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스트 라이브즈>(2023)에 대해 본격적으로 말하기 전에 영화를 본 당시의 즉각적인 감상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다. 단적으로 말해 나는 이 영화에 크게 감동하지 않았다. 12년을 주기로 삶의 세 시간 축을 오가는 장면 연결은 불교의 '12연기'를 헐겁게 적용한 작위적 연출처럼 보였고, '인연'이나 '전생'과 같은 개념이 등장할 때마다 인물의 현생에서 이어지지 못한 관계에 대한 아쉬움보다 노골적이고 어색한 발화의 양태로 내세워진 낱말에 대한 낯간지러움이 앞섰기 때문이다. 이처럼 동양적 사상을 환기하는 자막과 대사가 외려 그 개념이 배태할 법한 정서에의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동했다는 점이 '최고의 데뷔작'이란 호평에 흔쾌히 수긍할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였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막상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다수의 반응을 접하면서, 문득 나를 포함해 <패스트 라이브즈>에 감동하지 않은 이들이 느낀 일련의 아쉬움이 진정 작품의 결함이기만 한 것인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영화를 복기하기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언젠가 귓가를 스친 노라의 대사다. 극 중 어린 시절 친구였던 노라와 해성은 12년 만에 연락을 주고받는다. 각각 미국과 한국에 사는 두 인물이 영상 통화로 교류를 이어가던 어느날, 극작가인 노라는 집필에 집중하기 위해 아티스트 레지던시에 가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은 해성이 목적지까지 소요 시간을 묻자 노라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뉴욕에서 네 시간쯤 동쪽?" 자신이 거주하는 뉴욕에서 동쪽을 향해 네 시간쯤 이동하면 레지던시가 있는 '몬탁'에 도착한다는 이 말은 구태여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없을 만큼 즉각적으로 의미를 전달한 후 휘발된다.
시간이라는 직관의 형식이 일종의 물리량으로 표현될 때, 대개의 경우 방향의 개념은 그 내용에 포함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일상에서 시간은 주로 숫자와 단위만으로 환산된 스칼라값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위 장면에서 노라의 화법은 이와 조금 다르고, 적어도 내게는 그 미묘하게 낯선 대사의 구체성이 자꾸만 <패스트 라이브즈>를 돌아보게 하는 것 같다. '뉴욕에서 네 시간쯤 동쪽'. 노라의 말에는 기준점으로서의 공간과 운동이 지속되는 시간뿐 아니라 행로를 결정짓는 방향이 한 데 포개어져 있는데, 이처럼 운동의 향방을 포함한 공간적 차원으로서의 총체이자 벡터값으로 묘사된 시간은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어떤 의미를 함축하기에 특기할 만하다.
다른 시간, 다른 공간, 다른 이름. 열두 살의 '나영'과 서른여섯 살의 '노라'는 이미 서로에게 무척이나 다른 존재다. 그럼에도 노라가 어린 시절의 자신과 공유하는 특성을 정의할 수 있다면 떠오르는 표현이 하나 있다. 바로 '또라이'다. 맥락상 그녀가 가진 '또라이'스러움의 근원은 모종의 자기 확신을 토대로 삶의 방향성을 겨냥하는 태도에 있는 듯하다. 문제라면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의 장면화가 다소 허술하다는 점인데, 그 설득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울보', '두 번의 이민' 등 인물의 특성과 정체성을 설명하는 대사에 불과하다. 이처럼 말이 곧 말을 근거하며 외려 화면 바깥의 관념으로 서사에 대한 해석을 유도하는 셀린 송의 연출은 스크린 안팎의 감정적 동화를 매끄럽게 연결 짓지 못한다는 점에서 비판의 소지가 있고, 이는 "반복적으로 발음되는 말들을 책임지는 단일한 장면이 없다"는 변해빈 평론가의 지적(「[Critique] 아름답지만 안전하게 움직인다」)에 설득을 더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패스트 라이브즈>를 곱씹을수록 나는 이러한 비판의 근간이 된 문제의식, 즉 인물이 내뱉는 말과 서사의 결착을 용인할 수 있는가에 천착하는 동안 이 영화의 초점을 외려 벗어나는 게 아닐지 다소 회의적인 생각이 든다. 따라서 이 글은 인물의 말이 영화 내부의 어떤 장면에 근거하고 있느냐에 대한 또 하나의 의문을 보태기보다, 어눌하고 근거가 미약하기만한 그 말들이 공간의 지표에 붙들려 프레임을 부유한 끝에 도달한 지점에 잠시나마 머무르려는 시도가 될 것이다.
