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플레이백>으로 청년세대를 대표하는 감독이라는 평가 속에 20대를 마무리한 미야케 쇼는 몇 년 뒤 <밀사와 파수꾼>(2017)과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2018)를 연달아 내놓으며 영화계에서의 위치를 굳힌다. 이후 그의 영화인생은 베를린국제영화제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극찬 받은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2021)으로 절정기를 맞았다.
여기서 고백하면, 필자로서는 ― 다소 짓궂은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세계영화사의 사례에서 흔히 유례를 찾을 수 있듯이 ― 근 10년 동안의 그에 대한 관객과 평단의 의견이 워낙 긍정일변도였기에 다소 주춤하거나 일시적인 소강상태를 맞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베를린 초청 이후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 개막작으로 초청된 <새벽의 모든>(2024)이 현지에서 수많은 대작을 제치고 미니시어터 개봉작으로써는 이례적인 흥행수입을 기록한 까닭이다.
내용은 이렇다. 극심한 PMS(월경전증후군) 증세로 짜증이 솟구치면 전혀 다른 사람이 돼버리는 탓에 대기업을 퇴사하고 과학교재를 만드는 중소기업(쿠리타과학)에 재취업할 수밖에 없었던 후지사와(카미시라이시 모네 분)는 어느 날 매사 심드렁한 반응으로 일관하는 야마조에(마츠무라 호쿠토 분)와 맞닥뜨리고 다시 분통을 터뜨린다. 그런데 알고 보니 야마조에 역시 공황장애로 비슷한 곤란을 겪고 쿠라타과학에 들어와 있던 상황. 그렇게 서로의 말 못할 사정을 알게 된 두 사람 사이에는 단적으로 정의하기 어려운 동지의식이 싹트기 시작한다.
"연애 없는 로맨틱코미디"
"결국 둘이 사귀지 않는구나!"
<새벽의 모든>의 시사회가 끝난 뒤 들려온 <고지라 마이너스 원>(2024)과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2023)의 제작자, 이치가와 미나미의 일성. 살짝 익살스럽게 느껴지지만 역시 관록 있는 프로듀서답게 작품의 매력 포인트를 대번에 짚어낸 평가다. 기획ㆍ프로듀스를 맡은 이노우에 류타도 필자에게 귀띔한 바 있거니와, 그의 제안으로 메가폰을 잡은 미야케 쇼가 세오 마이코의 동명원작소설에 매력을 느낀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기 때문이다. 연인으로 관계의 결말을 맞지는 않더라도 왠지 애정이 가는 두 주인공. 미야케에게 <새벽의 모든>의 제작과정은 이 애정의 원인을 반추하는 과정이었다.
<새벽의 모든>은 "쉽게 털어버리기 힘든 '어려움'을 안고 살아가는 주인공"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과 궤를 같이 한다. 다만 미야케가 이 영화를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과 전혀 다른 스타일로 만들어보기로 결심한 것은 원작이 PMS와 공황장애라는 두 주인공의 '어려움'을 '육체적인 노력(복싱)'이나 '연애' 같은 행위를 통해 극복하는 모습을 굳이 보여주지 않으며, 그 자신 이 점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초반에는 서로 친해지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던 두 주인공이 시행착오를 반복하는 가운데 서로의 아픔에 눈길을 돌리게 되고, 함께 극복하려는 노력을 이어간다는 내용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미야케는 이 독특한 서사를 구성하면서 플롯의 구성은 물론 시나리오가 수정을 거칠 때마다 원작자 측과 긴밀하게 소통했다. 그 과정에서 큰 힘이 되어준 사람이 후지사와로 붕한 카미시라이시 모네 배우. 원작의 열성팬인 그녀는 원작에 등장하지 않는 천체투영관이라는 오브제와, 극중 모친과의 관계, 결말의 변경 등과 같은 정보를 사전에 공유 받고 만족해했다고 한다.
