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비에 아사야스'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앞으로 말끔하게 나아가기보다 끝날 듯 끝낼 수 없는 상태와 마주하는 수고로움이 뒤따르는 일이다. 아사야스의 세계를 걸을 때면 미완의 상태를 붙잡고서 모호한 느낌과 기운에 자신을 내맡겨보는, 어딘지 위태하고 불균질한 정신이 수반되곤 한다. 이를테면 <데몬러버>(2002)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악령(demon)의 난동으로 인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수면·최면에 빠지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약물과 폭력에 의한 육체적 통각, 죽는 일과 다름없는 공포에 질리며 의식을 잃고 생환하길 거듭하는 가혹한 풍경이 연이어 펼쳐진다. 모의적 사건과 그 배후에 감춰진 세력은 주체의 의식 아래 은둔하던 마음의 외상에 대한 비유다. 인물들을 괴롭히는 악령은 다름 아닌 제 내면에 드리운 고통스러운 풍경인 것이다. 또한 <이마 베프>(1996)에서는 실컷 펼쳐둔 징후를 해결하지 못한 채 엔딩 크레딧을 띄워버렸다. 잠적한 영화감독 르네(장피에르 레오)는 주변 사람들의 예언대로 자기 영화를 끝마치지 못했고, 다음을 기약한 인물들은 우리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남은 것은 미완성을 예견한 자의 겁에 질린 침묵, 어딘가 석연찮은 영화의 끝이다.
아사야스에게 '어쩌면 예정된 일'이라는 짐작은 빈번히 뒤늦은 응답에 불과하다. <데몬러버>에서 디안(코니 닐슨)은 총알 없이 당겨진 방아쇠에까지 허무를 느끼며 그를 위협한 상대에게 "(겁에 질린 채로) 그다음은? 그다음은 없어?"하고 되묻는다. 지속적인 고통 대신 파멸에의 미련으로 추동하던 영화는 '고통스러운 쾌락(jouissance)'을 가리키는 고문 기계에 결박된 어느 영혼의 최후를 가리킨다. 그나마 <데몬러버>의 예견된 죽음의 실패가 도리어 엔딩을 의연히 받아들이도록 한다면, <보딩 게이트>(2007)의 낌새는 너무 이르게 찾아와 허무의 고통이 가중된다. 사실상 아사야스는 영화가 시작되기도 전에 파국을 선언했다. 그게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도 없지만, 시작에서부터 인물들은 '더는 미룰 수 없다'고 버릇처럼 중얼거리면서 사변을 늘여놓고 시종 나른하게 움직인다. 두 남녀 사이에 형성된 은밀함은 관계의 파국을 반강제적으로 에워싼, 불안정한 재회와 속임수 같은 사랑의 고단함이 남긴 정취다. 이들은 서로 다른 곳을 응시하거나 상대의 등 뒤에 서서 사물의 반사면을 통해 겨우 바라볼 수 있을 뿐이지만, 또한 예정된 상실을 지연하기에 유혹적이기도 하다.
찰나의 상념으로 무산되는 배반과 음모, 처절한 사랑의 온상은 반복적인 전조 증상으로 인해 당혹감을 더하기보다 오히려 그럴듯하게 여겨지기에 괴롭다. <보딩 게이트>에서 복수의 날을 세운 산드라(아시아 아르젠토)는 눈앞의 연인을 제거하지 못한 채 그저 숨죽여 바라본다. 산드라의 무산된 살인은 그녀 자신을 영화의 화면에서 서서히 지워낸다. 그러나 원경으로 사라지던 그녀가 다시금 뒤돌아보는 실루엣을 보고 마음이 무너져 내린다면, 아사야스가 매번 무언가를 애매하게 흩트리던 이유를 조금은 알 수 있게 된다. 산드라는 지금 그녀의 과거를 청산해주겠다는 미명 하에 자신을 죽여 없애려던 남자의 등 뒤에 서 있다. 실연의 아픔과 연민을 느끼면서, 자신은 안중에 없는 남자의 얼굴(미래)을 상상한다. 그녀는 (죽음의 열기마저 사라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기 삶 속으로 말려 들어가면서도, 진작 떠나고 없는 무언가의 끝을 붙잡고 있다. <데몬러버>에서 깨어있기를 포기하며 도리어 무의식 속에 내맡겨지던 디안이 "말문이 막히면 눈이 흐려"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산드라가 죽이려던 저 뒷모습 너머, 어느 지난날에는 반대로 자기 등 뒤로 다가오는 죽음도 모르던 그녀 자신이 있다. 자신을 상실하는 숨죽인 붙잡음에는 체념할만한 시간(러닝타임)조차 남지 않았다. 이 적막하고 슬픈 유사-죽음은 차마 끝까지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다.