공간의 지표 주변을 배회하는 말들
동갑내기인 노라와 해성의 인연이 이번 생에서 더 가까이 이어지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은 그들이 몸담은 공간이 물리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서로에게 너무 멀리 떨어진 채 오랜 시간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24년 만에 다시 만난 두 인물은 이제와 주변의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서로를 바라볼 만한 위인이 못 되는, 좋게 말해 성숙하고 나쁘게 말해 평범한 어른이 되어있다. 따라서 그들은 서로가 마주치고 엇갈린 삶의 시간보다 육중한 공간의 무게를 거스르지 못하고 마지막일지도 모를 또 한 차례의 헤어짐을 맞는다. 이처럼 노라와 해성의 재회는 삶을 변화시킬 파격적 사건이 아니라 서로 떨어져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엇갈린 공간의 차이를, 즉 각자가 개체로서 스며든 문화적 틀의 간극을 수용하는 과정으로 그려진다.
얼핏 보면 <패스트 라이브즈>는 '인연'과 전생'이란 동양적 관념을 내세워 누구나의 삶에서 오가는 모든 것들의 무상함에 관해 말하는 것 같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 간의 만남일 수도, 비가역적인 시간의 흐름일 수도, 때로는 과도하게 적확하고 노골적이어서 외려 정처를 잃은 것처럼 들리는 인물들의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의 핵심이 단순한 시간이 아닌 공간에, 더 정확하게는 '공간적 차원의 총체'로서의 시간에 있음을 상기해 이러한 영화의 테마와 형식 간의 만남을 살핀다면 위의 해석에서 조금 더 나아가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때의 시간은 선형적인 흐름에 복무하지도, 기억이란 이름으로 진공된 단면의 차원에 머무르지도, '윤회'라는 원형적 시간을 가늠하게 하는 차원도 아니라는 점에서 얼마간 특별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끝 무렵, 예상보다 일찍 도착한 택시에 올라타기 전 침묵을 끝내는 건 해성의 목소리다. "야!"하고 노라를 부르는 그의 육성이 비슷한 구도로 이별을 맞은 24년 전의 그들을 불러들일 때 비로소 셀린 송이 '전생'이란 개념을 내세운 이유가 드러난다. 그들의 현재에 틈입한 어린 시절은 단순히 현재를 기준으로 선형적 시간을 거슬러 도달할 수 있는 기억이 아니라, 마치 동일한 업보가 무한대로 재현되는 공간적 차원(layer)의 영역이자 찰나의 이미지(frame)로만 표상될 수 있는 가능성의 차원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셀린 송의 플래시백은 으레 인식되는 시간의 선형적 흐름을 벗어난 가능적 세계의 부분집합, 즉 동일한 업보를 다른 방식으로 재현되는 다겹의 세계로 표상하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그리고 뒤따르는 해성의 말, '다음' 생에서는 '벌써' 서로에게 다른 인연일지 모를 관계를 환기하는 그의 대사는 현재에 틈입한 이미지를 불가능한 기억의 초상으로 붙잡아보려는 지난한 시도로 읽힌다.
그렇지만, '지금, 여기'에 존재할 뿐인 두 인물에게 서로의 방향과 공간이 일치한 다른 차원을 상상하는 일은 온전히 실현될 수 없고, 현재의 무게를 느끼며 살아가는 '어른'이 된 그들에게 가능한 것은 그저 과거를 떠나보내고 각자가 살아가는 시공간의 단면을 붙잡는 일뿐이다. 해성의 물음에 "모르겠어."라 답하는 노라의 말은 회귀할 수 없는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나 불가지한 미래에 대한 회의감이 아니라, 현재만을 미덥게 긍정할 수 있음을 확인하는 자기 인식적 응답에 가깝다.
