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해가 그러했지만 2023년의 베스트를 고는 작업은 제법 까다로웠다. 베스트 10을 고르고 난 다음에 최근 영화를 관통하는 어떠한 정서에 감흥을 느낀 듯하다. 그 정서를 한 단어로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다. 2023년이 COVID-19의 후유증과 나날이 심해지는 탈-진실과 음모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세계적인 기후위기(유엔에서는 올해 지구온난화를 지구열대화라고 부르자고 제안했다.) 등으로 다사다난한 시간이었던 만큼 영화도 나름 혼곤함을 거쳤을 것이다. 정치적 대안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막막한 시대다. 베스트 10에 있는 영화는 여러 맥락이 뒤엉킨 혼잡한 파국에서 제 나름의 돌파구를 마련하려고 한 듯하다. 문제는 돌파구가 미래가 아니라 과거를 다시 소환하는 방식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를 단순히 노스탤지어라고 부르기에는 모호하다. 미래를 더는 상상할 수 없기에 과거를 단순히 상품으로 소비하는 방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파국의 기원으로 되돌아간다든지, 고전적 생활 양식을 되살리며 지금 사라진 가치를 다시 보게끔 하는 방식이다.
이를 통해서 영화 안이 아니라 영화 바깥으로 나가기를 바라고 있다. 베스트 10에 포함되지는 못한 여러 영화도 이를 드러낸다. <6번 칸>(2023)은 인터넷이 현대인의 지배적인 소통 양상이 되기 전의 이야기이다. <플라워 킬링 문>(2023)은 미디어고고학의 방식에 기대고 있다. 영화의 전반부에 초기 영화에서 비서구인을 서구인의 시선으로 기록하는 데에 쓰는 민족지 영화가 삽입되기도 하며, 훗날에 구조적 문제가 아니라 피상적으로 드러나는 스캔들에 집중하는 미디어의 폭력성을 당대의 라디오 쇼에서 발견하기도 한다. 그러나 피해자인 오세이지 족은 끝내 영화의 시청자로 기록되지는 않는다. 놀란의 <오펜하이머>(2023)도 사소한 원한으로 인해서 지구 전체의 파국을 멈출 수 없는 동시대의 알레고리로 볼 수 있다. <서울의 봄>(2023)도 이 사례가 될 수 있을 듯하다. <더 웨일>(2023)과 <비밀의 언덕>(2023)의 경우도 글쓰기를 통해서 과거의 자아정체성인 진정성과 현대의 자아정체성 프로필성에 대한 흥미로운 고찰을 한다. 이같은 기준에 따라서 올해의 베스트 영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1. <파벨만스 The Fablemans> 스티븐 스필버그 Steven Spielberg | 2022
<파벨만스>는 거장이 유년기로 되돌아가서 본인이 처음 영화를 마주했을 때의 설렘을 고백하고, 자라나는 과정에서 예술의 매혹과 그에 따르는 가혹한 대가를 마주하는 성장담이다. 다만, 감독의 여느 자전적인 서사와 달리 영화는 감독이 결코 카메라의 힘을 이겨내기가 어렵다는 두려움과 불안으로 가득해있다. 이는 스필버그의 페르소나 샘 파벨만(가브리엘 라벨)이 가족과 아버지의 친구인 베니 로위(세스 로건)가 함께 떠난 캠핑 여행을 찍은 다큐멘터리에서 어머니(미셸 윌리엄스)와 베니의 불륜을 포착하는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처음만 해도 배신감에 몸사리를 치지만 기어이 그 필름을 편집해 가족에게 상영한다. 그러나 그 나머지 필름을 편집해 어머니에게 보여주고야 만다. 안토니오니의 <욕망>(1962)가 생각나는 이 장면은 스필버그가 처음으로 영화 매체의 폭력성을 발견하는 순간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이윽고 해변에서 찍은 고등학교의 졸업 파티를 흥미롭게 편집한 다음에 그 결과로 구타당한다. 그러나 그는 이를 긍정한다. 영화의 제목인 Fable이 드러내듯이 이 영화는 그저 그가 촬영한 모든 것이 이야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스필버그는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의 핵심인 유미주의, 즉 아름다움으로의 도피가 이제 더는 시대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자기 삶으로 증명하고 있다. 예술가는 자신이 창작한 예술이 자신보다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옷을 찢어내듯이 드러내면서 말이다. 스필버그에게 영화는 놀란의 <오펜하이머> 속 원자폭탄과도 같다. 물론 스크린 속 이미지의 정확한 배치가 영화의 윤리성으로 이어진다는 존 포드의 말은 매우 아름답다. 지평선을 위나 아래로 고정함으로 인간을 더 정확히 비추라는 조언은 예술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를 1970년대 뉴할리우드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풀어낸다.
