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켈리 라이카트] 수직의 로드무비
[켈리 라이카트] 수직의 로드무비
  • 이현동
  • 승인 2024.05.14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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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그대로 볼 때 보이는 소외되고 배제된 것들"
ⓒ <트래비스>(2003)

"나를 사회적 존재가 되도록 얽매어 온 속박들은 대부분 나에게 있다" ― 체코 미디어 철학자 '빌렘 플루서'

조건화되어 있던 미국의 형상을 배제하려는 '켈리 라이카트'(Kelly Reichardt)의 작업은 여성감독으로 겪었던 성차별과 더불어 바드 대학의 학과장이자 실험영화 감독으로 잘 알려진 '피터 휴튼'(Peter Hutton)과의 만남을 통해 형성되었다. <올드 조이>(2006)에 관심을 표명했던 피터 휴튼에 뒤를 이어 2006년부터 바드 대학에서 학생을 지도했던 그녀는 인간과 미국적 풍경 속에 내제하고 있는 스테레오 타입에 대한 의문을 품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퇴락된 필름과 디지털 중간 사이에 존재하는 '물성'과 사회 내부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타자'가 '어떻게 연대할 수 있을지'를 주요하게 관찰한 작가다.

켈리 라이카트의 필모그래에서 가장 볼록하게 튀어나온 영화가 있다면, <초원의 강>(1994) 이후 연출한 세 편의 단편 <송가>(1999), <일년>(2001), <트래비스>(2003)다. 동성애와 극단적인 종교 분쟁에 관한 이야기를 담는 <송가>와 미성년자와 성관계를 한 여교사 메리 캐이 르투어노의 사건, 남편에 의한 여성 살해 사건 등이 실제 뉴스 기사와 해설을 다룬 <일년>은 아이러니하게도 서정적인 자연의 이미지와 콜라주 된다. 이 중에서 가장 실험적인 작품인 <트래비스>는 형체를 분간할 수 없는 추상적인 이미지를 나열하고 지속적으로 색채가 변형됨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전쟁으로 인한 슬픔을 다룬 작품으로 이라크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미 육군 군인인 트래비스를 기리기 위해 제작되었다. 부시 대통령이 분쟁 종식을 선언한 직후 지뢰 제거 작전에 참여하면서 사망한 그는 영화에서 그의 어머니와 NPR(내셔널 퍼플릭 라디오)와의 인터뷰를 통해 소환된다. 파편화된 음성과 반복되어서 들리는 문장은 사건의 상기와 상실, 그리고 한편으로 혼란스러운 정서를 대변한다. 여기서 슈퍼 8 카메라로 촬영한 이 작품들과 현재까지도 라이카트가 애용하는 이러한 둔감한 재질의 영상 이미지는 결국 숏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과거에 연착하고 있는 아날로그 이미지는 기술력을 역행하여 본질적으로 잘 찍는 숏에 집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일본 영화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는 영화 매거진 『필로』 13호(2020.3.4)에서  "영화의 '현재'라 불리는 최첨단" 인터뷰에서 켈리 라이카트를 데이비드 로워리와 더불어 '숏을 찍을 수 있는 감독"이라 호칭했다. 시게히코는 "뛰어난 감독은 피사체를 향하는 카메라의 위치나 거기에 던지듯 드리우는 조명, 그리고 그 지속시간 등 모든 게 오롯이 이것밖에 없다는 듯 결정적인 방식으로 작품을 찍어서 보여준다"고 말했다. 여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숏'은 앙드레 바쟁도 이야기한 것처럼 사진의 객관성을 시간 속에서 완성한 영화로서 최소 단위이자 최대 단위로 작동한다. 숏 하나만으로도 라이카트는 화면과 화면 밖 시선을 놀랍게 결합하는 재주를 보여준다. 그건 슬로우 시네마가 갖고 있는 시간의 권능을 화면 속에서 재현해 내는 원리 속에서 관객을 설득해 낸다. 또한, 라이카트는 미국이 가진 스펙터클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면서 기민하게 작품을 세공해 내는 작가다. 숏이 누락되지 않기 위해 장소를 공고히 수색하는 일, 배우의 활력을 폐기하고 평평하게 프레임을 터치하는 힘은 웬만한 용기가 없다면 수행하기 힘든 시도다.

