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영화에서는 스크린을 뚫고 나오려는 이미지의 흉악한 힘을 느낄 수 있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와 그의 아들 '브랜든 크로넨버그'의 영화에서 이미지는 늘 상 현실을 침략해오고, '자비에 돌란'은 스크린을 열어젖히려는 기세를 과시하며, 피사체에 가장 적합한 형식을 고안하는 '드니 코테'의 작품 역시 존재의 새로운 고향이 되어 현실을 대체한다.
이들보다는 훨씬 가볍고 치기 어린 영화를 연출하는 1985년 온타리오 태생의 젊은 영화감독 '매트 존슨' 역시, 이러한 동포들의 관심을 이어간다. 그의 영화는 항상 '모큐멘터리'다. 그 이유는 본디 이미지가 현실을 초월하고 싶은 욕망에서 출발하지만, 현실에 위치한 카메라는 필연적으로 다큐멘터리적 요소를 미세하게라도 반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다큐멘터리이고 싶어도 현실과 차별화하고 싶은 욕망이 객관적인 기록을 불순하게 오염시킨다. 그래서 존슨은 어설픈 가상과 어렴풋한 진실이 뒤섞인 모큐멘터리를 하나의 예술관으로 삼는다. 그렇게 탄생한 이미지들이 아주 쉽게 사실로 호도된다고 작품 내에서 매번 고찰한다. 이미지는 진실이라고 믿고 싶은 욕망에서 출발하였기에, 또한 가상을 현실화하고 싶은 거대한 원동력에서 태동하였기 때문이다. 존슨 본인도 데뷔작 <고딩감독>(2014)에서 그 욕망을 절대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존슨은 욕망을 억제해가며 이미지의 함정을 폭로하고 늘 진실을 발굴한다. 그의 '허무맹랑하면서도 현실적인 연출'은 이제 블랙베리의 흥망성쇠를 영상화한다.
블랙베리의 태초에 '기술자' 마이크(제이 바루첼)와 더그(매트 존슨)가 있었다. 그들은 오직 순수한 '기술'만 연구한다. 영화 초반, 마이크와 더그는 '사업가' 짐(글렌 호워튼)과 미팅한다. 영화의 배경 1990년대에 스마트폰이라는 자신들의 비전을 설득하기 위함이다. 이후 그들과 협력하게 된 짐은 여러 기업과 계약을 체결하며, 잘 '설득'하고 '포장'하는 협상의 기술을 뽐낸다. 그런데 마이크와 더그는 짐의 '화술'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들의 발표는 허술할뿐더러, 정신이 다른 데 팔려 있는 그들은 기계에서 새어나오는 '소음'에만 관심이 있다. 물론 소음은 매끈한 포장지보다 더 중요한 기술의 본질일지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그 본질이 귀 따갑다는 것이다. 중요하다만, 자꾸만 귀를 막고 싶어진다.
이처럼 그들의 연구실에는 자신이 외부에 어떻게 보일지, 현실에 어떻게 참여할지 조금도 고민하지 않는 너드들로 가득하다. 그들의 관심은 '사이버스페이스'에 산재한 '정보'들, 미래를 상상하는 'SF 영화', 현실이 아닌 '게임' 등 흥미진진한 유토피아에 집중되어 있다. 그런데 이들이 몰두하는 세계는 20세기 후반에 전혀 보편화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연구를 지속하기 위해선 난해한 것은 쉽게 설득하고, 기이한 것은 매혹적으로 포장하여 사람들의 투자를 끌어내야 하지만, 너드들은 미래의 토대가 되는 '지금 여기'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화술은 어눌하고 표정은 얼빠져있으며 행동은 어설픈 그들을 포착하는 연출 또한 삐걱거리는 '크래쉬 줌', 쉴 새 없이 흔들리는 '핸드 헬드' 등 매우 불안정하다. 존슨의 연출은 연구진의 속성과 일치할지언정, '연출하는 존슨'과 '존슨이 연기하는 더그'의 태도는 180도 다르다. 현실에 아무런 대비가 되어있지 않은 너드들의 비가시적인 속성을 형식으로 가시화하여 감상자에게 잘 전달하는 존슨은 더그와 달리 스크린의 화술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스피치를 포기하지 않는, 되레 화술에만 집념하는 또 다른 남자는 바로 짐이다. 짐 또한 사내 정치에서 밀려나 예상에 없던 결과를 맞닥뜨릴 때는 연출이 불안정해진다. 다른 사업가들과 수싸움에서 밀릴 때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이는 교활한 사업가들과의 관계에서나 그렇지, 짐이 너드 콤비와 협상하는 일은 '어린아이에게 사탕을 빼앗는 일'만큼 아주 쉽다. 그래서 짐이 너드 콤비와 협상할 때의 카메라는 앞선 연출과 달리 아주 안정적이다. 