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는 어질지 않아서 인간을 지푸라기 개 다루듯이 한다" ― 『도덕경』, 노자
음악이 흐르고 카메라가 앙상한 나뭇가지가 무성한 하늘을 찍으며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텅 빈 겨울의 하늘을 5분 가까이 응시하는 카메라에는 약간의 흔들림조차 없다. 화면 너머로 발걸음 소리가 들오기 시작하며 영화에 불길한 기운이 엄습한다. 'EVIL DOES NOT EXIST'라는 오프닝 타이틀이 드러난 다음에 음악이 급작스레 끊기며 화면이 전환된다. 이윽고 카메라는 멀찍이 서서 하라사와 마을 주민 타쿠미(오미카 히토시)가 열심히 장작을 패는 모습이 오랫동안 포착한다. 이 두 개의 숏은 이어지기는커녕 급작스레 충돌하는 듯하다. 나아가 두 개의 숏에 포착된 세계가 완전히 단절된 듯한 느낌을 준다. 이때 의문이 하나 생긴다. 이 두 세계를 포착할 수 있는 시선의 주인공이 누구냐는 것이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신작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2023)는 자연과 공생하는 하라사와 마을에 글램핑장이 신설된다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둘러싸고 생기는 사건을 다룬다. 타쿠미는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며 주민이 부탁한 일을 처리하는 심부름꾼 역할을 생업으로 삼는다. 장작을 패고 우물에서 우동 가게에서 쓸 물을 긷는 그의 일상은 더없이 평화롭다. 그의 딸 하나(니시카와 료)는 타쿠미를 따라다니며 생태계의 흐름을 하나씩 배운다. 어느 날, 마을에 글램핑장에 관련된 설명회가 열린다. 글램핑장을 건설하는 회사는 글램핑 관련 회사가 아닌 작은 연예기획사인 플레이모드다.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타기 위해서 졸속으로 기획된 것이다. 설명회는 사장이나 컨설턴트 없이 원래 배우 매니저 일을 했던 두 직원이 진행하게 되었다. 마을 주민은 자연과 어우러져서 사는 하라사와의 조건을 고려하지 않은 채 짜인 무리한 계획에 반대한다. 두 직원은 이 계획을 백지화하자고 제안하지만, 사장과 컨설턴트는 이를 묵살한다. 두 직원은 사장의 명령에 따라서 타쿠미를 아군으로 끌어들이려 하라사와 마을로 돌아가나 둘은 되려 지친 도시 생활과 하라사와 마을의 아름다움에 반해 회사를 그만두기로 한다. 그때 하나가 실종되고 온 마을의 주민이 하나를 수색하러 다닌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가 최근에 연출한 네 편의 영화와 비교해보았을 때 이질적인 문법으로 연출된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가 음악감독인 이시바시 에이코의 라이브 공연에 쓸 영상으로 제작되었기에 더욱 그러해 보인다. 이전까지의 그의 영화가 유려하게 흘러가는 편집과 세련된 대화, 안정된 속도감을 자랑하는 반면 이 영화는 정반대다. 서사의 흐름이 단절되기도 하며 나무를 패는 등 타쿠미의 노동을 길게 담기도 한다. 오프닝에서 드러나는 자연과 자연이 사라진 직후의 현실을 충돌하는 문법은 하마구치 류스케에게 그다지 낯선 것이 아니다. 다만 하마구치 류스케가 마치 본인의 새 챕터를 선언하듯이 이 문법을 전면에 드러낸 것은 눈여겨볼 만하다.
