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일드 투어>(2019)의 중반부, 우메는 이전에는 볼 수 없던 복장(YCAM의 로고가 가슴팍에 박혀 있는 야구복 상의다)을 한 채로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고 말한다. "나랑 같이 DNA 채취하러 가자." 다큐멘터리의 관찰자 시점에서 흘러가는 듯 보였던 영화는 이때 처음으로 정면 얼굴을 비추며, 스크린 너머의 우리에게 직접 말을 건네며 일종의 선언을 한다. 이것은 앞서 보인 바 있는 인터뷰의 형식과는 다르다. DNA 워크숍의 진행자인 대학생 우메와 참가자인 슌과 다케가 자신을 소개하는 영상에서 인터뷰의 요청자는 항상 카메라의 뒤편에 있으며, 프레임 속 인터뷰이들은 카메라 뒤편의 인터뷰어를 상정하고 발화한다. 여기서 카메라를 들고 있는 자는 인터뷰어로서 프레임 속 존재들에게 적극적으로 혹은 정서적으로 개입하고 유대하기 때문에 시네마 베리테의 참여성을 경유한다.
하지만 우메의 정면 얼굴은 다른 의미에서 참여적이다. 그 정면 얼굴과 "나랑 같이 ~하자"라는 권유 내지 요청의 발화는 스크린의 장막 너머 영화관에 앉아 있는 우리가 영화 안으로 참여하길 바라는 것 같다. (다시 말해, 앞선 인터뷰에서 카메라는 프레임 내의 세계에 개입한다는 점에서 참여적이고, 우메의 정면 얼굴은 프레임 밖의 세계에게 말을 건넨다는 점에서 참여적이다) 어쩌면 이것은 우메와 슌, 다케가 함께 만드는 특정한 목적을 알 수 없고 그 결과물 또한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 편집 영상의 클립 중 하나에 더 어울릴 것이다. 이런 가벼운 단상들 사이에서, 우메의 정면 얼굴을 담은 숏은 본질적으로 결국 무엇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인가. 그것은 그들의 세계가 우리의 세계에게 건네는 수줍은 손짓일까.
하지만 이 숏을 뒤따라오는 다음 숏은 그 확장의 가능성과 상상을 기분 좋게 비껴간다. 우메의 반대편에 있는 존재로 카메라가 180도 고개를 돌려 컷하면, 그곳에 똑같은 복장을 한 우메의 전 연인이 있는 것이다. 우메는 그 남성에게 자신의 실수였다며 그와 연인으로서 다시 만나고 싶다는 마음을 고백한다. 이때 <와일드 투어>는 우메의 정면 숏으로 또 다른 세계(현실)에 말을 건네다가 전 연인의 숏으로 컷하며 영화에 픽션을 불러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이 픽션은 현실의 기록으로는 볼 수 없던 관계의 이면을 들추기 시작한다. 워크숍과는 관계없는 남녀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며, 이후 슌은 다케에게 우메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다케는 그 말을 듣자마자 우메에게 자신의 진심이 담긴 편지를 전달하기까지 한다.
<와일드 투어>의 우메의 정면 얼굴을 담은 숏을 보고 나면, 나도 모르게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2018)의 마지막 숏을 떠올리게 된다. 이별을 통보받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나'의 뒤늦은 고백 뒤에 따라오는 사치코의 불가해한 청춘의 얼굴. 그 얼굴은 '나'를 향한 것이자 동시에 관객석에 앉은 우리를 향한 것이기에 픽션의 장막을 뚫고 논픽션의 피부에 닿는다. 그렇기에 픽션으로 수렴하는 우메의 얼굴과 논픽션으로 발산하는 사치코의 얼굴은 마치 거울상처럼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혹은 등지고 있다).
