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4일 오후 4시 30분경. 도쿄도 메구로구 도립대학역 인근 메구로퍼시몬홀.
심사위원석에 있었다. 올해로 78회를 맞는 마이니치영화콩쿠르 시상식. 배우부문을 맡아 흐뭇한 기분으로 수상의 영광을 안은 일곱 명의 연기상 수상자를 지켜보고 최우수작품상에 해당하는 일본영화대상 수상작 안내멘트가 흐르고 있을 즈음 그가 눈에 들어왔다.
트레이드마크인 검은 뿔테안경에 콧수염, 살짝 긴 느낌의 헤어스타일의 사내가 이그제큐티브 프로듀서 하라다 미츠요와 함께 예의 무덤덤한 표정으로 수상소감을 말하기 시작한다. 일본어에서 말의 의미를 강조할 때 사용되는 ― 다소 거북하지만 ― 직역하면 "똥"이 되는 단어가 등장했다. "쿠소(kuso)"말 그대로 한자 "변"의 일본어 훈독. 용례를 들어볼까. 예컨대 "열심히"를 의미하는 "마지메"라는 형용사를 강조하고 싶을 때 앞에 붙여 "쿠소마지메"라고 하면 "완전 열심히"정도의 의미가 된다. 스피치에서는 이런 이른바 'k-워드'가 내내 등장하는 언어유희가 펼쳐졌고 사람들은 박장대소했다. 그도 그럴 것이, 수상작이 화장실을 소재로 한 영화니까. (게다가 본인이 털어놓기를 쿠로키 하루 배우를 캐스팅하면서 바뀌었지만 기획단계의 타이틀이 무려 <에도의 똥>이었단다) 여간한 말장난에는 크게 반응하지 않는 편인 필자조차 웃음보가 터졌다. 감독의 어떤 주제를 말할 때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 한때 사범대(국립요코하마대학 교육학부)를 다닌 이력을 떠올리게 하는 예의 차분하면서도 조곤조곤한 말투와 "쿠소"가 빚어내는 묘한 불협화음 때문이었다.
여덟 번째 장편상업영화 <멍텅구리 ― 상처 입은 천사>(1998)로 3회를 맞으며 아직 걸음마를 하고 있던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은 이래, <의리 없는 전쟁>(2000), <얼굴>(2000), <보쿤치 ― 내가 사는 곳>(2002), <클럽 진주군>(2004), <카멜레온>(2008), 그리고 <도시의 이방인>(2010)까지 12년 동안 여섯 번이나 초청되며 현대일본영화를 대표하는 거장으로 자리매김한 감독.
이번 마이니치영화콩쿠르 수상작은 팬데믹이 잦아들기만을 기다린 듯 <동생과 안드로이드와 나>(2022)와 <겨울장미>(2022)에 이어 몇 달 간격으로 쏟아낸 세 편의 신작 중 가장 최근(2023년 4월)에 공개된 <오키쿠와 세계>였다. 필자가 이 작품의 존재를 알게 된 건 만 1년 전. 시니어프로듀서를 맡고 있던 다카사키영화제의 일본영화 베스트 셀랙션에 35밀리 필름으로 상영된 데뷔작 <패주겠어>(1989)와 <겨울장미>의 GV를 하러 온 그를 만났을 때다. "처음으로 전주국제영화제에 초청돼 갈 예정인데, 혹시 거기서 다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하는 말과 함께 건네받은 한 부의 팸플릿.
"흑백영화네요. 처음 만드시는 거 아닌가요?"
"그런 건 아닌데, 아무튼 지금까지 제 영화들과는 또 다를 겁니다."
멋쩍게 웃으며 얼버무리는 그의 얼굴이 묘한 홍조를 띠었다. 이후 작품을 보자마자 그 의미를 알 수 있었지만.
