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현의 무빙] 후카다 코지X차이밍량, 긴 유통기간의 영화를 만드는 아시아 뉴웨이브의 두 아들
[홍상현의 무빙] 후카다 코지X차이밍량, 긴 유통기간의 영화를 만드는 아시아 뉴웨이브의 두 아들
  • 홍상현
  • 승인 2024.04.08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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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의(不思議)한 격정의 데칼코마니로 이어지는, 두 개의 순간
ⓒ 영화 <애정만세>(1994)

암전을 10분 42초 앞두고 프레임 안으로 걸어 들어온 메이(양구이메이 분)를 따라가는 카메라. 물러나면 펼쳐지는 적막하고 스산한 도시의 원경, 무표정하게 신문을 읽던 노인 뒤편에 앉아 훌쩍이기 시작하는 그녀. 4분 44초 내내 운다. 눈물을 닦으며 담배를 꺼내 물지만 울음이 멈추리라 확신할 수 없다. 아니, 그 전에 극장이 어둠에 둘러싸여 버렸다. 거의 모든 관객들이 사라졌을 무렵 수첩에 볼펜으로 눌러 적었다. 1995년 6월 20일 화요일, 이제는 없어진 종로2가 코아아트홀 20시 50분 프로. 차이밍량의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 <애정만세>(1994). 늦은 시간이었지만 극장 문을 나와 대학로까지 걸었다.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객석에서 느꼈던,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격정에 과연 걸어갈 수 있겠나 싶었으니까.

후미에(츠츠이 마리코 분)가 공원 벤치에 앉아있다. 시선이 멈춘 곳에 서 있는 딸, 호타루(시노카와 모모네 분). 현실에선 도움 없이 침대에서 돌아눕지 조차 못하는 딸이 아무렇지 않게 다가와 엄마 곁에 앉는다. 멍하니 엄마의 얼굴을 응시하는 자신의 모습을 호타루는 그녀의 꿈속에서라도 볼 수 있었을까. 손을 올려 후미에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순간, 끈 없는 운동화를 적시는 파도. 어느새 사방은 해변이다. 허나 그도 오래 이어지지 않는다. 복잡한 심정을 억누르며 딸을 바라보던 엄마의 얼굴에서 시퀀스가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2016년 10월 9일 일요일, 부산국제영화제가 한창이던 CGV 센텀시티 16시 30분 프로. 후카다 코지의 칸영화제 주목할 만 한 시선 부문 심사위원상 수상작 <하모니움>(2016). 바다를 보겠다고 해운대로 향하다 그만두었다. 감정이 북받쳐 걷잡을 수 없게 될까봐.

<애정만세>가 그 역시 좋아하는 작품이기도 할뿐더러, 무엇보다 이런 격정의 실체를 규명해보고 싶어서 <하모니움>의 시나리오와 연출을 맡은 심우(心友)의 견해를 물었더니 다음과 같은 답이 돌아왔다.

"'꿈 장면'에는 시나리오 상으로 두 가지를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습니다.

하나는 딸과 온화하게 마주하고 싶은 어머니 후미에의 심상, 다른 하나는 자신과 다른 사람 사이에 있는, 결코 극복할 수 없는 깊은 골, 그러니까 누구나 본질적으로 안고 있는 고독이지요.

만약 누군가 이 장면에 감정이 흔들린다면 그것은 그 감상자에게 이 대척점이 아주 친근하게 느껴졌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본 지면에서 소개하게 될 2022년 10월 29일 대담(이하 '10ㆍ29 대담')에서 그와 차이밍량이 공유하는 키워드는 다음 세 가지 정도다.

우선은 '연극'.

대학(다이쇼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후카다 코지는 영화미학교 픽션 코스를 수료한 뒤 현대구어연극이론의 주창자 히라타 오리자의 작품에 매료되어 "유학하는 기분"으로 그가 이끄는 '극단 청년단'에 들어간다. 차이밍량은 타이베이의 중국문화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했다. 영화인들이 흔히 작위적이며 과장된 일체의 표현방식을 '연극적'이라 뭉뚱그려 비판하는 걸 상기하면 뜻밖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연극에서의 경험이나 지견은 영화의 표현이 영화팬들에게밖에 통하지 않는 클리셰에 빠지는 걸 막아"준다는 후카다 코지의 주장을 곱씹어보면 두 사람의 작풍에 나타나는 '닮음'이 대번에 이해된다.

