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수의 영화로 세계 속으로] 루마니아: 자를 수 없는 롱테이크
[박정수의 영화로 세계 속으로] 루마니아: 자를 수 없는 롱테이크
  • 박정수
  • 승인 2024.05.17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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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조차 무익하게 꾸지 않는다"

오늘날의 시네필이라면 극장이든 영화제에서든 한 번쯤 루마니아 영화를 감상해봤을 것이고, '루마니아 뉴웨이브'라는 개념도 들어봤을 것이며, 그들의 아주 길고 긴 '롱테이크'도 경험해 본 적 있을 것이다. 이처럼 현대 영화 흐름 중에서 가장 유명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루마니아 뉴웨이브의 특징은 바로 '리얼리즘'이다. 주제에 있어선 루마니아의 악명 높은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치하에서 말할 수 없었던 진실과 그 후폭풍을 영화로써 증언한다. 차우셰스쿠 시절 악랄했던 피임 및 낙태 금지 정책이 반영된 당시의 풍경은 <4개월, 3주... 그리고 2일>(2007) 등에서 재현되고, 그렇게 강제로 태어나 버려진 '차우셰스쿠의 아이들'의 삶은 <신의 소녀들>(2012), <알리스. T>(2018)와 같은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역사와 현실을 효과적으로 재현하고자 루마니아의 영화감독들은 롱테이크를 적극 활용한다. 롱테이크는 현실을 생생하게 반영할 수 있는 형식이다. 인간이 뿌리를 내린 현실에선 영화마냥 지금 여기를 잘라내고, 다른 시공간을 이어낼 수 없다. 그래서 편집이 전무하다시피 한 롱테이크야말로 현실의 시간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구현하는 형식이다. 이 롱테이크는 루마니아 뉴웨이브를 열어젖힌 대표적인 세 명의 기수 '크리스티 푸이유', '코르넬리우 포룸보이우', '크리스티안 문주'부터, 이후 루마니아 뉴웨이브를 이어가는 '라두 문틴', '라두 주드', '칼린 페터 네처' 등 모두가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이들 대부분이 현실과 밀착한 주제를 롱테이크라는 그릇에 담아내지만, 각각은 1차원적인 리얼리즘 이상의 의미를 롱테이크에서 길어낸다.

 

ⓒ <4개월, 3주... 그리고 2일>

어떤 감독은 '출구 없음'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롱테이크를 사용한다. 특히, 문주가 대표적이다. 우리가 현실에서 영화마냥 편집을 사용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불쾌하거나 싫은 순간은 과감히 자르거나 축약하고, 대신 '유토피아'로 손쉽게 초월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과 이를 반영하는 형식 롱테이크는 편집의 '탈출' 가능성이 전무하다. 문주는 롱테이크의 폐쇄성을 적극 사용하여 좁게는 차우셰스쿠 독재에서 도망칠 수 없었던 서민들의 삶, 넓게는 탈출 불가능한 루마니아와 지옥도와 같은 세계의 속성을 가시화한다. 전자로는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이 있고, 후자로는 <내겐 너무 멋진 서쪽 나라>(2002), <신의 소녀들>, <엘리자의 내일>(2016), <R.M.N>(2022)이 있다.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은 차우셰스쿠 치하에서 불법화된 낙태와 피임의 여파를 적나라하게 체험시켜주는 작품이다. 여기서 롱테이크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20세기 후반의 루마니아를 간접 체험할 수 있는 형식으로 작용함과 더불어, 당대 루마니아 여성들에게 강제 부과된 임신과 출산이란 의무의 탈출구가 존재하지 않았음을 가시화한다. 임신하지 않으면 벌금이 매겨지는 시대에 여성은 어머니 외의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았다.

