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que] 개인이 사회를 움직일 수 있는가?
[Critique] 개인이 사회를 움직일 수 있는가?
  • 변해빈
  • 승인 2024.04.09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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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치는 말이 소거의 형상을 갖추게 될 때"
ⓒ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2015)

안국진은 극 안에서 인물들이 '말'하기를 요청해 왔다. 사건의 골자와 상황을 장면으로 보여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인물의 음성을 더한다. 빚 청산을 위해 동네 재개발이 절실한 수남(이정현)의 이야기를 그린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2015)는 지난 삶을 스스로 설명하는 인물의 하소연을 들려주며 시작된다. 수남의 말을 듣는 상대 경숙이 재개발 반대 시위를 선동한 사실이 드러나기 이전이므로, 얼마간 오프닝이 주는 당혹은 그것을 왜 이토록 상세히 들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과 연관된다. 그저 쏟아내기만 한단 점에서 혼잣말과 다름없는 수남의 말은 <일주일 만에 사랑할 순 없다>(2020)에서 인물의 속마음을 들려주는 내레이션으로 변주된다. 세세하게 묘사된 인물의 내적 감정은 종말론을 앞둔 세상의 권태로운 풍경과 충돌한다. <댓글부대>(2024)에 이르면 내레이션은 여론을 형성하는 언론의 성격을 더하는 핵심으로 쓰인다. 장면을 부연하는 음성들은 특수한 일부 상황을 강조하기 위해 개입되기보단, 말의 특수한 지점을 간과할 만큼 무척 방대한 양을 자랑한다. 그런 이유에서 안국진의 말들은 존재하는 목적 이상으로 넘친다. 중요한 건 낭비되는 차원과는 다르다는 점인데, 특정 상황에 굳이 없어도 되는 말, 혹은 말이 진실을 초과하는 상황으로부터 사회의 형상이 구체화하기 때문이다.

초과는 단순히 많다는 뜻이 아니라 정해진 기준치를 넘어서는 것이다. 특정 범주를 버티지 못하고 터져 나오는 말들은 상식에서 도덕과 윤리의 문제를 겨냥하기에 이르는데, 안국진은 그것을 지적하거나 더 나아가 사회적 기준이 배제한 영역을 사유하기 이전에 멈춤으로써 현실의 답답함을 더한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상식적으로 하지 않을 법한 말들을 너무나 쉽게 하는 인물들과 그걸 아무렇지 않게 듣는 주인공을 통해 '비정상적'인 사회의 풍경을 그린다. 공장 기계에 손가락이 절단된 규정(이해영), 그의 아내 수남을 향해 의사가 다음과 같은 말을 내뱉는 장면이 있다. "창녀하고 산부인과 의사하고 성병에 대해서 누가 더 잘 알고 있을까요? 창녀? 산부인과 의사? 창녀예요. 창녀들은 아주 조그만 변화가 자기 몸에 있어도 그냥 알거든, 한방에? 이게 무슨 병인지. 자기 일이니까. 아주 프로페셔널하다고. 다음부터 만약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잘린 손가락을 얼음물에 넣어서 가지고 오세요." 길게 이어지는 대사 중 정작 두 사람에게 필요한 말은 마지막 줄에 불과하다. 이 영화는 규정이 여러 번 사고를 겪으며 신체적 기능을 상실하는 상황이라든지, 내기치 않지만,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저지르는 수남의 연쇄 살인이 상기시키는 잔인함이 있다. 하지만 그보다 폭력적인 건 필요한 것 이상으로 길어지는 말에 내포된 함의를 알아차리기 모호한 지점에 있다. 그러니까 의사가 예시를 든 것처럼 그는 직접 손가락이 절단된 경험이라도 있다는 걸까? '자기 일이어서 더 잘 안다'라는 맥락은 전문성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다. 손쉬운 비유 대상으로서의 '창녀'가 발음되는 여기엔 열악한 환경에 노출된 노동자가 손가락 접합에 어처구니없게 실패하기까지 한, 두 사람의 비극을 아주 단순한 방식으로 치부하는 저속한 인식이 내포되어 있다.

 

ⓒ <댓글부대>(2024)

안락사를 쉽게 권하고, 성인을 아이처럼 어르고 달래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속 인물들의 교묘한 말투는 관객이 그런 말들을 예민하게 포착할 것인가에 있어 망설임을 유발하는 쪽이라면, <댓글부대>는 전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 말, 혹은 그 기준을 구분할 수 없는 상황으로부터의 문제점을 명시하고 시작하는 영화다. 오보 사건 후 무너진 자격을 회복해야 하는 기자 임상진(손석구)의 분투는 인터넷 환경에서 너무 쉽게 퍼지고 또 생성되어 진실과 가짜를 구분할 수 없는 말의 문제와 결합된다. 안국진은 엄청난 말을 쏟아내며 말의 효력과 효력 없음을 동시에 발생시킨다. 그러면서 인물들은 그들이 행하는 무언가에 관해선 전문성을 지니고 있지만, 그 전문성이 어떠한 인정을 받지 못하는 상황들이 그려진다.