다음은 '리얼리즘.'

여기서는 꽤 보편화돼있는 선입견을 뛰어넘어야 한다. 앞서 언급한 <애정만세>와 <하모니움>만 놓고 보더라도 빈 집에서 되풀이되는 시아오강과 아정의 엇갈림이나, 진즉에 눈치를 채고도 남았을 것 같건만 시종일관 상황을 지나쳐버리는 메이의 모습은 그다지 '리얼'하지 않다. 한 술 더 떠 <하모니움>의 야사카(아사노 타다노부 분)는 호타루를 해치러 가면서 굳이 '튀는' 붉은 티셔츠를 입는다. 이 대목에서도 후카다 코지의 견해는 좋은 길잡이가 된다.

"저는 내추럴한 것과 영화에 있어서의 '리얼'이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다가 자연주의적으로 얼핏 보면 다큐멘터리 같은 자연스러움을 가장하면서 캐릭터의 입을 통해 감독의 인생철학을 이야기하는 작위만큼 저를 냉담하게 만드는 것이 없어요.

세상과 나, 세상과 관객 사이에 카메라가 놓이고 스크린과 스피커가 놓이는 이상, 뭐든 자연스러운 건 없겠죠. 영화의 문법이라는 필터를 통해 재구축된 '세계'를 관객의 세계로 피드백 해 서로 상상력의 커뮤니케이션을 도모하는 것이 영화라는 제 확신이, 더듬거리면서도 <옆얼굴>을 통해 더 깊어졌다 할 수 있겠습니다."

 

마지막은 '세대'다.

차이밍량과 후카다 코지에게는 공히 혁신의 흐름 속에 등장한 세대적 경험(generational experience)이 있다. 차이밍량은 <광음적고사>(1982)로 혜성처럼 데뷔한 에드워드 양이나 <비정성시>(1989)로 타이완 뉴웨이브의 존재를 세계에 알린 허우 샤오시엔의 뒤를 잇는다. 그들이 관객의 시야에서 멀어져 갈 무렵 <결혼 피로연>(1993)으로 베를린국제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한 이안과 함께 부상했다.

후카다 코지는 2020년 <더 리얼 씽>으로 자신을 초청한 칸영화제로부터 "고레에다 히로카즈, 구로사와 기요시, 가와세 나오미의 행보를 잇는 위대한 'K 리스트 세대 감독'"이라는 명칭을 부여받는다. 이것이 맥락상 차이밍량과 마찬가지로 (일본) 뉴웨이브의 '다음세대'에 해당하는 의미를 갖는다는 점은 후카다 코지의 맹우(盟友), 하마구치 류스케의 설명을 통해 보다 분명해진다.

요인이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짧게 정리해 보면 제 경우, 그 원류에 하스미 시게히코의 비평ㆍ상영활동이 있었습니다. 1970에서 80년대에 걸쳐 그로부터 직접 교육받은 세대가 (제 스승)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을 필두로 한 이른바 '릿쿄 누벨바그'로 불리는 사람들인데요. 후발세대인 우리는, 말하자면, 하스미의 영화비평과 그 다종다양한 실천을 동시에 수용했죠. 이런 일이 가능했던 건 '온갖 종류의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착각마저 들게 하는 '영화도시'도쿄라는 환경요인도 있을 텐데요. 그 중심지가 현재도 운영 중인 미니시어터 유로스페이스입니다.

이상의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은 2020년 '세계의 영화인 7인'에 선출되면서부터 함께해온 (일본) 국제교류기금이 도쿄국제영화제와 3회째 진행하고 있는 「국제교류기금ㆍ도쿄국제영화제 공동제공 교류 라운지」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즉, 10ㆍ29 대담의 참가자를 차이밍량과 후카다 코지로 정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다.

