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빈의 랜덤 플레이 무비 #1] 선명하지 않음을 만드는 빛
[이우빈의 랜덤 플레이 무비 #1] 선명하지 않음을 만드는 빛
  • 이우빈
  • 승인 2024.04.12 12: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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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소리: 좀비와의 전쟁>(Bong of the Dead, 2011, 토머스 뉴먼)
왓챠, 'B급 무비' 카테고리, 12번째 줄 왼쪽에서 4번째 영화

5분 간 펼쳐지는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무성영화의 외양을 따라 하며 이목을 끈다. 대사가 없는 연출 아래에서 2000년대 초반 홈비디오 목적으로 나온 디지털 캠코더의 조악한 디지털 질감이 대번 눈에 띈다. 대개 딥포커스로 촬영된 터라 극단적인 숏 사이즈의 변경이나 프레임 속 음영 대조와 같은 이미지의 단순함에 집중하게 된다. 요컨대 이 5분의 무성영화는 차후 이 영화가 무성영화 시대의 그것처럼 숏의 적절함을 제대로 드러낼 것이라고 말하는 감독의 자부심 넘치는 예고와도 같이 느껴진다.

여하튼 주인공은 한 노부부인데 평범한 정원을 가꾸던 남편의 뒤로 불현듯 우주 어딘가에서 나타난 유성이 떨어진다. 유성에서 흘러나온 모종의 바이러스 같은 것에 남편이 중독된 후 아침에 일어난 그의 머리엔 커다란 종양이 나 있고 종양을 압출하자 초록색의 진물이 역겨운 소리를 내며 온갖 곳에 튄다. 다만 남편은 어떠한 불편의 기색도 내지 않은 채 이 과정을 완수하고, 이 기괴한 압출 후에 그가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으려 할 때 다가온 아내는 진물과 피와 피부 껍데기 같은 이물질이 묻어있는 남편의 머리에 가볍게 키스한다. 속이 울렁거리게 로맨틱한 모닝 키스가 끝나니 남편은 좀비로 변하고 TV를 보던 아내를 깨문다. 한 뜸이 지나고 앙각의 카메라가 소파에 앉은 두 부부를 비추는데 부부는 사이좋게 서로의 장기를 파먹고 있다.

이 영화는 좀비물이구나란 인식이 즉각 찾아들 무렵 영화는 바로 오프닝 타이틀과 크레딧을 올리고 주인공은 20대 중후반쯤의 두 남자로 변해있다. 두 남자는 대마초 중독자다. 한 남자는 좀비의 뇌를 이용해서 대마를 키우는 데에 성공하고 대마초의 대량 재배를 원하는 둘은 더 많은 좀비의 뇌를 얻기 위해 정부가 접근을 금지한 위험 구역으로 떠난다. 그 길에서 둘은 군대를 모으겠다며 말하는 좀비도 만나고 홀로 집을 지키는 여자와 합류하여 좀비와 싸우기도 한다. 여하간 이런저런 말도 안 되는 돌출적 이야기와 화장실 유머가 오가고 종종 내장과 뇌수가 카메라에 진득하게 묻는 이 전형적인 B급 좀비물에서 과연 영화는 어떠한 말을 건네고 있나.

 

ⓒ <죽음의 소리: 좀비와의 전쟁>

앞서 말했듯 <죽음의 소리: 좀비와의 전쟁>의 이야기에 가타부타 할 이야기란 없겠으나 (물론 재미있는 이야기지만) 가장 눈에 띄는 바는 서두에 언급한 캠코터의 조악한 질감과 얕은 심도를 구현하지 못하는 카메라의 기술적 한계에 있다. 망원렌즈의 효과를 내지 못하는 대신 이 영화가 택한 것은 적극적인 과다 노출의 사용이다. 이를테면 두 남자가 군대를 만들겠단 좀비의 포박에서 벗어난 뒤 좀비의 아지트에서 벗어 나는 장면에서 둘은 후경에서 전경으로 걸어 오며 대화한다. 그러나 숏 사이즈는 풀숏이고 초점은 딥포커스인지라 관객은 사실상 둘의 대화에 시각적으로 집중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이때 영화는 의도적인 헐레이션을 구현하여 화면의 가장자리를 뭉개 버리면서 흡사 아웃 포커스와 비슷하거나 아주 미약한 아이리스의 효과를 연출한다. 이와 비슷하게 세 남녀 주인공이 좀비 무리와 본격적으로 전투를 시작하기 이전에 세 남녀를 풀~롱숏의 앙각으로 비춘 넓은 하늘엔 노을빛이 지나치게 노출되고 후보정을 통해 색온도는 비정상적으로 높여져 있다. 영화는 세 인물의 클로즈업 숏을 보여주는 대신 이 기묘한 하늘색을 사실상의 주인공으로 택하면서 전투의 전조를 풍기는 데에 성공하며 다시금 영화를 빛의 훌륭한 노예로 만드는 일에 성공한다.

