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화라는 매체의 표현과 내용 전달 방식은 여전하지만, 이를 소비(수용)하거나 관람하는 방식은 달라졌다고들 말한다.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수용의 변화에 대한 많은 입장 표명은 은근한 위기론이다. 계속해서 천만 영화들이 나오고는 있지만, 소비의 장소가 더 이상 극장이 아니다. 덕분에 영화를 집중적으로 관람하지 않는다. 산만한 관람은 기본이고, 영화에 대한 많은 이해의 방식은 유튜버의 요약본에 의존할 때도 많다.
반대의 견해도 만만치 않다. 유튜브를 중심으로 문화의 형식들이 빠르게 변화하는 과정에서 보다 다양한 영상 제작의 방식과 소비의 방식이 생겨났다. 오히려 오늘날은 그 어느 때보다 영상의 시대다(영화의 시대는 아닐지라도). 지금은 과도기에 해당하지만, 적응되고 나면 보다 다양한 형식의 영화 제작과 수용이 이뤄질 것이다. 뤼미에르 시대의 초기 영화(early cinema)도 오늘날의 유행과 비교해 보면, '쇼츠'로 분류하여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다. 초기 영화와 현재를 비교했던 영화학자 토마스 앨새서의 '영화 고고학'의 입장이 이론의 차원을 넘어서 구체적인 현실이 셈이다. 오늘날의 쇼츠는 영화사 초기로의 회귀이자 '뉴트로(Newtro)'다.
영화 수용 형태의 변화에 따른 위기론이든, 긍정론이든 모두 들여다볼 구석이 있다. 문제는 "이러한 변화가 철학적으로 우리의 지각과 세계에 대한 인식을 어떻게 이끌 것인가"하는 질문이다. 여전히 벤야민의 기념비적인 논문으로 꼽히는 『기술적으로 복제가 가능해진 시대의 예술작품』은 사진과 영화로 대변되는 복제 예술의 대중화가 일어나는 가운데 인간의 지각적 경험이 달라질 수밖에 없음을 여러 지점에서 기술한다. 몽타주의 충격, 스타 숭배, 메스와 같은 카메라 등이 가져올 지각 경험의 변화는 기존의 것을 파괴할(그것이 바로 아우라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혁명의 가능성을 품을 수 있다.
미술관에서 회화를 관람하던 관객과는 달리 영화의 관객은 정신이 '산만하지만' 여전히 '시험관'의 태도를 지닐 수 있다. 새로운 대중(관객)을 가리켜 산만한 시험관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사실 서로 충돌하는 두 경험의 방식을 한 인간 안에 오롯이 포개어 넣은 셈인데, 오늘날 멀티 창을 띄워 놓고 카톡을 하며, 음악을 듣고, 동시에 웹툰을 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벤야민 자신의 예상이 옳았다고 박수를 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날의 관객은 산만한 시험관이 아니라 21세기를 사는 또 다른 영화 인간들이다.
이들에 다가가기 위해 영화는 매체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다. 과거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제임스 카메룬의 <타이타닉>(1997) 시사회였는데, 지금은 사라진 삼성생명 본관 지하에 위치한 '씨넥스'라는 극장에서였다. 이곳은 무엇보다 음향시설이 훌륭했다. 이안의 <와호장룡>(2000) 시사회의 기억이 또렷하다. 양자경이 장쯔이와 대결을 펼치며 각종 병기를 휘두를 때 소리의 원근감이 극장 내부를 웅하는 소리를 따라 감돌며 확연하게 구현되었다. <타이타닉>도 마찬가지였다. 배가 침몰하면서 배가 잘려 나갈 때의 공포와 스펙터클은 시각적인 것 이상으로 생생한 소리로 전달되었다.
