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뜨기 전인 이른 새벽, 정순(김금순)은 그녀의 딸 유진(윤금선아)이 운전하는 자동차에 타고 있다. 정순은 유진에게 그날 저녁 먹을 메뉴를 논하다가 무기력한 눈빛으로 창밖을 보기 시작한다. 그녀의 행선지는 그녀가 일하는 식품공장이다. 그녀가 공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정순>의 타이틀이 화면에 드러나며 영화가 시작된다. 보통의 타이틀 시퀀스가 앞으로 펼쳐질 영화의 문법을 한 데에 압축하는 것을 생각해보았을 때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연출이다.
영화의 흐름을 조금만 더 살펴보자. 이윽고 정순이 일하는 공장의 풍경이 펼쳐진다. 카메라는 정순이 차에서 내려서 공장으로 들어가는 순간을 위에서 아래로 포착한다. 이때 정순은 개미처럼 보인다. 정순이 움직이는 경로를 따라서 20대로 보이는 청년 여성과 중년 여성이 반반으로 나뉜 탈의실과 공장에서 입는 작업복을 빨래하는 세탁실, 직원을 점호하는 공장 입구, 식품을 포장하는 공장 내부까지 풍경이 서서히 드러난다. 또 작업 과정에서 정순에게 호감을 느끼는 신입 영수(조현우)와 공장 여직원과 염문이 생기는 문제아 도윤(김최용준)까지 인물이 하나씩 소개된다. 이윽고 유진의 일터가 소개된다. 폐차장에서 일하는 그녀는 자동차 부품을 잘 분해하는 남자 직원끼리 왁자지껄 떠드는 가운데에서 제 일을 묵묵히 한다. 회사 상사로 보이는 예비신랑과 결혼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마저 더없이 일상적이다.
정지혜 감독의 <정순>은 식품공장에서 일하는 중년 여성 정순이 디지털 성범죄의 피해자가 되면서 경험하는 심리적 트라우마와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을 담는다. 정순은 남편과 사별한 뒤 결혼식을 앞둔 유진과 단둘이 살아가고 있다. 그녀는 식품공장에서 만난 영수와 연인 관계로 발전하며 외로움을 달래려 한다. 둘은 영수가 임시로 숙박하고 있는 모텔 달방에서 데이트한다. 정순은 영수와의 자신을 둘러싼 소문이 퍼지는 것이 두려워 헤어지려고 마음을 먹으면서도 헤어지지 못한다. 영수는 정순을 만날 때마다 그녀를 찍은 영상을 본인 핸드폰에다 담으려 한다. 그러던 어느 날에 영수가 찍은 정순의 영상이 유출되면서 정순의 일상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다. 유진은 발 벗고 나서서 정순을 도우려 하지만 경찰은 수사에 적극적으로 임하려 하지 않는다.
<정순>은 감독의 자전적인 체험과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윤리가 어우러진 영화다.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 영화의 제작 과정을 두 단계로 이야기한다. 우선 감독은 식품공장에서 생산직 아르바이트를 한 경험이 있고, 거기서 중년 여성과 교류하며 중년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소망을 품었다고 이야기한다. 여기에 디지털 성범죄에 관련된 조사를 하던 중 디지털 성범죄 가해자 중 중년 남성의 비율이 높다는 사실을 발견했으며, 중년 여성도 얼마든지 디지털 성범죄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문제의식이 더해져 영화가 완성되었다.
감독은 "디지털 성범죄의 경우 디지털에 더욱 가까운 젊은 세대 여성에 국한된 문제"라고만 보는 편견이 있고, 이 편견 때문에 중년 여성을 대상으로 한 디지털 성범죄의 피해자 중 소외된 이가 있을 것이란 생각에 이 영화를 제작했다고 밝혔다. 영화 구성에서도 감독의 의도가 제법 정직하게 드러난다. 이 영화는 디지털 성범죄가 생기기 전인 1부와 그 이후를 다루는 2부의 구성으로 구성된다. <정순>의 1부는 노동 영화로, 2부는 정순이 피해자가 된 직후에 생기는 감정적 여파를 그려내는 심리에 초점을 두며 두 마리의 토끼를 잡으려고 한 것이다.
앞서 설명했듯이 <정순> 속의 세계는 오프닝에서 드러나듯이 영화적 기법과 문학적인 세공이 깃든 세계가 아니다. 다르덴 형제의 카메라에 TV 프로그램 <인간극장>같은 일상적 삶의 세계가 담겨 있는 다큐멘터리가 더해진 느낌을 준다. 캐릭터를 쉬이 클로즈업하지도 않으며 그들의 응축된 감정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다만 <정순>이 현실을 비판적으로 그리는 리얼리즘에 그치지 않는 감정적인 여파를 남긴다. 그 여파는 이 영화가 만드는 공포의 감정에 의해서 생긴다. 이 영화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영화 속 공간이다. 감독은 영화 속 로케이션을 본인이 나고 자란 양산으로 정했다.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폐쇄적인 양산의 지형은 영화 안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영화를 보는 동안 영화 바깥의 세계가 없는 듯한 고립감과 음산함을 만든다. 영화를 통틀어서 정순이 TV를 보는 장면은 단 한 번만 드러나며 정순이 누릴 수 있는 유흥거리는 등산과 노래방 정도만 드러난다. <정순>은 이 폐쇄성으로 인해서 설득력이 생긴다.