2. <애스터로이드 시티 Asteroid City> 웨스 앤더슨 Wes Anderson | 2023
<애스터로이드 시티> 이전에는 한 번도 웨스 앤더슨 영화에 호감을 느낀 적 없다. 웨스 앤더슨의 유미주의에 기반한 보수적 예술관, (굿즈로 소비될 만큼 화려한) 스타일 너머로 사라진 역사성이 어우러져서 그가 엘리트적 예술가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그의 스타일이 뒤집혀 드러나는 영화다. 이 영화가 호불호가 가장 심하게 갈리는 이유도 이 때문이 아닐까 싶다. 분명 압도적인 색채, 강박적인 비율이라든지 인형처럼 움직이는 인간, (영화가 이야기임을 강조하는) 극중극의 구조는 여전하다. 그러나 그도 COVID-19를 통해서 시대가 달라진 것을 체감한 것일까. 어기(제이슨 슈왈츠먼)과 미치(스칼렛 요한슨)이 창문을 보고 소통하는 장면은 마치 줌ZOOM에서 소통하는 두 사람을 보는 듯하며, 외계인이 애스터로이드 시티에 착륙했다는 이유로 그들을 바깥으로 못 나가게 하는 순간은 마치 COVID-19 시기의 이동 제한을 보는 듯하다. 1950년대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담은 영화라지만 사실 어떤지 동시대적 맥락이 가득하다. 오히려 동시대의 기원을 1950년대의 영화로 발견하려는 듯하다.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재미는 마구 흘러가는 나레이션을 이해하지 않으려 할 때 생긴다.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나레이터가 라디오 드라마를 낭독하듯이 빠른 템포로 서사가 진행된다, 이는 극중극이라는 복잡한 구조를 설명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세계관을 설명하는 대사가 지나간 다음에 영화는 오히려 무성영화처럼 흘러간다. 그 인물의 무표정에 소통을 갈망하는 현대인의 심리가 은연중에 드러난다. 조르조 아감벤의 선언처럼 무성영화가 그 이전에 없는 고유한 제스처를 발명하는 것이라면, 창문을 바라보며 나누는 어기와 미치의 대화는 COVID-19 시대의 제스처로 남을 것이다. (영화에서의 제스처는 인터넷 밈의 유행으로 인해서 파괴되기 시작했다.) 이의 연장선상에서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사랑하는 장면은 어기와 그의 아들이 핵폭탄을 멀찍이서 보는 장면이다. 이 무심함이야말로 분쟁에 가득한 우리 시대에 필요한 덕목인 듯하다. 영화는 끝날 즈음에 "잠들지 않으면 깰 수 없다"라는 강력한 명제를 밀고 나간다. 또한 영화는 마영화는 그저 한순간의 꿈이며, 영화의 극중국은 우리가 영화관이라는 공간에 들어서서 영화를 보는 극중극과 심리적 연결성이 생긴다. 결국 영화라는 것은 꿈이자 휴가지에 불과하지만, 거기서 깨어나면 세계가 달리 보인다는 감독의 호소는 이 영화의 아름다움을 배가한다.