선명하지 않은 영화의 화면은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나. 특히나 현대 영화에서 주로 쓰이는 120~200mm 내외의 망원렌즈와 얕은 심도의 버스트 숏~클로즈업 숏은 무엇을 위해 있나. 이 바보 같은 질문에 <죽음의 소리: 좀비와의 전쟁>은 무척이나 영리한 답변을 내두르고 있다. 선명하지 않은 화면을 이뤄야 하는 이유는 초점을 흐림으로써 강제하는 관객의 수동적 시선이 아니라 빛의 능동을 통한 화면의 직조에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눈은 망원렌즈가 아니다. 눈앞에 손가락 하나를 갖다 대고 집중할 때야 후경이 흐려지긴 하지만 멀리 있는 피사체를 보면서 아웃 포커스를 이룰 수 있는 인간의 눈은 없다. 대신 우리의 눈은 햇빛과 역광, 영화로 따지면 주광에 맞서는 보조광이나 측면광을 통하여 보고 볼 수 없는 것을 가늠한다. 혹은 완전한 어둠에 빠져있을 때 우리는 무언가를 보지 못한다. 또는 시야를 가리는 장애물의 존재가 있을 텐데 이 역시 빛의 투과를 물체가 방해하는 원리임을 포함했을 땐 크게 다르지 않은 경우가 된다. 이러한 사실을 카메라와 망원렌즈는 초점이란 무기를 통하여 늘 배반하고 있는데 우리의 인지는 이 익숙한 영화 문법의 부자연스러움을 대체로 깨닫지 못하고 있던 셈이다. 반면에 <죽음의 소리: 좀비와의 전쟁>은 의도적인 빛의 산란과 과다, 헐레이션을 통해 관객이 볼 곳과 안 봐도 될 곳을 구분한다. 따지자면 이것은 지독한 시각의 리얼리즘이고 '본다는 것'에 대한 가장 원론적인 사유다.

 

ⓒ <죽음의 소리: 좀비와의 전쟁>

물론 이러한 시각적 사유를 B급 무비에 곁들였다고 하여 특별히 대단한 의미가 생성되진 않는다. 중요한 바는 이 시각적 자연스러움의 결과가 영화의 서사에도 여실히 결부한다는 점이다. 다시 줄거리의 처음으로 돌아갔을 때 좀비화가 진행 중인 남성 노인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본인 머리의 주먹만 한 종양을 짜냈다. 아내는 그 주먹만 한 종양이 찢어진 자리에 너무도 뻔뻔하게 입을 맞춘다. 결국 영화는 '보는 행위'의 자연스러움만 만족시킨다면 그 내재적 세계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든 기어코 영화 속 인물과 관객에게 역겨운 부자연스러움을 안기지 않는다. 내장과 뇌수가 터져 나오고 오로지 대마초를 피우기 위해서 좀비와 싸우거나 목숨까지 바치는 이 돌출적인 인물들의 이야기가 자그마치 100분이나 지탱된 이유는 이것이 영화여서다. 그리고 이 영화가 시각적 자연스러움을 빛의 조절을 통해 탁월하게 구현해서다.

문득 <듄: 파트2>에서 시종일관 아이맥스 스크린을 채우던 사막의 태양이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시각적 스펙타클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택했고, 그 캐치프레이즈에 찬동하며 시네마틱한 비주얼의 신기원이라거나 영화적 화면의 새 지평을 열었다며 평하는 이 21세기 블록버스터 대작이 그토록 커다란 햇빛을 화면에 담으면서도 그 햇빛에 의한 어떠한 시각의 능동적 차이도 부르지 않는 안일함을 택했듯이 안온한 초점의 세계에 갇혀 빛의 논리를 무시하는 무수한 작품들의 한심한 부자연스러움이 <죽음의 소리: 좀비와의 전쟁> 덕분에 드러났기 때문은 아닐까.

[글 이우빈 영화평론가, 731dnqls@ccoa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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