두 사람이 도쿄국제영화제와 맺고 있는 인연의 무게도 가볍지 않다. 차이밍량 감독은 장편 데뷔작인 <청소년 나타>(1992)로 1993년 제6회 영시네마 경쟁부문 동상을 수상했고, 제35회인 지난해에는 월드포커스 부문에 데뷔 30주년 특별전이 꾸려졌다. 후카다 코지는 2010년 제23회 때 <환대>(2010)로 어떤 시점 부문 작품상을 수상하고 2020년 제33회 때는 일본의 현재 부문에서 감독 특별전이 개최되었다. 그리고 대담이 있던 날에는 도쿄국제영화제가 14년 만에 부활시킨 구로사와 아키라상을 받았다.

그럼 이제부터 수상에 대한 축하멘트에 드는 시간마저 아낄 정도의 절실함 속에서 진행된 대담의 현장으로 가 보자.

 

ⓒ Tokyo International Film Festival

차이밍량

오늘 후카다 감독을 뵙게 되어 대단히 영광입니다. 대담에 임하기 전에 후카다 감독의 작품을 세 편 봤습니다. <하모니움>(2016)과 <호토리 노 사쿠코>(2013), 그리고 <바다를 달리다>(2018)였는데 모두 너무 멋지더군요. 후카다 감독의 영화기법, 언어의 사용법이 제 작품과 무척 닮았다고 느꼈습니다. 최근 몇 년간 극영화를 찍지 않았는데요. 후카다 감독의 작품을 보니까 다시 극영화를 찍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후카다 코지

예상외의 말씀을 듣게 되어 대단히 기쁩니다. 어릴 적부터 밍량 감독의 활약을 지켜보면서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특히 훌륭했던 점은 이야기를 위해 영상도 대사도 소비하지 않는다는 거였어요. 프랑스의 에릭 로메르 감독을 좋아하는데 그의 저서에 보면 "대사는 필요한 대사와 진짜 대사로 나뉜다. 필요한 대사란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해 말하게 해야 하는 것으로써 창작자의 의도로 점철돼 있다. 따라서 진짜 대사가 중요한 것이다."라는 말이 나와요. 이처럼 어떻게 해야 이야기에 쓰이는 대사를 줄일 수 있을지를 항상 의식하고 있는 밍량 감독의 작품이 아주 멋집니다.

차이밍량

제 영화에는 침묵이 많이 나오는데요. 그것은 등장인물이 고독하고 과묵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영화를 통해 감수성을 추구하죠. 등장인물의 감각이 어떻게 관객에게 전달될 수 있을지를 고민합니다. 그래서 관객들로 하여금 정말 이런 사람이 존재한다고 믿게 만드는 거지요. 따라서 작품에 음악도 적게 삽입하고요. 음악은 인물들의 심정을 지나치게 표현해버리거든요. 저는 그게 두려워요. 덧붙여서 저는 스스로를 리얼리즘 작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후카다 감독의 <하모니움>을 보는데 등장인물이 모두 실제로 존재하는 리얼한 사람들 같았어요. 부부관계나 가정상황을 묘사하는데 예컨대 아침식탁에 앉은 가족의 동작이나 말투 같은 것들이 하나같이 사실적이더라고요. 식사장면이란 정말 중요해서, 먹는 방법에 따라 인물이 표현될 뿐 아니라 작품 전체의 분위기까지 완성될 수 있습니다. 거기에 아사노 타다노부가 분한 사내(야사카)가 나타난 뒤 분위기가 일변하는 부분도 완성도가 높아서 순식간에 몰입이 되었습니다. 진짜 마음에 와 닿더라고요.

후카다 코지

대단히 기쁜 말씀이십니다. 그 '인물의 리얼리티'는 저 혼자서가 아니라 배우와 함께 만들어낸 것입니다. 밍량 감독께서도 배우와 시나리오에 대해 의논하면서 제작을 진행하신다는 이야기를 예전에 인터뷰를 통해 접한 바 있는데요. 저도 연기란 감독의 이미지를 강조하는 게 아니라 배우가 만들어가는 것이라 생각하는 까닭에 그들에게 항상 눈앞에 있는 공연자(co-actor)와 소통해줄 것을 당부해요. 관객을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평소에 다른 사람들과 접하는 느낌으로 공연자와 마주해 달라고 말이죠. 그런 제 의도를 캐스트 여러분들께서 헤아려주신 덕분에 확보된 리얼리티라고 생각합니다.