물론, 영화는 모큐멘터리로서 다큐멘터리적인 촬영인 핸드 헬드를 줄곧 유지하기에 흔들림은 약소하게 남아있지만, 그 조급한 떨림을 최대한 없애 안정적인 워킹과 줌인으로 나아가며 짐이 원하는 '완전성'에 도달했다는 것을 표현한다. 짐은 하버드에서 배운 화술로 위풍당당하게 계약을 성사하나, 정작 너드 콤비와 공동 대표를 맺고 계약을 따러 갔을 때, 자신이 의기양양하게 포장하는 기술의 '알맹이'를 모른다. 그래서 짐 역시 존슨과 닮았지만, 동시에 다르다. 존슨은 영화가 다루는 블랙베리의 창립과 역사를 꿰고 있기 때문, 즉 연출로써 무엇을 포장해야 하는지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존슨은 영화 속 극단에 위치한 서로가 결합해야 한다고 말한다. 첨단기술을 팔아야하지만 팔지 못하는 개발자들의 세계, 무언가를 파는 기술은 있지만 정작 무엇을 팔아야 할지 오리무중인 사업가의 세계는 서로 반쪽짜리다. 각각 경제학과 IT기술이 없는 절반짜리 세계는 공동 대표를 맺기 전까지 '교차편집'으로 분리되어 뒤섞이지 않는다. 마이크는 교활한 기업의 간계에 휘말려 어마어마한 손해를 입을 뻔했고, 짐 또한 자신이 무엇으로 어떻게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지 상사를 설득하지 못했으니, 각자의 세계에 참여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세 사람이 비로소 하나의 시퀀스에 공존하며 사업가는 무엇을 팔아야 할지 알게 되고, 기술자는 자신들의 공을 세상에 널리 알리게 될 때, 비로소 세계에 결함은 사라지고 완전에 가까워진다. 경제와 기술이 만나 각자의 단점을 보완했을 때 블랙베리는 창립했고, 그래서 초기에 돌풍을 일으킬 수 있었다고 존슨은 해석한다.
이 같은 블랙베리의 탄생이 모큐멘터리란 장르에 또 다른 당위성을 제공한다. 짐은 아주 아름답게 포장하는 사람이다. 그의 발화는 늘 청산유수다. 그런데 아름다운 기표가 기의와 일치하지 않거나, 기의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가 인재를 영입할 때 남발하던 '스톡옵션'은 사기였고, 그는 잘 포장하지만 실체를 설명하진 못한다. 반대로 마이크와 더그의 연구소는 솔직히 말해 쳐다보기 싫게 생겼다. 또 화법이 좋지 못한 마이크와 더그의 발표는 도무지 '촐싹'대서 내용과 별개로 신뢰가 가질 않는다. 즉 미적 속성이 결여된 현실은 시선을 끌지 못한다. 그래서 타인을 설득하지 못하는 진실엔 멀끔한 '양복'을 입혀야 한다. 존슨 역시 현실에 충실하면서도, 그 내용에 걸맞게 가시화하고 승화하는 연출을 선보이며, 그것이 거친 진실을 반영하면서도 특출한 감각을 겸비한 모큐멘터리다.
사업가와 개발자의 세계, 현실와 영화 등 두 차원이 결합하기 전까지 연출은 은밀하고 조심스러운 태도를 고수한다. 주차장에서 풀숲이나 전봇대, 가로등 뒤에 숨어, 등장인물의 행적을 몰래 훔쳐보는 구도가 연이어진다. 두 차원이 만나기 전까지 '숨김'이 만연한 이유는 각자의 단점을 은폐하기 때문이다. 너드 콤비는 분명 어설프다.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어수룩함을 은폐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나, 어찌됐든 현재 자신들의 연구소가 어떤 위기에 봉착했는지, 기술이 어느 정도로 진척했는지 말을 아낀다. 그래서 짐은 너드 콤비가 처한 문제를 오롯이 파악하지 못했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간헐적이고 제한적'으로 훔쳐본 셈이다. 너드 콤비가 바라보는 짐은 더한데, 짐은 분명 사내 경쟁에서 밀렸다. 짐은 영화 내내 계약에서 온전하게 우위에 서지 못한다. 성공과 더불어 실패도 적지 않다. 또 짐의 계약은 항상 '밀실'에서 은밀하게 진행된다. 법에 저촉되거나 비윤리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드 콤비 앞에서 짐은 완전무결한 척 연기한다. 약점을 지닌 것이 인간의 필연이지만, 그것을 노출하고 싶지 않은 서로는 상대 면전에서 허언, 거짓말 등 주장을 허위로 부풀리고, 그런 가운데서 진실이 무엇인지 골똘히 고민·관찰하는 '관음증'의 시선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존슨은 몰래 뒤로 돌아가 '이면'을 본다. 그 이면에서 숨겨진 진실을 폭로한다. 마냥 이성적이지 않은 사업가들의 감정적인 거래, 자신들이 몰두하는 차원에선 똑똑하지만 그 외의 영역에서는 모자라고 현실감 없는 기술자들을 비춘다. 서로가 그 결여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비난 대신 협력·보완할 때, 블랙베리는 더 큰 성공을 거둔다. 