그런데 <타이타닉>을 언급하는 것은 사라진 극장의 향수를 가져오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 시기에 극장을 갈 수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비디오 출시 기간을 기다려야만 했다. 기다리던 <타이타닉>이 출시되었을 때 보도자료의 특별함이 기억난다. 제임슨 카메룬은 비디오 시대에 맞춰 영화를 다시 편집했다. 비디오 플레이어와 연결되어 있는 텔레비전의 화면을 통해서도 선체의 붕괴와 생생함을 전달하기 위해 사이즈를 재조정하고, 배의 전체보다는 부분을 강조한 편집의 조각으로 재조립하였다. 카메룬은 그렇게 생각했다. 비디오에 맞춰, 영화는 재편집되어야 한다고.
#2
카메룬의 재편집은 보통의 사람들에게 다가기기 위함이다. 오늘날 영화 "수용의 방식, 소비의 방식, 관람의 방식에 있어 달라졌다"고 하지만, 정작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짚어서 이야기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웹툰을 보는 지하철의 풍경을 떠올려보자. 눈과 함께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은 손가락이다. 손가락 끝은 부지런히 이미지를 스크롤하고, 스킵하며, 한 회를 빠르게 소비한다. 과거와 다른 속도의 증가 때문에 점점 가속화되는 속도가 지각 변화에 핵심이라고 말하고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산업혁명 이후 모더니즘이 앞세운 것 중의 하나가 속도의 증가였고, 대중들은 이러한 속도에 몸을 쉼없이 맞춰왔기 때문이다.
과거 같으면 십 분 정도 소요될 툰(만화)의 소비가 핸드폰에 담긴 웹툰을 통해 보는 데에는 1분이면 충분하다. 그것은 점점 더 가속화될 것이다. 눈의 빠른 적응은 더 이상 정보를 보는 것이 아니라 표면의 정서만을 강조한다. 인간이 깊이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한데, 속도의 증가는 깊이보다는 정보의 양과 넓이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이끈다. 무엇보다 속도의 증가는 테크놀로지의 증가와 깊은 관련을 맺는다. 이제 일상이 된 무제한 데이터의 사용은 웹툰을 비롯한 OTT와 유튜브 소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여러 개의 창 혹은 멀티 태스킹을 통해 정보의 깊이가 아니라 정보의 양적 증가에 적합한 형태에 집중해 왔다.
지금까지 무제한 데이터 요금제를 사용해 본 적이 없는 필자의 경우는 이러한 지각의 요구에 대해 살짝 비껴있다. 핸드폰의 데이터가 제한되어 있다보니, 자주 버벅대는 지하철의 와이파이를 다 사용하고 느린 속도로 연결되는 무제한 데이터를 사용하고는 한다. 덕분에 자주 경험하게 되는 데이터 관련 현상은 버퍼링이다. 굳이 영상을 클릭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는다. 자연스럽게 버퍼링이 일어날 확률이 적은 콘텐츠를 소비하거나 핸드폰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는 대신 가방이나 주머니에 집어넣기도 한다. 그런데 오늘날 주요하게 상실되어 가는 것은 데이터의 정보량 자체가 아니라 버퍼링의 종말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현재 5G를 앞세우지만, 모르긴 몰라도 더한 것들이 나올 것임이 분명하다. 그것이 무엇으로 불릴지는 모르겠지만 부정적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는 오늘날의 버퍼링이야말로 예술의 가장 중요한 측면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3
시를 보자. 시는 말들의 숲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시의 형식은 말만으로 빼곡히 채워져 있는 것이 아니다. 연과 연 사이, 행과 행 사이, 단어와 단어 사이에 놓인 빈 공간이 존재한다. 그래서 이 공간을 삭제하기 위해 어떤 시는 일부러 띄어쓰기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리 말들을 빼곡히 이어놓아도 시를 읽기 위해서는 자연스럽게 말과 말 사이를 떠올린다.
