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회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리모노프>(2024)의 감독 '키릴 세레브렌니코프'는 러시아 당국의 집요한 핍박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체제 비판적인 작업을 이어가는 시네아스트다. 세레브렌니코프의 영화는 아주 혼란스럽고 난해한데, 그 이유를 '풍경'에서 찾을 수 있다. 세레브렌니코프의 영화 속 배경은 울적한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거나, 낙후되어 어둡고 우중충하며, 극도로 폐쇄적인 경우가 잦다. 이 장소성이 세레브렌니코프가 바라보고 체감하는 러시아 그 자체다.
이토록 제한적인 배경에 갇힌 등장인물들은 '욕망'에 극도의 갈증과 허기를 느낀다. 이들의 욕망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스튜던트>(2016), <레토>(2018) 등의 원동력인 '표현의 자유', 다른 하나는 <비트레이얼>(2012), <페트로프의 감기>(2021)에서 폭발하는 '에로티즘'이다. 등장인물이 욕망을 대하는 태도 역시 두 형태로 갈린다. 욕망이 실제인 양 상상하거나, 현실에서 일단 저질러보지만 검열을 피하기 위해 바로 그 사실을 부정한다. 거짓은 현실인 양 둔갑되고, 사실은 금세 가상으로 후퇴하는 것이다. 그 욕망들이 겹겹이 쌓여가며 감상자뿐만 아니라 등장인물조차도 본인들의 행위가 사실이었지, 아니면 한갓 백일몽이었는지 분간할 수 없게 된다. 세레브렌니코프는 현실/가상을 엄격하게 나누지 않는 '편집'으로 체제 속에서 욕망의 강박증에 걸린 러시아인의 의식을 가시화하며, 이러한 연유로 그의 영화는 뒤죽박죽 어지럽다.
예술가임과 동시에 자유로울 수 없었던 표토르 차이콥스키(오딘 룬드 바이런), 시대와 이념에 가로막혀 욕망이 좌절된 안토니나 밀류코바(알리오나 미하일로바)의 격정적인 관계를 탐구한 <차이콥스키의 아내>에서도 세레브렌니코프의 카메라는 쉴 틈 없이 현실과 상상을 오고간다. 이 영화는 '차이콥스키의 장례식'으로 시작된다. 차이콥스키 생전에 안토니나는 이혼을 한사코 거부하며 관계가 개선될 수 있으리란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모든 조건이 안토니나에게 불리했지만, 일단 그가 살아있고 마음이 변할지도 모르니 '차이콥스키의 아내'로 불릴 수 있는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제 망자가 된 차이콥스키가 벌떡 일어나 "저 여자는 왜 왔어? 난 당신이 싫어"라며 그녀를 힐난한다. 차이콥스키의 죽음으로 안토니나가 아내로 불릴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조차 말소된 것이다. 그의 목숨은 신이 앗아갔고, 그 절대자만이 이혼을 선고할 수 있다고 안토니나는 내내 주장해왔다. 그런데 안토니나는 그 신이 갈라놓은 관계마저 부정하는 듯, 이후 영화는 '플래시 포워드', 곧 과거로 되돌아간다.