3. <쇼잉 업Showing Up> 켈리 라이카트Kelly Reichardt | 2022
<쇼잉업>(2023)은 여성 예술가 리지 카르(미셸 윌리엄스)의 일상을 다루는 영화다. 감독에 따르면 "천재라는 개념을 파괴하는 영화"랄까. 낭만주의 시대에 등장한 천재라는 개념은 남성성이 짙게 배어 있는 개념이기도 하다. 남성만이 예술가로 성공할 수 있는 시기에 만들어진 데다가 여성은 천재의 질료가 되기 위해서 뮤즈로 소비되어야 했으니까. 과연 이러한 관점은 지금도 유효할까 질문하는 것이 켈리 라이카트의 목적인 듯하다. 리지 카르는 성공한 예술가 친구인 조 트란(홍 차우)의 집에 얹혀사는 중이다. 리지의 집은 온수가 안 나오는데 조 트란은 본인의 전시회 때문에 바쁘다며 수리를 미룬다. 그녀는 여기저기에서 공간을 빌려서 몸을 씻는다. 게다가 돌보는 고양이가 비둘기를 습격해서 비둘기를 어쩔 수 없이 집에서 돌봐야만 한다. 리지는 그 와중에 신작 전시회까지 열어야 한다. 이 영화는 리지 카르의 학교를 다큐멘터리 같은 톤으로 다룬다. 예술이 천재적 재능의 산물이 아니라 끝없는 노동의 산물이라는 것, 예술가에게는 친구와 가족 등 여러 조력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차분한 톤으로 이야기한다. 이는 예술가가 성장하는 것을 감동적으로 드러낸다. 예술가의 성장은 곧 비둘기의 회복으로 이어지며 자연과 인간 사이의 가교를 마련한다. 여기에다가 켈리 라이카트 특유의 자연 풍경을 포착하는 숏이 영화 전반에 매력을 더한다. <쇼잉업>은 또한 소소한 코미디로 가득하다. 그 가운데 가장 웃긴 것은 리지 카르의 동생이 대지 예술을 한답시고 우스꽝스러운 예술에 전념하는 장면이다. 리지 카르의 동생은 천재적 예술가상에 가장 부합하나 그것이 현대적 관점에서는 코미디라는 것을 전적으로 드러내며, 리지 카르와 같은 성실한 예술가를 응원하는 감독의 마음이 잘 드러난다.
4. <킬링 로맨스 Killing Romance> 이원석
<킬링로맨스>는 한국의 컬트 영화로 길이 남을 영화다. 과거의 케이블 홈쇼핑 광고, 노래방 영상 등 온갖 미디어를 동원하는 과감한 연출은 다시는 볼 수 없을 연출이라고 생각한다. 영화와 그 바깥의 것 사이의 경계를 적극적으로 무너뜨리기에 호불호가 갈릴 수밖에 없다. 다만, 모든 것이 과잉된 기호가 부담감을 안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과잉이야말로 영화 바깥과 더없이 닮은 듯하다. 영화 바깥에서 생기는 기호의 과잉이 정치적 스캔들과 혐오로 구성된다면 이 영화 속 기호의 과잉은 정반대로 연대와 희망으로 구성된다. 예술은 추한 세상을 반영하거나 닮아간다는 말은 이미 흔하다. 이 영화는 추한 세상을 닮아가되, 추한 세상을 아름다운 세상으로 뒤집어 드러낸다. 그러나 이제 이 영화는 마음이 편히 볼 수 없는 영화가 되었다. 故 이선균 배우의 죽음 때문이다. 영화에 만화적인 색채를 더한 조나단 나(이선균)의 대사인 "잇츠 뀻"이 이선균 배우의 애드립이었다. 그만큼이나 배우의 힘이 큰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이선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든 <킬링로맨스>를 볼 때 조금 마음이 복잡해질 수 있다.
5. <어파이어 Afire> 크리스티안 펫졸드 Christian Petzold|2023
<어 파이어>의 동시대성은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 카>(2022)와는 다른 맥락으로 체호프를 소환한다는 데에 있다. 아니 더 정확히는 직접적이라고 해야 할 듯하다. 체호프의 여러 테마 중 하나는 무심한 자연과 그 자연에 어우러지는 인간의 혼연일체다. 그 혼연일체 안에서 (아마 몰락한 지식인이거나 예술가인) 인간은 세속적인 욕망을 포기하고 진정한 삶에 다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어 파이어>는 체호프의 『메자닌의 집』을 빌려와 자연과 예술의 관계를 고찰한다. 지금껏 예술이라고 하는 것이 "지구 열대화"가 선포된 지금 시점에서는 세계의 진정한 위기를 못 보게끔 하는 것이 아니냐는 식으로 말이다. <어 파이어>는 외-화면으로 사운드가 화면에 침투하게끔 한다. 이 감각은 우리가 뉴스에서 기후 위기 뉴스를 흘려듣는 방식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어 파이어>를 기후라는 관점으로만 몰고 가는 데에 불만을 지니는 독자가 있을 수도 있다. 한국에서 열린 마스터클래스에서 페촐트 감독의 표정이 기억난다. 이 영화가 호주 산불에서 모티프를 딴 영화라는 것을 드러내며, "왜 한국인은 아무도 불타 죽는 멧돼지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나요? 외국인은 매일 그 질문만 하던데."라고. 한국인의 질문이 아주 다르다는 식으로 이야기했지만, 그의 웃음이 왜인지 서늘했다. 그 미소를 기억하므로 이리 생각할 수밖에 없다.