연과 연 사이에 놓인 공간은 시의 전개에 있어서도, 변화에 있어서도 핵심적이다. 사이 혹은 공간은 하나의 말을 다음 말과 연결하면서 확장시키고 변형하며 상상의 영역을 일으킨다. 행과 행도 다르지 않다. 한 행에서 시적 화자가 한 진술은 다음 행에서 반복되는가 하면, 변주가 일어나기도 하고, 전혀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기도 한다. 단어와 단어도 마찬가지다. 말의 '사이'는 그 어떤 말보다도 역동적이고, 화려하며, 날선 침묵이 있다.
말과 말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 혹은 공간의 침묵은 울림통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말과 말 사이가 넓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말과 말 사이는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이를 지닐 때도 있고, 아예 말들이 종말을 맞이해 버린 밀도 높은 침묵으로 이뤄져 있기도 하다. 독자 혹은 시인은 말들의 숲에서 비로소 숨쉬거나 달아나거나 사유할 수 있는 장소를 사이를 통해 허락받는다.
우리는 이 공간, 이 침묵, 이 사이를 버퍼링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버퍼링은 부드러운 이음매를 단절시키면서 작품 속에서 덜그럭거리고, 매끄럽지 않게 만들며, 불편함을 초래한다. 이것이야말로 시의 공간이 원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오늘날 시가 읽히지 않는 것은 시인들의 부재나 무기력함이 때문만이 아니다. 오늘날의 문화가 빈 곳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버퍼링을 혐오하는 시대에 시는 외떨어져 있다. 버퍼링을 본질로 삼아 언어를 드러내고자 하는 시의 시도는 독자들로 하여금 많은 노력을 요청한다. 버퍼링을 사유하라는, 버퍼링이라는 사유를, 버퍼링이라는 본성 혹은 본질을.
#4
아래는 이성복의 초기 시집 「남해금산」에 수록된 '당신은 짐승, 별,'이라는 시의 전문이다.
당신은 짐승, 별, 내 손가락 끝
뜨겁게 타오르는 정적
외로운 사람들이 따 모으는 꽃씨
외로운 사람들의 죽음
순간과 머나먼 곳,
異邦의 말이 고요하게 시작됩니다
당신의 살갗 밑으로 大地는 흐릅니다
당신이 나타나면 한 개의 물고기 비늘처럼
무지개 그으며 내가 떨어질 테지만,
시의 행과 행이 얼마나 넓게 공간을 만들어내는지는 조용히 읊조려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공간은 넓고 깊어서 우리는 손쉽게 우주를 상상한다. 그것은 현실의 남해금산일 뿐만 아니라 고대의 남해금산 혹은 신화적 공간일 수 도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첫 행을 살피는 것은 흥미롭다. 첫 행은 시의 화자가 당신(연인일 수도 있고, 다른 존재일 수도 있다)을 인식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처음에 당신이 화자에게 낯설고 두려운 '짐승'과도 같았지만, 어느새 마음에 들어와 동경이 일어나면서 저 멀리 있는 '별'처럼 인식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짐승이나 별이나 근본적으로 먼 거리에 있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다음의 시어다. "내 손가락 끝." 내 손가락 끝은 얼마나 가까운 거리인가, 아니면 내 눈에서는 얼마나 먼 거리인가.
현상학적 환원이라 부를 만한 것을 통해 시인은 당신을 인식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단어와 단어 사이를 넓히놓고, 당신은 다른 당신이 아니기에 '쉼표'로 연결하면서 "짐승, 별, 손가락 끝"의 변화와 동일성을 이어간다. 동시에 짐승과 별 사이에, 별과 손가락 사이에 버퍼링을 확보한다. 시어의 공간을 만든 것은 시인의 노력이지만 이 공간을 온전히 따라가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독자는 부드러운 휘핑크림을 잔뜩 뿌려 연결해 주지 않으면 쉽게 공간을 삼키려 들지 않는다. 부드럽게 스크롤 되지 않거나 버퍼링이 일어나거나 불편함(존재론적, 사유적)이 초래하면 금새 지워버린다. 그것이 스킵(skip)이다.