"그때 보자." 공간적 좌표가 탈락된, 또 다른 생의 차원을 시간의 한 점으로 지시하는 해성의 마지막 인사는 그렇게 <패스트 라이브즈>가 표상하는 어긋남과 불가능의 감각을 극대화한다. 이는 영화가 두 인물이 마주보고 선 서로 다른 시공간의 차원을 빠른 리듬으로 오감에도, 삶이란 흐름에 내던져진 스크린 안팎의 존재 모두는 두 차원을 '과거'와 '현재'라는 분화된 개념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음을, 다시 말해 말과 개념으로 대표되는 세속적 인연의 틀을 붙잡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대사다. 따라서 끝내 싱거운 한 문장의 물음으로 점멸해버린 해성의 물음과 노라의 응답은 그들의 현재를 바꿀 수 없으며 그저 주어진 삶에 대한 미진한 주석으로 남는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이별이 가슴 벅찬 감동이나 뜨거운 정념의 폭발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것은, 한편으로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두 사람은 직접 몸으로 부딪쳐서야 그들 사이엔 딱 떨어지는 단어가 없다는 사실, 구체화하지 못한 그런 관계가 그들의 총체라는 것, 그걸 알게 되었을지 모른다."는 변해빈 평론가의 말은 원문에서 부정적 뉘앙스로 쓰인 것과 정반대로 읽힐 소지가 있다고 본다. <패스트 라이브즈>를 단순히 '말'로서 서사를 견인하는 영화가 아니라 어떤 '말'로도 환원되지 못하는 어긋남, 즉 개념과 상황 간 결착의 불가능성을 말하는 영화로 받아들일 때 문제시되었던 셀린 송의 연출은 단순히 결점이 아닌 해당 작품 고유의 성질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인물 사이를 이어줄 자연스러운 '말'의 부재, 그 불가능성이 그들 관계의 총체라는 지적은 외려 <패스트 라이브즈>에 대한 더없이 적절한 묘사이자 이 영화를 긍정하는 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또한 나는 박정수 평론가가 언급한 "현재는 무수한 가능성으로 가득 찬 반면, 과거는 제한적이고 협소"하다는 표현(「'패스트 라이브즈' 우리는 어째서 자꾸만 뒤돌아보는가」)을 정반대로 뒤집을 수 있다고 보는데, 서른여섯의 노라와 해성에게 무수한 가능성으로 가득 찬 것은 차라리 과거에 가까우며 현재는 그들 스스로에 의해 철저히 제한되기 때문이다. 셀린 송은 이러한 상태를 구태여 부정하지도 요란스레 긍정하지도 않으면서 현재와 나란히 선 기억 속의 '지금, 여기'를 현재의 '지금, 여기'를 받아들이기 위한 찰나의 감각으로 제시한다. 이때 간과해선 안 될 것은 '현재'라는 개념 자체에는 아무런 힘이 없다는 사실이다. <패스트 라이브즈>에서 '현재'란 만족과 불만족의 기준을 넘어 겸허한 받아들임을 통해 긍정되어야 할 층위의 관념으로서 인식될 따름이며, 셀린 송이 그린 두 인물의 현재는 미증유의 가능성 속에서 무한과 영원 사이를 횡단하는 운동으로 서로를 스친 후 또다시 어긋나기 때문이다.
서울의 남산타워와 상해의 동방명주 그리고 뉴욕의 마천루. 셀린 송의 카메라가 20대의 해성과 노라의 육체를 각기 다른 장소의 상징적 이미지 아래 각인할 때, 그들은 서로 다른 공동체 속에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고 증명해야 할 성인으로서의 역할을 막 수행하는 참이다. 이때 두 인물의 만남이 성사되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은 이보다 뚜렷한 만남에의 명분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되물음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해성이 무려 24년 만에 뉴욕까지 날아와 노라를 만나야 하는 명분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만은 함구하는 영화가 다소 얄팍하게 느껴질 법도 하지만, <패스트 라이브즈>가 이 물음에 명명백백히 답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점은 사실상 셀린 송의 영리함이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하다.
해성의 선택과 그의 행보는 온전히 자발적인 것이라기보다 '한국적'이라 불릴 만한 관념들을 따르는 것처럼 그려진다. 관객은 뉴욕으로의 여정을 위해 해성이 지불해야 했을 대가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데, 차라리 모든 여정이 그러하듯 그는 '돌아감'을 목적으로 한다고 설명하는 편이 적절할 수 있다. 그만큼 <패스트 라이브즈>에서 해성이란 인물 내부의 자발적 동기는 전혀 중요치 않으며, 핵심은 오직 그의 행보가 영화의 무엇에 복무하기 위해서인지에 있다.