6. <거미집 COBWEB> 김지운|2023
한국 영화감독 중 가장 애정을 지니고 보는 감독이 누구냐고 물어본다면 김지운이라 대답할 자신이 있다. <거미집>(2023)도 개인적으로 올해의 한국 영화다. 물론 단점이 없지는 않다. 난삽한 데다가 중간에 동어반복이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가 힘들다. 반복으로 인해서 영화의 핵심인 막장 유머 코드가 차츰 힘을 상실해가며 다소 관객을 지치게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상쇄할 만큼 이 영화는 아름답다. <조용한 가족>(1998)과 <반칙왕>(2000) 등 초기작에서 쓴 부조리한 코미디로 되돌아온 그는 여전히 본인이 재기발랄한 감독이라는 자신감을 곳곳에 드러낸다. 이만희의 <마의 계단>부터 시작해 김기영의 영화까지 온갖 1970년대 영화 스타일을 인터넷 밈을 쓰듯이 마구 가져다 쓰는 그의 담대한 스타일은 타란티노에 비견할 만하다. 타란티노가 세계 각국의 영화를 패스티시하는 반면에 김지운은 한국 영화사도 할리우드만큼이나 재해석할 가치가 있다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한국 영화를 이토록 사랑한 영화가 최근에 있을까.
김지운 감독의 전복적 상상력은 최근 개봉한 다른 한국 영화와 확연히 비교된다. 류승완의 <밀수>(2023)이 1970년대의 한국으로, 김성수의 <서울의 봄>(2023)과 <헌트>(2022)가 군부독재의 시대로, 김성훈의 <비공식작전>(2023), 임순례의 <협상>(2023) 등이 1990년대와 2000년대로 되돌아가고 거기에 머무르고 만다. 나아가 <서울의 봄>이나 <헌트>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가야 하는 지점에서 멈춘다. 왜 타란티노처럼 우리는 시대의 비극을 전복할 수 없는가. <거미집>은 검열이라는 틀을 역이용해서 영화를 촬영하는 과정을 그린다. 시대 전체를 뒤집지는 못하더라도, 시대를 똑바로 그려내야만 한다는 그 틀을 파괴하는 것이 김지운의 급진성이다. 지금껏 그의 영화는 많은 영화의 재배치로 제작되었으나, 이만큼 유희적인 경우가 드물었다. 이 영화의 가장 기이한 순간 중 하나는 신상호(정우성)가 촬영하는 시퀀스이다. 신상호의 촬영장에 소품으로 셀린 시아마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의 그림이 걸려 있다. 1970년대만 패스티시한 영화로 알려져 있지만 김지운 감독은 1970년대 영화의 세계 곳곳에 본인의 취향을 삽입하고 있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의 영화다. 검열을 넘어서는 것은 그 검열을 전유하는 감독 개개인의 취향이라는 듯이 <거미집>은 영화사에 기대지 않고 자신만의 역사를 써내려 간다.
7. <사랑은 낙엽을 타고 Fallen Leaves> 아키 카우리스마키Aki Kaurismaki|2023
핀란드 출신의 거장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6년 전 은퇴를 번복하고 만든 영화다.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탔으나 개인적으로는 황금종려상도 노려볼 만한 영화가 아니었나 싶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2023)는 카우리스마키의 영화 가운데에서 가장 낙관적인 영화인 데다가 중간중간에 드러나듯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감독이 낼 수 있는 호소가 담겨 있다. 영화 속 안사(알마 포위스티)가 라디오를 끄면서 "망할 놈의 전쟁!"이라고 외치는데, 넌지시 던져진 이 대사는 영화 전체의 메시지를 함축해 담아낸다. 또 안사가 일하는 술집에 2025라고 적힌 달력이 있는 것으로 보아하니 영화의 시제는 미래다. 이같은 시간이 이어질 것이라는 감독의 비관적인 전망이 담긴 설정이기도 하다. 영화는 다만 비관에 빠지지 않는다. 그저 전쟁이 가득한 세상이라도 사랑은 피어난다는 듯한 시선으로 가득하다.
감독 본인의 말대로면 이 영화는 그가 활동 초기에 제작한 프롤레타리아 3부작의 속편이다. 프롤레타리아 3부작은 그 이름에서부터 드러나듯 노동자의 삶을 그려낸 영화다. 이 세 편의 영화가 그러하듯이 이 영화도 주인공이 노동하는 현장을 먼저 담는다. 안사는 슈퍼마켓의 노동자고, 알코올 중독자 홀라파(주시 바타넨)는 건설 현장에서 노동하는 노동자다. 영화는 안사와 홀라파가 제작기 이유로 해고당하는 상황에서 시작한다.