#5
스킵은 문화 전반에 걸쳐 일어나고 있다. 웰빙의 유행과 함께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식재료가 환영받게 되었지만, 이것을 소비하는 '웰빙'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불편함은 제거되어 있다. 자연적 식재료의 본질이 덜그럭거림임을 이해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기본적으로 생식이 불편한 것은 자연 자체이고, 그것은 쉽게 환원되거나 수용될 수 없는 성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먹는 쌀은 도정이 된 것이다. 그것은 쌀의 겉면을 깎고 다듬어서 매끄럽게 넘길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덜 깎인 쌀이 바로 현미다. 현미는 먹기에 불편하다. 하지만 건강을 의식해 현미를 먹는다. 하지만 현미를 먹기 위해서는 백미를 먹을 때보다 다섯 배 이상의 씹기를 해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백미를 먹는 것만도 못한 독소가 발생하기 쉽다. 우리의 몸은 이미 백미에 적응한지 오래이고, 밀가루 음식이 탄수화물의 대명사가 된 것은 쌀에 비해 훨씬 부드럽기 때문이다.
진정한 웰빙이란 불편함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지만 웰빙이라는 이름을 단 재료들은 기성의 식품들처럼 가공된다. 자본주의적 상업적 웰빙은 불편하지 않은 웰빙이어야만 한다. 결국, 우리 앞에 등장하는 것은 매끄러운 웰빙이다. 이때 강조되는 것은 원재료의 성질이 아니라 자연에서 온 재료라는 환상이다. 그러나 가공된 것은 이미 자연이 아니다. 자연을 전시한 인공이다.
웹툰을 보며, 인스타그램을 확인하며 손가락은 빠르게 움직인다. 그 손가락 끝이 타오를지는 몰라도 "정적"은 없는 손가락이다. 시 속에서 당신은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처음에는 짐승이 되고, 별이 되고, 손가락이 되어 끝내 타오르지만 웹툰의 읽기는 침묵과는 거리가 멀다. 빠르게 확인하고 넘길 수 있어야 한다. 거기에는 침묵이 사라진다.
애초의 웹툰에는 장면과 장면 사이에 간극이 있었다. 만화책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장면과 장면이 프레임 씌어져 분리되고 거리를 만들어 낸다. 그런데 오늘의 웹툰은 최대한 화면을 연결하여 부드럽게 잇는다. 장의 차이를 거의 느끼지 못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부드럽게 이어지는 '이세계물'의 전쟁을 목격한다. 부드러운 전투 장면은 더 이상 덜그럭거리거나 비참한 세계를 인식시키거나 사유시키지 않는다.
철학자 한병철은 『아름다움의 구원』에서 매끄러움과 덜컹거림을 대비시킨다. "매끄러움은 현재의 징표다. 오늘날 우리는 왜 매끄러움을 아름답다고 느끼는가? 매끄러움은 미적 효과의 차원을 넘어서서 하나의 사회 전반적인 명령을 반영한다. 다시 말해 오늘날의 긍정사회를 체현하는 것이다. 매끄러운 것은 상처를 입히지 않는다. 어떤 저항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좋아요, like를 추구한다. 매끄러운 대상은 모든 부정성이 제거된다."
동시대성에 대한 이러한 통찰은 한병철만의 것만은 아니다. 폴란드의 철학자 지그문트 바우먼의 "유동하는 현대성"에서도 이러한 매끄러움이 특징이 담겨 있다. 중요한 것은 매끄러움의 추구가 궁극적으로 목표로 삼는 것은 부정성의 제거에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정치,경제 등의 문제로 확산된다. 부정성이 제거된 세계의 예술은 젠더적 이슈도, 계급적 문제도, 표현의 이슈도 모두 거세한 채 부드럽게 나타난다. 그것은 부드럽게 이슈를 표현했다는 것만으로도 각광받는다. 하지만 예술의 본질은 부드러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까칠함에 있으며, 모두가 부드럽게 눈감는 것들의 문제 제기에 있다.