영화사를 넘나드는 기묘한 착각. 일본 영화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가 강력히 지지하는 일본의 이 젊은 시네필 감독의 영화에서, 영화 속에 드러나는 삼각관계(한 여성과 두 남성)와 젊음의 활력이 고다르를 떠올리게 한다면,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의 사치코의 얼굴은 <네 멋대로 해라>(1960)의 마지막 숏, "역겹다."라고 나지막이 말하며 죽어가는 남자의 숏에 따라오는 진 셰버그의 정면 얼굴과 같다고 말할 수 없을까. 셰버그는 그의 말을 듣고 시선을 떨구더니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한손 엄지를 입술에 갖다 대고 쓸어넘기는 묘한 액팅을 취한다. 그것은 영화내내 쉴 새 없이 떠들던 장 폴 벨몽도 숏에 대한 침묵으로서 저항의 몸짓이다.
반면 미야케 쇼의 얼굴들은 아무런 동작도 하지 않는다. 그저 그 정면 얼굴로 역숏에 놓인 얼굴을 받아치거나(<너의 새는 노래할 수 없어>), 그 역숏의 전제로서 존재할 뿐이다(<와일드 투어>). 그렇다면 미야케 쇼의 인물들이 얼굴과 목소리만을 가진 숏으로 기능할 때, 이들은 또 다른 숏에서는 어떤 액팅을 보여줄 것인가. 셰버그의 몸짓이 그러했듯, 미야케 쇼의 인물들은 어떠한 몸짓으로 새로운 관계를 그려나갈 것인가. 무엇보다 얼굴의 숏에서 프레임 밖에 있던 이들의 '손'은, 하스미의 문장을 빌려 말하자면, 어떤 시각적 웅변으로 우리에게 나타날 것인가. 그리고 작은 손짓의 순간을 경유하여 도착하는 이 얼굴들은 끝내 픽션과 논픽션에게 어떤 손짓을 건넬 것인가.
전염되는 손짓과 몸짓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에서 아르바이트를 빼먹은 '나'는 밤중에 거리를 거닐다가 우연히 점장과 사치코를 마주친다. 점장과 사치코의 미묘한 낌새를 얼핏 감지하는 것도 잠시, 점장의 뒤를 따르던 사치코가 '나'의 팔꿈치 한쪽을 손등으로 무심하게 살짝 건드리고 빠르게 자리를 떠난다. 이상함을 느낀 '나'는 120까지 셀 동안 그를 기다리기로 다짐하고, 포기할 즈음에 사치코는 달려와 "다행이다. 마음이 통했네."라고 말한다. 둘은 잠시 후 근처의 술집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지만, 술김에 새벽까지 잠에 들고만 '나'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룸메이트인 시즈오와 밤거리를 걸으며 술을 마신다.
우연을 통한 만남에서 의도치 않은 약속의 파기까지, 미야케 쇼는 이 일련의 시퀀스를 하코다테의 밤공기와 건조하게 흐르는 '나'의 내레이션, 중저음으로 나지막이 건네지는 사치코의 목소리, 공허한 가게 안을 비추는 숏, 찌그러진 맥주캔, 새벽이 끝날 즈음의 텅 빈 거리 등을 통해 새로운 만남이 시작되는 가슴 떨리는 청춘의 한순간으로 유려하게 묘사한다. 하지만 영화를 다시금 떠올려 볼 때면, 정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그런 유려한 숏과 리듬이 아니라, 그 리듬을 깨는, 사치코가 '나'의 팔꿈치를 한 손으로 무심하게 건드리는 다소 뜬금없는 행동이다. 그 행동의 연쇄를 구성하는 걸음의 리듬, 살과 살이 맞부딪히는 소리, '나'가 놀라 돌아보는 반응마저 짧은 시간 동안의 사소한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계산된 것처럼 느껴진다. 더불어 이것은 둘 사이 연인으로의 발전 이후에는 볼 수 없는 행동이기에 그 자세와 몸짓은 범상치 않은 액션으로 우리의 눈에 각인 된다.