어느 날 아서는 노라와 자신의 인연이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말한다. 자신이 오로지 자신이라서가 아니라, 그날 그곳에서 만난 두 사람의 조건이 서로에게 너무나 적절히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란 설명이다. 이처럼 다른 누군가에 의해 대체될 수 있는 자리에 대한 아서의 불안이 해성의 출현과 함께 그들의 현재에 노정된다는 점은 해성이란 인물을 삶에서 중대한 이동의 결심을 행한 두 부부의 이민자 정체성과 그 기저의 불안을 장면화하기 위해 나타났다 사라져야 하는, 일종의 영화적 계기로 받아들이게끔 한다. 한편, 스스로에 대한 노라의 설명에 따르면 그녀는 어린 시절의 인연에 천착해 현재의 삶을 내팽개칠 리 없는 인물이다. 누구보다 이 사실을 잘 아는 아서가 느끼는 소외의 감정과 불안정한 상태가 노라의 귀가 이후에도 말끔히 해소되지 않는 결말은 <패스트 라이브즈>에 대한 양극단의 입장을 동시에 불러들인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멜로드라마의 관습을 새로운 방식으로 계승했다는 입장과 기존의 틀을 완전히 탈피하지 못했다는 입장, 즉 좋게 말해 영리하고 나쁘게 말해 안전한 영화라는 평가 말이다.
<패스트 라이브즈>에 대한 비판을 검토하면서 작품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논의를 펼치긴 했지만, 이처럼 꽤 그럴듯한 영화의 짜임새가 어떤 그리고 얼마만큼의 감정적 반응을 불러일으킬지는 여전히 이를 수용하는 각자의 몫으로 남겠다는 생각이다. 개인적인 입장을 다시 정리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더없이 탁월한 명작은 아닐지라도 잔잔한 여운을 남기는 영화. 깊이 감동하진 않았으나 이에 대한 나름의 이유 역시 찾을 수 있는 영화. 다소 미온한 결론이지만, 여기서 무언가 덧붙일 수 있다면 오히려 나는 <패스트 라이브즈>를 되짚는 내내 떠올렸던 다른 한 편의 영화에 관해 말하고 싶다. 바로 <퍼펙트 데이즈>(2023)에 관해, 정확히는 빔 벤더스의 영화가 셀린 송의 영화와 달리 내 마음을 울린 이유에 대해 말이다.
공간의 지표 아래 실존하는 삶
남산타워와 동방명주, 뉴욕의 마천루와 자유의 여신상 그리고 도쿄타워와 스카이트리. <패스트 라이브즈>와 <퍼펙트 데이즈> 속 풍경의 중심에는 늘 각 도시의 상징인 건축물이 등장한다. 셀린 송과 빔 벤더스의 인물들은 자신이 몸담은 공간의 사회적 맥락에서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는 개인으로 존재하고, 영화의 카메라가 그들의 '현재'를 긍정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공통적이다.
다만, 이를 구현하기 위한 두 감독의 전략은 사뭇 상반되는데, 앞서 언급했듯 셀린 송은 두 차례에 걸쳐 노라와 해성의 과거를 서로가 마주치고 엇갈렸던 삶의 한 기점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엔딩에 이르러 긴 삶에 비하면 찰나에 가까웠던 과거의 한 꼭지를 현재와 나란히 성립할 수 있는 무수한 전생의 단면으로 끌어들인다. 반면 <퍼펙트 데이즈>에는 이 영화의 주인공이자 도쿄의 화장실 청소 노동자인 '히라야마'의 과거에 대한 묘사가 부재하다. 그의 조카인 '니코'의 등장으로 인물의 과거가 미약하게나마 환기되긴 하지만, 그렇다고 히라야마의 전사가 극 내부에서 온전히 서사화되거나 장면화되지는 않는 것이다. 더욱이 셀린 송이 대사와 배경 음악 그리고 카메라의 움직임을 적극 활용하며, 인물 행위의 동기에 관한 설명의 필요와 불필요를 구분한다면, 빔 벤더스는 그러한 필요성에 붙들리지 않는다는 인상이 짙다. 절제된 대사로 비워진 설명의 자리를 점유하는 것은 일관된 리듬과 미약한 변주의 조합 아래 각각의 완결성을 가진 나날들의 연쇄일 뿐이다. 한 마디로 <퍼펙트 데이즈>는 히라야마의 현재를 긍정하기 위해 그가 살아내는 현재 이외의 어떤 주석도 불러들이지 않는다.