매끄러움의 추구는 한병철의 지적처럼 동시대에 브라질리언 왁싱의 유행을 만들어 냈고, 하마구치 류스케 영화의 '위생성'이라는 문제를 생각할 수 있게 하며, 박찬욱의 최근작 <헤어질 결심>(2022)에서 이전과는 그토록 달랐던 이유를 깨닫게 한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따라온 독자의 입장에서는 탕웨이와 박해일이 주연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흔해빠진 정사 장면 하나 없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이 영화가 과거의 박찬욱과 얼마나 달라졌는가는 단순히 정사 장면에 국한되지는 않겠지만 달라져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동시대 예술가의 절박함은 중요한 필수적인 과제가 되었다. 오늘날 <올드보이>(2003)는 물론이고, 훨씬 멀리 간 <복수는 나의 것>(2002)이나 그보다 온화한 <친절한 금자씨>(2005)는 도저히 시도할 수 없는 시나리오가 되었다.
#6
매끄러움의 추구에는 무서운 진실이 있다. 얼마 전 학생들에게 어째서 '섹스'라는 말을 쓰지 않고, '야스'라고 쓰는지를 물어보았다. "야와 섹"은 얼마나 다른 단어인가. 야스로 대체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효과를 노리고 있는 것일까. 세대론적인 언어 차이를 넘어서 이 단어가 지니는 잇점이나 장점은 무엇인가 등. 고맙게도 여러 답을 들려주었고, 그중 상당수는 섹스라고 할 때 껄끄러울 수 있는 부분을 '야스'는 좀 더 부드럽게 완화시켜준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수긍하기가 어려웠다. 먼저 섹스는 상대적으로 얼마나 더러운 말일까. 그 말이 야스보다 더 강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야스는 섹스보다 얼마나 온화하다는 것일가. 야스는 섹스의 대체된 말이라면 결국 눈가리고 아웅 아닌가? 두 말이 다른 것을 가리키는 것도 아닌데 야스가 부드럽다는 통념은 선뜻 수긍하기가 어려웠다. 중요한 것은 어째서 그러한 통념이 생겼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 학생이 흥미로운 이야기를 했다. 포털에서 섹스라는 말이 금지된 후 '야스'라는 말이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바로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야스를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섹스의 금지 혹은 검열이 작동하면서 야스라는 말로 대체되었고 어느새 내면화되었음을 말이다. 그런데 왜 그 말을 쓰는지 이유를 묻자 합리적인 근거를 찾는다. 바로 '매끄러운 표현'이라는 것이다.
매끄러움은 검열의 결과다. 그럼에도 이 검열은 어느새 우리의 일상이 되어 자연스럽게 쓰인다. 과거에 이러한 것에 저항하는 것이 대중 예술의 한 측면이었다면, 자본과 결합된 오늘날의 예술은 저항이 아니라 앞장서서 수용해 버리는 결과를 보여준다.
섹스라는 말은 인터넷의 마이너리티 커뮤니티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말이 되었다. 언어의 통제가 점점 더 많은 커뮤니티의 분화를 낳고 있다. 보편적인 언어의 사용이나 매끄러움은 통제의 결과였다면 이제 우리의 인식과 언어는 포털의 통제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조지 오웰이 『1984』에서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7
영화에서 덜컹거림을 일으키는 것은 쇼트와 쇼트 사이다. 우리는 이것을 잘려진이라는 뜻의 컷(Cut)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실질적인 작업이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프리미어 프로그램이나 일러스트레이터를 사용하는 탓에 이음매, 즉 컷이 보이지 않지만 아날로그의 시대에는 현상한 필름을 직접 잘라 프레임을 편집하고 테이프로 프레임을 이어붙였다. 이 편집기를 스틴벡이라고 부른다. 스틴벤의 낭만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예를 <시네마천국>(1988)에서 볼 수 있다. 스틴벤의 시대는 컷이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분명히 알 수밖에 없다. 그것을 지켜보던 주인공 토토는 자연스럽게 영화감독이 된다. 오늘의 편집프로그램은 이음매가 보이지 않는다. 컷은 단순한 불가시 편집의 원리 때문이 아니라 기계적 작업에 의해 이미 부드러워지고, 인식 불가능의 영역으로 달아나버린다. 쇼트와 쇼트 사이는 더 이상 인식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것은 부드러운 웹툰의 패턴에 가깝다.
