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 드림' 그때를 기억하고자 하는 의지
'로봇 드림' 그때를 기억하고자 하는 의지
  • 김경수
  • 승인 2024.04.01 11: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애의 종말, 그리고 덕질의 종말"
ⓒ 영화사 진진

때는 1970년대의 뉴욕 이스트빌리지. 도그는 더없이 평범한 하루를 보내는 중이다. 냉장고에 있는 냉동 맥앤치즈를 먹고 난 다음에는 소파에 드러누워 잠들 때까지 TV를 보거나 1인 콘솔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에드워드 호퍼의 회화를 보는 듯한 쓸쓸한 조명 아래서 도그의 무표정이 두드러진다. 그는 우연히 TV에서 외롭냐고 물어보는 광고를 접한다. 그는 맞은편 창문에 사는 소와 기린이 한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보더니 곧장 본인의 친구가 될 로봇을 주문한다. 도그는 로봇을 조립한 뒤에야 처음 집 밖으로 나가며 시내를 둘러보기 시작한다.

파블로 헤르베르의 애니메이션 <로봇 드림>은 도그와 로봇의 멜로드라마다. 외톨이인 도그는 로봇을 구매하자마자 들뜬 마음으로 뉴욕 곳곳을 돌아다니며 데이트를 즐긴다. 도그가 즐겨 듣는 어스 앤 윈드 앤 파이어의 'September'에 따라서 디스코를 춤추는 둘의 얼굴에는 미소가 만개한다. 둘은 여름이 끝날 무렵 뉴욕 외곽의 해변으로 데이트를 한다. 한참 물놀이를 즐기던 로봇이 급작스레 작동을 멈춘다. 도그는 모래사장에 누워 있는 로봇을 고치려 온갖 방법을 쓰지만 실패한다. 설상가상으로 해변이 그다음 해 6월까지 폐쇄된다. 도그는 어떤 수로든 해변에 가려 하지만 가로막힌다. 아직 의식이 깨어 있는 로봇은 도그가 언젠가 자신을 구하러 오기만을 기다리는 중이다.

<로봇 드림>은 도그와 로봇의 사랑을 무성영화의 문법으로 그려낸다. 모든 캐릭터가 아무 대사 없이 몸짓과 감탄사로 소통한다. 캐릭터의 얼굴과 역동적인 몸짓을 강조하는 애니메이션이 무성영화의 문법을 쓰는 일은 드물지 않다. 되려 애니메이션이야말로 무성영화에 더욱 잘 어울린다. 이 영화의 강점은 무성영화를 형식적인 제약으로 쓰는 데에서 비롯한다. 도그와 로봇의 캐릭터 디자인은 웃음과 눈물 등 1차원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 효과적이다. 복잡하고 과잉된 감정선을 그리기에는 어색할 정도로 귀엽다. 영화의 매력은 여기서부터 나온다. 둘의 감정은 아무리 격정적이더라도 단순한 그림체에 의해서 그 감정이 제한된다. 이는 감정의 여백을 남기려는 연출이 아니다.

 

ⓒ 영화사 진진

영화의 캐릭터 디자인은 우리의 일상적 감정을 그려내는 듯하다. 특히, 도그의 얼굴은 항상 외로움에 물들어 있는데도 표정은 더없이 평범하다. 캐릭터의 얼굴이라기에는 과장되지 않은 편이다. 당연히 배우가 그려내는 표정만큼의 섬세하지도 않다. 도그의 얼굴은 보통 사람이 지을 수 있는 만큼의 표정을 벗어나지 않는다. 눈썹을 위아래로 움직이는 등 기초적인 감정 표현에 기반해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짓는 표정에도 격정적 감정이 담길 수 있다는 태도가 여기에 깃든 것이다. 도그와 로봇은 멜로드라마에서 보일 법한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도그는 한 번만 눈물을 흘리지만 그마저도 그 스스로가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할로윈데이에 어린아이가 로봇 분장을 한 채로 등장한 순간 그는 감정이 복받친다. 그는 이윽고 히치콕의 <싸이코>(1962)를 보는 듯한 샤워실로 간다. 그의 눈물이 샤워기 사이로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딱 우리가 평소 우는 만큼만 운다. <로봇 드림>은 감독의 말대로라면 만화책을 넘기는 질감을 살리고자 일부러 평면적인 화면을 유지한다. 감정의 여백을 전달하는 담백한 연출로 오해받을 수 있다.