<4개월, 3주... 그리고 2일> 외의 작품에서 문주는 차우셰스쿠에 국한되지 않는, 더 많은 루마니아의 폐쇄성을 진단한다. <신의 소녀들>과 <엘리자의 내일>에선 자국을 등졌거나, 등지려 하거나, 뒤바꾸려 하던 사람들이 등장한다. 동시에 루마니아라는 거대하고도 부조리한 구조를 오랜 시간 지탱해온 '정교회', '공권력'이 이들을 에워싼다. 탈출을 꿈꾸던 이들은 구조에 붙잡혀 무기력하게 체념하거나 희생되고(<신의 소녀들>), 출구를 뚫거나 균열을 내서 구조를 뒤바꾸려던 이들은 끝끝내 부조리함에 잠식되고야 만다(<엘리자의 내일>). 그렇다면 천신만고 끝에 어떻게든 출구를 찾는다면 절망적이고 비참한 롱테이크를 잘라내고 유토피아를 이어낼 수 있지 않을까? <내게 너무 멋진 서쪽 나라>와 <R.M.N>을 공통으로 관통하는 소재는 '이민'이다. 즉 구조를 벗어나려 한다. 그러나 루마니아인들이 자국을 탈출해도, 루마니아 드림을 꿈꾸며 개발도상국 이민자들이 루마니아로 찾아와도, 그 어디에도 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구조를 탈출하면 더 거대한 구조가 착취를 준비하며 결국 지옥도가 연속된다. 즉 문주는 차우셰스쿠 시기, 더 나아가선 루마니아와 전 세계의 부조리함을 롱테이크의 폐쇄성으로 가시화한다.

 

ⓒ <라자레스쿠씨의 죽음>

롱테이크의 도망칠 수 없는 특징을 문주 외의 감독들도 주목한다. 푸이유의 <라자레스쿠씨의 죽음>(2005)도 대표적이다. 당장 치료를 받아야 하는 응급환자 라자레스쿠씨(이온 피스쿠테아누), 그러나 그는 영화 내내 치료받지 못한다. 원인은 루마니아의 공권력과 의료체계를 경직시킨 '관료주의'에 있다. 영화 전체에 거쳐 라자레스쿠씨는 여러 병원, 기관을 전전하는데 모든 기관에서 자신의 의무나 책임이 아니라는 이유로 환자 받기를 거부하거나 진료를 미룬다. 관료들은 자신이 맡은 협소하고 편협한 기준에 갇혀 있고, 이로써 라자레스쿠씨도 죽음이라는 운명에서 탈출하지 못한 채 몸이 서서히 식어간다. 그러나 동시대 루마니아 감독들은 부조리하고 추한 현실을 냉정히 묘사하되, 그 악덕이 또다시 현실로 이어지길 바라지 않는다. 푸이유는 라자레스쿠씨의 롱테이크를 깨트리진 못하지만, 죽음 진단을 받고도 기어이 깨어나는 노인의 모습을 포착하며, 출구 없는 현실에서 나름의 출구를 찾을 수 있는 인간의 의지에 기대를 건다.

주드의 근작 <지구 종말이 오더라도 너무 큰 기대는 말라>(2023)에서 롱테이크의 기능도 유사하다. 주인공 안젤라(일린카 마놀라케)는 캐스팅 디렉터로 온종일 루마니아 곳곳을 누비며 출연에 적합한 사람을 물색하는데, 그녀는 자신이 맡은 일에 불만이 아주 많다. 안젤라에게 부과된 노동의 양은 지나치게 과다하고, 그녀에게 과한 업무를 주문하는 기업은 정작 공익 광고를 연출하며 위선을 떨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젤라는 이 세계의 추악함을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부캐', 보비차로 틱톡에서 활동한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필터를 이용해 남성으로 분장하여 안젤라인 자신이 속한 현실에서 잠시나마 탈출한다. 그러나 틱톡은 아주 찰나인 '숏폼'이기에 결국 현실의 지지부진한 롱테이크로 돌아와야 하고, 보비차로 만들어주는 필터 역시 불완전하여 중간중간 안젤라의 모습이 노출된다. 주드는 모순으로 가득한, 이로써 맨정신으로 버티기 어려운 현실에서 우리가 탈출할 수 없다는 것을 롱테이크로 표현한다.