끝끝내 이 영화는 안토니나가 차이콥스키의 사망 소식을 접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되는데, 그 이후엔 도입부의 장례식으로 되돌아가 다시 플래시 포워드되며 '뫼비우스의 띠'를 이룬다. 그 이유는 안토니나는 차이콥스키의 아내여야만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존재가 까맣게 지워지기에, 그녀는 상상과 회고의 루프에 갇힌다. 안토니나는 장례식 참석에 앞서 '미망인'으로서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독자적인 계획을 세웠고, 숏에 독립적으로 위치했었다. 그런데 정작 장례식에서 무수한 인파의 시각과 발화로 가득 찬 롱테이크-롱숏을 이겨내지 못한다. 야외에서는 안개, 실내에서는 어둠에 잠식된 안토니나는 상복을 입은 수많은 조문객들과 구분되지 않는다. 자신의 생각과 달리, 부군의 장례식에서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니기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본격적인 플래시 포워드가 시작된 이후에도 안토니나는 대체로 어둔 곳에 위치한다. 어두컴컴한 것을 넘어서 '비'까지 내린다. 차이콥스키가 공연을 마치고도 그녀 곁으로 돌아오지 않을 때, 사샤(바르바라 슈미코바)가 안토니나에게 차이콥스키는 네가 생각하는 남편이 아니라고 충고할 때, 결말에서 차이콥스키가 콜레라로 사망했을 때,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안토니나가 원하는 모습을 씻겨내고 그녀를 흐리게 만든다.
어둠 속에 파묻힌 그녀는 늘 주체성을 침해당한다. 하지만 그녀는 "시집이나 가는 게 남는 장사"인 당대 성 역할 및 관행을 거부한다. 자신이 경제적 손해를 입더라도 욕망에 충실한 결혼을 하고자 하며, 남자보다 높은 자리에 선 후견인, 여교장으로 우뚝 서고 싶었다. 자아를 따르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상황에서 그녀는 더더욱 흐려지는 것이다. 이런 그녀가 연회에서 차이콥스키를 만난다. 안토니나가 거주하는 누추하고 열악한 환경과 달리, 당대 유럽 문화의 메카 파리를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한 차이콥스키의 연주회는 아주 환해서 모든 것이 잘 드러난다. 시대 속에서 안토니나는 여성이 음악가로 성공하기가 참 어렵다고 말한다. 그래서 안토니나는 차이콥스키를 발굴하고 후원하며 음악가로서 욕망을 간접적으로 충족하고 싶었던 것일 지다. 더욱이 그녀는 난생 처음 제 '육체'의 지시를 솔직하게 따르며 차이콥스키에게 적극 구혼한다. 연애편지를 쓰고 보호해 주겠다고 선언하는 쪽이 안토니나다. 이렇게 욕망을 따르는 안토니나는 자욱하던 어둠을 몰아내며 뚜렷하게 우뚝 선다. 안토니나가 음악원에서 차이콥스키를 몰래 흠모하며 쳐다볼 때, 날카롭고 환한 빛이 감상자의 동공을 찌를 기세로 흠뻑 쏟아지며 그녀는 명료해진다. 차이콥스키가 사샤에게 쓴 편지를 아직 읽지 않았을 때, 다시 말해 그가 안토니나의 곁으로 돌아올 거란 '희망'이 잔존할 때 불이 켜진다. 망상 속 식당에서 차이콥스키와 재회할 때도 촛불과 횃불이 자욱하다.
이 빛은 차이콥스키의 유·무로 결정된다. 안토니나는 자신을 따르면서도 타인을 필요로 하는 이중적인 욕망을 갈망하기에 불꽃은 늘 불안정하다. 차이콥스키 본인도 아닌, 그가 보낸 하잘 것 없는 편지 한 장에 빛과 어둠이 결정될 정도다. 그런데 차이콥스키 없이도 한 차례, 빛이 아주 충만했던 씬이 있다. 안토니나가 차이콥스키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음악원에서 배운 피아노 연주를 사샤의 자녀들에게 뽐낼 때다. 즉 남성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여성은 제 잠재력으로 충분히 빛날 수 있지만, 당대의 이데올로기는 여성이 광명을 자기 내부가 아니라 남성에게서 찾도록 강제한 시대였다. 하지만 그들한테도 여성이 찾는 빛은 존재하지 않는다. 음악원에서 입으로는 '해돋이'를 말하면서도, 정작 문을 쾅 닫으며 안토니나의 동공에 내리쬐는 햇빛을 차단해버리는 자가 차이콥스키다. 가부장제의 일반적인 남성들에게 여성은 도구이지 결코 태양이 아니다. 차이콥스키는 안토니나의 '재력'에 눈독을 들이고, 또 게이로서 '스캔들'을 잠재우기 위해 그녀를 도구로 삼아 결혼했다. 이후 안토니나의 집착과 기대 이하의 재력에 실망하며 신경쇠약에 걸리자 그녀와 상의도 없이, 이혼을 툭 통보한다. 소송을 할 때, 변호사 실리코프(블라디미르 미슈코프)는 안토니나가 원치 않는데도 합의를 강요하거나, 그녀 곁에 매달리며 동거하는 듯하다. 안토니나가 차이콥스키에게 매달리며 이혼을 부정할 땐 그녀의 따귀를 때리고, 결국 안토니나는 실리코프의 아이를 세 번이나 출산한다.