<패스트 라이브즈>의 시퀀스 단위를 크게 12년의 간격을 둔 세 차원으로 나눌 수 있다면, <퍼펙트 데이즈>는 히라야마가 잠에서 깨어나고 또다시 잠에 빠지는 하루를 기준 삼는다. 이 영화에서 연쇄되는 시간의 단위를 잇는 것은 취침과 기상 사이의 꿈처럼 보이는 이미지, 즉 하루 중 히라야마가 두 눈으로 포착한 광경이 서로 겹치고 교차하는 흑백 레이어들의 몽타주다. 그런데 러닝타임이 지날수록 매번 반복되는 일상이 점차 짧은 리듬으로 축약되듯, 히라야마가 시선을 빼앗긴 광경의 몽타주 역시 보다 빠르고 직접적으로 화면에 틈입한다. 그리고 이는 밤의 취침과 새벽의 기상 사이에 정갈히 배치되는 것을 넘어 서로 다른 시간의 간격을 잇고 그 흐름을 주도하는 역할을 도맡는다. 이에 따라 인물의 실제 삶과 꿈은 전자에 대한 반영의 이미지로서의 후자로 고정되지 않고, 이분화된 실제와 꿈의 이미지는 현재라는 흐름 속 두 측면으로서 서로를 마주본다.
위에서 언급한 '히라야먀가 두 눈으로 포착'하고 '시선을 빼앗긴 광경'이란 표현에 대해 약간의 과장을 보태자면, 사실상 이는 <퍼펙트 데이즈>의 전부라 할 만한 것이다. 잠에서 깨어나 일과를 시작하고 다시 잠에 빠지기까지 히라야마의 하루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은 어떤 말도 사건도 아니라 무언가를 바라보고, 들여다보고, 올려다보는 몸짓이기 때문이다. 매일 같은 시간대에 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평범한 일상에 특별함을 더하는 것은 별안간 닥친 사건과 그로 인해 흐트러진 일상의 규율이란 외부적 예외성이 아니라, 대상과 조우하는 시선을 경유해 모종의 새로움을 감각하는 일이며 이는 오롯이 인물 내부의 차원에서 발생하는 작용에 해당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새로움을 발견하기 위한 인물의 행위가 단순히 동일성 속에서 차별성을 발견하는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차라리 그것은 이미 다른 것들로서 주어지는 모든 '다름'들을 그 자체로 수용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같은 시간, 같은 공간, 같은 노동의 반복인 듯하지만 히라야마의 삶이 매번 처음이자 마지막인 순간들의 연속처럼 보이는 이유는 주변의 풍경에 시선을 빼앗기는 그의 행위가 '다름'을 향해 온 감각을 열어젖히는 실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물의 실천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은 히라야마가 점심을 먹으며 벤치에 앉아 흔들리는 나뭇잎과 그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바라보는 장면에 있다. 늘 고개를 들고 눈앞의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히라야마이지만, 이 풍경 앞에서만은 매번 필름 카메라를 꺼내드는 그다. 말하자면 '코모레비(こもれび)'의 풍경, 늘 빠르게 변모하는 운동의 이미지를 찰나의 단면으로 붙잡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히라야마가 행하는 사진 찍기의 몸짓에는 다소 유별난 구석이 있다. 그는 촬영 시 카메라의 뷰파인더에 눈을 갖다대지 않는데, 그래서인지 셔터를 누르는 손의 동작과 기계적 시선의 만남에 의해 순간을 포착하는 행위는 마치 자동적인 우연성에 기대는 일종의 주사위 놀이처럼 보인다. 심지어 그 결과를 확인하기까지는 며칠의 간격이 필요한데, 휴일에 현상소를 찾아 필름을 맡긴 히라야마는 다음 휴일에야 사진을 찾아오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사진을 선별하는데, 이때 선택된 사진은 상자에 고이 보관되는 반면 선택받지 못한 사진은 곧장 찢겨 버려진다.