내용은 이렇다. 19세기 에도시대, 몰락한 무사의 외동딸 오키쿠(쿠로키 하루 분)는 아버지 겐베에(사토 코이치 분)를 결투에서 잃고 겨우 목숨을 건지지만 목소리를 잃는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인생에 에도의 변소를 돌며 인분을 사고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야스케(이케마츠 소스케 분)와 츄지(칸 이치로 분)가 끼어든다. 아직'세계'라는 단어조차 없었던 시절, 가장 낮은 곳에서 수줍게 사랑하고 씩씩하게 살아가며 삶을 꽃피우는 세 청춘. 말할 수 없고 쓰는 법도 모르지만 사랑하는 이에게 언젠가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는 이들은 희망을 잃지 않고 앞을 향해 나아간다.
홍상현
주로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서 한국 관객을 만나 오시다 이번 신작으로 처음 전주에 오셨습니다.
사카모토 준지
부산영화제는 초창기 때 주로 불러주셨는데, 실은 그전에 서울독립영화제에 초청됐던 게 첫 한국행이지만요. 그렇다 하더라도 부산에서의 추억은 정말 특별해요. 일본영화가 해금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기 때문에 이전까지 접할 기회가 별로 없었던 한국 관객 여러분들께 뜨거운 환영을 받았죠.
전주국제영화제의 경우, 그간 한국의 국제영화제와는 조금 멀어져 있던 상황이었고, 그나마 예전에 불러주셨을 때는 일정이 맞지 않아 직접 참여하지 못했던 까닭에 이번 참가가 실로 감개무량합니다. 특히 거리에서 고도의 정취가 많이 느껴지는데 인상적이네요. 그리고 한국 관객 여러분께서 이 영화를 어떻게 봐주실지 다소 불안한 것도 사실입니다. (쑥스러운 웃음)
홍상현
어느새 한국영화계와 인연을 맺은 지 30년이 되어가시는데 최근의 한국영화의 발전상을 보시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사카모토 준지
오락에 필요한 요소, 사람의 이야기, 각본상으로 보면 의표, 폭력묘사, 유머라는 필요한 요점이 다 갖춰져 있고, 사회적인 주제를 포함시키더라도 엔터테인먼트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한국영화의 강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에서는 역사물이라면 아무래도 고령층을 타겟으로 하는 느낌이라 젊은 사람들에게 어필하기 어렵거든요. 또한 산업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한국에서는 사회물이 아니더라도 현재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들을 보기 위해 영화관을 찾는 팬층이 대단히 두텁다는 게 느껴집니다. 영화인 여러분께서 오랜 시간에 걸쳐 노력해 오신 결과겠지요.
홍상현
<세계의 오키쿠>는 직전 작품인 <겨울장미>와 무척 다른 스타일의 작품 같은데요. 혹시 어떤 계기라도 있으셨던 건가요? (웃음)
사카모토 준지
한국 감독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일본 감독들은 자기가 어느 정도 잘하는 분야에서 점점 작품의 퀄리티를 올려가는 사람이 많은데, 저 같은 경우는 어떤 색깔을 정해놓고 싶지 않거든요. '사카모토는 이런 스타일의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있고, 무엇보다 전작 비슷한 색조의 영화를 찍는 게 재미없더라고요. 항상 신선하고 싶으니까요. 해서, 다소 어중간하다는 평가를 받을지 모르는 부담을 감수하고라도 특정한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작업에 스릴을 느낍니다. (웃음) 이게 감독으로서의 제 삶의 방식이고 다행스럽게도 여태껏 이런 저를 여러분께서 받아주셨기에 영화를 만들고 있지요. 그러니 결국 장르를 바꾼다고 해도 결국 제 뜻에 따라 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은 가지고 있다고 봐야겠죠.
홍상현
게다가 첫 오리지널 각본에 의한 시대극이라는 점이 화제를 모으고 있는데요. 작품을 구상하시게 된 계기가 뭐였나요.