심리와 상상
시나리오 집필과정에서서 미야케가 특히 고심한 포인트는 두 가지. 하나는 독자에게 상상의 여지를 제공하는 심리묘사의 방법이다. 소설의 이야기는 텍스트로 이루어져 있는 까닭에 따로 궁리가 필요하지 않지만 영화의 이야기는 영상으로 전개된다. 또 하나는 불안정한 심리상태가 극적 갈등의 원인이 되는 등장인물의 캐릭터를 어떻게 그려내느냐 하는 것이다. 영화는 소설처럼 지문(地文)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러나 가위질에 서툰 후지사와가 야마조에의 머리를 잘라주는 장면은 미야케 쇼가 끝내 이 난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해냈음을 보여준다. 원작에서도 무척 중요하게 다뤄지는 이 장면에서 미야케가 선택한 카드는 두 사람의 롱 테이크. 설정 자체는 약간 희극적이나 은연중에 두 사람 사이에 싹터있는 신뢰와 유대가 드러나는 이 장면에서 미야케는 두 배우의 동작을 미세하게 구분하고 속도감에 변화를 줌으로써 "연애 없는 로맨틱 코미디"라는 <새벽의 모든>의 본질(이자 히트요인)을 구현해낸다.
쿠리타과학
후지사와와 야마조에는 PMS와 공황장애로 일상생활에서 어려움을 경험하고 사회생활에서도 난관에 직면한다. 작품의 기획단계에서 전자를 의료적인, 후자를 사회적인 문제로 파악한 미야케 쇼는 이야기의 초점을 후자에 맞춰보기로 하고 원작의 쿠라타금속을 쿠라타과학으로 변경한다. 또한 이 회사에서 이동식 천체투영관을 제작하는 것으로 설정했다. 반구형 스크린에 별과, 행성의 움직임과 같은 천문현상을 정확하게 투영해 관람객들에게 원리를 이해시킬 목적으로 고안된 이 시설은 평소 맑은 밤하늘을 볼 수 없는 도시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제공해주기도 한다. 이동식 천체투영관은 특히 신체적인 제약으로 인해 시설을 방문할 수 없는 이들을 위한 것이다. 미야케는 공황장애 때문에 극장에 갈 수 없어 영화OST 앨범을 들으며 아쉬움을 달래는 주인공에게서 이동식 천체투영관이라는 오브제를 착안, "대체된 즐거움"이라는 모티브를 끌어냈다.
쿠리타과학과 관련한 언급에서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캐릭터가 사장인 쿠리타 가즈오(미츠이시 켄 분). 오래 전 동생을 잃은 회한을 곱씹으며 후지사와와 야마조에를 지켜보는 쿠리타는 슬픔에 지배되지 않고 변화된 삶을 살아가지만, 그렇다고 두 사람에게 섣불리 조력이나 갈등해결을 위한 실마리를 제공하지도 않는다. '난관에 봉착한 젊은이들과 그들에게 무상의 호의를 제공하는 키다리 아저씨'라는 클리셰를 피해가려는 미야케의 전략이다.
쿠라타과학과 관련해서 마지막으로 눈길을 끄는 것은 몹신이다. 대부분 내려다보는 구도로 촬영된 회사장면에서 동료들은 두 사람이 마주보거나 나란히 서서 대사를 주고받을 때 항상 프레임에 들어와 있다. 이는 미야케가 시나리오의 시각화를 궁리하는 과정에서 구상한 것으로 동료들을 후지사와와 야마조에의 관찰자이자 청중이라는 양가적 의미를 지니는 존재들로 묘사한 것이다.
귀 기울이기
하지만 필자에게 무엇보다 인상적으로 다가온 것은 영화가 두 사람의 연대를 그리는 직품임에도 의식적으로 그들을 한 프레임 안에 가두지 않고 각각의 자리에서 스스로 고민하며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아울러 후지사와와 야마조에가 같은 장면에 등장하더라도 조명과 앵글을 통해 두 사람의 얼굴을 보여줄 뿐, 도드라지는 카메라워크나 컷 분할, 클로즈업 등의 기교를 삼간다는 점. 수용자를 위한 여지를 남기기 위해서다. 각각 나눠 찍은 컷을 연결하면 편집 과정에서의 간격조정 등 다양한 표현이 가능해지지만 집중도를 반감시킬 수도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미야케의 이러한 연출기조는 스태프들에게도 충분한 동의를 이끌어 낸 걸로 파악된다. 대표적인 예로서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에 이어 다시 한 번 미야케와 호흡을 맞췄던 츠키나가 유타 촬영감독의 경우, 카메라의 지나친 개입을 최대한 피해갈 요량으로 클로즈업보다 미디엄 쇼트를 주로 사용했는데 현장에서 이에 관해 따로 요청을 받은 바도 없었다.