 

영화 <왠디와 루시> ⓒ Film Science
영화 <어떤 여자들> ⓒ Film Science

<웬디의 루시>(2008), <어떤 여자들>(2016), <퍼스트카우>(2019)에서 개방하는 첫 장면은 기차와 배가 지표면과 해수면 위를 천천히 운행하는 롱 숏이 등장한다. 그 자리를 고요하게 남기는 잔상은 미국의 황폐함을 해설하는 동시에 시간에 종속된 우리의 지각을 환기한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이런 화면을 종종 사용할까. 그녀가 말했듯이 자신의 영화가 '로드무비'이기 때문이다. '로드무비'는 시간과 공간, 관계를 연결한다. 대표적인 로드무비인 빔 밴더스의 <파리 텍사스>(1984)는 망각한 기억을 환기하기 위해 공간을 명시적으로 이동하고, 아내와의 관계를 재설정하면서 이 3요소가 적절하게 배합한다. 반면에 라이카트는 미국이란 공간 밖을 나가지 않고, '로드무비'의 활력을 제한한다. 숏의 비율을 축소하거나 제한할 때 주어지는 효과란 현실을 교체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기를 열망하는 데 주어진다. 그녀의 모든 영화가 미국, 그리고 대부분 오리건주에서 진행된다는 점은 지역 간 변화를 보여주던 '로드무비'에 대한 감각을 다른 방식으로 재생한다. 라이카트 총 6편의 영화에서 시나리오를 담당했던 '조나단 레이몬드'는 그녀의 영화가 불필요한 것을 정돈하고 무엇인가 설명하는 대사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이는 그녀의 영화적 성질이 무엇인지 잘 이야기한다.

켈리 라이카트는 '로드무비'를 통해 미국을 벗어날 수 없는 실존주의와 여성의 위치, 우정을 이야기한다.

 

미국을 향하는 통로

<초원의 강>은 당시 선댄스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 후보에 오르고, 『필름 코멘트』가 그해 최고의 영화 중 하나라고 꼽으며, 켈리 라이카트의 앞으로 행보를 주목하기에 충분한 작품이었다. 문화적 사막으로 불리는 장소인 마이애미 북부와 실제 아버지 집에서도 촬영된 이 작품이 가지는 가치는 열악한 제작 환경에도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상황에 좌초된 한 여성이 끝내 나아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테렌스 멜릭 <황무지>(1974), 짐 자무시의 <천국보다 낯선>(1984)와 같은 로드무비의 형식에 순응하고 있는 <초원의 강>은 미국의 현실을 유머스럽고도 비관적으로 표명한다.

<초원의 강>은 알콜중독자이자 경찰관인 아버지, 다른 남자와 바람 난 어머니, 사랑하지 않는 남편과 아이들로부터의 도주하는 한 코지(리사 도널드슨)라는 여인을 통해 진행된다. 이 과정에서 코지는 사교적인 떠돌이 리(래리 페슨덴)와 함께 여정을 떠난다. 리는 자신의 친구 집이라며 코지와 함께 몰래 잠입하여 수영하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낸다. 그러던 중 집 주인이 그 광경을 목격하러 나온 순간 총이 격발되어 버린다. 또 다른 도주의 이유를 찾게 된 둘이지만 도주의 계획도 부재한 그들에게 정확한 건 아무 것도 없다. 사실 그 집주인이 총에 맞아 죽었는지도 알 수 없고, 하다못해 모텔 방 바퀴벌레를 죽였는지도 알 수 없다. 할머니의 지갑에서 훔친 버스표를 현금화하기 위해 터미널에 방문하고 그 안에 있던 편의점을 털기로 결심하지만 실패한다. 뉴욕을 향한 원대한 꿈도 톨게이트 앞에서 통행료가 없어 좌초된다. 순찰대에게 걸려 이곳을 통과하기 위해선 '주머니에 돈이 있어야 한다'는 직설적인 말은 이 영화가 도주할 수 없는 현실을 지시한다. 이때 영화는 코지를 누르고 있었던 황량하고도 억압된 상황, 마이애미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불행한 현실은 가정 밖으로 나온 것과는 관계없이 동일하게 이어진다.