이처럼 루마니아의 영화감독들은 가상 이미지와 실재의 관계에도 관심이 많은데, 그들은 롱테이크로써 이미지가 미화되기 이전의 모습을 폭로한다. 이 작업을 포룸보이우와 주드가 선도한다. 포룸보이우는 '선전'이라는 허위의 이면을 롱테이크로써 까발린다.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2006)에선 차우셰스쿠 정부를 무너뜨린 혁명의 순간에 참여했노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경찰, 형용사>(2009)에선 '사전'에 적혀있는 경찰이란 단어와 의미가 커다랗게 클로즈업된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전후 맥락이 다 잘려있거나, 실제 경찰이 아닌데도 실체 없는 이미지로서 피사체를 대표한다. 그래서 포룸보이우는 롱테이크를 이용하여 전후 맥락을 다시 이어 붙인다. 이로써 혁명가라 일컬어지는 그들의 주장에서 모순을 발견하고, 현실 속 경찰들이 사전상 의미와 영 딴판임을 폭로한다. 즉 포룸보이우는 편집된 이미지가 그럴듯한 진실로 위장되는 오늘날에, 그 이미지의 전후맥락을 재건하는 롱테이크를 이용하여 진실을 발굴하고 의심을 환기한다.

 

ⓒ <배드 럭 뱅잉>(2021)

주드의 탐구도 포룸보이우와 유사하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소녀>(2009), <에브리바디 인 아워 패밀리>(2012), <나는 야만의 역사로 거슬러가도 상관하지 않는다>(2018)에선 현실과 대응한다고 일컬어지는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소녀>는 문자 그대로의 소녀가 등장하는 '광고', <에브리바디 인 아워 패밀리>에선 책임감 있는 '가장'의 이미지, <나는 야만의 역사로 거슬러가도 상관하지 않는다>에선 2차 대전 당시 루마니아에서 발생한 제노사이드가 '영화'로 재현된다. 주드는 롱테이크를 이용하여 광고 및 영화 촬영 현장, 이미지 너머의 모습을 폭로한다. 편집이 전무한 그 현장에서 소녀는 행복하지도 않았고, 가장은 가족을 큰 위험에 빠트릴 정도로 폭력적이었으며, 영화는 역사에 오롯이 대응하지도 않는다.

다시 말해, 이미지 너머는 매우 혼란스러운데, 그래서 몇몇 루마니아 영화감독은 롱테이크에다가 '롱숏'을 결합하여 그 혼돈을 생생히 재현한다. 이 작업을 푸이유가 선도하며, 주드의 <배드 럭 뱅잉>(2021) 1부, 문주의 <신의 소녀들> 후반부도 하나의 예시가 될 수 있다. '클로즈업'은 프레임에 하나의 피사체만을 커다랗게 가득 채운다. 이와 달리 롱숏은 개인이 몸담고 있는 공간이나 세계를 반영한다. 그래서 클로즈업에 비해 다수성을 띠는 롱숏엔 여러 이해관계, 모순, 역설, 혼란이 동시에 들어찰 수 있다. 이 널따란 '공간'에 길고긴 '시간'까지 결합한다면 하나의 숏이 품을 수 있는 것은 무궁무진해지며, 이로써 혼란도 극심해질 것이다. 푸이유가 이 효과를 극단적으로 밀어붙인 작품이 <시에라네바다>(2016)로, 하나의 시공간엔 차우셰스쿠에 대한 상반된 견해, 성별과 세대에 따라 달리 도출된 세계가 역설적임에도 공존한다. <배드 럭 뱅잉> 1부의 말싸움이나 소란스러움도 마찬가지로, 정돈된 이미지만을 잘라내는 가상의 영상과 달리, 현실은 무수한 충돌과 마찰로 가득한 '카오스' 그 자체다.