사카모토 준지
제 영화에서는 미술을 담당하고 다른 감독들과도 많은 작품을 함께했던 하라다 미츠오라는 미술감독이 있는데, 그가 4년 전 큰 병을 앓고 팬데믹 국면을 맞으면서 자신의 삶에 대해 돌아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뭔가 사회성 있는 주제를 가지고 직접 프로듀싱해서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면서 주제는 순환경제, 국가 지속가능발전 목표(SDGs, Sustainable Development Goals) 같은 걸로 하면 어떻겠냐고 그러더라고요. 저 자신 번드르르한 말이나 계몽적인 소리들을 늘어놓는 건 질색이고 자신도 없었는데 막상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이거라면 나도 할 만하겠는데'하는 생각이 들었죠. 에도시대를 예로 들면 분뇨와 음식의 순환경제가 대표적인 거 아닙니까. 하지만 어떤 사극도 이런 내용을 진지하게 다룬 사례는 없다 보니 뭔가 신선하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또, 이런 소재를 건드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당시 가장 낮은 곳에서 살아가던 젊은이들을 주인공으로 설정해 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다만, 문제는 제작비였는데요. 3년 전 하라다가 사비를 털어 일단 15분짜리 단편을 찍고 사람들에게 그걸 보여주면서 투자를 받아 보려고 했는데 잘 안됐어요. 그래서 다시 한 해가 지나 한 번 더 하라다가 내준 제작비로 15분을 찍어놓고 투자자를 구하러 다녔죠. 그러다 영화계와 전혀 무관한 사람이 필요한 나머지 금액을 내줘서 최종적으로 60분 분량을 더 찍었습니다. 다만, 어차피 단편으로 두 편을 찍어두었기 때문에 나머지 60분에서도 균일하게 챕터를 나눌 수밖에 없더라고요. 그래서 총 90분짜리 영화가 되었죠.
홍상현
조금 전 언급하신 '순환경제'라는 주제가 무척 흥미롭게 느껴지는데요. 그 부분과 관련해서 조금 더 설명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사카모토 준지
3년이라는 시간을 들여서 영화를 만들어가던 중에 사람들의 생활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걸 목도했습니다. TV를 켜면 온통 팬데믹에 관한 이야기가 가득한 가운데 식생활을 비롯한 일상의 여러 모습에도 변화가 일어나더군요. 우버이츠(Uber Eats)같은 배달 플랫폼의 보편화되면서 일회용 용기의 사용도 훨씬 늘어났죠. 특히나 다들 집에서 주로 생활을 하게 되니 이런 변화는 가속화될 수밖에 없었고요.
현실이 이럴수록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순환되던 시절의 이야기에 더 주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울러 저 역시 영화를 만들면서 낭비를 줄이거나 환경을 생각해왔는지 등에 대해 반문해보기도 했습니다.
홍상현
<오키쿠와 세계>에서 가장 의미 깊은 매개물로 등장하는 게 '똥'인데요. 하필이면 이걸 작품의 주제와 직결되도록 설정하신 이유는 뭔지요.
사카모토 준지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자연스럽게 개인적인 이야기를 꺼낼 수밖에 없겠는데, 실은 예전부터 분뇨를 퍼내서 농촌에 전하던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었어요. 요즘 젊은이들은 잘 모르시겠지만 예전엔 그런 일을 하시는 분들이 꽤 계셨거든요. 사람들이 가장 피하는 일을 굳이 생계로 삼고 있는 그들에게 시선이 향하게 되었죠. 다만, 영화감독으로서 앞서 이야기한 순환경제의 사이클을 보여주기 보다 그 '사람들' 자체에 주목하고 싶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청소차를 타고 쓰레기를 수거하시는 분들이 계시듯 에도시대에도 모두들 꺼리지만 결국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일을 묵묵히 떠맡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전제에서 시작되는 이야기. 심플하지 않나요? (웃음)
홍상현
그렇군요. (웃음) 여기서 화제를 다시 바꿔 보면, 작품에서 시간적 배경이 주로 늦봄이나 늦가을 등 계절이 바뀌기 직전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하게 되더라고요.
사카모토 준지
실은 꽤 세세한 구분이 필요했는데요. 분뇨가 필요한 게 바로 농번기입니다. 당시는 농경사회라 계절의 의미도 지금과 달랐죠. 아울러, 분뇨 그 자체도 순환의 사이클을 형성할 수밖에 없었고요. 이를테면 농번기에 사용된 후에 겨울이 오기 전에 발효를 시켜서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별도로 모아두는 일도 있었으니까.
