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th JIFF] '고코구 신사의 고양이들' 관찰자의 시선이 주는 안온다정함
[25th JIFF] '고코구 신사의 고양이들' 관찰자의 시선이 주는 안온다정함
  • 김경수
  • 승인 2024.05.07 11: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꽁꽁 얼어붙은 카메라 위로 고양이가 걸어다닙니다"

고양이 한 마리가 카메라로 다가오더니 촬영용 붐 마이크 커버를 장난감 삼아서 갖고 놀기 시작한다. 이윽고 고양이를 말리는 감독의 음성이 들려온다. 고양이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마이크에 냥냥펀치를 날리는 데에 열중이다. 그다음에야 카메라는 항구 우시마도의 초여름 풍경을 회화를 보는 듯한 구도 안에 담는다. 멀리서 우시마도 곳곳과 달팽이 등 자연물을 조망하던 카메라는 20분 가까이 계속 그곳에 사는 고양이의 일상을 포착한다. 대화가 거의 등장하지 않기에 무성영화를 보는 듯하다. 그다음에야 신사에 사는 고양이를 돌보는 마을 주민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일본의 다큐멘터리 거장 소다 카즈히로의 신작 <고코구 신사의 고양이들>(2024)은 <굴 공장>(2015)과 <항구 마을>(2018) 등 그의 근작에서 로케이션으로 등장한 우시마도의 한가운데에 있는 신사 고코구를 배경으로 한다. 이번 영화는 <멘탈>(2008) 등의 작품으로 일본의 복합적인 사회적인 문제를 주로 다루었던 그의 필모그라피와는 다소 결이 다르다. 작품 중간에 감독의 대사로 드러나듯이 이 작품의 주인공이 고양이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 영화는 길고양이의 탄생과 죽음에 초점을 둔다. 새끼 고양이로 시작하더니 죽은 고양이의 장례식을 치르고 애도하는 마을의 풍경을 담으며 끝난다. 마지막에는 그곳에 버려지는 새로운 고양이를 담는다. 또한 영화가 끝날 즈음에는 그곳에 버려진 새로운 고양이를 클로즈업한 뒤에 크레딧에 카메라에 담긴 고양이가 대부분 죽었음을 암시한다. 이처럼 고코구라는 신사 아래서 고양이와 자연이 순환하는 과정을 그려낸 셈이다. 여기에 고양이를 둘러싼 마을 사람의 이야기와 고양이 중성화에 대한 논의도 등장한다. 물론, 이 영화에도 곳곳에 지방소멸 등 일본의 사회적 문제가 은연중에 그려진다. 다만, 고양이를 관찰하는 중에 자연스레 딸려서 나오는 주제에 가깝다. 정확히는 감독이 어쩌다가 포착한 것으로 보인다.

 

소다 카즈히로의 스타일은 처음부터 드러난다. 카메라는 고양이가 카메라와 시선을 마주칠 수 있도록 눈높이에 정확히 가져다 댄다. 또 고양이가 다가와 돌발상황을 일으키는데도 카메라를 가만히 두며 첫 구도를 유지한다. 감독은 자신의 개입을 최대한 배제하며 상황을 통제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는 그가 다큐멘터리를 촬영할 때 고수하는 열 개의 원칙과 맞닿아 있다.<고코구 신사의 고양이들>에도 그가 설정한 원칙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1. 자료 조사하지 말 것.

2. 주체와 미리 만나지 말 것.

3. 스크립트를 쓰지 말 것.

4. 카메라를 내 손으로 직접 촬영한다.

5. 가능한 한 촬영을 오래 한다.

6. 작은 지역을 깊게 다루어라

7. 편집하기 전에는 테마나 목적을 설정하지 마라

8. 나레이션과 자막, 혹은 음악을 덧붙이지 않는다.

9. 롱테이크를 사용하라.

10. 제작에 쓰이는 본인을 본인이 충당하라.

