 이동할 것인지, 그 가능성을 점치며 끝난다. 유코는 메이의 아버지에게 그간의 진실과 이를 묵인하려 했음을 고백한다. 분노한 메이의 아버지는 유코의 목을 조른다. 이때 화면에 보이는 건 주변 물체에 교묘히 가려진 두 신체 부분의 격렬한 몸부림이다. 이마저도 카메라는 계획적으로 시선을 바닥으로 낮추며(틸드다운) 인물들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각도로 밀어넣는다. 이 모든 상황이 롱테이크로 연이어 전해지는 가운데, 유코가 의식을 잃자 메이 아버지는 황급히 프레임 밖으로 벗어난다. 영화는 그 뒤로 아주 긴 시간을 할애해 미동 없는 인물의 다리를 보여준다. 움직임이 실종된 그 다음을 기다리는 이 시간은 무겁다. 고작 몇 초의 차이가 인물의 생사를 결정짓는 죽음이라는 극단이 끼어들어 있어서다. 늘 존재해 왔으나 극단적 형상을 갖추게 되어서야 절실히 체감되는 것으로써 시간, 그리고 진실의 동형적인 지점을 발견케 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유코가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과정에서도 ‘몇 초’는 무의식을 건드는 상당한 결정권을 쥐곤 했다. 가령 인터뷰이의 침묵이 이어질 때, 그것이 얼마나 길고 짧은지, 불과 몇 초 차이에 따라 전혀 다른 인식을 불러온단 점에서 그러하다.
따라서 이쯤에서 우리는 롱테이크에 관해 함께 말해야 한다. 153분의 적지 않은 상영 시간 동안 좀처럼 서두르는 기색이라곤 찾을 수 없는 <유코의 평형추>는 의외롭게도 시간을 재촉하는 현장 스태프의 시계를 비추며 처음 시작된 바 있다. 인물이 촬영하는 행위가 장면 안에서 실시간으로 이뤄질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그 안의 시간과 스크린 바깥 현실의 시간이 동시적으로 흐른단 점이다. 롱테이크는 영화와 극장의 시간적 동시성을 제공한다. 때문에 리얼리티의 맥락 아래 주제 의식을 강화하는 주요 방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유코의 평형추>의 롱테이크, 곧 시간성에서 더 중요한 건 지속되는 시간의 깨지기 쉬운 성질이다. 즉 롱테이크가 현실적인 무언가를 전한다면, 깨짐의 성질이다. 롱테이크가 무거운 건 단지 물리적 길이 때문만이 아니다. 영화적 조건 내에서 시간은 아무리 그것이 길에 이어져 왔다고 해도 영원성을 가지지 않는다. 연속성은 반드시 깨진다. 깨지기 때문에 영화인 것이다. 관객은 롱테이크만으로 ‘리얼’을 본 것이 아니다. <유코의 평형추>는 시간성을 통해 지속되지 않는 신념, 이성의 무력감이 곧 구체적 현실이 되어가며 파편화되는 관계, 앎의 무가치성에 대해 화두를 던진다. 눈앞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를 파악한다는 것에 관여하는 순수성은 동시에 그 물리적 단순성이 가지는 순수성을 어떻게 타진하는가. 물리적 현상을 파헤치면서 그 이면의 비가시적인 심부의 충돌, 그 작동 양상을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 촬영 행위가 기록물을 남기는 것으로써 시간을 극복하는 한편, ‘카메라 앞에 놓인 것’의 상태에 해당하는 현재성을 관객이 고스란히 경험하는 일이란 가능한 것인지 묻는다.
현재화의 양태인 시간성은 지금 거기의 지각적 경험을 발견케 한다. 죽은 듯한 화면을 진동시키며 나타나는 건 아주 미약한 신호다. 유코가 숨을 내쉬고 몸을 일으키는 느리고 작은 움직임이 나타난다. 그녀는 조용히 자기 카메라를 작동시킨다. 그 기계음은 너무도 낮고 찰나이며 여전히 가려진 시야 너머에서 그녀가 무엇을 향해 렌즈를 겨누었는지 알리지 않는다. 유코는 그간의 혼돈을 끝내고 자신을 향해 물음을 던질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영화는 관객의 시선에서 끝끝내 무엇도 보여주지 않으며 막을 내린다. 강조하건대 여기서 우리의 감각을 예민하게 잡아끄는 건 거대한 진실과 신념의 깊이가 아니다.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는 사실, 그러나 저 너머에서 무언가 벌어지고 있다는 비가시성의 기운, 무언가라는 무력한 표현 안에 자리한 잠재적 가능성의 도출이다. 이것은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느냐는 메이의 물음에 대한 비극적 대답(원점)만은 아닐 것이다. 보이는 것도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닌 이 시각적 구도는 이토록 확신을 가질 수 없는 사태를 통해 ‘물음’을 멈추지 않게끔 기능하고 있으므로. 이 사실을 신중하게 곱씹고 싶다.
[글 변해빈 영화평론가, limbohb@ccoart.com]
유코의 평형추
A Balance
감독
유지로 하루모토Yujiro Harumoto
출연
타키우치 쿠미Takiuchi Kumi
미츠이시 켄Mitsuishi Ken
카와이 유미Kawai Yuumi
우메다 마사히로Masahiro Umeda
제작연도 2021
상영시간 153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4.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