독특한 촬영 방식과 엄격한 선별 그리고 폐기와 보관까지. 동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것 치고 다소 구식처럼 느껴지는 일련의 행위가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지 단번에 파악하기는 쉽지 않지만, 창고에 적재된 상자의 양으로 미루어볼 때 이것이 히라야마에게 무척 오래 지속된 일상의 일부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빔 벤더스는 이러한 인물의 루틴에 단 한 번의 예외를 허용한다. 바로 히라야마가 니코와 함께 같은 장소를 방문했을 때다. 해당 장면에서 니코는 히라야마와 카메라의 시선이 향하던 나무를 매만지고, 히라야마는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돌연 평소와 다른 방향으로 카메라를 세워 뷰파인더에 눈을 갖다대는 그의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겠다는 보다 적극적인 의지다. 흥미롭게도 이때 히라야마가 촬영한 사진은 초점이 맞지 않는데, 그렇다고 이것이 여타의 사진처럼 가차 없이 버려지리라 생각되지는 않는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거스를 수 없을 듯 엄중한 의식처럼 보였던 오랜 습관을 거의 자동반사적으로 거스르는 히라야마의 몸짓, 곧 니코를 아끼는 그의 마음이다.
한편, 위와 같이 '사진'을 매개로 한 단일한 인물의 서로 다른 행위 간 대비는 <퍼펙트 데이즈>와 <패스트 라이브즈>의 차이를 다시금 느낄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아서의 말에 따르면 노라와 그는 오랫동안 뉴욕에 살면서도 한 번도 함께 자유의 여신상을 보러간 적이 없다. 이 영화에서 노라와 함께 미국이란 관념을 상징하는 풍경 아래 의식적으로 서는 일은 이곳의 방문자이자 여행자인 해성에게 맡겨진다. 그곳에서 해성과 노라는 함께 사진을 찍는데, 해당 장면 직후 노라는 해성에게 자신과 아서의 결혼사진을 보여준다. 그 이미지가 영화의 화면에 직접적으로 제시되지는 않지만, 노라와 아서가 찍은 결혼사진과 노라와 해성의 모습이 함께 담긴 사진이 정반대의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다. 이때 차이의 핵심은 각각의 사진이 지시하는 시간의 방향에 있다. 아서의 결혼사진이 부부로서 약속한 두 사람의 미래를 가리킨다면, 해성의 여행 사진은 '지금, 여기'에 잠시나마 함께한 그들의 모습을 '그때, 그곳'에 함께 했던 과거의 증거로서 각인한다.
이처럼 셀린 송에게 사진은 아서와 해성의 각기 다른 처지를 대변하는 요소로, 즉 한 장의 사진 속 피사체가 된 두 인물과 노라가 지시하는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 따위의 임의적 개념으로 구분 짓기 위한 방편으로 활용된다. 하지만 빔 벤더스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그의 인물인 히라야마에게 사진이란 흐르는 시간 위에서 오직 현재를 발견하기 위해 능동과 수동의 태도를 동시에 불러들이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또한 <퍼펙트 데이즈>에서 히라야마의 과거를 극중에 잠시나마 환기하는 나코가 피사체로 대상화되는 순간은 그녀가 끝내 말해지지 않는 히라야마의 과거에 대한 주석이 될 수 있느냐가 아니라, 이때의 행위가 과거에 대한 설명 없이도 인물의 현재에 모종의 감정적 설득을 불러올 수 있을지에 관한 실험처럼 행해진다. 그러니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다. 언어라는 일종의 상징 체계에 붙들린 셀린 송의 인물들이 도심의 건축물이 상징하는 어떤 의미를 가리키는 하나의 지표로서 영화에 각인된다면, 빔 벤더스의 인물은 최소화된 말과 수행의 몸짓을 통해 도심의 풍경 아래 실존하는 삶으로서 영화에 머무른다고.
"그때는 그때, 지금은 지금."