특히, 정순이 일하는 식품공장은 마치 고딕 장르에서 등장하는 성을 연상하게끔 만드는 장소로도 보인다. 고딕 장르에서는 내부에 혼란을 일으키는 외부자의 침입으로 서사가 시작된다. 그 외부자는 바로 영수다. 영수는 서울에서 지방으로 내려온 이이며 무릎이 아프다는 것 외에는 그 어떤 서사도 부여되어 있지 않다. 이는 도리어 영수를 미스터리한 캐릭터로 보이게 만든다. 제아무리 영수가 공장에서든, 정순에게서든 순박하고 어수룩한 사람으로 보일지라도 말이다. 영수는 속내를 가늠하기가 힘든 캐릭터에 더욱 가깝다. 영화는 영수에게 책임을 몰아세우지 않는다. 되려 범죄를 저지르게 한 폐쇄적인 호모소셜(남성중심적 사회)의 구조를 그리려 한다. 정순의 영상을 돌려보는 남성은 악마화되지 않고 일상이라는 듯이 평범하게 그려질 뿐이다. 또 이러한 폐쇄성으로 인해서 정순이 영수의 달방 앞에서 마주하는 노숙자처럼 발붙일 장소가 없는 것을 강조한다. 고딕 서사가 보통 여성이 시스템의 총체를 보고 미치는 걸로 끝난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영화의 서사도 고딕 소설로 볼 만한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영수가 범죄를 저지르는 순간을 생각해보자. 도윤과 그의 동료가 한곳에 모인 뒤에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보며 음담패설을 속닥거릴 때 영수는 혼자서 멀찍이 떨어져 그들을 보고 있다. 도윤은 이전에도 공장 직원과 연애한 뒤에 헤어지자고 말하자마자 헤어지자고 한 전력이 있다. 도윤은 "아저씨는 순수한 사람이라 이런 거 잘 몰라"라고 영수를 업신여기는 말을 건넨다. 영수는 머뭇거리며 도윤을 보고 있다. 곧장 몽타주로 곧장 20대 여성 직원 셋이 정순의 영상을 보고 웃는 듯한 상황이 드러난다. 디지털 성범죄를 둘러싼 경찰 조사에서 도윤이 강압적으로 퍼뜨리게 했다라는 영수의 진술과 먼저 동영상을 보여준 것은 영수라는 도윤의 진술이 포개진다. 둘 다 진범이지만 진범이 명확하게 진술되지 않은 상황이다. <정순>은 가해자를 정확히 지정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여성을 성적, 육체적 부품으로 소비하며 지탱되는 공장 시스템이 얼마나 공포로 다가올 수 있는지를 드러낸다. 마지막에 이르러 정순은 운전면허 시험을 치르던 중 네 남성이 친하게 지내는 것을 마주한다. 정순이 넷을 추적하나 복수극으로 갈 수 있는 대신에 그들 넷이 형 아우로 대하는 일상적 풍경을 드러낸다. <정순>의 공포는 적어도 영화 안에서는 호모소셜의 외부가 없다는 데에서 드러난다.
영화는 2부에서 정순의 트라우마에 집중한다. 이때부터 영화는 김금순 배우의 연기에 힘입어 폭발적인 힘을 지니기 시작한다. 이불을 뒤집어쓰는 정순을 반복적으로 드러내되 피해자의 이미지를 전형적으로 그리려고 하지 않는다. 유진에게 도움을 받지 않으려 하며 온 힘으로 악다구니를 쓰며 트라우마를 견디려 하는 정순을 포착한다. 그제야 음악과 조명 등이 환히 들어온다. 영화는 정순의 주체성이 꿈틀거리는 순간에만 극적인 장치를 부여하며 관객의 마음이 움직이도록 이끈다. 정순의 아파트, 좁게는 이불 안에서야 드러나는 정순의 트라우마는 다른 캐릭터에게는 포착되지 않는 것이다. 감독은 관객만큼은 그 고통을 함께 봐주기를 바란다. 이 순간이야말로 사각지대에 있는 소수자를 비추려 하는 감독의 의도가 가장 선하게 드러난다. 아니 이 영화의 핵심이라 할 수 있을 듯하다.
[글 김경수 영화평론가, rohmereric123@ccoart.com]
정순
Jeong-sun
감독
정지혜
출연
김금순
윤금선아
조현우
김최용준
배급 더쿱디스트리뷰션
제작연도 2024
상영시간 104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4.0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