겁과 두려움, 신경쇠약증적인 사랑에 시달리는 인물들의 야심이자, 고통을 덜어내는 허위적 위안으로서 페이딩(fading)은 아사야스의 짙은 관성으로 굳어지면서 그는 더 과감하게 눈을 감고, 귀를 닫기 시작한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의 욕망은 이 세상 경계 너머로 확장되며 선지적 능력을 혜안의 영역으로 넓힌다. <퍼스널 쇼퍼>(2017)의 후반부를 보면, 심장마비로 떠난 쌍둥이 오빠의 영적 신호를 기다리던 영매 모린(크리스틴 스튜어트)은 연인 앞에서 그만 나약해지고 만다. 응답 없는 내세, 청신호를 향한 막연한 기다림. 모린이 스스로 체득한 불가능을 미처 단언하지 못하는 가운데, 연인은 때를 기다렸다는 듯 냉혹하게 말한다. "그런 거 같은 게 아니라 존재하질 않는 거야. 죽고 난 후엔 아무것도 없어." 그런데 앞서 그녀가 했던 말 하나를 떠올려보면 이때의 근심이 새로운 깨우침이 아니라 자기실현적 예언에 대한 되새김질과 거부감에 의한 것임을 알게 된다. 영혼의 실체에 관해 여러 번 말을 번복하던 장면의 끝, "그다음에는 살아가면서 잊어야겠죠"를 말이다. 말꼬리는 가냘파지고 '그다음'을 상상하는 얼굴은 엑토플라즘처럼 퍼지는 담배 연기에 활력을 빼앗긴다. 육신의 남은 기력이 흩어지는 동안 불가능에 몸을 내맡긴 자의 절망은 더욱 생생해진다.
부산한 심야의 정경, 도심의 과도한 고독 속을 유랑하는 모린, 그녀를 담은 화면은 빛의 일렁임 또는 심령의 그것처럼 흐릿해진다. 성녀 힐데가르트의 멜로디가 증폭돼 울려 퍼지지만 이제 우리는 급격히 찾아오는 이 나른함이 헛된 안간힘을 암시하는 아사야스식 전조 증상임을 안다. 이질적 사운드의 불협화음, 다성(소음)과 무성(침묵)의 급진적인 교환, 아웃포커싱과 다이얼로그 도중 페이딩 되는 장치들로 인해 각 시퀀스, 장면, 시공간이 전환되는 경계부의 흐름은 단절되곤 한다. 각종 기호는 인과적 관계를 잃은 채 스크린 내부로 태연하게 침투하고 넘쳐나는 말들은 명징하게 요약되지 않는다. <논-픽션>(2018)에서는 '언급해둘 필요 자체의 가치'를 강조하며 논쟁과 토론을 닫히지 않는 물음들과 함께 그대로 남겨둔다. 숱한 담론의 생성과 달리, 인물들은 줄곧 상대를 떠보는 가정형 문장과 우울증적 뉘앙스를 풍기며 소진되어가는 관계를 연장하려 애쓴다.
아사야스는 현실의 고통을 제거하는 해결사가 아니라 현재를 견딜 만큼 편집하는 내담자이자 기억 속을 관람하는 성찰가의 면모를 지닌 채 세상을 바라보는 자다.
여운을 붙잡고 느끼기
'붙잡음의 실패가 주는 소멸의 허무'는 순환적인 리듬에 대한 이해로 확대되며, '소멸하는 존재를 붙잡는 여운'으로 변주된다. 달리 말하면, 아사야스의 세계는 무언가를 벌어지게 하면서 또 반드시 무언가는 무산시키는, 혹은 그 반대의 힘 간의 유착으로 작동하는 곳이다. 차마 볼 수 없던 아사야스의 사정은 인간의 가시적 영역 너머의 내밀한 구석으로 확장된다.