이를테면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수남이 아무리 청소와 생선 손질, 신문 및 명함 던지기에 놀라운 실력을 발휘해도 종국엔 살인을 저지르는 데에 쓰일 뿐이다. <일주일 만에 사랑할 순 없다>의 주인공 남우(이다윗)는 4년간의 고시 끝에 경찰이 되지만 한 달 만에 종말 소식을 들으며 경찰로서의 행위는 무의미한 것이 된다. 종말이 다가오며 정체를 숨기고 있던 초능력자들이 출현한다는 설정을 포함하지만, 안국진은 전형적인 히어로물과 반대되는 성격을 선택한다. <댓글부대>의 임상진이 첫 번째 오보 사건 후 다시금 제보자의 불명확한 신원을 알 수 없는 믿음으로 속단할 때, 여기엔 진실을 알리겠다는 사명감보단 억울함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개인의 입장이 부각된다. "나만이 아는 비밀이 주는 쾌감은 기자만이 안다"라는 임상진의 말은 위험한 오류를 품고 있다. 임상진은 각종 커뮤니티에 자신의 신상 정보가 떠돌 때 억울함과 절망과 분노를 느끼지 쾌감을 느꼈는가? 알려지지 못한 진실 앞에 주어지는 쾌감은 그것이 자기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는 안정감, 느슨한 책임성에서 기인한다.

 

ⓒ <댓글부대>(2024)

안국진은 인물들에게 거듭해서 기회를 주지만 이것으로 오히려 그들이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을 그린다. 임상진에겐 세 명의 제보자, 세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 대기업 만전의 횡포를 고발하는 중소기업 사장, 그것을 오보로 만든 것이 만전임을 고발하는 '댓글부대' 팀알렙의 멤버 찻탓캇(김동휘), 그리고 찻탓캇의 실체를 고발하는 제보자X까지. 영화가 진행될수록 더 많은 정보가 주어지고 변수를 예측하고 의심할 기회 또한 주어지지만 그 방향은 철저히 어긋난다. 오히려 같은 오보를 반복한 끝에 임상진이 언론매체가 아닌 가짜가 양산되는 커뮤니티를 이용하게 된다는 결론은 진짜가 아닌 '진짜일지도 모르는 것'의 불온한 힘을 이용하는 '댓글부대'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 순간 시작과 동시에 진실을 좇으며 엄청난 양의 대화와 내레이션을 분출하던 에너지는 무슨 의미가 있던 것인지, 허탈감을 안긴다. 다시 말해 <댓글부대>의 말들은 쓸모를 상실하기 위한 것으로서 존재한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수남은 끊임없이 선택의 기로에 놓이지만, 그것은 어떤 쪽이든 그녀를 구원하는 방향이 아니다. 까마득한 중학교 시절로 거슬러 간 영화는 여공이 되느냐, (고등학교 진학 후) 엘리트가 되느냐의 기로가 선택의 주체적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줄 뿐이다. 그녀에게 주어지는 선택지는 내가 죽지 않으려면 남을 죽여야 하는, 스스로의 인간성을 말살하는 결말로 도달하고 만다. 경제적인 문제에서부터 비롯되는 보이지 않는 사회 계급 구조의 문제는 물질적인 것에 그치지 않는다. 감독의 인물들이 말의 넘침과 교환하여 가장 마지막에 잃는 것은 인간성이다. 안국진에게 기회는 희망을 바라보지 않는다. 기회 없음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다. 자살한 규정은 죽지 않고 식물인간이 되지만, 이것은 그에게 다시금 주어진 기회인가? 수남이 위기에서 벗어나는 대신 주어지는 살인 기회는 인간성을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완벽히 제거하는 쪽이다.

 

ⓒ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2015)

안국진은 사회의 문제에 포커스를 맞추며 시작하지만, 그것이 한 개인의 사정에 묶이며 사회를 움직이는 힘으로 확장되지 못하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런 맥락에서 영화 속 상황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수남은 식물인간인 남편을 데리고 바다 향하는 긴 도로 위에 오른다. 이 길 위엔 미래를 위한 선택지가 없다. 지구와 행성이 충돌한 후 남우는 고시원 방에서 정신을 차린다. 초능력으로 시간을 역행한 것인지, 종말이 다가온 세상이 오랜 고시 생활 중 찾아온 그의 꿈인지 알 수 없다. 임상진의 폭로가 커뮤니티에서 폭발적인 관심을 끄는 것은 진실을 밝혀내는 일과는 무관한 방향으로 비틀린다. 안국진은 언제나 영화의 끝을 열어 두지만, 이 미확정성은 아무것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강화하고 확정 짓는다. 이것이 '개인이 사회를 움직일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은 아닐지 생각해 보게 된다. 이에 답하지 못하는 것이 지금의 사회를 드러내는 가장 직접적인 형태일지도 모른다.

[글 변해빈 영화평론가, limbohb@ccoart.com]

변해빈
변해빈
 몸과 영화의 접촉 가능성에 대해 고민한다. 면밀하게 구성된 언어를 해체해서 겉면에 드러나지 않는 본질을 알아내고 싶다. 2020 제1회 박인환상 영화평론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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