리는 자신의 여러 생활 조건을 나열하며 함께 살자고 말한다. 방이 크진 않지만 아파트가 있으며, 직장을 구하기 전에 한동안 투잡을 뛰고 돈을 모으겠다고 설레발을 치는 리에게 코지는 총을 쏴 차 밖으로 밀어버린다. 코지가 가장 확실하게 할 수 있었던 자유란 리를 살해하는 것이었다. 페미니즘 영화의 걸작으로 자주 호명되는 리들리 스콧의 <델마와 루이스>(1991)는 이 영화와 유사한 플롯을 갖고 있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 차량이 절벽으로 미끄러질 때의 쾌감과 해방감은 미국으로부터의 완전한 도주로를 형성하지만, <초원의 강>에선 유유히 다시 돌아가는 코지의 차를 조명하며 영화가 끝난다. '난 방랑하는 빛'이라는 노랫말은 켈리 라이카트가 미국으로부터 고대했던 자유에 대한 갈망, 하지만 그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아이러니 속에서 외치는 함성이다. 이렇게 중첩되고 있는 밖으로의 기호는 사회를 겨냥한 물성에 대한 고찰이자 영화가 가진 남성 중심적 사유에 대한 반론이다. 여성은 남성을 죽이지만, 여전히 해방되지 못한 채 방랑하는 노래를 들으며 현실을 자위한다.

 

<웬디와 루시>는 인간과 관계를 맺는 강아지 루시가 등장한다. 동물은 무조건 키우는 주인의 여건에 영향을 받게 된다. 시간이 되면 먹이를 주어야 하고, 병에 걸리지 않도록 관리를 해야 한다. 이처럼 동물과의 밀착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현대 자본주의 법칙이 통용되지 않을 때 인간과 동물은 어떤 위치에 놓이는지를 묻게 된다. 켈리 라이카트 영화의 초기작인 이 작품은 도주로가 차단되어 한 장소에 정체되어 있거나 혹은 <초원의 강>과 같이 본래의 장소로 회귀해야 하는 지를 유사한 방식으로 논한다. 그러므로 전작인 <올드조이>에서 끝에 어렴풋이 보여주었던 그늘이 <웬디와 루시>에선 더욱 활동적으로 드러난다. 이와 유사하게 비토리오 데시카 <움베르토 D>(1952)가 현대에 이르러 지금도 맹렬하게 힘을 발휘하는 이유는 자본 권력으로 인해 억압된 이들이 배회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웬디에 관한 정보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패차 수준의 차를 운전할 정도로 궁핍한 처지이고, 어업 회사에 취직하기 위해 알래스카로 가는 중이었다는 것 정도다. 대중들에게 제한된 시각은 패쇄적인 빈곤의 부호를 긴밀하게 찾아보게 한다.

라이카트가 전망하는 세계란 단조롭고, 건조하기까지 한 웬디의 연기에서도 축적된다. 돈이 없어 동네 시장에서 사료를 훔치려다 적발된 웬디에게 "개 사료를 살 능력이 없다면 개를 키우면 안 된다"는 점원의 말은 <초원의 강>에서처럼 돈이 없다면 게이트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말과 일치한다. 경찰에게 잡혀 벌금을 내고 시장에 묶어놓은 루시를 잃어버린 웬디는 이곳저곳을 찾아 나선다. 루시가 외딴집에 있는 것을 발견하며 울타리 밖에서 웬디가 울면서 할 수 있는 말은 "돈 벌어서 다시 올게"라는 말이다. 결국 라이카트 영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미국이란 경계, 자본주의가 빈번하게 카메라 앵글로 촘촘하게 맺힐 때 그녀를 향한 조그마한 선의도 그 반경에서 넘어서지 못함을 드러낸다. 서로의 만남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차원에서 머문다는 지점에서 웬디와 루시의 시선은 병치 된다. 마지막에 지정된 좌석조차 존재하지 않는 화물기차를 몰래 올라탄 웬디가 향하는 길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나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내포한 채 영토 없는 자본주의의 유령은 그렇게 떠돌아다닌다.