손으로 신체를 건들거나 붙잡는 이 '터치(touch)'의 몸짓은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를 넘어 <와일드 투어>와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2022)을 포함해 미야케 쇼의 영화 전면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변주된다. '나'와 사치코가 우산을 쓰고 밤거리를 걸을 때 서로의 손가락 몇 개를 놓을 듯 말 듯 하게 걸쳐 맞잡고 있는 손의 자세, 전차를 기다리며 키스할 때 서로의 팔꿈치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손짓, 나무 피리의 손잡이를 어설프게나마 잡아당기는 손짓, 클럽에서 허공을 향해 손을 들어 올리고 양손으로 얼굴을 부여잡다가 '나'와 함께 춤추며 끌어안는 사치코의 몸짓, 술에 취해 사치코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시즈오와 그런 시즈오에게 저리 가라는 듯이 손등으로 얼굴을 살짝 밀치는 '나'의 손짓.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의 손짓은 삼각관계라는 구도 안에서 서로를 향한 인력과 척력으로서 작동한다. 즉, 터치의 몸짓은 관계가 변화하는 과정 안에 놓이고, 관계를 적극적으로 변화시킨다. 하지만 이런 관계의 역학이라는 기능을 차치하더라도, 그 손짓이 숏 안에 놓이는 형상은 서사에 종속되지 않은 투명하고도 생경한 아름다운 형상이다.
<와일드 투어>의 슌과 다케는 우메와 함께 숲속 깊은 곳으로 채취 실습을 떠난다. 여기서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의 삼각관계가 반복되는데, <와일드 투어>의 관계는 중학생 3학년과 대학생 1학년 학생이라는 캐릭터의 연령 설정과 DNA 채취 워크숍이라는 동심을 일으키는 상황 때문에, 은밀한 성적 긴장보다는 어린 시절의 첫사랑 같은 풋풋함으로 다가온다. 고대의 문화재 같은 것을 발견한 이들은 이내 탐험을 마치고 왔던 길을 돌아가는데, 이때 작은 개울을 건너면서 사소한 어려움이 있는 탓에 이들의 몸과 손이 잠깐이나마 '터치'되는 양상이 펼쳐진다. 이후 슌과 다케는 아이폰으로 촬영한 탐험 영상들을 돌려보며 그것에서 우메의 손을 맞잡았다는 서로 간의 '터치'의 행위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 클립 영상들이 완벽히 논픽션의 영역에서 이루어진 것인지, 감독 미야케 쇼의 연출이 개입한 것인지, 아이폰을 들고 있는 촬영자이자 프레임 안에 담기는 출연자인 이들이 서로의 사전 회의를 통해 스스로 연출한 장면인지는 알 수 없다.
슌은 다케에게 고등학생이 되면 우메에게 고백할 사실을 말하고, 다케는 이 말을 듣자마자 충동적으로 자신이 쓴 러브레터를 우메에게 전한다. 계단에서의 대화가 끝나면 우메는 일어나서 다케의 팔꿈치를 살짝 건들며 위로를 전한다. 그리고 다케는 우메가 '터치'한 자신의 팔꿈치를 감싸안고 살며시 더듬는다. 이 '터치'와 '더듬음'으로 마무리되는 숏은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의 손짓들을 호명하고 단번에 함축한다. 한밤중 '나'의 팔꿈치를 살짝 '터치'하는 사치코의 손짓, 그리고 한낮에 이별 통보를 받은 '나'가 횡단보도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팔꿈치를 '더듬는' 손짓. 사치코의 '터치'는 그의 삶의 균열로 다가오고, '나'는 그 상처의 주위를 뒤늦게 '더듬으며' 균열을 봉합한다. 또는 그 부재의 흔적을 '더듬으며' 첫 만남의 순간을 떠올린다. 이렇게 미야케 쇼의 영화에서 '터치'의 감각은 개별 작품과 숏의 경계를 넘나들며 반복되고 전염된다.