그러나 영화에 흐르는 감정선은 오히려 보통의 멜로보다 폭발적이다. 이 폭발적인 감정은 화면 너머로 드러난다. 뉴욕의 사운드스케이프, 로봇의 꿈 등 여러 미장센을 통해서 그들의 감정을 풍경에 흩뿌리는 방식으로 말이다.

<로봇 드림>은 왜 도그를 보통의 사람을 그리고자 했을까. 도그의 캐릭터 디자인에서 눈에 띄는 점은 그의 통통한 뱃살이다. 직업도 없고, 로봇 없이는 이동을 전혀 안 하는 그의 생활은 히키코모리를 생각나게끔 한다. 도그는 마치 어딘가에 유폐된 존재로 보인다. 도그에게 가족이 있는지, 그가 어떤 일을 하는지, 로봇을 어떤 돈으로 구매하는지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아무리 원작의 동화적인 정서를 빌렸더라도 생활인으로의 도그를 전혀 그리지 않는 것은 이상하다. 그래서 도그와 로봇의 만남은 종종 상상 친구와의 만남으로 보이기도 한다. 도그의 꿈에 등장하며 오마주된 <스노우맨>은 어린아이의 상상 친구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동화다. 이와 같은 오마주는 충분히 로봇이 도그의 상상 친구로 보이도록 만드는 알리바이가 된다. 로봇을 상상 친구로 볼 만한 증거는 여기저기에 널려 있다. 특히 로봇도 해변에 있을 때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기에 도그의 환상에 머물러 있는 듯한 상상에 가까운 존재로 그려진다.

 

ⓒ 영화사 진진

<로봇 드림>을 상상친구 이야기로만 보는 일은 일차원적인데, 이는 도그가 사는 공간과 이어져 있는 듯하다. 감독은 원작 그래픽노블을 각색할 때, 두 캐릭터가 머무르는 시공간을 본인이 유년기를 보낸 1970년대 뉴욕으로 배경으로 전환했다. 역사적인 시공간이 부재한 동화에 가까운 원작과 달리 이 영화에는 로봇과 함께 본 <오즈의 마법사>(1942) 비디오에 적힌 킴스비디오 등 당시에 막 탄생하기 시작한 하위문화를 상징하는 기호가 가득하다. 도그에게 뉴욕은 소비와 하위문화가 막 생겨난 문화적인 시공간으로 남아 있다. 로봇은 상품에 불과하다. 도그가 로봇과 헤어진 뒤에 또 다른 로봇을 사는 것을 생각해보았을 때 더욱 그러하다. 다만 뉴욕이라는 세계와 그곳의 풍경을 알려준 존재이기도 하다. 또한 로봇과 함께하기에 1970년대의 뉴욕의 시끌벅적한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

도그는 로봇과 사랑이 점차 깊어질 즈음 <오즈의 마법사>로 문화적 기호를 공유하기 시작한다. 이는 영화 곳곳에서 드러난 오마주로 치환된다. 감독은 둘의 일상적 감정을 영화와 포갠다. 포스터에 등장하는 <원스>(2011)에 대한 오마주에서부터 이를 알 수 있다. 로봇과 도그가 처음으로 헤어지는 순간, 로봇이 해변에 쓰러진 도그의 몸을 지탱하고 있는 자세는 무르나우의 <선라이즈>(1927)의 오마주로 보인다. 해롤드 로이드가 사랑한 뉴욕의 풍경, <셜록 2세>(1924)와 같은 제 4의 벽도 마찬가지다. 로봇과 보내는 일상은 일상에 불과할지라도 영화적 순간으로 물들어가며 관객의 마음에 서서히 스며든다. <오즈의 마법사>라든지 <싸이코>, <그렘린>(1984) 등 감독이 사랑하는 영화로 덧칠된다. 로봇 또한 꿈에서 도그를 회상할 때, 도그에 대한 그리움보다 도그가 알려준 듯한 문화적 레퍼런스에 기반해 도그를 회상한다. <오즈의 마법사>를 오마주하며 둘이 보았을 법한 탭댄스를 삽입한 것도 그러하다.