소다 카즈히로는 작은 지역을 깊숙이 관찰한다는 미시사회학적인 관점을 고수한다. 또한 독립적인 프로덕션과 작품을 Vimeo에서 판매하는 유통 구조를 고집하며, 타인의 의도에 따라서 촬영한 대상을 왜곡하지 않으려 한다. 나아가 거기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자 음악과 나레이션, 자막 등 화면 바깥의 개입을 차단한다. 작품의 플롯이나 목적도 따로 정하지 않으며, 스크립트 또한 배제하며 무엇보다 대상을 멀찍이 오래 촬영한 다음에 편집하는 과정에서 주제를 설정하며 대상을 미리 판단하지 않으려 한다. 그의 영화를 하나의 주제로 정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온갖 주제와 오브제에 발을 걸치는 이 다큐멘터리는 정리되기를 거부하는 매력적인 구성으로 이어져 있어서다. 필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촬영한 대상을 향한 존중에 공감하며 이 감독의 태도를 살피는 것뿐이다.

 

카즈히로의 카메라는 고양이를 포착하는 데에 더없이 어울린다. 고양이야말로 개와 달리 길들이지 않는 야생성을 상징하는 동물이어서다. 고코구 신사가 소개될 때 마을 주민은 고양이의 이름을 부른다. 그 고양이가 사라졌는지, 죽었는지에 대한 정보가 제시되지 않는다. 프레임 속 고양이의 움직임은 담을 수 있더라도 프레임 밖에 있는 고양이의 행방은 미지수로 그려진다. 이는 자연의 속성과 맞닿아 있다. 감독의 사유는 고양이를 촬영한 숏 중간중간에 삽입된 곤충과 나무 등 자연물을 드러내는 인서트 숏으로 드러난다. 고양이는 자연물 전체를 환유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고양이는 영화 중간에 뜻하지 않게 들이닥친 태풍과 비슷하다. 영화는 기어이 자연의 불확실성을 따라가려고 한다.

카즈히로는 고양이를 타자라는 언어에 가두지 않고 그들을 그대로 관찰한다. 특히 고양이가 20분 가까이 나오는 초반부는 카메라가 고양이를 따라가기만 하는데도 온갖 소동극이 포착되어 무성영화를 보는 듯한 재미를 안긴다. 카즈히로는 고양이에게 생기는 수많은 사건을 에피소드 단위로 포착한다. 다만 감독은 TV 동물 다큐멘터리와 다르게 나레이션으로 고양이나 고양이를 보는 관객의 감정을 직접 지시하지 않는다. 또 고양이의 여러 비슷한 행동을 몽타주하며 고양이를 서사의 주체로 만들지 않는다. 한 고양이 다음에 어떤 고양이가 등장하는지에 대한 논리가 부재해 있다. 고양이와 고양이 사이에 연속성이 없기에 고양이들의 이야기를 하나의 서사로 연결하기가 힘들다. 이때 카즈히로는 관찰자로서의 태도를 드러내고자, 1인칭 시점을 최대한 배제하려고 한다. 이 영화는 감독이 손수 촬영한 작품인 만큼 감독의 1인칭 시점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 물론, 감독은 자연을 찍을 때만큼은 감독의 1인칭 시점을 자제하려고 애쓴다. 인간을 인터뷰할 때만 전면화된다. 자연을 찍을 때는 시점을 자유롭게 설정하며 자연에 녹아들려고 한다. 예외적으로 고양이가 프레임을 벗어나려 할 때만 핸드헬드로 움직일 뿐이다. 다만 핸드헬드를 하더라도 자연물을 정중앙에 포착하려는 욕망은 없다.