<퍼스널 쇼퍼>에서 잃음을 망각하는 애도의 시간은 잠재된 '그다음'이 아닌 '지금'의 머뭇거림에 해당하는 전회적 축 안의 일이다. 모린의 유예된 애도와 그 절망감은 영매로서의 끌림을 통해 인식하는 실체 없는 감각보다 구체적인 물질로부터의 가시적인 욕망에 집착하도록 만든다. 익히 알려졌듯 아사야스 영화에 만연한 물질주의와 정신적인 미몽 사이의 긴장은 인간의 물리적인 몸과 무의식 영역—사이키델릭과 수면/최면의 몽환성, 영매의 심안과 영혼이 안내하는 세계—사이의 방황과도 같다. 마찬가지로 연속적인 흐름을 중단하고 유예하는 아사야스의 기술적인 질서는 의식의 중단을 통해 회복과 각성을 욕망하는 정신적인 원리와 맥을 이으며 성립된다. 기존의 정신적 질서를 이탈한 감각/느낌의 물질화, 물질화된 허상의 환락은 존재론적 불안과 두려움을 일시적으로 상쇄하는 모순을 통해 심적인 변화의 분위기를 감돌게 한다.
허무와 유예는 잠재성을 위한 시간적 질료이며, 그 시간을 담는 장소로써 영화에 매개된 물질, 곧 영사막과 카메라와 각종 기계 장치들은 이전과 다른 질서의 지각과 느낌을 보여주는 데에 기여한다. <5월 이후>(2012)에서 "내 뒷모습 보지 마"라는 떠남의 선언은 외려 반어적으로 작동한다. 카메라는 이별하는 연인을 관조하는 새 혹은 유령의 육안이 깃든 것처럼 하늘로 치솟아 같은 장소의 다른 인물로 옮겨 다닌다. 카메라는 떠나는 사람, 그를 응시하며 머무는 사람의 뒤편으로 서서히 물러나고, 마지막 순간 스크린 위에 고정되며 되돌아온 사람의 얼굴 앞면으로 이동한다. 비록 이것조차 반쯤은 기억의 잔상에 불과하지만 <5월 이후>는 오직 긴 휴지기를 거친 이후의 잠재적 미래를 대면하기 위한 여정으로서 (작중 인물의 대사를 차용해) '우울한 플랫폼'의 장소성을 띤다. 무언가를 눈으로 볼 수 있게 담는다는 것, 영화의 눈짓이란 당연하지만 그만큼 간절함이 필요한 몸짓이다.
아사야스의 스크린은 볼 수 없는 저 너머를 응시하는 하나의 얼굴로 요약되기에 이른다. <클라우즈 오브 실스 마리아>(2014)에서 작고한 감독 빌렘의 연극을 리메이크하는 중년 배우 마리아(쥘리에트 비노슈)는 미래를 예측하지 못한 과거의 자신과 대면한다. 20년의 세월은 선문답과 아포리즘이 뒤섞인 인물들의 대화 속에서, 상상계의 질서를 활용해 홀연히 모습을 감춘 (연극 속 캐릭터인) 여인을 시지각적 묘사의 형국으로 불러 세운다. 마리아는 골칫거리로 치부했던 허구적 여인의 시간을 살며 긴밀하고 개인적인 감정을 과거에서 비롯된 타인의 기억과 접속하고 재배치한다. 극 중 '현재'는 어딘지 모를 과거에서 비롯되고 언제 끝나는지 알 수 없는 여운을 살아내는 시간이기도 하다.
의사-유령처럼 마리아의 주변부를 맴돌던 외부의 목소리(발렌틴)가 지시하는 익명성의 고통은 보이지 않는 언덕 아래, 스크린의 외화면으로 사라진다. 생사를 가르기 대신 사라짐의 여운을 극대화한 아사야스는 클로즈업된 응시의 눈짓, 이를 담은 초상을 마주한다. <클라우즈 오브 실스 마리아>의 무대는 이를 위해 한 번 더 펼쳐진다. 극의 제한된 시간은 오직 미래를 위해 짜여 있다. 상실의 비통함을 느낄 단 몇 초의 여운조차 사치인 과거의 여인에게 무대의 시간은 혹독하다. 그러나 이 순간, 아사야스는 아주 먼, 어딘지 모를 까마득한 미지를 몇 초간 순회하는 응시의 눈짓을 불러온다. 세트 사이를 가로지르는 마리아의 분주한 걸음은 현장의 스태프와 나누는 짧은 대화, 재킷을 둘러메고 담배에 불을 붙이는 일상적인 행위로 이어진다. 순간순간의 합을 담은 롱테이크의 긴 호흡 속에서 카메라는 문득, 움직임을 멈춘 마리아의 초상을 향해 다가선다(클로즈업). 인물과 카메라의 맞붙은 응시의 순간은 가장 순수하고 광학적인 광경, 곧 느리게 타는 담배 연기, 나지막이 안팎으로 숨을 내쉬는 몸짓, 어딘가를 바라보는 마리아의 단순한 제스처로 뒷받침된다. 스크린은 과거의 어느 순간 혹은 무엇을 응시하는 눈짓으로 명멸하면서, 딱 잘라 말해질 수 없는 미래적 도래를 향한 분열적인 느낌과 상태를 끝없이 읽고 사유하게끔 요구한다.