어느날 히라야마의 집 앞에 불쑥 나타났던 니코는 결국 그녀를 데리러 온 엄마를 따라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히라야마가 니코와 함께한 시간은 그의 일상과 영화 전체에 특별한 감흥을 더하지만, 그중에서도 두 사람이 함께 자전거를 타다 스카이트리가 훤히 보이는 다리 위에 멈춰선 장면은 유독 각별하다. 이유는 그들이 주고받은 대화에 있다. 셀린 송이 노라와 해성을 통해 '인연'과 '전생' 등의 낱말을 영화에 불러들였다면, 이 장면에서 빔 벤더스는 히라야마를 통해 "그때는 그때, 지금은 지금."이란 문장을 <퍼펙트 데이즈>에 공명하는 하나의 테제로 제시한다. 시종 과묵하기만 했던 인물이 그의 조카에게 전하는 묵직한 격언은 홍상현 평론가의 표현대로 "도쿄에서 가장 큰 나무" 아래 살아가는 히라야마의 현재를 '완벽한 나날들'의 부분집합으로 완성한다. 그런데 따져보면 '인연'이란 개념이 <패스트 라이브즈>에서 유독 직접적으로 강조되긴 했어도, 이것이 해당 작품만의 전유물인 것은 아니다. 해당 낱말에 대한 발화 여부와 무관하게 '인연'은 빔 벤더스의 영화 곳곳에서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서로를 스치는 풍경으로 보다 풍부하게 아로새겨지기 때문이다.
언제나 혼자인 것 같은 히라야마이지만, 그의 삶에도 니코뿐 아니라 수많은 인연들이 스쳐 지나간다. 직장 동료인 '타카시'와 그의 여자친구 '아야'부터, 공원에서 엄마를 잃어버린 소년과 매 점심마다 옆 벤치에 앉아 식사를 하는 젊은 여성, 온몸으로 나무를 형상화하는 노인과 사찰의 스님, 늘 같은 시간 목욕탕에서 마주치는 노인들, 화장실 사용법을 물어보던 외국인, 단골 식당과 책방 그리고 선술집 주인, 심지어 그녀의 전남편까지. 히라야마가 이 모든 인물들과 매번 직접적인 교류를 주고받는 건 아니지만, 반복되는 스침과 비언어적 소통만으로도 그들의 인연은 이어진다. 만약 히라야마가 거리에서 스친 이들과 그가 일하는 동안 화장실을 방문한 이들을 포함한다면 그 관계망은 더욱 폭넓게 확장될 것이다.
하지만 <퍼펙트 데이즈>에서 가장 특별한 인연은 따로 있다. 평소처럼 일을 하던 어느날 히라야마는 화장실 세면대 옆 틈에 꽂힌 종이를 발견한다. 이를 대수롭지 않게 쓰레기봉투에 넣은 그는 늘 앉던 벤치에서 점심을 먹고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잠깐의 휴식 후 다시 차로 돌아온 히라야마는 난데없이 쓰레기봉투를 뒤진다. 다시 꺼내어 본 종이에는 가로, 세로 두 줄의 선이 교차되어있고 그 중심 칸에는 'O'이 표시되어 있는데, 히라야마는 펜을 꺼내 또 다른 칸에 'X'를 써넣고 종이를 발견한 곳에 다시 끼워둔다. 이때의 행동은 다소 돌발적으로 보이지만, 실상 이것이 느닷없는 충동에서 기인했다고 말하긴 어렵다. 오히려 이 장면을 통해 히라야마가 매일의 삶을 꾸려나가는 방식은 더없이 직관적으로 설명되기 때문이다. 빔 벤더스의 카메라가 일견 반복적 행위들의 집합처럼 보이는 인물의 삶을 매번 다른 구도와 리듬으로 포착하듯, 그의 인물이 지향하는 삶은 '일상'이라 불리는 연쇄적인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다른 것들로서 주어진 현재를 매번 새롭게 수용한다. 그러니 이때 히라야마는 또 한 차례 '다시 보기'와 '다르게 보기'를 실천하는 중이라 말할 수 있다. 불확실한 응답에의 가능성에 내기를 건 정체 모를 누군가의 게임에 동참하는 방식으로.