홍상현
그럼 이제 작품의 내용으로 좀 더 깊이 들어가 볼까요?
<오키쿠와 세계>에서는 그 자체로 시대의 흐름과 변화를 상징하는 인물이 많이 등장합니다. 예컨대 몰락한 봉건계급을 상징하는 겐베에나 공동주택의 서민들이 그들인데요. 다만, 퇴비 상인인 츄지와 야스케는 어떤 그룹에도 속하지 않고 그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이야기를 전개하는 느낌이더라고요.
사카모토 준지
자연스럽게 각본이 그렇게 된 것 같은데요. 요컨대 몰락한 무사와 공동주택에서만 살 수 있는 사람들, 냄새가 난다지만 결국 없이는 살 수 없는 거름을 나르는 젊은이 등, 같은 서민이라고 해도 다양한 부류가 존재한다는 거죠. 일종의 색깔구분이라고 할까. 낮은 계층 가운에서도 가난의 모습은 다양할 수 있잖아요. 당연하지만 사회의 저변으로 시선을 돌리더라도 그곳에 계신 분들을 하나로 뭉뚱그릴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작품 속에서 그려지는 공동주택의 인간군상도 바로 이런 시각에 기초해있죠. 노름이나 하는 야쿠자가 있는가 하면 막일꾼이나 목수, 수리공 등이 등장시켰듯이. 덧붙여서 에도시대의 일본은 자원이 희소하고 화석연료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뭐든 함부로 버릴 수가 없었는데요. 이 인물들은 그런 당시 사회상을 반영하기도 합니다.
홍상현
전반적으로 흑백 톤을 유지하다 극적인 전기를 맞는 순간에 컬러로 전환되는 표현도 무척 인상 깊었습니다.
사카모토 준지
시종일관 흑백으로 통일했다면 그건 또 그거대로 별 위화감 없이 볼 수 있었겠죠. 하지만 시간적 배경이 에도시대라는 것까지 고려할 때 전편을 흑백으로 만들어놓으면 결국 그간 제가 봐 왔던 선배들의 시대극 이미지와 맞물려 버리는 거 아닐까 싶더라고요. 특히 젊은 관객들에게 '옛날영화' 같은 인상을 주는 게 싫었고, 한순간 컬러화면을 보여줌으로써 관객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효과 또한 기대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에도시대부터 이미 실제 모델이 존재했던 순환경제를 현재에서 다시 되살려 볼 수 없을까하는, 오늘과 이어지는 이야기가 작품에 담겨있다는 점을 관객 여러분께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홍상현
위기에서 목숨은 건졌지만 목소리를 잃은 오키쿠는 급격한 캐릭터의 변화를 보여줍니다. 단지 '세컨드 찬스'에 의한 심경변화라는 것 외에도 여러 가지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요.
사카모토 준지
오키쿠는 목소리를 잃음으로써 다른 커뮤니케이션의 방법을 접하게 되죠. 자신의 캐릭터를 보여주는 '소리'를 잃었는데, 에도시대에는 수화조차 아직 태어나지 않은 환경이었어요. 일단 외부 출입을 끊고 집에서 두문불출하다 다가오는 누군가를 통해 조금씩 새로운 세계로 들어서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여기서 '새로운 세계'란 계급을 뛰어넘은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고요.
홍상현
방금 언급하시기도 했지만 극 중에서 '세계'라는 단어가 대단히 중요하게 사용되는데요.
사카모토 준지
극중에서 "세계"라는 처음 단어를 언급하는 겐베에는 조정에서 회계를 담당하는 부서에 있었죠. 당시는 막부 말기로, 미국과 영국이 개국하라고 다그칠 무렵이었던지라 당연히 그 개념을 오늘날과 동일한 의미로 인식하고 있었을 겁니다. 쇄국 중이던 일본이 세계를 바라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암시이기도 하고요. 따라서 그 "세계"라는 말을 변소에서 분뇨를 퍼내던 젊은이에게 세대와 입장을 초월해 전하는 장면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할 겁니다.