차이밍량

배우를 대하는 데는 감독마다 각자의 방식이 있을 텐데요. 제가 유달리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연기를 할 공간과 분위기를 제공해 주는 일입니다. 제 영화는 대사에 의지해 이야기를 전개하지 않는 까닭에 배우가 공간과 어떻게 마주하면서 연기하는지가 중요하거든요. <애정만세>를 촬영할 당시 배우들끼리 터놓고 수다를 떠는 걸 보고 시나리오 상으로는 알게 된 지 얼마 안 된 상황이니까 서로에 대해 너무 속속들이 아는 분위기를 풍기면 안 된다고 말린 적이 있었습니다.

<하모니움>의 츠츠이 마리코 배우를 보면서 대단히 복잡한 캐릭터이기 때문에 분명 후카다 감독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심리적인 변화가 있고 나서 남편과의 관계가 조금씩 달라져가는 모습을 보여주려면 역시 감독의 도움이 필요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런데 후카다 감독은 익숙한 배우들과 함께 영화를 만드는 게 습관처럼 돼 있으신 것 같더군요. 저도 마찬가지에요. 서로 아는 사이라면 말없이도 서로가 원하는 것이라든가 상황 같은 것들을 파악할 수 있잖아요. 이런 면들을 보더라도 영화에서 제일 어려운 건 역시 '배우'입니다. 이 부분이 잘 풀리지 않으면 영화를 만들 수가 없지요. 그리고 후카다 감독은 이 균형에 대해 아주 잘 파악하고 계시다고 느꼈습니다.

 

ⓒ Tokyo International Film Festival

후카다 코지

감사합니다. 배우를 대하는 방식은 상황에 따라서나 감독에 따라서, 혹은 나라마다 다를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본의 경우, 오디션을 통한 캐스팅이 뿌리내려있지 않은 까닭에 작품에 대해 논의할 시간이 없고, 그렇다 보니 때로는 처음 만난 배우들끼리 오랫동안 함께해 온 부부를 연기하게 되는 일마저 생기지요. 가급적이면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는 게 바람직하겠다는 생각에 평소 배우들과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적극적으로 마련하고 있어요. 츠츠이 배우와 작업할 때도 역할에 대해 깊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신뢰를 쌓은 연후에 본격적인 연기를 부탁드리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차이밍량

다음으로는 영화와 시장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 싶습니다. 갑작스런 질문입니다만 후카다 감독의 작품은 일본에서 흥행이 어떤가요?

후카다 코지

"절호조입니다!"라고 말하면 거짓말이겠죠? (웃음) 보고 싶어 하시는 분들께서는 꾸준하게 찾아주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큰 규모로 개봉하지 않는 데다 공감성도, 오락성도 높은 작품이 아님을 자각하고 있으니 관객몰이를 하는 편은 아니라고 해야 맞겠네요. 한마디로 '그렇게까지는 아닌' 거죠. (웃음)

차이밍량

저도 마찬가지예요. (웃음) 폭발적인 히트를 맛본 경험이라는 게 제게는 없어요. 그래도 스스로는 만족합니다. 한 편 한 편, 아주 좋아하는 작품이니까요. 하지만 분명 유통기한이 긴 작품을 찍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이를테면 <청소년 나타>(1992)만 보더라도 지금 미국에서 배급되고 있거든요. 후카다 감독도 아마 저랑 같은 노선을 걷고 계신 게 아닐까요.

후카다 코지

그렇다면 영광인데요. 유통기한이 긴 작품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은 저도 가지고 있으니까요. 100년 후, 제가 죽은 뒤에도 사람들이 찾아볼 수 있는 작품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합니다. 다행히 실제로 2008년에 찍은 작품(<휴먼 코미디 인 도쿄>)이 최근 프랑스 배급이 결정되어 새삼 만들어 놓길 잘했다고 느끼던 참이었어요. 제 작품이 (당장의 흥행성적은) 가늘지라도 오래 볼 수 있는 영화가 되길 바랍니다.