프롤레타리아 3부작에 냉소와 절망이 가득했다면 이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의 전형성을 따라간다. 안사와 홀라파는 서로 직장에서 잘린 날 밤 친구와 함께 가라오케에 가서 처음 마주친다. 이 둘의 인연이 본격적으로 이어진 것은 안사가 두 번째 직장인 술집이 망하는 것을 본 날이다. 홀라파는 안사에게 데이트를 신청하고 함께 영화 <데드 돈 다이>(2018)까지 보러 간다. 그러나 홀라파는 안사가 연락처를 적어서 준 종이를 잃어버리고 만다. 둘은 영화관에서 기적적인 재회에 성공하지만 안사는 홀라파가 주정뱅이라는 이유로 그를 거절한다. 홀라파는 각고의 인내 끝에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 안사를 만나러 간다. 그러나 안사를 만나러 가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하고 만다.
이 영화가 단지 로맨틱 코미디에 그쳤더라면 덜 흥미로웠을 것이다. 이 영화가 이 둘의 로맨틱 코미디를 담아내는 시공간이 흥미롭다. 35mm 필름으로 찍힌 영화는 인터넷이 아직 활성화되지 않은 1990년대의 시공간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이는 올해 개봉한 <6번 칸>(2023)과도 비슷하다. 아날로그 매체에 있기에 둘 사이에는 과잉된 연결이 없으며, 멀찍이 서로 거리를 두고 타자로 바라볼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두 남녀에게 스마트폰이 있더라면 금방 SNS를 뒤져서 서로의 연락처를 발견해내지 않았을까. 그리고 둘은 라디오를 보기보다는 전쟁 영상을 보고 그 스펙터클에 빠져 있지 않을까. 이 영화의 윤리성은 이처럼 과감한 시간 역행에서 나온다. 전쟁 영상의 스펙터클도, 연인 사이의 현대적 만남마저도 배제된 이 시공간은 오히려 지금에야 더 호소력이 있다. 또한 곳곳에 흘러나오는 비창과 여러 음악이 커플의 감정을 배가하면서 고전적인 영화의 가치를 되새긴다.
아 참, 이 영화는 또 시네필의 영화이기도 하다. 홀라파와 안사가 영화관을 나오려는 순간 문 앞에 선 다른 두 노동자가 <데드 돈 다이>(2018)가 로베르 브레송의 <시골 사제의 일기>(1951) 같다느니, 장-뤽 고다르의 <국외자들>(1964)과 같다느니 하는 농담을 건넨다. 하필 둘이 연락처를 주고받으려는 순간 그들의 뒤편에는 장-뤽 고다르의 영화, 데이비드 린의 영화의 포스터가 배치되어 있다. 둘은 오즈 야스지로의 인물처럼 대화하고, 나루세 미키오 영화의 흔적도 곳곳에 있다. 카우리스마키에게 영화는 잠시의 위안이 되고, 시끄러운 전쟁을 욕할 수 있고 거기서 잠깐이나마 쉬면서 관계의 회복을 도모하는 공간이다. 영화와 영화가 이어져서 우정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그의 진심이 이러한 레퍼런스 차용에서 드러난다.
8. <너와 나 The Dream Songs> 조현철|2023
/ <스즈메의 문단속 Suzume> 신카이 마코토|2023
이 두 영화는 앞서 코아르에 길게 평론을 쓴 바가 있다. 특히 <너와 나>를 쓸 때는 애도의 윤리를 중점으로 둔 관점으로 접근해 뺀 부분이 있다. <너와 나> 의 장르성이다. 이 영화는 더없이 애니메이션의 문법과 닮아있다. 세미와 하은이라는 두 커플이 사회적인 매개 없이 커다란 재난과 부딪힌다는 점에서는 세카이계의 세계관을 공유한다. 또한 이 영화는 백합 영화이기도 하다. 사랑보다 먼, 우정보다는 가까운 여성의 관계를 다루는 이 백합 서사는 작가 본인이 백합 서사라고 말해야 보통 백합 서사로 인정되나 이 영화는 백합이라는 언급이 딱히 없더라도 그 장르로 소비되기에 적합하다. <너와 나> 가 세월호를 이야기하는 애도의 영화인데도 곳곳에 마법적인 색채가 깃들고, 장르적으로도 흥미로운 코미디인 이유가 여기에 있는 듯하다. 감독이 이야기했듯 이 영화는 애니메이션인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의 설정, 심지어 카메라의 구도마저 빌려오고 있다.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는 마법 소녀의 클리셰를 빌려오되 파격적으로 뒤집는다. 상대를 구하려 무한 루프에 갇힌 인물을 통해 마법으로 상대를 구할 수 있다는 환상을 파괴한다. <너와 나>의 세계관은 세미와 하은의 연애를 비선형적인 시공간에 둠으로, 둘의 사랑이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반복될지도 모른다는 어떤 섬뜩함을 포함하고 있다.<너와 나> 의 스토리텔링은 영화와 재페미네이션의 경계가 무너지는 중이라는 신호로도 보인다. 과연 <슬램덩크>(2023)와 <스즈메의 문단속>(2023)이 1위인 나라답다. 아 참, 언급된 김에 <스즈메의 문단속>도 올해의 베스트로 선정하고 싶다. 비슷한 맥락에서 애도의 윤리와 게임적인 서사를 결합한 수작이다. 마찬가지로 코아르에 길게 평론을 쓴 바가 있다.
