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계+인 2부>(2024)의 오프닝을 보는 순간 마음이 복잡해졌다. <외계+인 1부>(2022)를 못 본 관객도 <외계+인 2부>를 편하게 볼 수 있도록 영화를 재편집했다는 인터뷰를 접하긴 했으나, 예상보다 당혹스러운 방식이었다. <외계+인 2부>는 이안(김태리)의 나레이션이 1부의 플롯을 5분 정도의 회상조로 읊조리면서 시작된다. 이는 지난 회차를 못 본 관객을 배려한 TVA(TeleVision Animation)의 오프닝에서나 볼 법하다. 그러나 애니메이션 오프닝 속 소개는 관객이 소화하기 어려울 정도로 방대한 세계관을 전반적으로 설명하는 수단이다. 애니메이션은 <외계+인 2부>처럼 이전까지의 작품을 스토리로 압축하지는 않는다. 이 오프닝은 마치 영화유튜버의 프로모션에 가깝다는 인상까지 준다. <외계+인 2부>는 <외계+인 1부>를 영화로 대하기보다는 2부를 위한 정보 정도로 소모한다. <외계+인 2부>를 응원했던 입장으로 처음 실망한 순간이었다.
<외계+인 2부>의 플롯은 복잡하다. 1부는 인간의 몸에 갇힌 외계인 죄수가 탈옥해 지구를 정복하려고 하는 음모를 다루는 현대, 인간을 치유하는 신검의 행방을 물색하는 이안(김태리), 두 신선(조우진, 염정아), 무륵(류준열)과 그의 두 고양이인 우왕(신정근)과 좌왕(이시훈), 인간으로 가장한 외계인 죄수 자장(김의성)의 활극을 다루는 고려 시대의 이야기가 620년의 시차를 두고 오간다. 신검은 사실 외계인의 에너지원이며 외계인 죄수의 음모를 막으려 한 간수 로봇인 썬더(김우빈)와 가드(김우빈), 이안이 설계자를 포함한 외계인 넷을 데리고 과거로 가버려 고려로 넘어온 것이다. 영화는 외계인들의 탈옥을 주도한 설계자가 사실은 무륵의 신체에 숨었을 수도 있다는 섬칫함을 남기며 끝나버린다. 2부는 1부에서 흩뿌린 여러 단서를 수거하면서 전개된다. 2부에서는 능파(진선규)라는 맹인 검객의 캐릭터가 추가된다. 또한 1부의 조연인 민개인(이하늬)가 능파의 후손이라는 설정이 드러난다. 능파는 10년 전 과거로 넘어온 자장(김의성)과 싸우다가 맹인이 되었으며 신검에 베여서 눈을 회복하려는 목적으로 신검을 찾는다. 반면 이안은 과거로 함께 넘어 온 썬더의 행방을 물색하고, 두 신선은 설계자를 죽이고자 무륵을 추적한다. 자장은 무륵과 이안을 벽란정으로 불러내서 신검을 빼앗으려고 함정을 판다. 모든 이가 벽란정에 모이기 시작하고, 신검을 둘러싼 쟁탈전이 벌어지게 된다.
차라리 <외계+인 2부>가 전편보다는 괴작이기를 바랐다. <외계+인 1부>는 최동훈 감독이 자신이 어릴 적에 아꼈던 영화의 오마주로만 구성된 괴상한 세계관을 타협이 없이 그려내는 작품이다. <외계+인 1부>는 고려 시대와 현대라는 630년의 시차를 지니는 두 개의 시간을 교차하며 전개된다. 이 중 고려 시대는 그가 <전우치>(2009)에서도 그린 적 있는 고전 소설과 홍콩 무협 장르에 대한 애착이 드러난다. 반면에 <외계+인>의 현대는 그가 어릴 적 재밌게 본 <에일리언>(1979), <백 투 더 퓨처>(1985) 등 여러 할리우드 고전 SF와 괴수 영화를 짜깁기 듯하다. 게다가 신검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수많은 인물의 활극은 최동훈 감독이 지금껏 제작한 케이퍼 무비 장르를 따라간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익숙하거나 최동훈 감독의 작품을 따라온 관객이라면, 모든 이미지가 어디서 본 듯하다는 인상을 받을 법하다.
최동훈 감독이 영화를 찍기로 한 시발점이 된 영화가 타란티노의 <펄프 픽션>(1994)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설정이기는 하다. <펄프 픽션>은 레퍼런스가 수백 편에 달하는 작품이다. 타란티노는 도둑질을 자신의 미학이라고 이야기하며 영화 곳곳에 다른 영화의 이미지나 기표만을 빌려다가 쓴다. 타란티노의 제작사 이름이 장-뤽 고다르의 <국외자들Band-a-part>(1964)인 것부터 제 스타일을 드러내고 있다. 타란티노의 스타일은 흔히들 혼성모방이라고 설명된다. 한 작품 안에서 다른 작품을 인용할 때 그 작품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든지 간에 그 스타일만을 빌려다가 쓰는 것이다. <펄프 픽션>의 미학은 저만의 독보적인 설정을 지탱하기 위한 수단으로 다른 이미지를 빌려다 쓰는 데에서 비롯한다. 또한 그 이미지가 이야기와 이야기 속 감정에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 그저 그 영화의 원전을 아는 시네필의 이스터에그 놀이에 그친다.