현실을 직시하고 복원하기
본래의 이미지가 흐려짐으로 인해 외려 맹렬한 형상을 갖추는 광경도 있다. <와스프 네트워크>(2019)의 올가(페넬로페 크루즈)가 상대의 이기심을 눈감아주며 끌어안기 위해 카메라 앞으로 불쑥 다가오는 장면이다 비운과 낭만이 뒤섞인 포옹의 형상은 여인의 고독감으로 위태롭게 지탱될 따름이지만, 일순간 죽음이 연계된 계략과 두 사람을 감시하던 외부인들의 경계심은 터무니없이 누그러진다. "항상 당신을 사랑했어. 항상" 사랑을 읊조리는 목소리는 바로 직전 눈물로 얼룩진 여인의 초상이 남긴 잔상으로 지탱된다. 최면에 빠지듯이, 전선을 타고 장소를 이동한 목소리에 의해 공간적 깊이가 아득해진다는 착각에 빠질 무렵, 이 비현실적 감각은 생업에 시달리는 인물의 토악질과 함께 가차 없이 중단된다. 시리즈 <이마 베프>(2022)에서 영혼의 그림자를 모사하던 미라(알리시아 비칸데르)의 은밀한 일탈과 초월적 제스처가 한순간에 관음증적인 굴욕으로 뒤바뀌던 장면도 떠올려볼 수 있다. 환상의 반대편 얼굴과 대면한 인물들은 복원된 원래의 자리, 다시 말해 더 선명한 현실을 직시하며 깨어난다.
사랑의 선언처럼 응답이 필요 없어 강조되는 사실이 있는가 하면 단지 하나의 응답으로 살아나는 생도 있다. <퍼스널 쇼퍼> 속 저택의 심령은 뿌연 연기 덩어리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희박하게나마 얼굴의 형상을 드리우는 심령과 달리 모린의 최후의 얼굴은 스크린 저 너머로 사라진다. 그녀는 지금 '마음을 괴롭히는 어떤 것'(demon)이자 이를 내쫓을 '그것'은 '그저 나 자신'뿐이라는 예감에 시달리는 중이다. 이제 우리를 대신할 인물의 눈은 깊고 어스름한 어딘가, 마음의 외침을 들여다보기 위해 감긴다. 청신호는 자기 그림자와의 접신을 통해 들려온 짧고 간단한 두드림, 비가시적 세계와 소통하는 외재음이다. 부재한 대상으로부터의 반응이 아닌, 거의 정지에 가까운 포즈 앞으로 영화는 관심사를 이동한다.
거듭 말하건대 아사야스는 규정된 사실을 또 다른 질서로 전복시킨다. 모린은 짧은 탄식과 함께 다시금 눈을 뜬다. 그녀의 '눈 뜸'은 역설적으로 우리의 시야를 백색의 빛으로 뒤덮어버린다(화이트아웃). 빛의 운동은 그녀의 육신을 배회하던 엑토플라즘, 곧 털어내지 못한 불안과 살해된 영혼을 배출한다. 빛의 가림막을 뚫고 생의 순환을 알리는, 탄식 이후 이어진 모린의 숨소리는 가늘지만 분명하다. (앞서 언급했던 마리아의 마지막 제스처와 달리) 숨은 몸짓이라는 가시적 이미지를 더 이상 요구하지 않는다. 원초적 형태로 되돌아온 백화된 스크린에 생동하는 건 "그저 나 자신"이 살아간다는 사실 하나다. 현존하는 대상으로의 이동, 이 움직임 속에서 프로이트의 정언명령은 인용되어 마땅하다.
"살아야 한다. 아무리 슬퍼도 현실을 직시하라. 왜냐하면 네가 사랑하던 그것은 이제 현실 속에 없기 때문이다."(Freud, 1917: 245-6. 김홍중, 2010) 죽고 난 후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던 연인의 말은 빗나간다. 죽음을 딛고 난 뒤 살아갈 누군가의 다음 생이 깨어나야 한다.