다만, 도그과 로봇 둘 다 서로의 관계가 끝난 다음에는 오리나 새 로봇을 만나더라도 이런 영화적인 경험을 누구와도 공유하지 못한다. 영화의 쓸쓸함은 거기서부터 생긴다. 로봇은 기본적으로 상품이다. 하위문화로 인해서 연애와 덕질은 하나가 되며 연애의 종말은 곧 덕질의 종말이 된다. <로봇 드림>은 작품을 통해서만 다른 세계를 경험할 수밖에 없는 덕후의 이야기가 된다.

 

ⓒ 영화사 진진
ⓒ 영화사 진진

로봇과 도그의 관계는 이중적이다. 그 이중성은 로봇과 도그가 철조망 때문에 서로 보지 못한다는 데에서 생긴다. 둘이 연결되지 못한다는 상황은 COVID-19 이후 언택트와 비슷해 보인다. 로봇이 꿈으로만 도그에게 접근하는 것도, 도그가 로봇을 멀찍이서 보는 것도 그러하다. 쌍둥이 빌딩 뒤에 솟아 있는 9.11 이전의 뉴욕에 대한 개인적인 노스탤지어도 여기에 거든다. 영화의 엔딩은 둘의 만남이 언택트라는 것을 명확히 한다. 로봇은 다른 이와의 만남으로 라디오가 몸을 대체한 새로운 몸을 지니고 다시 태어난다. 그는 건물 옥상에서 우연히 도그를 마주하나 그에게 다가가지 않는 대신에 <셉템버>를 튼다. 창문 아래를 내려다보더니 이윽고 춤을 추기 시작하고, 창문 아래에 있는 도그도 춤을 추기 시작한다. 이윽고 분할화면에 둘이 포착된다. 둘은 처음 만날 때 춘 춤을 춘다. 이때 둘이 뻗은 손은 분할화면의 경계에 걸쳐 있지만 상상적으로 이어진다. 결국 둘은 이어지지 못하고 서로의 새 연인에게 간다.

감독은 이 상상적인 만남, 과거를 잠시나마 소환한다. 도그와 로봇이 같은 것을 덕질할 때의 그 기쁨은 이제 각자의 것이 되었다. 줌과 스트리밍, 유튜브 등 파편화된 콘텐츠 채널 등으로 각자가 다른 화면에 있는 세계다. 이제 둘은 다른 것을 소비해서다. 감독은 1970년대 뉴욕 풍경을 빌려와서 9.11 이전의 세계를 잠시나마 되돌아보도록 한다. 다만, 그 시대로 되돌아가려고 하지 않는다. 로봇의 슬픈 표정은 청춘의 표정이기도 하고, 모두가 같은 문화를 공유하던 시기에 대한 그리움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사랑했던 모든 하위문화에 바치는 애도이기도 하다. <로봇 드림>은 우리가 상상에서나마 하나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는 상상력을 내포한다. 바디우가 『사랑예찬』에서 말하듯 사랑은 계속 미래로 나아가는 자본주의의 규칙에서 벗어나, 코뮤니즘을 가능하게끔 하는 연극이자 공동체이니까. <로봇 드림>의 사랑은 그 성숙함을 기억하고자 하는 의지, 그리고 그것을 새로운 곳에서 만들려 하는 의지로 가득 차 있다.

<글 김경수 영화평론가, rohmereric123@ccoart.com>

 

ⓒ 영화사 진진

로봇 드림
Robot Dreams
감독
파블로 베르헤르
Pablo Berger

 

배급 영화사 진진
제작연도 2023
상영시간 103분
등급 전체 관람가
개봉 2024.03.13.

김경수
김경수
 어릴 적에는 영화와는 거리가 먼 싸구려 이미지를 접하고 살았다. 인터넷 밈부터 스타크래프트 유즈맵 등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모든 것을 기억하되 동시에 부끄러워하는 중이다. 코아르에 연재 중인 『싸구려 이미지의 시대』는 그 기록이다. 해로운 이미지를 탐하는 습성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영화와 인터넷 밈을 중심으로 매체를 횡단하는 비평을 쓰는 중이다. 어울리지 않게 소설도 사랑한 나머지 문학과 영화의 상호성을 탐구하기도 한다. 인터넷에서의 이미지가 하나하나의 생명이라는 생각에 따라 생태학과 인류세 관련된 공부도 하는 중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