9. <퍼펙트 데이즈 Perfect Days> 빔 벤더스 | 2023
빔 벤더스가 오랜만에 만든 수작이다. <파리 텍사스>(1984)보다 아름다운 연출도 더러 있을 정도다. 야쿠쇼 코지가 지금껏 연기한 영화 중 <큐어>(2000)에 비견할 만하다. 영화는 화장실 청소부로 살아가는 한 남성의 일상을 따라가며 시작된다. 남성은 혼자 사는 집에서 새벽에 깨 식물에다가 물을 주고 청소부 옷을 입은 뒤에 밖으로 나와서 기지개를 한 번 켜고 자판기에서 캔 커피를 두 잔 산다. 차에서는 옛날 록 음악을 듣는다. 직장에 출근하면 젊은 동료가 한 명 있고, 그 동료 옆에는 동료의 귀를 사랑하는 다운증후군 환자인 친구 하나가 있다. 이들과 한바탕 청소한 다음에 필름 카메라로 하늘 풍경을 찍어서 고이 간직한다. 퇴근 후에는 단골 술집에 들러서 맥주를 한 잔 마시고, 일상의 모든 순간은 남자에게 소중하다. 영화는 이 남성의 주위에 여러 인물이 등장하며 일상이 서서히 무너져가는 순간을 다룬다. 남성은 끝내는 인생의 복잡다단함에 눈물을 흘린다.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일상이 아니라 스스로 신성히 여기는 일상을 개척해가는 남성의 삶은 현대인이 상실한 가치를 생각하게끔 한다. 이러한 삶을 리추얼이 충만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재독 철학자인 한병철은 지금 우리 시대가 마주한 위기 가운데 하나를 리추얼의 종말이라고 진단한 적 있다. 그는 고전적 가치를 계승하는 상징적 행위를 리추얼이라고 했다. 화장실 청소부의 삶은 그야말로 아날로그의 삶이다. 핸드폰마저 스마트폰이 아니다. 화면 중간중간에 삽입되는 일렁거리는 네거티브 필름은 디지털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아름다운 미장센을 연출한다. 남성의 고전적 삶은 우리가 잃어버린 리추얼과 진정한 소통을 반추하게 한다.
10.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Spider-Man: Across the Spider-Verse> 조아킴 도스산토스 | 2023
소니의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두 번째 영화다. 흥행 성적이 항상 아쉽다고 생각할 정도다. 디즈니 마블시네마틱유니버스MCU에서 피상적으로 드러나는 연대와 정치성을 생각할 때 훨씬 급진적이고도 아름답다. 하물며 필름 영화와 디지털 영화 등 시공간을 넘나드는 연대까지 해낸다. (게다가 적어도 여기선 어벤저스 어셈블!같은 유치한 구호를 외치며 연대하지는 않는다.)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경이로운 애니메이션이다. 2D와 3D, 1990년대 재페미네이션과 미국 애니메이션 등을 아우르면서 서브컬처 전반을 아우르려는 야심까지 보인다. 파트 1과 2로 나뉘어서 전개될 정도로 복잡하고도 거대한 서사도 만족스럽다. 애니메이션이 어디까지 다다를 수 있는지 이토록 극한까지 밀고 나가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를 보는 동안에 애니메이터가 씬 단위로 착취당했을까 걱정되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노동 착취로 고발된 이력이 있다. 이 점이 이 영화의 유일한 오점일 것이다.
[글 김경수 영화평론가, rohmereric123@ccoar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