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아마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시네필 중 한 명일 듯한 중년의 남성과 대화를 나눌 일이 있었다. 그는 오늘날에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하거나 영화에 대한 글을 쓰려는 청년들('젊은 평론가'라고 일축하겠다)의 대부분이 이상한 괴리(실제로는 훨씬 격한 표현이었지만)를 지니고 있다고 지적했다. 요약하자면 최근의 젊은 평론가들은 영화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좋아하는 자신' 혹은 '영화를 둘러싼 무언가'를 좋아할 뿐이라는 비판이었다.
그의 주장의 주요한 근거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그들은 태생적으로 영화를 좋아할 수가 없다. 이미 극장의 시대, 단관의 시대가 저문 뒤에 기성의 영화광들이 선정했을 뿐인 일명 영화사의 걸작들과 작가들을 영화라는 매체의 전부인 것처럼 볼 수밖에 없는 세대가 과연 영화와 진정으로 마주했다는 것이 가능할지라는 물음. 이른바 영화의 전성시대를 산 영화광들은 본인이 보려는 영화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극장에 가서 아무런 영화표를 끊고 나서 영화를 즐겼을 테지만, 이제는 그처럼 순수한 영화 감상이 불가능해졌다는 것, 특히 한국의 시네필 문화를 이끌었고 이끄는 일련의 극장과 시네마테크들은 누군가의 영화만을 포섭하는 퇴행적 영화 감상 문화에 가장 큰 원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덧붙이자면 그렇게 우연하게 영화를 마주해야 했던 이들은 영화를 단 한 번 보고 순수한 자기 비평을 쓸 수 있었으나 지금의 젊은 평론가들은 그 영화를 몇 번이나 확인하며 일종의 재현적 강박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이다.
둘째, 젊은 평론가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를 자꾸만 남에게 알리고 자랑하려 한다는 것에 대한 비난이다. 비유하여 말했을 때, 만약 자신이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장점, 그 사람을 사랑하는 이유, 그 사람에 대한 평가를 만인에게 알리려 할 것인지란 의문. 진실로 영화를 사랑한다면 랑글루아처럼 거대한 사유 극장을 만들어 영화들을 독점하고 싶을 뿐이란 의견이 그의 논지였다. 두 근거를 종합하자면 젊은 영화 평론가들은 영화를 제대로 본 적이 없으면서도(우리의 탓만은 아닐 테지만) 그것을 사랑한다고 말하며 심지어 그 틀린 사랑을 남들에게 전하고 있다는 괴리를 흩뿌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말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내 반론의 근거는 지극히 개인적인, 완연히 나로부터 시작하는 허술한 귀납이다. 첫째, 내가 최초로 영화를 봤던 창구는 15년 전쯤 인터넷 영상 문화의 선두에 있던 판도라 TV, 곰TV, 엠빵 등 혹은 OCN, 국회방송, EBS에서 틀어 주던 각종 영화였다. 이곳에서 나는 (형과 함께) 누구의 작품인지도 모르고 어떤 시대, 어떤 국가에서 만들어진 것인지도 명확하지 않은 영화들을 봤다. 다만, 이곳은 극장이 아닌 형과 내가 자던 골방이었을 뿐이니 중년의 시네필이 말한 '순수한 영화 감상'엔 절반쯤만 성공한 셈이다. 영화란 것의 형체를 어느 정도 느꼈을 때야 영화의 전당 시네마테크에 가서 알려진 영화들을 보며 그것들의 이름을 익힌 잘못을 범했다.
둘째, 사랑의 대상을 말하고 알린다는 것은 사랑의 틀린 전제인가. 이 물음에 대해선 영화와 완전히 무관한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므로 이곳에 길게 쓸 마음은 없지만, 간략하게 말하자면 사랑에 대해 침묵하고 발화하려는 욕망의 그 중간 지점에서야말로 사랑의 진정한 긴장이 생성된다고 느끼는 개인으로서는 명백히 동의할 순 없는 지적이다. 여하간 그의 지적이 꽤 타당하다고 생각하며 일종의 수치를 느낀 나로선 이 수치심을 조금이나마 극복할 방법론이 필요했다. 타성에 젖어 영화를 보는 나날이 늘어가며 영화 바깥의 너무 많은 정보와 말 속에서 과연 나의 주관이란 얼마나 살아있는 것인지의 자문이 적절히 겹친 시점이다.
아무리 정평이 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2023)를 재밌게 봤대도, 과연 남들마저 모두 상찬하는 이 영화에 어떤 말 하나 얹는다는 관성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 모르겠는 요즘이다. 그래서 15년 전쯤으로 회귀하고자 한다. (맘 같아선 115년 전 프랑스나 미국으로 가고 싶지만) 지금 시대에 영화를 무작위로 보고 그 무작위성의 매력까지 품으며 영화를 사랑한다는 일이 가능하다면, 현재 나의 방법론적 최대치는 OTT에 있는 영화를 무작위로 보고 쓰기라 판단이 든다.
연재는 아래의 과정을 따라 진행한다.
1. 아무 OTT를 켠 후 임의의 조건에 따라 영화를 무작위로 선정한다.
예시) 왓챠의 '스릴러' 카테고리에서 12번째 줄 왼쪽에서 2번째 영화.
2. 1에서 선정한 영화가 아래의 조건을 모두 충족한다면 감상하고, 아니라면 1의 작업을 반복한다.
조건 1) 이것의 제목과 존재를 처음 인지한 영화
조건 2) 이것의 감독이 만든 작품을 하나도 안 본 영화
3. 2에서 선정 완료한 영화를 메모하지 않으며 단숨에 본 뒤 가급적 1시간 안에 감상을 쓴다. 이때 영화를 다시 보진 않는다.
4. 3에서 평가한 영화가 걸작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감독의 작품을 가능한 한 모두 보고 감독론을 쓴다. 아니라면 5로 넘어간다.
5. 3 or 4의 작업이 끝났다면 1로 돌아가 연재를 반복한다.
누구의 정전에도 오르지 않은, 혹 정전에 적혔다고 할지라도 내가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백지의 상태에서 이뤄지는 영화와의 마주함이 과연 어떠한 심상을 일으킬지는 아직 모르겠으나 적어도 시도만큼은 해보려 한다. 능동보단 수동의 쓰기, 발굴보단 기계적 기록, 비평보단 배설에 가까운 말 그대로 '랜덤 플레이 무비', 필름도 아니고 시네마도 아닌 무비의 저급함에서 영화의 맨얼굴을 보고 싶다.
[글 이우빈 영화평론가, 731dnqls@ccoar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