 

ⓒ <믹의 지름길>

<믹의 지름길>은 남성 중심의 서부극 탈피이자 전형적인 서사 양식을 붕괴시키려는 의도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다. 그전에 대표적으로 니콜라스 레이의 <쟈니 기타>(1954)나 로버트 알트만의 <멕케이브와 밀러 부인>(1971)가 있었지만, 이 영화와 같이 숏에 운명을 맡기듯 집약적으로 풍광을 묘사한 작품은 흔치 않았다. 더 이전으로 돌아가자면 존 포드, 하워드 혹스, 세르지오 레오네, 샘 페킨파 등이 내세운 서부극은 당대 지배적 양식으로 정립되면서 영화의 지위를 격상시킨 것과는, 무관하게 라이카트는 그 미학을 유지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서부극의 일반적인 결론이 개인 혹은 집단의 해방이자 폭력을 통한 구원의 메시지라면, 이 영화가 가진 힘은 정반대로 위치한다. 서부극의 속도와 리듬을 거세하고 슬로우 시네마로 구조를 변환할 때 얻는 지각이란 더욱 한폭의 그림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믹의 지름길>은 4:3 화면비로 광활한 오리건 풍경을 좁게 투과함으로 프레임 밖을 도주할 수 없도록 시선을 제한한다. 여성과 개척민 사이의 격동적인 상황이 펼쳐질 때도 인물의 표정과 제스처를 쉬이 드러내지 않는다. 이때 클로즈업보다 롱 숏을 주로 사용함으로 이 로드무비는 밖이 제한된 미국을 상징적으로 묘사한다. 이는 라이차트의 작법이면서도 서부극의 재해석이자 미학적 문제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 문제로 지시된다. 생존과 인내, 느림의 운동, 자유주의, 권력 구조가 마찰하는 이 사회적 얽힘은 서부극이 단순히 유흥을 위해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을 지목하며 전복하는 드라마가 된다. 명확한 선악 캐릭터도 없고, 어떤 목적과 계획이 명증하게 도출되지 않는다. 이 로드무비는 순간순간 모순에 접촉하면서도 불온한 희망을 놓치지 않는 군중들을 조명할 뿐이다.

<믹의 지름길>은 1845년 마차를 타고 서부로 이주를 꿈꾸는 세 가족은 길을 안내해 줄 스테판 믹(브루스 그린우드)를 가이드로 고용하면서 시작된다. 믹은 지름길을 장담하지만, 그 과정에서 확정되지 않는 불안한 행진을 지속할 뿐이다. 이는 마치 성서의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길을 인도하지만, 그는 남성중심주의의 한계를 보여주는 장치로 그려진다. 불만 없이 그를 추종하는 이 무리는 믹의 리더십에 공개적으로 도전하지 않고 나아가는 것에 에너지를 집중한다.

이 과정에서 영화의 앵글에는 남성보다 여성의 모습이 자주 비춰진다. 빨래를 널고 나뭇가지를 주워 불을 지피는 일상에서의 노동은 남성 중심이었던 노동 사회가 여성으로 변환되는 걸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 남성이 지배했던 서부극을 변환하여 여성 주인공인 에밀리(미셸 월리엄스)가 인디언을 죽이려는 믹에게 총을 겨누며 그사이를 중재한다. 이 장면은 지난 몇몇 서부극이 인디언을 빌런으로 삼던 지난 시기를 여성 서사로 변환한다. 믹을 저지한 에밀리는 인디언의 안내에 따라 물과 안전이 보장된 희망의 경로를 발견한다. 이것은 여성의 길을 발명하는 동시에 인디언을 선지자로 모색한다. 원칙의 문제를 운운했던 믹과 앞으로의 앞일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나아가야 한다는 에밀리의 모습에서 영화는 여성의 진보를 긍정한다. 마지막에 에밀리에게 길 안내를 맡기는 믹은 <초원의 강>에서의 리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한 무기력한 남성상을 미국 서부극의 장르와 더불어 재해석한다.