 

ⓒ Tokyo International Film Festival

차이밍량

저는 일본이 타이완과 달리 영화 강국이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시장이 아니라 작품성 부분에서요. 타이완도 예전엔 대부분의 작품이 상업영화였어요. 하지만 대부분 비슷한 테이스트(taste)의 작품이라 관객들도 질려하는 바람에 흥행에 실패했죠. 어떻게 영화를 만들어야 돈을 벌 수 있을지 누구도 모르던 상황에서 나타난 사람이 허우 샤오시엔 감독이었습니다. 그 무렵 계엄령도 해제되고 다양한 소재가 허용되면서 에드워드 양 감독 같은 사람도 등장하고 유럽에 영향을 줄 만한 작품들이 나왔지요. 이때부터 10여 년 정도는 타이완 영화계도 빛났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또 달라지고 있고, 특히 업계 전체가 상업적 성공을 위해 장르 영화에 치중하고 있는 추세예요. 시장으로서의 활기는 분명 있습니다만, 예전과 같은 '빛'은 손실되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유감입니다.

반면, 일본 영화계에는 후카다 감독도 계시고,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도 계셔서 대단히 기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후카다 감독처럼 개인 창작의 길을 걸으면서 독특한 언어표현을 모색, 활력 있는 작품을 만든다는 건 정말로 중요하니까요. 팔리는 영화를 만드는 건 간단한 일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상상력을 가진 작품을 만들기란 어렵지요. 일본은 예로부터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과 오즈 야스지로 감독, 고바야시 마사키 감독에 미조구치 겐지 감독, 그리고 오시마 나기사 감독 등 세계를 놀라게 하는 훌륭한 감독들을 배출해 왔습니다. 지금도 변함이 없는 것 같고요.

후카다 코지

현재 일본의 젊은 감독들이 하나같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는 점만 보더라도 일본을 영화 강국이라 부르는 건 무리가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허우 샤오시엔 감독이나 에드워드 양 감독의 작품을 1990년대 이후에도 볼 수 있는 환경이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저나 하마구치 류스케 같은 감독들이 많은 영향을 받은 작품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지요. 이렇듯 타이완과 일본은 끊임없이 서로 영향을 주면서 나란히 걷고 있는 것 같아요.

저는 그 중에서도 밍량 감독의 작품을 통해 용기를 얻습니다. "표현한다는 건 이런 식으로 세상에 내보이는 것"이라고 사람들에게 피드백하는 면 때문이 아닐까 하는데요. 게다가 밍량 감독의 작품은 상상력에 대해 열려 있습니다. <애정만세>의 마지막 장면도 관객의 상상력에 맡겨져 있다 보니 간단하게 공감하기는 힘들지 몰라요. 하지만 그러면서도 '아, 이런 표현을 해도 되는 구나'하는 용기를 심어주지요. <하류>(1997), <청소년 나타>(1992), <떠돌이 개>(2013) 같은 작품들을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차이밍량

감사합니다. 우리 영화를 봐주시는 관객은 매우 소중하지요. 좋은 감독들도 많지만 일본에는 특히 좋은 관객들이 많이 계신다고 생각해요. <하류>를 베를린국제영화제에 가져갔을 때 일본 배급사 분을 만났는데요. 일본에서 개봉하고 싶다기에 왜냐고 물으니까 "일본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서요."라고 답하시더군요. 일본의 배급사에 이렇듯 안목을 가지고, 다양한 작품을 관객에게 소개하고 싶어 하는 분들이 계시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해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타이완에는 그다지 좋은 배급사가 없어요. 그래서 저는 예전에 직접 티켓을 팔아 치우고는 했습니다. 개봉 한 달 전부터 배우랑 같이 거리로 나가서 1만 장의 티켓을 파는 거죠. 그걸 극장 관계자들한테 보여주고 '이만큼 팔았으니 2주는 상영해 달라'고 설득하는 겁니다. 안 그러면 제 영화는 하루 만에 상영이 끝나버리니까요. 아시아와 유럽은 관객의 분위기가 전혀 다릅니다. 유럽 관객은 평소 미술 작품 등을 친근하게 접하다 보니 다양한 아트필름을 보는 게 습관이 돼있어요. 하지만 아시아 관객은 상업영화를 보는 습관밖에 없지요. 그래서 저는 미술관과 제휴해서 영화를 미술관에서 상영해보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미술관에서 관객을 키워 나가는 거예요. 후카다 감독께도 참고가 되면 좋겠는데요, 어떠신지요?