 

ⓒ <말름크로그>(2020)

이렇게 현실만을 치열하게 반영하는 루마니아 뉴웨이브이기에, 그들 영화에선 편집의 맛과 부조리한 현실 너머를 지칭하는 희망찬 미장센을 꿈꿀 수 없을 것만 같다. 하지만 루마니아의 영화감독들 역시 '꿈의 공장' 할리우드의 시네아스트들처럼 현실 너머를 꿈꾸지 않은 것은 아니다. 문주는 <엘리자의 내일>에서 '가면', <R.M.N.>에선 '자살'이라는 상징 등 현실에서 통용되지 않는 영화만의 가상적 질서를 구축했고, 푸이유 역시 <말름크로그>(2020)에서 노동자들의 혁명이 성공하는 '꿈'을 이어내기도 하였다. 다시 말해 루마니아의 시네아스트 또한 현실을 벗어나 영화 고유의 꿈이나 원리를 구축하고 싶은 욕망이 존재한다. 이들보다 더 적극적으로 리얼리즘을 탈피하는 감독도 존재하는데 포룸보이우는 <트레져>(2016)와 <더 휘슬러스>(2019)로 루마니아의 하이스트 및 스릴러 장르를 개척했고, 주드는 <아페림!>(2015)으로 루마니아 뉴웨이브에 '서부극'을 이식하였다. <배드 럭 뱅잉> 결말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의 롱테이크가 리얼리즘이라는 마땅한 당위성을 지닌 것처럼, 가상적 형식과 장르를 개척하는 흐름 역시 나름의 원인에서 출발한다. <트레저>와 <더 휘슬러스>에선 각각 현재를 개선한 '미래', 일반적인 언어와 다른 체계를 갖춘 '휘파람어'로 초월한다. 매끈한 미장센과 잦은 편집의 당위성은 부조리함과 통속을 해결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엔 미지의 보물을 끈기 있게 추적하고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등 문제 해결을 위한 치열한 몰두, 곧 지루한 롱테이크를 거친다. 즉 이상으로 초월하기 위해선 현실의 불완전함과 결여를 모두 없애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 <아페림!>에서 주드가 서부극을 차용한 이유는 루미나아인들의 집시 혐오 역사를 고발하기 위함으로, 그간 백인의 선전 용도로 사용된 서부극이란 장르를 역사의 진실을 담아내는 그릇으로써 반성한다.

 

ⓒ <지구 종말이 오더라도 너무 큰 기대는 말라>

이러한 문제 해결 및 반성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가상은 그저 허황한 백일몽으로 전락할 뿐이다. <말름크로그>의 꿈은 실제 역사와는 상반된 결과이기에 금세 깨어나 현실로 되돌아오고, <배드 럭 뱅잉>이나 <지구 종말이 오더라도 너무 큰 기대는 말라>에서 나타나는 욕망 역시 그저 현실을 회피하는 태도에서 비롯되었기에 진지함과 타당함을 조금도 지니지 못한다. 결국, 루마니아 영화감독들은 꿈조차도 무익하게 꾸지 않는다. 그들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꿈꾸기에, 꿈과 같은 영화는 늘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제시한다. 그래서 앞으로도 루마니아 뉴웨이브의 명맥은 아마도 이어질 것이다. 어떤 문제가 해결되어 도래하는 꿈은 찰나이고, 결국에는 또다시 문제가 초래되는 것이 현실의 숙명이기에, 그들은 손에 쥔 롱테이크란 도구를 영영 놓을 수 없을 것이다.

[글 박정수 영화평론가, green1022@ccoart.com]

박정수
박정수
예술은 현실과 차별화된 고유하고도 독립적인 차원입니다. 그중에서도 영화는 타 예술 매체와 구분되는 고유한 시각적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술만의, 오직 영화만의 경험을 독자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동시에 영화는 현실에서 비롯되고, 인간에게 이바지합니다. 그렇기에 현실-예술, 인간-영화를 이어내는 교두보와 같은 글을 제공하고자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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