안토니나는 현실에서 어떻게든 부당한 가부장제를 극복해보려고 발악했다. 실질적인 가장인 어머니(나탈리아 파브렌코바)가 동의는커녕 신랄하게 무시하더라도 꿋꿋하게 차이콥스키와의 혼인을 주도한다. 차이콥스키가 내던진 이혼서류에 서명하지 않고 끝까지 버텨보려 했지만, 여권이 낮았던 당시에 그녀는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전무했다. 그렇다고 해서 호락호락하게 낙담하고 싶지도 않았기에 그녀는 내면, 곧 꿈과 망상으로 도피한다. 즉 여성이 주체성을 실현할 수 있는 출구가 가부장적인 현실에 전무하니, 지독한 망상 장애가 이어지는 것이다. 반면 남성은 내면이 아니라 외부를 바라볼 수 있다. 차이콥스키는 안토니나와 사진 촬영을 할 때, 그 현장이 갑갑하다는 듯이 자꾸 시선을 돌린다. 그러다가 영화를 감상하는 우리들, 곧 현실을 응시한다. 그는 '제 4의 벽'을 뛰어넘어서 현실을 개척할 수 있다. 실제로도 차이콥스키는 별거 이후 음악가로서 순풍을 탄다. 반면 안토니나는 실리코프의 아이까지 낳았지만 그들을 모조리 고아원에 보내는 등 현실을 부정한다. 그렇게 만들어낸 '빈자리'에 차이콥스키와의 만남이란 허상을 채워 넣는다.
안토니나가 차이콥스키와 밀회를 갖는 가상의 롱테이크는 현실의 시간과 별 차이가 없다. 영화의 1초는 현실에서도 1초다. 그런데 영화 내 현실을 반영한 롱테이크는 되레 가상적인데, 길고 긴 시간을 한순간으로 축약하기 때문이다. 안토니나가 차이콥스키를 기다리는 기차역, 그로부터 진실을 전해들은 사샤의 집, 실리코프의 죽음 등 안토니나가 원치 않는 순간에 사용된다. 그녀는 '디졸브'까지 동원하여 몇 시간, 며칠씩 걸리는 방대한 시간을 한순간으로 압축한다. 끔찍한 현실의 시간을 가상화하여 단번에 몰아낸 이후, 현실과 유사한 시간성을 갖춘 망상적 롱테이크를 대신 채워 넣는다. 차이콥스키와의 재회와 키스, 가족사진 촬영 등은 사실과 정 반대지만 시간의 흐름만큼은 정상적이기에 감상자가 혼동하기 쉽다. 이 상상은 현실의 재료에서 비롯됐기에 사실처럼 호도된다. 차이콥스키의 콘서트, 그와 함께 찍은 사진과 결혼반지, 그의 생존 여부 등이 소재다. 그런데 안토니나는 화재로 반지를 유실했고, 차이콥스키도 사망한다. 망상의 재료조차 모조리 빼앗긴 그녀가 택하는 최후의 수단이 무한한 플래시 포워드의 굴레인 것이다. 그녀는 '있을 미래'가 아니라 '있었던 과거'에 갇힌다. 망상 장애에 빠진 그녀들은 시간을 개척할 수 없다.