해당 장면 이후에도 히라야마의 일상은 반복과 변주를 교차하며 전개되고, 이름 모를 상대와 몇 차례 기호를 주고받은 끝에 종이에 그려진 아홉 칸의 공간이 모두 채워진다. 이를 확인하던 날, 히라야마는 변기에 걸터앉아 여느 때보다 조심스럽게 종이를 펼친다. 그리고 웃음을 머금은 태양처럼 꾸며진 'O'와 그 아래 덧붙여진 메시지 "Thank you"를 발견한다. 그렇게 게임이 무사히 종료되고, 히라야마의 얼굴에는 따뜻한 미소가 번진다. 그런데 이 장면은 그 평온하고 따스한 분위기만큼이나 은연중에 차가운 충격을 전한다. 충격의 이유는 다름 아닌 상대의 메시지에, 정확하게는 메시지의 내용이 아닌 이를 읽는 인물의 방식에 있다. 히라야마는 늘 반으로 접힌 종이를 마치 그가 읽는 책처럼 가로로 펼치곤 했는데, 이 장면에서 그는 상대의 메시지를 읽기 위해 가로가 아닌 세로 방향으로 종이를 회전시킨다. 물론, "Thank you"는 방향에 관계없이 누구나 쉽게 알아볼 수 있을 만한 문장이지만, 핵심은 글귀 자체의 식별가능성이 아니라 그들이 여태 서로 다른 관점에서 종이를 펼치고 접으며 게임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는 것에 있다.
빔 벤더스는 두 사람의 상호작용이 완성되는 지점에서 '어긋남' 위에 성립하는 만남의 역설이라는 기묘한 인연의 본질을 확인시킨다. 그들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단순한 기호 이상의 언어적 매개 위에서 만날 때, 그간의 상호작용은 실패로 돌아가진 않을지언정 완전한 성공 역시 될 수 없다는 작은 진실을 폭로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진실이 히라야마의 삶과 <퍼펙트 데이즈>라는 세계 자체에 유의미한 균열을 가하지는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히라야마는 다시 혼자로서의 삶을 되찾는다. 다시 돌아온 휴일, 히라야마는 늘 그래온 것처럼 빨래를 하고 사진을 찾고 책을 산다. 하지만 그 모습은 결핍처럼 보이진 않으면서도 못내 쓸쓸하고, 인물 주변의 풍경 역시 여전히 아름답지만 왜인지 공허하다. 그렇게 다소 이른 시각, 히라야마는 단골인 선술집으로 향한다. 그런데 하필 평소 연모하던 선술집 사장이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있는 게 아닌가. 이를 목격한 히라야마는 편의점에서 담배와 맥주를 구입해 늘 지나던 다리 아래로 향하고, 극중 처음으로 고독에 사무친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 전 선술집에서 본 남자가 다가와 자신을 여사장의 전남편이라 소개한다. 죽음을 선고받은 사연을 전하며 전처를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건네는 그로 인해 별안간 환기된, 현재의 단절이자 삶의 종착지인 '죽음'의 그림자가 히라야마의 현재에 무게를 더하는 시간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때는 그때, 지금은 지금'이 아니겠는가. 히라야마 전례 없는 적극성을 발휘해 상대에게 다가가고 그 덕에 두 남자는 함께 유쾌한 시간을 보낸다.
다음날 아침이자 영화의 마지막 장면, 히라야마는 또다시 새로운 하루를 시작한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같은 출근길을 다른 음악으로 채운다. 오늘의 선곡인 'Feeling good'이 서서히 스크린 안팎을 압도할 때, 이번만은 히라야마의 얼굴을 끈질기게 붙드는 빔 벤더스의 카메라다. 그렇게 늘 주변의 광경을 살피며 현재의 흐름에 자신의 호흡을 내맡기던 히라야마의 시선이 오래도록 정면만을 응시할 때, 떠오르는 태양과 붉어지는 눈시울이 겹치는 광경에는 어떤 말도 덧붙여지지 않는다. 다만 늘 새로운 세상을 구경하는 어린아이처럼 생기로 빛나던 두 눈에는 어느새 저물어가는 삶을 살아가는 한 남자의 애환이 거스를 수 없이 밀려든다. 히라야마는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을, 붉게 타오르는 아침의 태양을 얼마나 더 보게 될까. 이 삶이 다한 후, 그가 모은 어린나무와 테이프와 책과 사진은 어디로 가는 걸까. 문득 폴 보울스의 시구가 떠오르는 대목, 이토록 담담하면서도 폭발적인 엔딩은 내게 현생과 전생의 무한한 가능성을 비추는 '영원한 햇빛(Eternal Sunshine)'을 희구했던 <패스트 라이브즈>의 갖은 말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슬펐다. 그리고 그래서 아름다웠다.
[글 함윤정 영화평론가, badasal2@ccoar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