반면에, 최동훈의 <외계+인 1부>와 <외계+인 2부>(이하 <외계+인>)의 혼성모방은 이야기를 지탱하는 수단으로의 혼성모방이 아니다. 이야기를 구성하는 수단으로의 혼성모방이다. 여러 설정을 빌려다가 누더기처럼 기우는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이미지가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을 뿐이다. 영화 속 모든 이미지가 있어야 하는 마땅한 이유도 없다. 그저 시각적인 요소의 과잉에 그치지 않는다. 모든 이미지를 하나로 연결하는 논리적인 체계가 부재해 있다는 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문제일 터다. 나아가 수많은 인물을 하나로 연결하는 감정이 부재해 있다는 것 역시 문제다.
다만, <외계+인>의 실패는 조금 더 근본적인 지점에 있다. 이야기꾼이라는 창작자 모델이 더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점이다. 이야기꾼은 구술 문학의 감흥을 인쇄된 종이에 번역하려는 이들이다. 구술 문학을 간단하게만 이야기해보자. 월터 옹은 구술 문학에서 캐릭터가 기억되려면 운율을 담는 정형어구(일정한 형식이나 틀을 지닌 언어를 이야기한다. 시조에서 3/4/3 어구기 있듯이 말이다.)가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구술 문학은 현장에 머무르는 이에게 텍스트를 최대한 정확히 전달해야 한다. 입말은 말하는 순간 사라져버리기 마련이라서 하려는 이야기가 논리적으로 정리되기보다 장황해지기 마련이다. 그 텍스트를 정확히 기억하게끔 하는 장치 중 하나가 바로 운율과 정형어구 등으로 인상을 강하게 남기는 것이었다. 다만, 구술 문학은 그것을 듣는 이와 상황에 따라서 달라지기 마련이고 기호로 정착되지 않는다. 이야기꾼은 그 정형어구와 운율, '기념비적이고도 잊기 어려우며 누구나 알 정도로 공공성을 띠는 인물' 혹은 한 번 듣고 잊기 어려운 그로테스크한 괴물을 그려내는 캐릭터와 장황하고도 비논리적인 이야기 구성 등을 문자로 기록해 그 뉘앙스를 남긴다. 옛것의 재미를 더욱 잘 전승하려는 의도에서다. 최동훈의 영화에 주로 반복되는 장면인 고서에서 튀어나오는 인물은 이같은 최동훈 감독의 개성을 잘 드러내는 장면이다. 최동훈의 여러 영화에 등장하는 분신(<외계+인>에서는 우왕과 좌왕, 두 신선 캐릭터로 드러난다)과 거울 등 고전적인 설화에서 빌려온 듯한 여러 모티프가 이야기를 듣는 듯한 정서를 만든다. 최동훈 감독의 이야기와 그것을 지탱하는 대사는 과장되고 뻔뻔할수록 더 설명이 안 될수록 매력적이다. SF인만큼 더욱 뻔뻔해야 그 설정을 납득시킬 수 있었다.
<외계+인>은 수많은 이질적인 캐릭터와 설정을 도입하는 반면에 캐릭터의 성격을 압축하는 인상적인 제스처 혹은 대사가 부재해 있다. <타짜>(2005)의 캐릭터 구성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정마담(김혜수)의 나레이션을 바탕으로 짝귀와 아귀, 고니, 너구리 등 운율이 형성된 이름이 충돌한다. 최동훈 감독이 영화에서 캐릭터를 그려내는 방식은 철저히 구술문화적인 논리에 기반해 있다. 또한 모든 캐릭터가 저마다의 시그니처라고 할 수 있는 대사와 톤을 지니고 있다. 화투패를 섞을 때마다 "아수라발발타"라고 말하는 평경장(백윤식)이라든지 고광렬(유해진)의 캐릭터의 톤은 최동훈 영화의 장기라고도 할 수 있다. 오로지 텍스트로 적힌 책과는 달리 영화는 캐릭터끼리 대사를 주고받으므로 대사에 자연스레 리듬이 실릴 수밖에 없다. 구술문화의 생동감은 여러 캐릭터가 말로 주고받는 액션 사이에서 되살아난다. 반면에 <외계+인>은 두 신선과 우왕이 좌왕이 등 감초 캐릭터를 제외한 주연에게 저마다의 시그니처 대사와 포즈를 배정하지 않는다. 무륵 그리고 이안 두 캐릭터는 더없이 심심하고도 평범하다. 또한 자장도 왜 빌런으로 등장하는지 납득되지 않는다. 그나마 두 신선과 우왕과 좌왕이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둘만이 유일하게 시그니처 제스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제스처를 슈퍼히어로라는 장르로 각색하면서 저마다의 초능력을 더하는 방식으로 상쇄하려 했으나 능력을 얻기까지의 과정이 부재해 있다는 것도 커다란 문제다. 이 모든 빈틈을 메울 만한 뻔뻔하고도 황당한 설정이 부재해 있다. 흔히들 <외계+인>이 설정 과잉이라고 말한다. <외계+인>의 진짜 문제는 '캐릭터 설정이 부재해 있다'는 것이다. 이안은 더욱 재밌어야 했으며, 썬더는 처음부터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며 능청스러운 모습을 보여야 했다.