이러한 문법의 시작은 인터넷이 마비된 세계인 <우연과 상상>(2021) 3부다. 모카 나츠코(우라베 후사코)가 아야의 집에서 아야의 연인을 연기할 때가 그러하다. 모카 나츠코가 연기를 시작한 순간 화면에 드러나지 않은 아야의 연인이 모카의 몸에 강림하는 듯한 효과가 생긴다. 물론 하마구치 류스케 영화에서 신들림의 순간은 반복된다. <아사코>(2018)에서 <자아와 타자> 라는 전시회에 있는 고초 시게오의 쌍둥이 사진을 보며 무언가에 홀려 있는 아사코, <드라이브 마이 카>(2020)의 성관계 도중 절정에 달아올라서 이야기를 막 쏟아내는 오토, <천국은 멀리 있어>(2016) 속 3.11 동일본 대지진 희생자의 영혼을 되살리는 남성 등 하마구치 류스케의 인물은 자신이 아닌 것에 의해 점령당한다. <우연과 상상> 3부의 모카가 연기하는 순간에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모카가 연기하는 영혼이 아니다. 카메라는 모카와 아야의 사이에 있는 창가를 정중앙에 두고 있다. 모카가 연기를 시작하는 순간 창문 너머로 흔들리는 수풀이 포착된다. 이를 자연이 모카 나츠코에게 스며든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연과 거기서 급작스럽게 추방되는 경험은 류스케의 세계에서 전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한층 더 과격하게 말해보자. 그의 영화에서 자연과 인류세의 영향을 배제하는 시선이야말로 영화에 갇혀 있으려는 시네필적인 강박관념의 산물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에서 자연과 인간은 상응하고 있다. <아사코>에서 아사코(카라타 에리카)가 후쿠시마 인근에 있는 둑 위에 서서 바다를 응시하는 순간은 프리드리히의 낭만주의 회화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를 보는 듯하다. 낭만주의 회화의 양식에서 인간은 자연의 무한함을 통해서 현실을 초월한 자아의 무한함을 확인하는 주체다. 한마디로 자연은 '나'의 주체성을 확인하는 알리바이로 작동한다. 바쿠와 료헤이 사이에서 선택을 망설인 아사코가 처음 주체적 선택을 시작한 순간이 바로 둑 위에 선 순간이다. 이는 쓰나미가 휩쓸고 간 3.11 동일본 대지진의 흔적을 마주한 순간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엔딩에 이르러 아사코는 료헤이와 더러운 강물을 보고 있다. 아사코와 료헤이는 영화의 오프닝에 등장한 고초 시게오의 사진과 같은 구도로 포착된다. 아사코를 3.11 동일본 대지진 전의 세월(바쿠)을 그리워하면서 그 이후(료헤이)를 살아가는 젊은이를 그려낸 존재로 말할 수 있을까. 또 바쿠는 아사코의 환상이 반영된 존재이기도 하다. 아사코는 자연을 마주 보며 바쿠를 떠나보내고 료헤이를 타자로 여기기 시작한다. 료헤이도 마찬가지다.
히로시마를 배경으로 한 <드라이브 마이 카>의 가후쿠도 이윽고 훗카이도로 간 다음에야 "충분히 상처받지 못했다"라는 고백을 쏟아낸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아사코>에서 '체호프적인 것'을 연기하는 순간을 영화적 문법으로 확장한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를 통해 체호프의 영향력을 드러낸다. (이 <바냐 아저씨>가 체호프의 영향을 드러내기 위한 기호로만 소비된다는 의심은 거둘 수 없다.) 체호프는 자연 안에서야 인간이 본연의 자연스러움을 회복할 수 있으며 속물정신에서 벗어나 자신의 평범함(banality)을 회복하는 순간을 그리는 작가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의 고백도 마찬가지다. 가후쿠의 내면에는 히로시마에 가해진 원폭의 트라우마, 아내이면서 타인이었던 오토를 잃은 슬픔, 3.11 동일본 대지진이라는 여러 층위의 트라우마가 축적되지만, 감정이 응축되어서 드러나는 것은 설원에 도착한 다음이다. 이는 이유나(박유림)와 재니스 창(소니아 위안)이 나무 앞에 서서 연기하다가 급작스럽게 기적 같은 순간을 연출하는 순간과 포개진다. 이때 자연은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는, 신들림이 가능한 장소인 연극적인 장소를 가동하는 장치로 그려진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영화에 연극에서나 볼 법한 순간을 연출하며 그것을 영화에서의 기적으로 소환한다. 그의 영화는 연극이 진행되는 내부와 그 밖으로 나뉘어 있다. 연극과 영화, 다큐와 픽션의 경계도 마찬가지다. 엔딩은 연극, 영화라는 이중의 세계에 코로나가 유행하고 있는 영화 바깥의 세계를 소환하며 다큐멘터리적인 순간까지 그려낸다. 이 영화에서 경계를 그려내는 것이 바로 자연이다. <아사코>에서 마야의 집이 연극의 장소로 소환되고, 바쿠가 등장하는 순간 하나하나가 연극적으로 전환되는 것과 달리 <드라이브 마이 카>는 자연 안에서만 연극이 성립되게끔 한다. (다만 이러한 문법이 정작 다루어야 할 역사적인 트라우마를 연극의 언어로 흡수한다는 의심은 거둘 수 없다. 더 나아가 캐릭터 각자의 트라우마와 3.11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한 역사적 상흔을 가두는 동물원과 같은 장소로 보일 수 있다는 위험이 있다.)