 

ⓒ <어둠속에서>

<어둠속에서>는 켈리 라이카트 영화 중에서 가장 의아한 작품 중 하나이면서 독특한 지위를 갖고 있다. 이 영화가 토론토와 베니스에서 처음 공개되었을 때, 라이카트에게 호의적이었던 비평가들도 마지막 장면에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스릴러를 가장한 장르의 연출이 내러티브를 온전히 지탱하지 못한다는 것이 그 근거였다. 물론 점차 주목받기 시작한 라이차트가 예전보다 많은 제작비를 수급받으면서 캐스팅이나 연출의 폭이 넓어졌다는 건 그만큼 그의 작품이 책임져야할 것이 많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것과 무관하게 이 작품은 여전히 소외와 배제라는 미국적 풍경을 동일한 내러티브로 변주하는 작품 중 하나다. 이를 회피하지 않고 돌파하고자 하는 감독의 의지는 이전보다 더욱 광범위하게 생태문제를 지시하고자 하는 의도도 담겨 있다.

<어둠속에서>에서 수제 폭탄을 이용하여 수력발전 댐을 폭파하려는 계획을 세운 환경 급진주의자 조쉬(제시 아이젠버그)와 데나(다코타 패닝), 하몬(피터 사스가드)는 무표정한 얼굴로 이를 수행한다. <믹의 지름길>이 서부극에 대한 재전유였다면, <어둠속에서>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미국의 전형적인 배우의 얼굴을 제거하는 것에 있다. 감독에 의해 노략질당한 배우의 표정은 어둠과 불안에 잠식되어 움직임을 잊어버린 얼굴이다.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고 데나를 살해한 조쉬의 얼굴에는 어떠한 죄책감도 찾기 어렵다. 그것은 영화가 선언하는 가장 큰 어두움이며, 이 영화가 폭발시키고자 하는 냉엄한 미국의 이미지다. 그것은 바로 서구 사회와 풍경이 청결할 것이라는 신화, 또는 이를 해결하려는 낭만 서사와 실제 운동이 환경문제뿐만 아니라 인간의 표정까지도 해체할 수 있음을 물리적으로 드러낸다.

 

우정과 자연, 그리고 사회

라이카트 영화에서 이성과의 결합은 존재하지 않는다. '플라토닉 커플'의 결합을 욕동하는 그녀의 영화에서 우린 그것을 우정으로 보기도 하고, 사회의 단면을 암시하는 걸로 해석하기도 한다. 공간을 관통하는 평등한 시간성, 주변 환경에 관한 인식, 신자유주의의 범람과 사회적 격차 등은 미세하게 라이카트의 영화를 조율하는 요소다. <올드조이>에서 의도한 자연의 풍광은 앞으로 영화를 장악하는 에너지로 보인다. 프랑스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Louis Pierre Bachelard)는 인간 세계와 자연 세계의 균형을 유지함으로 지속 가능한 공존을 실현하기 위해 작동하는 자연, 말하자면 대지를 회복과 치유의 공간으로 이렇게 역설한 바 있다.

"예컨대 집, 배. 동굴 등에는 모성으로의 복귀라고 하는 중요한 공통된 특징이 있다. 이러한 전망에서는, 무의식이 지시하고, 무의식이 길을 인도한다."