최동훈이 작품마다 인터넷 밈을 만드는 유일한 한국 감독인 것도 이러한 구어적인 속성에서 비롯한다. 대표적으로 <타짜>(2005)는 거의 모든 장면이 인터넷 밈으로 가공되었다. (최동훈 감독은 이야기꾼 감독으로는 드물게 욕이라든지 여러 폭력적 언사를 써서 캐릭터를 각인시키지 않는다. 마초적인 대사로 가득한데도 그것이 상대를 비방하는 수위로 번지지 않는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아감벤의 말마따나 영화가 제스처를 발명해내는 것이라면, 최동훈 영화는 정보값이 현저히 떨어지는 구어적인 대사로 제스처에 가까운 말의 제스처를 연출한다. 다만, <외계+인>은 모든 것을 포기한 다음에 말의 액션을 몸의 액션으로 이행한다. 인물의 과장된 대사는 인물의 능력치로 변환되었고 그 결과 실패했다. 스파이더맨이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등의 시그니처 대사를 지닌 것을 생각해보자. 최동훈 감독이 이안이나 무륵에게 조금이나마 반복되는 대사나 그에 마땅한 톤을 더했더라면, 이만큼 혹평을 듣지 않았을 것이다. <외계+인 1부>의 어지럽고도 혼란한 편집은 그나마 그 제스처를 살리려 노력했다. 그러나 <외계+인 2부>의 깔끔한 편집은 이를 살리는 대신에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데에 집중한다.
정작 최동훈의 영화는 지금껏 무엇을 말하려는지 잘 드러나지 않는다. <타짜>에서 욕망과 자본주의의 굴레를 보는 일은 어불성설이고, <암살>(2017)에서 애국심을 느끼기는 어렵다. 최동훈의 영화를 지탱하는 것은 그 이야기가 전개되고 풀리는 과정에서 오는 것이었다. <외계+인>은 주제를 전달하려고 하지만 그 주제가 무엇인지 이 창작자마저 모르는 듯하다는 생각을 들게끔 한다.
<외계인>은 1부와 2부라는 분할 개봉도 영화의 패착 원인이었다. 1부와 2부로 분할된 영화는 원래 원작이 있는 경우가 다수다. 그 기원은 <반지의 제왕> 시리즈(2001~2003)나 더 멀리는 <마농의 샘>(1986)에서 볼 수 있다. 이 이야기가 이만큼의 규모로 전달되어야 한다는 이유가 원작의 두께로 증명되었다. <외계+인>은 그 이야기가 어떠한 규모인지 미리 파악하기가 어려운 실정이었다. 또한 최동훈 감독은 복합 서사와 앙상블을 잘 만든다. 다만 4시간 가까이 되는 규모에서 그 모든 캐릭터의 시그니처 포즈를 질리게 하지 않게 하려면 압축된 이야기를 만들어야 했다. 최동훈 감독을 비판해서는 아무 해답도 나오지 않을 듯하다. 그동안 이야기의 규모를 잘 조정한 감독이 왜 이처럼 판단했는지가 더욱 중요하다. 이야기를 소비하는 환경의 변화 때문이다. 드라마로 만들어야 하는 이야기와 영화로 만들어야 하는 이야기의 구분이 흐려지는 혼란 가운데에서 탄생한 것이 2부작 영화다.
<외계+인>은 현대적인 이야기의 규모가 달라지는 시대의 산물이다. 이 영화에 쏟아진 비판이 과잉된 지점도, 이 영화가 변화의 한가운데에 있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완성도를 옹호하고 싶은 생각은 아니나, 비극적인 상황에 처한 불우한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영화의 흥미로운 설정 중 하나는 능파와 민개인이 있는 옛날 그림에 그려져 있되 직접 2022년으로 넘어오지는 않은 것이다. 능파는 대신 신선이 두고 간 무기를 싸두고 미래에 도착하기만을 기다린다. 다행히 민개인이 그것을 지니고 있어서 이야기가 전개되나, 자칫하면 미래와 과거 사이의 시간선이 끊길 우려가 있다. 이 무기를 싸두려는 능파의 마음이 곧 이야기를 전승하는 최동훈 감독의 마음이지 않나라는 생각이 든다. 이야기가 전달될지는 모르더라도 누군가는 사랑할 수 있는 이야기를 건넨다는 진실한 마음을 볼 때 이 영화의 실패가 더욱 안타까웠다. 노쇠한 이야기꾼의 안간힘을 보는 듯했다.
[글 김경수 영화평론가, rohmereric123@ccoart.com]
외계+인 2부
Alienoid
감독
최동훈
출연
류준열
김태리
김우빈
이하늬
염정아
조우진
김의성
진선규
배급 CJ ENM
제작연도 2024
상영시간 122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4.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