스크롤의 시대, 매끄러움의 시대에는 더 이상 컷이 보이지 않는다. 무한히 증식하는 하나의 테이크만이 가시성의 영역으로 부각된다. 침묵이 가져올, 부재가 이끌어 낼, 부정성이 가져올 덜컹거림은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까. 컷이 보이는, 덜그덕거리는, 부정성을 품는 예술은 자본주의의 낙원에서 빠르게 추방되고 있다.
한때 인기를 누렸던 <캐롤>(2015)의 토드 헤인즈나 <콜미 바이 유어 네임>(2017)의 루카 구아다니노의 신작에 대한 반응을 보고 있노라면, 작가는 더욱 거칠어졌지만 수용하는 이들은 좀 더 부드럽기를 요구하고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 <아가씨>(2016)만 하더라도 인간의 추악함을 주요한 동력으로 태웠던 박찬욱 감독이었다. 그런데 <헤어질 결심>에서 탕웨이의 남편들은 모두 추악하지만, 살인을 저질렀던 그녀는 자신의 말처럼 "불쌍한 여자"의 지위에 오른다. 과거 박찬욱의 여주인공들은 불쌍함과 추악함이 공존하는 미묘한 존재였지만 <헤어질 결심>은 불쌍함 쪽에 훨씬 더 기울어진다.
이 점이 오늘의 변화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다만, 매끄러움만으로는 예술가의 이야기가 존속하지 못한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2023)는 시작과 끝에서 공중을 향해 있는 부드러운 카메라로 시작한다. 그런데 인간의 시선을 벗어난 카메라의 시선은 이전에는 절정이나 결말에 등장하는 것이었다. 가령 <아사코>(2018)에서 센다이 방파제 장면, <우연과 상상>(2021)의 첫번째 에피소드에서 메이코가 뒤돌아서 공사 중인 도시를 바라보며 사진을 찍은 후 공중으로 올라가는 카메라의 움직임과 같이 그것은 세상의 변화를 인식하고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전혀 부드럽지 않다. 바쿠와 갑작스레 이별을 선언한 후 홀로 센다이 방파제에 오르는 장면은 벼락같다. 메이코가 전남친과 현재의 절친 사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망설임의 '환상 장면'이 지난 후 돌아보는 순간은 번개같다. 하지만 이번 영화에서는 전반적으로 훨씬 매끄럽다. 그의 영화는 전반적으로 매끄러지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다.
그럼에도,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결말이 이상해 보이거나 이해가 가지 않거나 기이해 보이는 것은 목을 조르는 다쿠미의 행동을 느닷없이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 장면은 컷은 분명 이상하다. 다쿠미의 딸 하나와 사슴이 함께 있는 장면이 보였다가 컷이 바뀌면 하나가 쓰러진 채 있다. 사슴은 보이지 않는다. 컷의 생략 혹은 연결 속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여주지 않는다. 영화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카메라의 매끄러운 이동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 이 장면이 여전히 문제적인 것은 덜그럭거림을 통해 질문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8
영화의 역사에서 이러한 덜그럭거림을 집약했던 용어 중의 하나가 '브레히트적 효과'다. 장 뤽 고다르뿐만이 아니라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다르덴의, 구스 반 산트(<엘리펀트>)의, 숀 베이컨의, 웨스 앤더슨식의 여러 브레히트적 방식들이 존재해 왔다. 그것은 영화의 이음매를 덜그럭거리게 하고, 그 속에서 컷과 컷 사이의 쇼트를 통해 사유의 가능성을 열어 보였다. 그것은 이제 폐기되어야 할 낡은 모더니즘의 방법이나 형식일까.