미야케 쇼의 영화에서 감지할 수 있는 '터치를 통한 전염의 감각'은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에 이르러 새로운 맥락으로 다가온다. 그도 그럴 것이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원작에 과도한 각색을 하면서까지 의도적으로 코로나 팬데믹이 장기화하던 2021년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이다. 미야케 쇼는 복싱 체육관의 회원들이 각자 운동하고 있는 모습을 일정한 리듬을 지닌 채로 단독 숏으로 분절하여 보여주거나, 청각장애인의 입장에서 마스크로 인해 소통이 불가능한 상황을 묘사하며 바이러스 전염으로 인한 터치(물리적인 터치와 정서상의 소통)가 부재한 시대를 그려낸다.
이때 영화 내내 청각장애인 케이코가 보여주는 수화의 몸짓과 복싱의 펀치는 가끔 사일런트 시대의 연기를 보고 있다는 착각을 일으킨다. 코치의 미트를 치며 펀치 연습을 하는, 시청각적인 리드미컬함을 극대화하고 있는 장면이 그러하고, 친구 또는 남동생과 수화만으로 대화하는 장면이 그러하다. (남동생과의 대화에서는 사일런트 시대에나 사용했던 자막 숏을 끼워 넣는 감각적인 연출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렇기에 터치가 부재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사실 미야케 쇼의 영화에서 종종 볼 수 있던 손짓과 몸짓의 감각을 영화의 숏 전체에 전염시키려는 진정한 '전염의 감각' 또는 '감각의 전염'을 구현하는 영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밀어붙이고 싶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청각장애인 복서라는 캐릭터는 고요 속에 퍼지는 펀치(손짓과 몸짓)의 활력을 보여줄 수 있는 최적의 인물이다. 이렇게 팔꿈치를 건드리고 더듬어대던 미야케 쇼의 인물은 팔을 크게 휘두르며 손을 통한 새로운 감각을 숏 곳곳에 퍼뜨린다. 그리고 이내 거울을 마주 보고 나란히 서서 서로의 동작을 모방하며 유대로서의 전염의 양상에 다다른다. 이때 미야케 쇼의 손짓들은 픽션을 뛰어넘은 동시대의 감각을 피부에 맞닿게 필름에 새겨넣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순간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픽션과 논픽션 사이의 얼굴들
미야케 쇼의 영화들의 손짓들에 눈을 고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앞서 말했듯, 그것이 서사와 관계의 역학을 어떻게 구성하는지의 문제와 연관되기도 하거니와, 그것이 픽션과 논픽션의 사이에서 짜인 연기인지, 즉흥적인 연기인지, 혹은 선뜻 몸에서 작동한 자연스러운 몸짓인지 파악할 수 없는 그 투명함과 생경함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손짓들을 '시각적 웅변'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은 픽션과 논픽션의 명확한 경계 위에 놓이지 않고 필름 위에 던져지는 투명한 몸짓이다. 이러한 투명성은 앞서 살펴본 정면 얼굴의 숏을 다시 한번 소환한다. 고다르가 <네 멋대로 해라>의 마지막 하나의 숏에서 셰버그의 작은 손짓으로 이전에 펼쳐졌던 숏들을 모두 부정하는 듯이 과감하게 시각적으로 웅변했다면, 미야케 쇼는 작은 손짓과 몸짓들을 영화 전체의 숏에 전염시키고, 정작 정면 얼굴의 숏에서는 손짓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 이들에게 주어진 것은 얼굴과 목소리(또는 침묵)뿐이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의 마지막 숏에서 사치코는 뒤늦은 '나'의 고백을 듣고, 할말을 삼키고 끝내 침묵한다. 이 얼굴은 셰버그의 얼굴과 가장 맞닿아 있는 숏이다. 총격을 당한 장 폴 벨몽도가 한 손으로 허리춤을 붙잡고 휘청거리며 도망쳤던 것처럼, 이별 통보를 받은 '나'는 머리를 쓸어 넘기고 팔꿈치를 만지작거리다가 횡단보도 너머로 달려간다. 셰버그가 "역겹다"는 그의 말에 "'역겹다'가 무슨 뜻이죠?"라고 대꾸한 것처럼, 사치코는 사랑한다는 '나'의 말에 침묵으로 대꾸한다. 그 얼굴은 앞선 모든 시간들을 부정하고 새로운 이면을 들추는 존재로서 숏 안에 놓인 것 같다. 이때 사치코의 얼굴은 뒤늦은 진심 앞에서 대답할 수 없는 불가해한 청춘의 초상이 되어 스크린을 뚫고 나와 동시대의 피부를 건든다.