또한 이 "세계"는 오키쿠를 통해서 지정학적인 "세계" 외에 "세상"을 가리키는 의미와도 이어집니다. 오늘 인터뷰에서 제가 되풀이해 언급하고 있는 순환형사회에서 "세계"는 거름이 된 분뇨를 통해 결국 땅을 매개로 다시 모두를 묶어주지요. 결국 모든 인간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건데요. 제가 이런 발상을 하게 된 계기는 팬데믹이었습니다. 코로나19는 감염병이라는 비극을 통해 한 나라만이 아니라 지구적인 차원의 위기감을 인류에게 심어줬지요. 사람들은 원했든 아니든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계"라는 개념에 대해 목소리를 잃는 개인적 비극을 겪은 후 제대로 인식하게 되고, 서당으로 돌아가 다음세대에게 전하게 되는 오키쿠의 모습도 같은 함의를 지니죠. 역설적으로 코로나19가 없었다면 "세계"라는 제목도 생각할 수 없었을 것 같네요.
홍상현
이케마츠 소스케 배우는 역시 실망시키지 않는 열연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그의 캐스팅을 염두고 두고 계셨나요? 촬영 중에 어떤 디렉션을 하셨는지도 궁금합니다.
사카모토 준지
하라다 미츠오의 기획으로 제대로 된 개런티도 지불할 수 없고, 장편영화로 완성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쿠로키 하루, 칸 이치로, 이케마츠 소스케 세 배우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이 세 사람이라면 우리의 기획의도를 이해해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저와 하라다, 두 사람과 다른 작품들을 통해서도 만났던 익숙한 배우들이기도 했고요. 그래서 시대극이고, 장편을 만들 제작비가 없기 때문에 우선은 단편부터 만들어보기로 했다는 취지도 솔직하게 털어놓으면서 함께해줄 수 없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일단 배우들은 모두 오케이를 했는데 소속사 중에서는 플랜 자체가 워낙 막연하니까 살짝 당황스러워하는 경우도 있더군요. (웃음) 결국에는 다들 오히려 응원해주셨지만.
다만, 배우들의 연기력과 메시지전달력에 대해서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아울러 칸 이치로 배우와 이케마츠 소스케 배우 소속사의 경우, 아무래도 매니지먼트를 맡은 아티스트들의 이미지에 민감하기 때문에 변소서 분뇨를 퍼내는 장면을 수차례 연기해야 하는 배역을 부담스러워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그냥 연기자들의 소신을 믿었어요.
특히 이케마츠 배우의 경우, 할리우드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2004)의 아역부터 연기활동을 시작해서 나이에 비해 상당히 긴 경력을 가지고 있는 까닭에 평소부터 일본영화의 문제에 대해 무겁게 인식하고 있는데요. 이번 <오키쿠와 세계>의 출연제안을 받고는 감사하게도 '이번 기회를 놓치면 두 번 다시 이런 재미있는 역할을 맡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주셨다더군요. (웃음)
홍상현
츄지 역의 칸 이치로 배우는 이번 작품으로 배우인생의 전기를 맞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촬영을 하면서 힘들어하지는 않던가요? (웃음)
사카모토 준지
그가 맡은 역할은 허무주의적인 태도에서 시작됩니다. 그렇게 '어차피 난 안 돼'라든가, '더 이상 뭘 기대할 수 있겠어'같은 식으로 생각하던 젊은이가 우연히 야스케를 만나면서 조금씩 생각을 바꿔가다 궁극에 있어서는 읽고 쓰는 것까지 배우게 되죠.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초기에 니힐리스트 분위기를 제대로 내줘야 한다는 건데, 칸 이치로 배우 본인의 실제 캐릭터와도 어느 정도 맞물리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기대한 만큼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홍상현
타이틀 롤인 오키쿠의 역할창조 과정에 대해 들려주시겠습니까.