후카다 코지

대단히 참고가 됩니다. 말씀하신 내용은 다양한 작품에 대해 영화업계가 문호를 개방한다는 의미도 되니까요. 얼마 전 밍량 감독의 VR 작품인 <더 데저티드>(2017)를 미술관에서 볼 기회가 있었는데, 평소 접하던 밍량 감독의 작품세계를 좀 더 깊숙이 파고들어 가는 신비한 체험이었습니다.

한편, 확실히 프랑스에도 흥행 상위권에 드는 작품은 오락성이 높은 영화들이고, 이러한 상황은 어느 나라든 마찬가지일 거예요. 다만, 잘 모르는 외국 작품이라도 일단은 보려고 하는 관객의 수가 많다는 건 분명합니다. 제 작품은 일본보다 유럽에서 더 많은 관객들이 찾아주시거든요. 이는 개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프랑스에 어릴 적부터 예술을 접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기 때문일 겁니다. 오락성이 높은 작품도 좋지만 그 외의 작품들도 접해볼 수 있는 기회, 우리도 볼 수 있는 기회를 늘려가야죠. 꾸준하게 만들고 싶은 작품들을 만들고, 관객을 키워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새삼 생각합니다.

 

작가론을 거쳐 영화 리터러시에 관한 언급으로 마무리된 대담은 일회성 이벤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피력한 견해에 대한 실천이 현재진행형인 까닭이다.

플랫폼의 다양화를 이야기한 차이밍량은 <노 노 슬립>(2015) 같은 단편은 물론, 후카다 코지가 앞서 언급했던 VR 콘텐츠로까지 활동영역을 넓히는 등 상업영화의 틀과 그 플랫폼 혹은 윈도우에 얽매지 않는 정력적인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대담이 있던 날 저녁 구로사와 아키라 상을 받은 후카다 코지는 이어진 스피치에서 불안정한 수입과 고용형태, 노동시간 등의 문제가 쌓여가던 와중에 코로나 19 사태까지 겹쳐 문화예술종사자의 정신보건 문제가 영화계의 위협으로 부각되어있는 현실을 지적했다. 그리고 문제해결에 힘을 보태고자 예능종사자협회가 개설, 운영 중인 창구서비스, "예능종사자 마음 119"에 상금 1백 만 엔 전액을 기부하겠다고 발표했다.

[글·취재 홍상현 영화평론가, krpopper@ccoart.com]

홍상현
홍상현
 《코아르》 운영위원, 고토부키홈빌더 영화영상사업부 프로듀서.
정치학과 영상예술학 두 분야의 학위를 소지. 인문사회과학과 영화이론을 넘나드는 전문적 식견으로 한일 양국 매체에 분석기사를 쓴다. 파리경제대 토마 피케티와 『21세기 자본』 프로젝트를 진행한 도쿄대 연구실 출신.
 프로듀서를 맡은 장편 다큐멘터리영화 <포 디 아일랜더스>는 2008년 제주영화제 개막작이었다.
 2013년부터 월간 《게이자이》에서 담당하는 경제평론지면이 에히메대 와다 제미나르의 교재로 쓰인다. 국제영화비평가연맹(FIPRESCI) 지부인 일본영화펜클럽 회원. 『마르크스는 처음입니다만』 등 다수의 스테디셀러를 소개해온 번역가로도 유명하다.
 일본국제교류기금이 선정하는 “세계의 영화인 7인” 중 1인이며 일본 TBS(채널 6) 주최 디지콘 6 아시아 심사위원, 《마이니치신문》 영화웹진 《히토시네마》 필진 및 마이니치영화콩쿠르 심사위원, 다카사키영화제 시니어 프로듀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어드바이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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