<와일드 투어>의 중반부에서 뜬금없이 우메는 함께 DNA 채취를 하러 가자고 누군가에게 권유한다. 우메의 얼굴은 역숏의 대상이 드러나지 않은 채 놓이기 때문에, 카메라를 마주 보는 그 시선으로 제4의 벽을 깨는 듯하다가, 역숏의 등장으로 인해 결국 픽션 안에서 새로운 관계의 회전을 낳는 픽션으로서의 초상이 된다. 그리고 미야케 쇼는 또 다른 워크숍 진행자가 여학생들과 함께 숲을 떠돌며 연구 실습을 하는 영상과 두 아이가 강가를 거닐고 눈 위를 하염없이 걷는 클립 영상 뒤에 그것을 보고 있는 우메의 얼굴을 다시 한번 소환한다. 아이폰으로 촬영하여 그 특유의 질감과 생경함이 도드라지는 영상은 우메의 전 연인을 담고 있는데, 우메가 그 영상을 보고 무엇을 느꼈는지는 알지 못한다.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 얼굴이 논픽션으로 확장되는 아이폰 촬영의 시퀀스를 픽션의 가능성으로 끌어당기는 구심력을 지닌 픽션의 초상이라는 사실이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의 후반부에서 케이코는 체육관 관장의 아내가 다음 시합에 관해 하는 말을 듣고 나지막이 '네'라고 대답한다. (사실, 이때 카메라는 케이코를 정면에서 약간 벗어난 앵글에서 담아내고 있다. 케이코의 시선 또한 카메라와 겹치지 않는다) 이 말은 선천적인 청각장애인으로서 말을 하지 못하는 케이코가 영화 안에서 내뱉는 두 번째 말이다. 첫 번째는 체육관을 나서기 전에 문을 앞에 두고, 관장에게 '네'라고 대답했을 때인데, 이는 앞선 내용에서 이미 언급된 바 있어 충분히 예측 가능한 순간이다. 반면 거의 초면인 관장의 아내에게 '다음 시합이 기대되지 않냐'는 말에 '네(はい)'라고 육성으로 대답하는 순간은 놀라운 감동의 순간으로 다가온다. 가장 내밀한 소통 안에 놓였던 관장에게 한 육성의 대답이, 한 사람의 매개를 거치더라도 발화되어야만 하는 간절함이 있기 때문이다. 이때 케이코의 얼굴은 '눈을 똑바로 뜨고 있는', 극의 설정을 뛰어넘어 동시대와 현실에 가닿는 희망으로서의 초상이 된다.
미야케 쇼의 얼굴들이 경계를 허무는 숏으로 놓일 수 있는 이유는 저항의 몸짓을 연기(延期)하더라도, 종종 연기(演技)의 틀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손짓을 보여주며, 그들이 발화하는 말은 (또는 발화하지 않는 말이) 그들을 극 중의 논리를 벗어나는 제삼의 초상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이들은 그 불가해하고 투명한 손짓들처럼 경계에 놓였으며, 어떤 범주에도 속하지 않는 모호한 형상이기에 가장 아름답고 '얼굴적'이다. 결국 얼굴적인 형상으로서의 얼굴은 단일 필름에 새겨진 흔적을 넘어서 필름의 시간 밖으로 열린 시제를 파악할 수 없는 부정형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미야케 쇼의 손짓들을 따라가다 발견하게 되는 얼굴들은 이 무한한 상상을 가능케 하는 사진적 형상으로서 픽션과 논픽션 사이, 나아가 시네마의 얼굴들을 자유롭게 유영한다.
[글 김민세 영화평론가, minsemunji@ccoart.com]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