사카모토 준지
쿠로키 배우로서는 목소리를 잃고 나서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하는 연기를 어떻게 보여줄지가 가장 힘들었다고 하는데 그건 역으로 가장 보람을 느꼈다는 반증이기도 하겠죠? 개연성 면에서도 그렇거니와 전례가 없는 인물이기도 했고요. 이런 배역을 그 세대의 젊은 여배우가 해냈다는 건 대단한 일입니다. 갑자기 시대극에서, 저 정도로 완성도 높은 연기를 보여주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으니까요. 아울러, 전통의상을 입고 보여주는 예법 등 다시 말해 몸의 움직임 같은 건 제가 디테일을 지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녀가 알아서 연기한 거예요. 스스로 철저한 학습과 연습을 통해 준비했던 거죠.
홍상현
그밖에도 쿠로키, 칸, 이케마츠 세 배우의 케미스트리가 무척 좋은데요.
사카모토 준지
칸 배우와 이케마츠 배우는 아마 따로 소통을 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다만, 촬영 당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식사나 술을 함께 하면서 교류에 깊이를 더하는 건 일체 불가능했어요. 그러니 촬영장에서 모든 교류가 이루어졌을 거라고 보는데요. 저로서는 오히려 그래서 더 좋지 않았을까 합니다. 평상복 차림으로 일상적인 관계를 구성한 게 아니라, 의상을 갈아입고 각자 맡은 배역에 몰입한 상태에서 만나 관계를 설정해 간 거니까요.
비슷한 사례 중에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쿠바에서 촬영한 <에르네스토>(2017)라는 영화를 꼽고 싶습니다. 오다기리 조 배우가 주연을 맡았는데 극중에서 주인공이 쿠바 친구들과 함께하는 장면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촬영 전에 그들과 토론이라도 해 보면 어떻겠느냐'고 했더니 오히려 '연기를 통해 교류하고 싶다'는 거예요. 헌데 결과가 꽤 만족스러웠습니다. 그런 경험에 비추어 이번에도 별문제가 없으리라는 예상은 이미 했죠.
홍상현
촬영하면서 잊을 수 없는 에피소드도 많았을 것 같은데요.
사카모토 준지
마스크를 쓰고, 상시적으로 소독하고, 단체로 식사를 하는 게 금지된 것 말고도 일반적인 영화제작의 방식 전반이 재고되었기 때문에 다들 스트레스가 심했을 겁니다. 게다가 지난해 겨우 투자자가 나타났다 하더라도 대단히 빠듯한 예산 범위 안에서 촬영 일수도 12일이 전부였거든요. 단편은 각각 하루씩, 나머지 60분 분량을 열흘에 걸쳐서. 경제적으로나, 코로나19라는 환경적으로나, 여러 가지로 극복해야 할 어려움이 많았던 현장이지만 그렇다고 그런 어려움이 작품의 완성도에서 드러나면 안 되니까 다함께 지혜를 모아 많은 문제를 해결해 나갔습니다. 촬영 당시 제 나이가 예순넷, 촬영감독은 예순다섯, 조명감독이 예순셋, 그리고 녹음기사가 일흔이었는데요. 다들 이 나이가 되도록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라 가능했던 거 아닐까 싶습니다. (웃음)
홍상현
차기작 계획은 있으신가요.
사카모토 준지
일단은 시납시스를 써 놓은 상태고, 전주국제영화제가 끝나고 나면 본격적으로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갈 참인데요. 제 오리지널 작품입니다. 시나리오를 쓸 때 저는 일단 구상하는 영화가 지금까지 만들어 온 것들과 다른지, 현재 제 관심사가 무엇인지에 대한 자문과 더불어 어떤 배우와 작업을 하고 싶은지를 우선적으로 생각하거든요. 그리고는 그 배우에게 어떤 이야기가 가장 어울릴지 고민하고요. 덧붙여서 저는 제가 만든 작품의 스토리가 재미있었다는 말보다 출연한 배우에게 어떤 식의 강렬한 인상을 받았는지에 대해 듣는 게 더 기뻐요.