짐에게 모뎀 계약 실패와 빚진 액수를 털어놨을 때, 계약 과정에서 짐이 설명할 수 없는 기술의 원리를 마이크가 대신 설명할 때 기업은 많은 이윤을 남긴다. 그래서 존슨의 영화는 더더욱 모큐멘터리여야만 한다. 불완전한 그들이 서로 결합해야 하듯, 진실은 지녔지만 미적 형식을 지니지 못한 다큐멘터리와 이와 정반대의 속성인 픽션의 결합이 모큐멘터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본이 테크놀로지를 식민화하며 서로 간의 균형이 서서히 무너진다. 이로써 영화의 연출 또한 진실과 형식의 미적 조화가 아니라, 오직 '겉치레', '양복'만 남게 된다. 짐이 공동 대표가 되기 전까지, 연구원들은 근무 시간에도 게임을 하거나 인터넷 서핑, 연구소의 전통 '영화의 밤'을 즐겼다. 그러나 짐의 입사 및 관리자 찰스(마이클 아이언사이드)의 부임 이후 사내 분위기는 엄격하게 얼어붙고 오직 노동만 강제된다. 개발자들은 돈도 중요하지만, 냉혹하게 통제하는 관리자와 상사가 싫다는 언급을 한다. 그들은 전문적인 기술이 아니라, '자본을 위한 기술'만을 독촉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독촉이 아예 불필요하진 않다. 마냥 놀기만 하던 개발자들에게 짐이 '마감 기한'을 설정하자 자신의 공상을 정돈하여 미래를 재촉한다. 그렇지만 미래를 공상하며 첨단 기술에 관한 '영감'을 받아야만 기술의 '왜?'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다. 테크놀로지를 발전시켜 도달하고자 하는 미래가 어떤 모습인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 해답은 경제가 말해주지 않는다. 그런데도 기술을 위한 독촉이 아닌, 오직 자본을 위한 독촉만 남는다. 일순간 블랙베리는 시장 점유율 1위라는 정상에 우뚝 서며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파는 기술'은 발전해갈지 몰라도 '파는 내용', 곧 당위성이 저물어간다. 패드를 아예 없애서 스크린의 효율성을 증대한 '아이폰'의 탄생에 블랙베리는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한다.
이렇게 자본주의가 테크놀로지를 식민지로 전락시킬 때, 하나로 결합하여 조화를 이루던 두 세계는 다시 분열되고 교차 편집이 재개된다. 하지만 영화 초반부처럼 기술/자본으로 양립된 상태로 되돌아가지 못한다. 교차편집으로 두 세계는 나뉘었지만 자본에 의해 잠식되었다는 본질은 각각 사업가/연구소를 비춘 양 시퀀스 모두 동일하다. 도입부에선 기술의 전문성을 마이크와 더그에게서 찾아볼 수 있었지만, 후반부엔 자본이 기술을 잠식하여 연구소의 전문성이 실종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 매트 존슨이 직접 연기하는 더그는 '순박하고도 순진한 기술'을 상징한다. 마이크는 돈을 벌며 짐의 멀끔한 용모를 닮아간다. 머리도 포마드로 세팅하고, 항상 깔끔한 양복 차림이며, 손목에는 반짝거리는 시계도 찼다. 사업가적인 용모로 가꿔가며 태도 또한 짐과 유사하게 변해간다. 기술자들에게 자본을 위한 연구를 주문한다. 그런데 더그는 사업이 순풍을 타더라도 용모가 늘 그대로다. 헤어밴드를 차고 민소매 나시를 입으며, 마이크에 의해 미팅에 끌려가기 전까진 양복도 입지 않았다. 그는 사업이 아무리 발전해도 순진하게 기술을 추구하는 속칭 '공돌이'의 전형으로, 존슨은 기술의 희망이 오직 그에게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해 존슨은 유한하고 불완전한 서로 간의 보완을 논하면서도, 연합하는 과정에서 개개의 '본질'을 잃어선 안 된다는 것을 블랙베리의 어리석은 일대기에서 밝혀낸다. 이 교훈은 블랙베리라는 개별적 사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존슨은 외의 작품에서도 연기자로 참여할 때 항상 편한 옷차림을 고수하는 '자신'을 잃지 않는다. 그것은 소재에 잠식되지 않으려는 영화의 의지이자, 배역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존슨 본인의 고집이다. 잠식은 블랙베리의 몰락이라는 참혹한 결과를 불러오는 반면, 그 치열한 조화의 미덕은 소재와 연출이 균형을 이룬 본 작품이 몸소 증명한다.
[글 박정수 영화평론가, green1022@ccoar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