심지어 상상 속에서도 안토니나는 절대 구원받지 못한다. 간절함에서 피어난 현실 도피적인 상상은 끔찍한 진실과 전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안토니나는 차이콥스키가 아주 위대한 음악가인지도 몰랐다. 또 니콜라이(미론 페도로프)와 사샤가 차이콥스키의 성 지향성을 직간접적으로 알려주는데도 불구하고 끝없이 고개를 휘젓는다. 심지어 안토니나의 얼굴과 쏙 빼닮은 성당 앞의 광인은 "죽은 그의 아내가 바로 나다"라며 그녀의 미래를 예언한다. 실제로 안토니나는 말년에 정신병원에 수감되었지만, 그 모든 사실을 부정하고 '상상 속의 남자'의 마음이 자신과 같을 거라 속단하며 파멸의 길을 걸었다.
물론 안토니나가 구원으로 여긴 결혼이 무언가를 내어주기는 한다. 결혼 직후 안토니나는 차이콥스키의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 행 열차에 올라탄다. 기차 안의 '복도'는 좁고, 부부가 머물 '객실'은 넓다. 후자가 결혼의 대가다. 그런데 객실은 쾌적하고 편하긴 하지만 부부의 마음을 조금도 달래지 못한다. 차이콥스키에게 진정 좋은 곳은 좁아서 남성들 간에 스킨십이 자연스레 이뤄지는 복도다. 이로써 정신이 다른 데 팔린 차이콥스키는 객실에서 안토니나를 외롭게 한다. 널따란 공간엔 공허만이 채워진다. 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 거리를 걸을 때도, 부부가 나란히 걷는 장면은 '렌즈 플레어'가 번쩍이기에 신비롭고 아름다우나, 정작 차이콥스키는 함께 있고 싶은 음악원의 남성 동료들과 멀어지게 된다. 그들의 결혼식은 분명 아름다웠다. 그런데 이 아름다움이 과연 그들 자신에게 좋은 것일까. 결혼반지는 반짝이지만 차이콥스키의 손가락에 도무지 껴지질 않는다. 고통스러운 그들을 바라보는 하이앵글, 곧 안토니나가 누누이 외치는 절대자의 시선에서나 아름답다. 그 절대자는 안토니나의 기도에 응답하여 차이콥스키를 불러왔다. 동시에 그 현장에서 소나기를 답하였다. 절대자는 안토니나의 욕망을 씻겨내는 것이다. 신께선 그들이 희생을 자처하며 바란 보상을 내어줄 마음이 전무하다.
이로써 현실을 부정하고 꿈으로 도피하게 되는 안토니나의 의식을 세레브렌니코프는 특유의 혼란한 연출로 가시화한다. 망상이 현실을 기어코 잡아먹는 후반부의 휘몰아치는 연출이 발군이다. 다만 영화에서 정교회 역시 망상의 기원으로 계속 언급됨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해악을 상세하게 분석하지 않는다. 이로써 140분이 넘어가는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을 빼먹은 듯한 찝찝함을 남긴다. 또한 안토니나의 절망을 승화한 클라이막스는 그저 오페라를 그저 안일하게 촬영해놓은 영상에 그친다. 곧 안토니나라는 여성의 출구를 굳이 영화로 가시화해야 할 명분을 잃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세레브렌니코프의 이전 작품들에 비해 내적으로 다소 빈곤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글 박정수 영화평론가, green1022@ccoart.com]
차이콥스키의 아내
Tchaikovsky's Wife
감독
키릴 세레브렌니코프Kirill Serebrennikov
출연
알리오나 미하일로바Alyona Mikhailova
오딘 런드 바이런Odin Lund Biron
배급 엣나인필름
상영시간 143분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개봉 2024.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