중요한 것은 방법 자체가 아니다. 형식과 형태는 변할 수 있지만 이러한 방법 안에 수렴되어 있는 사유하는 영화의 가능성은 여전히 중요하다. 사유하는 영화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사유하는 존재로 변신되기를 요구한다.
오늘날의 문화전반에 걸쳐 공격적으로 침투하는 매끄러움은 사유에 대한 저항이다. 아이돌 음악의 반복인 루프 형식은 노래의 첫 마디를 각인시키고, 그것을 통해 완성되는 휘발성의 효과다. 제아무리 쓴 사랑노래라도 휘핑크림을 듬뿍 얹어 달콤하게 만들어 버린다. 오히려 달콤한 노래에 더한 달콤함을 입혀 단맛에 중독되도록 이끈다. 여성 아이돌에게 요청되는 '과즙미'라는 용어도 달달함에 덧부여진 달콤함이다. 과즙미는 노래 이외에도 요청되는 그들의 미소와 몸짓에 해당한다. 달콤함을 달콤함으로 강조하는 오늘의 디저트 문화는 곳곳에 만연한 매끄러운 대중 문화의 방향성과 맥락을 같이 한다.
휘핑크림이 잔뜩 뿌려진 커피는 커피의 본질인 쓴맛을 상실시킨다. 아마 어떤 이에게 커피란 달달한 음료로 이미 인식되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커피에 중독된 것이 아니라 달달함에 중독된 것이다. 하지만 달달함에 질려버린 이들의 반란도 일어나고 있다. 씁쓸함뿐만 아니라 신만을 비롯한 차와 같은 커피의 맛에 대한 관심과 열광은 한국의 커피 시장을 '스페셜티'로 이동시켰다. 오랫동안 맥심 커피의 본거지였던 한국의 커피 시장이 가장 비싼 동시에 예민한 취향을 타는 스페셜티의 대표적인 소비지가 되었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무척 흥미로운 일이다.
시인 정현종은 시 혹은 예술을 가리켜 "고통의 축제"라고 불렀다. 예술은 고통을 포함하는 축제의 형식을 갖출 때 빛이 난다. 그것은 일상적이면서 도저히 일상적이지 않은 미적 경험을 향해 있다. 축제란 그런 것이다. 달콤한 과즙 이상으로 씁쓸한 예술가의 생각과 헛짓거리 같은 시도들이 기이하게 엉켜 열광을 만들어 낸다. 랭보는 "상처없는 영혼이 어디있겠는가"라고 말했지만 오늘날 많은 처세술과 심리학 상담술이 레시피처럼 떠들어대는 것은 "상처없는 영혼"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사태는 반대다. 상처를 상처답게 받아들이는 것, 그것은 <해피아워>(2015)에서 그 어떤 물건에서도 중심을 찾아 세울 수 있는 능력의 발현이며, <아사코>에서 새로운 연인을 선택한 후 세상을 붕괴시켰던 동일본 대지진의 고통 위에 세워진 아사코의 클로즈업과 그가 바라보는 도후쿠 지역의 바다 소리를 듣는 순간에 해당한다. 바다는 무섭다. 하지만 우리는 들어야 한다. 방파제 위에 서서 파도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다른 선택과 방향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일어난다. 영화는 그런 순간들을 향해 자꾸만 타오른다. 침묵과 함께.
[글 이상용 영화평론가, poema@ccoar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