켈리 라이카트는 자연을 자궁 삼아 에덴동산의 자리에 남녀가 아닌 우정을 삽입한다. 넓게 보면 이는 라이카트의 영화에서 분명 복귀하고자 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특히 <퍼스트 카우>에서 인물들이 대지로 돌아간다는 것에서 그렇다. 자연이 보여주는 풍광이라는 가시적인 측면도 존재하지만 모든 인물이 미국이란 나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귀환해야만 하는 한계는 라이카트의 영화의 주요한 주제의식 중 하나다. 평론가 필립 호커 <올드조이>를 "오랜 우정과 그 해체를 드러내는 작은 순간에 촛점을 맞춘 영화"라고 밝힌 것처럼 이 영화는 자연의 여백 때문에 라이카트의 영화 중 가장 정교하게 감정을 교류하는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삶의 권태가 찾아올 때 오랜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는다는 설정은 그 시간의 간격만큼이나 변화된 서로를 긴밀하게 모색할 수 있는 계기로 작동한다. 커트는 마크에게 오리건 숲으로 하이킹을 떠난 다음 유명한 온천에 몸을 담그는 여행코스를 제안한다. 마크는 임신 중인 타냐(타냐 스미스)에게 겨우 허락을 받아 커트의 차량에 올라탄다. 대책 없이 목적지를 감으로 짚는 커트와 그를 따르는 마크 사이에는 점차 밤의 그림자가 깊어진다. 야영장소에 위치한 소파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커트는 숲과 시내에 버려진 쓰레기를 보며 이건 과거와 현재도 동일한 한 덩어리라며 논평한다. 곧이어 비비탄총을 빈 깡통에 쏘며 유흥을 즐기다가 돌연 커트는 우주의 의미, 시간과 공간이 하나의 형태로 움직인다는 형이상학적인 이론을 주장한다. 이때 커트는 보고 싶었다며 마크를 향해 눈물을 흘리는데, 이는 우정을 향한 도약을 의도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가진 자유의 한계를 애처롭게 여기는 반응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건 둘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다시금 우정을 나눈다는 것이다.

 

ⓒ <어떤 여자들>(2016)

세 인물의 에피소드가 공존하면서 다층적인 관계를 모색하는 <어떤 여자들>(2016)은 그녀의 장편 중 유일하게 각본을 혼자 구성했다. 이례적으로 각본가 레이몬드와 협업하지 않았다. <어떤 여자들>은 그녀의 영화 중 가장 많은 대사가 등장한다. 숏을 중시하는 그녀가 대화를 통해 표시하고자 하는 건 제목과 같이 '여자'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이전 영화에서도 그러했지만, 이 영화에서 다루는 여성성은 전 영화들을 복기하는 데 여념이 없다.

가령 변호사 로라(로라 웰스)가 진상인 변호인 퓰러(자레드 해리스)를 만나 곤욕스러운 관계를 이어나가는 과정은 <믹의 지름길>을 떠오르게 하고, 사춘기 딸과 선하지만, 답답한 남편 사이에서지내는 지나(미셸 윌리엄스)는 <초원의 강>의 코지를 생각나게 한다. 마지막 3번째 에피소드에서는 <올드 조이>에서 보여주었던 동성 간의 우정이라 할 수 있는 관계를 잇는 장면이 나온다.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활약하는 이 에피소드는 지원 지역을 착각해 학교법 강사로 네 시간 거리를 운전해야 하는 시골에서 부임하면서 시작된다. 목장에서 말을 돌보며 지루한 생활을 하고 있었던 제이미(릴리 글래드스턴)가 우연히 그녀의 수업을 듣고 감화되어 관계를 맺게 된다. 하지만 장거리 출근과 변호사라는 투잡을 이기지 못해 다시 도시로 돌아간 베스(크리스틴 스튜어트)는 제이미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는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제이미는 무작정 4시간을 운전해서 그녀가 있는 직장을 수소문해서 찾아 나선다. 둘의 만남에서 이어지는 어색한 기류는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종결된다. 베스는 직장으로 돌아가야 하고, 제이미는 여물을 먹어야 한다.

<올드조이>가 그랬던 것처럼 자기 본래의 장소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정으로도 결코 치환될 수 없으며 낙관적인 '로드무비'가 아닌 차가운 실존을 보게 한다. 또한 도시와 촌의 이미지를 가진 두 배우의 분위기는(실제로 릴리 글래드스턴은 알려진 바 있듯이 원주민 출신이다) 전복의 수단이 아니라 감독이 보는 세계에 대한 서늘한 시선으로 대응한다. <어떤 여자들>는 여성에 대한 감독의 태도를 단편으로 펼쳐놓으면서 여성이 가지는 한계에 대해 자문한다.