이러한 관찰자의 태도는 자연과 일정한 거리감을 두어야만 가능하다. 감독이 고양이에게 두는 거리는 감독이 머무르는 집에 계속 들어오는 고양이 차타를 통해서 드러난다. 차타는 카즈히로가 머무는 집에 계속 침입한다. 이는 고양이와 인간 사이의 관계를 함축한다. 고양이가 프레임에 들어오는 일은 고양이에게는 더없이 자연스러운 행동이지만, 감독에게는 당황스러운 일이다. 처음 차타가 왔을 때만 하더라도 감독은 차타를 바깥으로 보낸다.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지 않음으로 그를 길들지 않으려는 것이다. 태풍이 올 때만, 감독은 고양이에게 자신의 집 현관을 내준다. 고양이의 생명을 지키는 윤리적인 선 안에서만 자연을 담으려고 하는 감독의 태도가 여기서 드러난다. 이러한 태도 때문인지 고양이의 야생성과 공격성을 제외한 무균실에 온 듯한 안온다정함이 느껴진다.

 

감독은 고양이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같은 논리를 적용한다. 자연물이 저마다의 논리로 움직이듯이 인간사도 저마다 목적을 지니고 움직일 뿐이라는 듯이. 영화 중반에 접어들 즈음부터 감독은 마을 사람이 길고양이와의 공생을 목적으로 고양이를 포획해 중성화 수술을 시키는 광경을 그린다. 그때 여러 마을 주민의 인터뷰가 담기 시작한다. 감독이 인터뷰 대상으로 삼는 인터뷰이는 무작위로 골라진다. 신사에 매일 식물을 심고 물을 주러 오는 늙은 화학공장 직원, 매일 밥을 주러 오는 젊은 여성, 마을에 달마다 고양이 사진을 촬영하러 오는 아마추어 사진가 등 그저 그 인근을 어슬렁거리는 사람이 인터뷰 대상이 된다. 이 가운데 고양이를 아끼지 않는 이도 있고, 이 신사가 덜 알려져야 한다며 이 다큐멘터리의 촬영을 넌지시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감독에게 언제부터 감독을 꿈꾸었냐며 되물으며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사람도 있다. 감독은 이 모든 사람을 조망하며 각자가 지니는 서사를 중심화하지 않는다. 지방소멸과 노령화 사회, 관광으로 인한 생태계의 파괴, 심지어 전범국이었던 일본의 과거에 대한 비판적인 죄의식까지 담는다. 다만 그 어떤 것도 중심이 되지 않고 우연히 등장한다. 이처럼 파편적인 구성으로 감독은 일본 사회를 모자이크화로 그리되 개입하지 않는다.

<고코구 신사의 고양이들>은 파편적인 구성과 수많은 서브플롯으로 인해서 이 감독을 처음 접한 관객에게는 난삽하다는 인상을 줄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을 넘어서 자연의 순환을 관찰하려는 이 관찰자로서의 태도가 주는 매력만큼은 분명하다. 영화 곳곳에 등장하는 고양이와 회화를 보는 듯한 미장센도 눈을 즐겁게 한다. 그 나머지는 영화를 보는 관객이 발명해야만 하는 몫이다. 소다 카즈히로의 영화가 안기는 영화적 체험은 바로 거기에 있는 듯하다.

[글 김경수 영화평론가, rohmereric123@ccoart.com]

김경수
김경수
 어릴 적에는 영화와는 거리가 먼 싸구려 이미지를 접하고 살았다. 인터넷 밈부터 스타크래프트 유즈맵 등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모든 것을 기억하되 동시에 부끄러워하는 중이다. 코아르에 연재 중인 『싸구려 이미지의 시대』는 그 기록이다. 해로운 이미지를 탐하는 습성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영화와 인터넷 밈을 중심으로 매체를 횡단하는 비평을 쓰는 중이다. 어울리지 않게 소설도 사랑한 나머지 문학과 영화의 상호성을 탐구하기도 한다. 인터넷에서의 이미지가 하나하나의 생명이라는 생각에 따라 생태학과 인류세 관련된 공부도 하는 중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