<우연과 상상>의 3부에서 드러나는 생태적인 전환은 분명 눈여겨볼 만한 하다. 류스케는 일상적인 집이 자연의 힘에 점령당하는 순간을 그려낸다. 다만 류스케의 생태적인 사고는 일본적인 정신, 사물의 정취(모노노아와레)와는 다르다. 자연은 인물의 정서를 그려내는 외적으로 드러내는 장치가 아니다. 오히려 자연이 인간의 내부로 침투하며 캐릭터의 정서를 구성한다는 인상을 안긴다. 이는 하마구치 류스케 속 캐릭터가 관계를 맺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인간 사이에 발생할 수 있는 우연은 자연과 상응한다. 이러한 우연을 가능케 하는 것은 인터넷의 종말이다. 네트워크는 모든 것을 과잉 연결하며 모든 만남을 필연적으로 매개하는 권능을 지니고 있다. 모카가 아야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한 것도 인터넷을 경유한 만남이라면 불가능한 것이다. 모카가 아야와 우연히 만나듯이 모카도 아야의 전 애인을 우연히 연기한다. 이 영화 이전의 <드라이브 마이 카>의 가후쿠도 오토의 목소리를 녹음한 테이프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다음에야, 훗카이도의 자연 한가운데에 선 다음에야 바냐 아저씨로 무대에 선다.
다시 돌아와서,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한 번도 인간의 1인칭 시점 숏을 쓰지 않으려고 한다. 오프닝에서 카메라는 시점을 점령하고자 하는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오프닝에서의 카메라는 기계적인 움직임을 보이는데도 숨소리가 개입한 순간부터 타쿠미가 걷는 속도와 이어져 있다는 착각을 안긴다. 그다음에 장작을 패는 타쿠미는 그의 허리춤 정도 되는 위치에 걸려 있다. 타쿠미가 장작을 다 팬 다음에는 급작스레 자동차 시점으로 전환된다. 자동차의 뒤편으로 카메라가 타쿠미가 탄 차를 촬영하고 있는데도, 어쩐지 카메라가 선 곳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다. 시점에 이입하려고 한들 실패하는 불편이 계속 서려 있는 셈이다. 관객은 자연과 인간 사이의 불편한 시점에 서 있게 된다.
카메라는 인간의 주체가 투영되지 않는 존재로 그려진다. 기계적으로 배치된 카메라는 인과성과 전혀 다르게 움직이고 있으며, 카메라 사이의 연결은 부자연스럽다. 카메라와 자연의 관점은 (임의적으로) 연결되어도 그사이에 인간의 시점이 연결되지 않게끔 하는 편집이 더해진다. 이때 인간을 제외한 모든 비-인간 존재가 네트워크가 되어서 스크린에 소환된다. 영화 오프닝에 드러나는 인공적인 프레임은 부자연스럽다기보다는 자연에는 감정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장치가 된다. 나아가 자연은 인간보다 훨씬 큰 것으로 그려진다. 타쿠미가 우동 가게에 쓸 물을 뜨러 가는 순간 카메라는 타쿠미를 정중앙에서 빗겨나가게 포착하며 인근의 숲이 두드러져 보이게 하는 구도에서 이를 알 수 있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일식>(1962)의 인간보다 큰 기둥이 그러하듯이 자연은 인간을 초과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글의 도입에서 언급한 "천지는 어질지 않아서 인간을 지푸라기 개 다루듯이 한다"라는 노자의 문장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인과성은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다. 영화를 두 파트로 나뉘면 1부에 위치할 글램핑장을 둘러싼 갑론을박을 다루는 에피소드는 이 영화의 문법을 압축한다. 글램핑장 설명회에서 연예기획사의 두 직원은 데이터로 하라사와 주민을 설득하려 한다. 처음 하라사와 주민에게 프레젠테이션 영상을 소개하는 순간에 카메라는 이 영상을 차단하듯이 급작스레 깃털을 주우려고 떠나는 하나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글램핑장 설명회는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는 물을 고려해야 한다”라든지, 균형이라는 추상적인 단어에 의해서 반박된다. 데이터가 아니라 추상이라 생각되는 것이 오히려 자연과 어울려서 사는 하라사와 마을의 생태계를 잘 드러낸다. 이처럼 이 영화는 관객이 데이터라는 물증이 아니라 심증으로 상황에 이입하도록 이끈다. 데이터를 합리화하는 것은 자연이 아니라 그 데이터를 통해서 타낼 수 있는 지원금이다. 글램핑장 컨설턴트는 줌 너머에서 조종만 할 뿐이며 제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한다. 계획을 수습하는 것은 두 직원의 몫이다. 인과율의 세계는 부조리로 가득하고 환경은 앞으로 쭉 파괴될 것이라는 암울한 감독만의 전망이 여기에 있다. 두 직원이 회사를 그만두었어도 계획이 백지화되었는지는 알 턱이 없어서다.