 

ⓒ  <퍼스트 카우>

13년 만에 동성 간의 우정을 직접적으로 다룬 영화인 <퍼스트 카우> 역시 미국 땅을 담는다. 영화는 미국 북서부에 위치한 오리건 준주의 틸리컴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벌어진다. 당시 미국 동부에서 인구가 유입되는 시기와 맞물려 이 지역은 다양한 인종들이 거주하는 무역도시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이는 그가 이전의 '미국'이란 이미지를 규범적으로 상기하려는 시도이자 대지의 역사를 보편적으로 보관하려는 시도다. 서부극을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에서 우정이란 <올드조이>보다 급진적인 속성의 것이다. <올드조이>에서 디제시스로 전파되고 있는 사회와 정치 뉴스의 음울한 진동과는 다르게 <퍼스트 카우>에선 시간과 공간, 인종의 이미지가 서로 교차하여 탈사회화된 우정을 지목한다. 규범으로 집약되어 있었던 서부극이 붕괴하고 그 안에 동성 간의 우정, 더 나아가 동물과의 관계를 투입하는 그녀의 영화에서 '미국'을 다루는 이유도 성별과 인종, 민족성의 문제를 반영하기 위해 설계된 것이다.

<퍼스트카우>는 사냥꾼 밑에서 요리를 해주는 피고위츠(존 마가로)와 우연한 계기로 중국인 킹루와 만나 전략적으로 돈을 버는 궁리를 하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세상이치를 빠르게 파악하고 있는 킹 루(오리언 리)는 2년을 이 땅에 거주하면서 재물이 오고가는 것을 무엇보다 많이 목격했다고 말한다. 노마드인 킹 루와는 다르게 피고위츠는 새로운 것이 없다며 반박한다. <올드조이>의 마크와 커트 같은 서로 다른 성향을 반사하는 이 둘은 전략적으로 라이카트 영화에서 공생하고 있는 기호다. 여기서 그들은 유일하게 마을에서 기르는 암소 한 마리에게 우유를 몰래 채취하여 만든 스콘을 통해 마을의 활력을 불어넣기 시작한다. 둘은 마을의 권력자인 대장의 재빵사로 채용되긴 했지만, 그 집에서 키우던 암소의 젖을 착유한다는 것이 들키자 도주하면서 둘은 기약 없는 작별을 고하게 된다. 그 과정 중에 산위에서 떨어져 의식을 잃은 피고위츠가 원주민의 도움으로 회복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믹의 지름길>에서처럼 켈리 라이카트의 서부극은 대지의 주인이었던 원주민과의 관계를 통해 땅이 주는 회복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 이야기는 사회정치문법이 잔잔하게 흐르지만, 이 영화가 <올드조이>보다도 우정이란 주제를 확장할 수 있는 주요한 이유는 첫 장면 때문일 것이다. 배의 잔상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주지하게 만들고, 그 후 교차된 화면에서 한 소년은 킹 루와 쿠키의 뼈를 발굴하는데, 이는 시간의 의미를 우정으로 탐색하게 한다. <퍼스트 카우>가 다루는 지형학적 구조상 무거운 물품을 운반하고 또한 지형과 지형을 잇는 수단으로 하는 배를 사용하는 이 영화는 타자를 연결하고 땅의 이미지로 일상을 담는다. 이후 다시 재회한 둘이 '쉬어가기 좋은 곳'이라며 찾아 눕는 장소는 영화에서 늘 배경으로 삼았던 숲속이다. 대지와 함께 휴식과 운명을 맞이하는 인간과 <올드조이>에서도 나체 상태로 온천에서 피로를 푸는 장소가 숲속인 것을 고려하면 감독은 이 땅, 자연의 의미를 우정으로 정의하는 것처럼 보여진다. 여기서 영화는 인물과 땅이 맺는 관계를 프레임 속에 배치하며 공간과 시간이 하나의 병합체로 존재하고 있음을 보게 한다. 시간을 초월하여 물리적 증거를 통해 우정을 간직하게 한다.