이밖에도 <새벽의 모든>에서 유난히 시선을 붙드는 것이 야마조에의 전 상사 츠지모토(시부카와 키요히코 분)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다 흐느끼는 장면이다. 여기서 화자는 츠지모토지만 카메라의 시선은 그의 등 뒤에서 야마조에를 바라보며 관객들은 오직 상영관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소리 만으로 그의 심리상태를 파악하게 된다. "PMS 증세가 나타나고 있는지 여부는 주위사람들이 신경만 쓰고 있으면 알아차릴 수 있다"는 대사와 궤를 같이 하는 부분일 거라 예상했는데 실제로 미야케도 "친구와 다방에서 마주보고 앉아 수다를 떨 때와 밤에 산책로에서 얼굴을 마주치지 않고 목소리만 들으면서 수다를 떨 때. 나오는 말이 달라진다는 것은 실감한다"고 코멘트했다. '상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일'의 의미를 영화적 체험으로써 전달하고자 한 것이다.
다시 시작되는 여정
미야케 쇼는 자신의 영화 만들기의 뿌리가 "얼마나 행복하든 고통스럽든 언젠가 사람은 죽는다는 사실, 인생이 한 번밖에 없다는 생각"에 있다고 누차 밝힌 바 있다. 삶, 수많은 선택과 물음에 직면하게 되지만 그 모든 것이 결국 "인생이라는 커다란 접시 위"에 올려 져 있다는 느낌. 그리고 "어차피 죽는다는 절망은 대충 잊어버리지 않으면 살 수 없지만, 그렇다고 아예 그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을 것"이라는, 해서 "계속 살아있다 보면 뭐든지 고마워져버린다"는 결론. 이는 분명"어느 누구나 죽는 것은 확정적이나 그것으로 향하는 과정에 대해서는 답이 정해져 있지 않다. 그런 불확정한 것을 영화로 찍고 싶다"는 욕망으로 이어지고 있으니까. 이 '불확정성의 영화작가'의 여정에, 부디 필자역시 앞으로도 오래오래 함께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새벽의 모든
All the Long Nights Film Partners
감독
미야케 쇼 Sho Miyake
시나리오
미야케 쇼 Sho Miyake, 와다 키요토 Kiyoyo Wada
프로듀서
이노우에 류타 Ryuta Inoue
출연
카미시라이시 모네 Mone Kamishiraishi, 마츠무라 호쿠토 Hokuto Matsumura
촬영
츠키나가 유타 Yuta Tsukinaga
배급 Bandai Namco Filmworks Inc., Asmik Ace Inc.
제작연도 2024
상영시간 119분
등급 미정
현지개봉 2024년 2월 9일
정치학과 영상예술학 두 분야의 학위를 소지. 인문사회과학과 영화이론을 넘나드는 전문적 식견으로 한일 양국 매체에 분석기사를 쓴다. 파리경제대 토마 피케티와 『21세기 자본』 프로젝트를 진행한 도쿄대 연구실 출신.
프로듀서를 맡은 장편 다큐멘터리영화 <포 디 아일랜더스>는 2008년 제주영화제 개막작이었다.
2013년부터 월간 《게이자이》에서 담당하는 경제평론지면이 에히메대 와다 제미나르의 교재로 쓰인다. 국제영화비평가연맹(FIPRESCI) 지부인 일본영화펜클럽 회원. 『마르크스는 처음입니다만』 등 다수의 스테디셀러를 소개해온 번역가로도 유명하다.
일본국제교류기금이 선정하는 “세계의 영화인 7인” 중 1인이며 일본 TBS(채널 6) 주최 디지콘 6 아시아 심사위원, 《마이니치신문》 영화웹진 《히토시네마》 필진 및 마이니치영화콩쿠르 심사위원, 다카사키영화제 시니어 프로듀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어드바이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