지금, 이 앞에 있다는 사실
아사야스 영화에서 '볼 수 없는 무언가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응답은 우울하고 몽롱한 톤 안에서 유지된다. 안개와 구름, 유령의 잔상, 애연가들의 중독증과 환각적인 표정, 영혼이 드나드는 통로로서 신체와 몽롱한 정신 따위를 보여주는 기체-이미지와 그것의 상태 변화를 활용한 기호들은 아사야스의 세계를 순회한다. 예컨대 <클라우즈 오브 실스 마리아>는 머리로 제 꼬리를 문 우로보로스 뱀의 원형 상징과 이것으로 뒷받침되는 구름의 움직임을 극의 기반으로 활용한다. 호수의 수증기가 운무를 형성하듯, 뱀이 골짜기를 지나며 허물을 벗듯, 인고의 시간을 거치며 영원한 회귀를 그리는 생의 연장을 보여준다. 아사야스의 세계에서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증발하고 소멸하려는 기체-이미지를 스크린에 침투시키거나 혹은 탈주하려는 것을 붙잡아 두는 심정과도 같다. 사라져야 하는 것은 외연을 확장하며 고통스럽게 지속된다. 보이는 것은 소유할 수도, 만질 수도 없이 저 멀리 연기처럼 부유할 뿐이다. 허상적인 장치를 빌려 한시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을 붙잡는 자기 슬픔과 고독만이 흘러넘칠 따름이다.
그러나 어떤 형태의 무엇이든, 지나간 대상을 다시금 보려는 이의 절박함은 불가능에 모든 걸 내맡기게도 한다. 아사야스는 26년이 지난 후, 영화 <이마 베프>를 품는 시리즈 <이마 베프>라는 거대한 에필로그를 덧붙인다. 그는 한동안 자신이 끝내버린 영화의 엔딩이 누구의 소유여야 했는가에 대한 근심에 사로잡혔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섣불리 단언할 수 없지만, 영화에서 돌연 사라졌던 '르네'는 아사야스의 현신으로 되돌아온다. 르네(빈센트 맥케인)의 내담을 조명한 해당 시리즈에서 그는 여전히 겁과 두려움에 질려 스스로를 고립시키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을 붙잡아 세울 중요한 사실을 성찰해낸다. "영화는 날 먼 곳으로 떠나게 하지만 사랑은 늘 당신에게로 돌아가게 해." 낭만의 선언이 나른하게 울려 퍼지면 르네의 스크린이자 그가 심연 속에 품고 있던 영혼(이마 베프)이 외부로 빠져나온다. 그 모르게 잠시 곁을 맴돌던 이마 베프는 빛과 어둠이 공명하는 도심 속으로 섞여든다. 그것은 사멸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꿈결이거나 외상 입은 마음, 벗어날 수 없는 어떤 굴레에서 빠져나와 또 어딘가로 유유히 흘러들게 될 것이다. 이 적나라하고 씁쓸한 사실과 동행하는 동안 르네, 그리고 아사야스는 그토록 붙잡고 싶던 무언가를 한 번쯤은 만나 보았을까. 어떤 응답이 이어 붙든, 불가능성에 대한 상념은 '지금 볼 수 있는 무언가'에서 비롯되는 잠재성 안으로 정착하게 된 것 같다.
아사야스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어떠한 깨달음도 섣불리 주지 않는다. 인물들은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고독의 여로를 거닌다. 덮쳐오는 무언가를 향해 자신을 내맡기고 나면 겪어내야 하는 '내'가 우리의 현전에 어김없이 정체를 드리운다. 당연하지만 동시에 애써서 깨닫게 되는 사실, 눈앞의 빛을 끄는 것도 어둠을 부둥켜안는 것도 다름 아닌 당신 스스로이다. 그러나 다음이 보장되지 않은 순간을 딛고 마주한 지금, 풀어지는 긴장과 잠재된 무언가에 대한 '내' 안의 어떤 느낌/끌림은 르네이자 아사야스의 말처럼 "잠시만 머무는 법"이다. 그래서 무심하게 흐르는 시간, 시시각각 상태 변화하는 분위기, 위태롭고 불균질한 영혼마저도 지연되고 번복한다. 이러한 아사야스의 헌신 속에서 한순간에 사라져버리는 사랑도, 한참을 기다려야 나타나는 석연찮은 잔상도, 우리는 제대로 볼 수 있다. 의연하지만 또한 가까스로 허무를 걷어내고 여운을 피워낸 채 하염없이 말을 건네 온,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심연이 우리를 각자의 얼굴 앞으로 데려다 놓았다.
[글 변해빈 영화평론가, limbohb@ccoar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