 

ⓒ <쇼잉업>

미국 밖을 벗어난 예술가 라이카트

<쇼잉업>은 라이카트의 페르소나인 미셸 윌리엄스와 <퍼스트카우>의 존 마가로를 주연으로 내세워 그 고유의 생기를 유지하며 극을 이끌어나간다. 다가오는 전시회를 준비하는 조각가인 리지(미셸 윌리엄스)는 미술대학에서 행정업무와 일상에서 주어지는 관계들 때문에 온전히 활동에 집중하지 못한다. 미술학교를 운영하는 엄마 진과 도예가 아버지 빌은 이혼한 관계고, 오빠 션(조 마가로)는 독특한 설치작업을 하는 대담한 예술가다. 이런 가정사와 맞물려 이 영화에서 유독 잘 드러나는 것은 예술가라는 측면이다. 조각을 동원하여 예술가의 예민함 속에 가장 느긋하고 쉽게 동요하지 않는 둔감하기 짝이 없는 비둘기를 동시에 배열한다. 동물은 연기를 하지 않는다. 관객은 동물이 연기를 한다고 받아들일 수 있지만 반복적인 훈련에 의해 연기처럼 보일 뿐이다. 예술이 갖고 있는 자율성과 창작의 과정에서 실패가 내제되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이 영화의 예술성이란 단지 그간 부과하였던 물리적인 문제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여기서 요청되는 건 일종의 수수께기와 같은 예술을 풀어나가는 태도다.

신기하게도 <웬디와 루시>와 <쇼잉업>이 같은 장소인 포틀랜드에서 찍었다는 사실은 라이카트가 이전에 추악한 미국(Ugly America)라고 언급했던 시절과는 다른 맵핑을 제시한다. 먼저 리지가 전시하는 조각 작품은 신시아 라티(Cynthia Lahti)의 작품이다. 마치 자코메티, 로댕의 작품을 연상케하는 세라믹을 활용한 이 작품은 어떤 화려함도 없고 어찌보면 볼품없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대지에 가장 가깝고, 다채로운 감정과 개성을 표현할 수 있는 대지의 원료를 사용한 라티의 작품은 가장 완벽한 인간성을 담아낸다.

라티는 포틀랜드에서 거주하면서 오리건의 야생, 땅에 담긴 진실에 대해서 강한 유대감을 갖고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신비하게도 <쇼잉업>의 션에게도 동일하게 선언된다. 그는 마당에서 땅을 파고 있는 장면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시는 대지의 목소리지. 전부 대지와 관련됐어." "말하지 않는 것에 귀를 기울여야 해" 이 말은 예술이 새겨놓고 있는 자연의 여백과 일상성에 대한 태도가 이례적으로 <쇼잉업>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마지막에 이 영화에서 션은 비둘기를 하늘로 풀어준다. 여기서 비둘기의 활공은 라이카트의 또 다른 전망을 예고한다. 왜냐하면 비둘기는 어떤 물리적인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 밖을 벗어나 또 다른 세상으로 이동할 수 있는 이 가능성은 예술이라는 주제를 통해 확장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다. 그렇다면 그녀의 영화에서 접맥하고 '로드무비'의 실체는 무엇일까. 이건 우리가 있는 그대로 같은 존재를 본다는 것,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쇼잉업>을 통해 우리는 어디선가 활공하는 비둘기를 만나게 될 것이고, 사회와 정치적인 매체의 소음(올드 조이), 길거리를 지나가다 파손된 차량(웬디와 루시)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산에 등반하며 그 밑에 누적된 유물과 죽음을 마주할지도 모른다(퍼스트 카우). <퍼스트 카우>에서 한 아이가 뼈를 발굴하는 장면은 예술의 방향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라이카트의 '로드무비'는 표면을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땅을 파고 수직으로 나아가는 데 의의가 있다. 계속해서 미국을 파내려 가면서 보이는 풍경이란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것이다.

[글 이현동 영화평론가, Horizonte@ccoart.com]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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