글램핑장을 둘러싼 논쟁 이후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2부에 해당하는 지점이라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사건 하나하나가 의문덩어리다. 그중 하나가 스크린의 외부에서 들려오는 총소리다. 건너편 마을에서 사슴을 사냥하러 온 사냥꾼이 총을 쏘아대는데도 마을에서는 그 누구도 저지하지 못하는 듯하다. 총소리가 들려오는 순간에 타쿠미의 건망증이 생긴다. 영화에는 네 번의 총성이 들린다. 그중 세 번째 총성에 타쿠미가 두통을 느끼는 듯한 순간이 연출된다. 엔딩에서 연예기획사 직원 마유즈미가 타쿠미의 가족사진을 볼 즈음 총소리가 다시금 들린다. 마치 타쿠미 혹은 하나가 총소리에 죽었다는 듯한 심증을 남긴다. 그때 타쿠미는 총상을 입은 어미 사슴을 마주한다. 그때 연예기획사 직원 타카하시(코사카 류지)가 쓰러진 사슴에게 먼저 다가가려 하자 타쿠미는 그의 목을 조르기 시작한다. 타카하시가 타쿠미에게 다가가는 순간 하나가 쓰러져 누워 있다. 타쿠미와 하나가 제각기 어미와 새끼 사슴에 빗대어지는 도식이 도출된다. 이처럼 타쿠미가 자연이라는 알레고리라 볼 수 있는 심증은 얼마든 영화에 있다. 오프닝과 엔딩에서 인위적인 카메라로 드러나는 자연에 숨소리로나마 개입할 수 있는 존재도 타쿠미 뿐이다. 이 영화의 엔딩이 이토록 미스터리한 것은 심증 외에는 타쿠미의 행동을 설명할 길이 없어서다. 지구온난화도 우리가 심증으로 더욱 잘 느끼듯 말이다. 이 같은 인과율을 초월한 논리는 수많은 우연과 돌발적인 순간을 경험하게끔 하며 물증에 기반한 사고를 파괴한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연을 파괴하는 인간을 악으로 그리지도, 자연을 도시보다 우월한 것으로 그리려고 하지도 않는다. 더욱이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악이 무엇인지 정의하지도 않는다. 그 대신 관객이 악을 생각하도록 되려 질문을 던진다. 영화는 마지막에 이르러 안개가 피어오르는 하늘을 다시 비추며 끝난다. 이윽고 타쿠미로 여겨지는 남성의 숨소리가 계속 들리다가 영화가 끝난다. 타쿠미는 죽었을까. 아닐까. 영화는 그 무엇도 설명하지 않는다. 이 장면에서 왜인지 <스파이의 아내>와 <드러이브 마이 카>의 엔딩이 떠올랐다. 창문 너머로 폭격이 진행되듯, COVID-19라는 현실이 영화에 개입하듯 여기서도 안개를 통해 어딘가 생기고 있을 재난을 암시한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가 지금껏 나온 생태주의 영화 중 걸작이라 할 만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타카하시는 여전히 살아 있고 하나를 안고 있는 타쿠미의 숨소리는 벅차다. 설상가상으로 영화관 바깥의 세계는 불타고 있다. 하마구치 류스케 영화를 관통하는 기적은 이제 사라질 것이다. 인물의 트라우마를 가두고 정화하는 연극적 세계는 사라지고 일상은 치유의 장소가 되기에는 이미 늦었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이 모든 어긋난 상황에서 악을 지목할 수는 없으며, 영화 바깥이 영화 안을 태울 수 있으리라는 공포에 절망에 빠져 있는 듯하다. 차라리 반어법으로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해볼 뿐이다.
[글 김경수 영화평론가, rohmereric123@ccoart.com]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Evil Does Not Exist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Hamaguchi Ryusuke
출연
오미카 히토시Hitoshi Omika
니시카와 료Nishikawa Ryo
코사카 류지Ryuji Kosaka
시부타니 아야카Ayaka Shibutani
배급 그린나래미디어
제작연도 2023
상영시간 106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4.0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