"<오키쿠와 세계는> 장르상으로 보면 뉴웨이브 시대극이고 똥 범벅이지만 그 안에서 아름다운 젊은이들이 등장해 사랑과 우정도 키워나가는 내용의 영화입니다. 그간 제 필모그래피를 보면 절망적인 결말을 맞는 작품들도 꽤 있었는데 이번엔 아무래도 환경자체가 코로나19라는 때문에 충분히 어려웠다 보니 엔딩크레디트가 올라갈 무렵 객석에 전해질 메시지는, 왠지 직접 말하기 부끄럽지만 '러브 & 호프'로 했어요. (웃음) 오늘날 일본은 아이들도 나라도 빈곤합니다. 하루 한 끼밖에 먹을 수 없는 아이들도 있고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아르바이트로 청춘을 보내죠. 그래도 아무쪼록 이 영화에 등장하는 츄지와 야스케의,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서 살아가면서도 기죽지 않는 모습을 주목해줬으면 좋겠어요.
한국 땅에 처음 발을 디딘지 벌써 수십 년 전이지만 여전히 한국영화에도, 한국이라는 나라 자체에도 흥미를 느끼고, 저 혼자라도 와서 영화를, 그것도 한국과 일본의 캐스트가 함께 출연하는 영화를 찍고 싶다는 꿈 또한 변함없습니다. 나라와 나라 간의 관계가 어찌 되든, 제 스스로는 한국 분들과 제 분야에서 교류를 이어가고 싶어요.
<오키쿠와 세계>는 오직 저만이 만들 수 있고, 일본영화계라는 환경에서만 태어날 수 있는 다소 독특한 작품 아닐까 합니다. 한편으로 어쩌면 한국관객 여러분께서 신선하게 받아들여주실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드는데요. 물론 일본영화계에서도 점점 만들기 어려워지고 도전한다 치더라도 심할 경우 사비를 털어 할 수밖에 없는 형태이지만요. 그래도 부디 '힘든 중에도 의미 있었던 한 걸음'으로 따듯하게 바라봐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실제로 있었던 고 김대중 대통령 납치사건을 모티브로 김갑수 배우를 주인공인 중앙정보부 요원 김차운 역으로 캐스팅해 화제를 모았던 <케이티>(2002) 이후 <클럽 진주군>, <다마모에>(2007), <어둠의 아이들>(2008) 같은 대표작들이 국내에서 개봉, 관객과 평단의 호평 받았던 이력을 떠올리며 전망을 낙관하고 있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마이니치영화콩쿠르 시상식이 끝난 직후 백스테이지에서 재회한 사카모토 감독이 국내개봉 소식을 전해왔다.
"한국에 갈 때면 매번 들뜨는데 이번에는 이런저런 이벤트도 계획되고 있는 것 같아 더욱 기쁘다"는 말을 하면서도 역시나 평소와 다름없던 담담한 어조. 다시 한 번 크게 웃었다. 부디 한국의 일반개봉관에서 15년 만에 이루어지는 한국 관객들과의 재회가 영화처럼 유쾌하고 따듯하기를 빈다.
[글 홍상현 영화평론가, krpopper@ccoart.com]
정치학과 영상예술학 두 분야의 학위를 소지. 인문사회과학과 영화이론을 넘나드는 전문적 식견으로 한일 양국 매체에 분석기사를 쓴다. 파리경제대 토마 피케티와 『21세기 자본』 프로젝트를 진행한 도쿄대 연구실 출신.
프로듀서를 맡은 장편 다큐멘터리영화 <포 디 아일랜더스>는 2008년 제주영화제 개막작이었다.
2013년부터 월간 《게이자이》에서 담당하는 경제평론지면이 에히메대 와다 제미나르의 교재로 쓰인다. 국제영화비평가연맹(FIPRESCI) 지부인 일본영화펜클럽 회원. 『마르크스는 처음입니다만』 등 다수의 스테디셀러를 소개해온 번역가로도 유명하다.
일본국제교류기금이 선정하는 “세계의 영화인 7인” 중 1인이며 일본 TBS(채널 6) 주최 디지콘 6 아시아 심사위원, 《마이니치신문》 영화웹진 《히토시네마》 필진 및 마이니치영화콩쿠르 심사위원, 다카사키영화제 시니어 프로듀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어드바이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