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BEST] 특이점의 기로에서
[2023 BEST] 특이점의 기로에서
  • 박정수
  • 승인 2024.01.16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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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수 영화평론가의 2023년 베스트 필름

2022년까지 인간은 질병에게 제 자리를 내주었다. 인간은 제 삶을 스스로 정향하지 못하고, 질병에 의해서 강제로 방향을 틀어야만 했다. 그렇기에 인간은 코로나19 펜데믹 종식 이후엔 필히 '자신의 자리'를 되찾을 수 있길 기대하였다. 

코로나19 펜데믹이 종식된 2023년, 인간은 여전히 자신의 역할을 고심해야만 했다. 바로 AI가 인간의 삶을 정향하기에 이르렀으니 말이다. 그들은 인간 못지않게, 때론 인간보다 더 정확하게 계획을 짜고 글을 쓰며 그림을 그린다. 심지어 빠른 속도로 발전되어 영상마저 위협하고 있다. "과연 이 시대에서 글쟁이인 나는 어떤 글을 써야 할까", "대 AI 시대가 열린 이후 인간이 만들어낸 영화는 AI가 제작한 영화와 무엇이 어떻게 차별화되어야 할까" 등의 고민이 많았고 무력감도 느꼈다. 그래서 자연스레 인간의 고유한 아이디어와 독특한 통찰이 담긴 작품들로 시선이 향했다. 2023년 베스트 필름 리스트는 이러한 맥락 속에서 도출된 결과다.

 

1. <메모리아 Memoria> 아피찻퐁 위라세타꾼 Apichatpong Weerasethakul|2022

ⓒ 영화 <메모리아>

불교나 윤회론이 무엇인지 주절주절 나열하는 일은 비교적 쉽다. 그러나 우리가 겪어야 하고, 겪었지만 전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윤회의 감각을 환기하는 작업은 대단히 어렵다. 위라세타쿤의 <메모리아>가 훌륭한 이유는 바로 그 어려운 윤회의 감각을 환기했다는 데 있다. 그는 이전 작품들에서도 부각하던 '편집'과 이 영화에서 특히나 두드러지는 '청각'의 추상성을 이용하여, 만인이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희소한, 그리고 잊힌 감각을 건드린다. 더욱이 영화만의 편집으로 특유한 감각을 표현해내고, 추상적인 청각과 대비하며 구체적인 시각으로서 영화의 특징을 드러내는 등, 영화만의 본질을 탐구한 점도 인상적이다.

 

2.<애프터썬 Aftersun> 샬롯 웰스 Charlotte Wells|2023

구체적인 진실은 상상력을 억제하고, 풍부한 상상력은 거짓·허위로 전락하기 쉽다. 그래서 진실과 상상은 한 쌍으로 묶일 수 없을 것 같지만, 웰즈의 <애프터썬>은 상상력과 진실이 한 쌍으로 묶일 수 있음을 증명하는 작품이다. 바로 상상이 소멸된 진실을 재현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며 말이다. 지금 내 곁에 존재하지 않는 소중한 이를 섬세하게 수놓는 터치도 인상적인 작품이지만, 상상력이 어떻게 사용할 지 비전을 제시한 점도 흥미로운 작품이다.

 

3. <시계공장의 아나키스트 Unrest> 시릴-아몬 샤블린Cyril SCHAUBLIN|2022

ⓒ 영화 <시계공장의 아나키스트>

위라세타쿤의 <메모리아>를 칭송할 때 언급했듯이, 자본주의와 물신주의가 인간에게 크나큰 해악이라는 것을 문자로써 설명하기는 쉽다. 또 자본주의의 참혹함을 이미지로 보여줄 수도 있으나, 그 결과물이 여 타 폭력과 차이가 없는 고루하고 진부한 형태일 때가 많다. <시계공장의 아나키스트>는 자본주의의 해악을 '구도'와 '촬영'을 이용한 미장센으로 가시화함과 동시에, 타 폭력과 구별되는 자본주의만의 인간 소외를 이미지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빼어난 성취를 보여줬다.

 

4. <토리와 로키타 TORI AND LOKITA> 뤽 다르덴 Luc Dardenne,인 장 피에르 다르덴 Jean Pierre Dardenne|2023

ⓒ 영화 <토리와 로키타>

색채와 철학이 확고하게 굳어진 노장에겐 대체로 변화를 기대하진 않는다. 그들이 이룬 빼어난 성취가 이어지고 있는지, 일련의 '항구성'을 기대하며 노장의 영화를 찾는다. 내게 다르덴 형제도 그랬다. 신작이 개봉될 때마다 리얼리즘과 인간성, 그리고 희망을 아직까지 놓지 않았는지를 궁금해 했다. 그러나 <토리와 로키타>에서 다르덴 형제는 달라졌다. 그들은 '편집'으로 말하는 작법을 발전시켰고, 더 날카롭고도 냉혹하게 현실을 진단한다. 그 변화는 안 그래도 빼어난 다르덴 형제의 휴머니티와 통찰력을 더 세련되고도 날카롭게 제련하며, 연출의 힘이 똑같은 동향과 이야기를 무한하게 뒤바꿀 수 있다고 증명한다.

 

5. <인체해부도 De Humani Corporis Fabrica> 루시엔 캐스팅-테일러 Lucien Castaing-Taylor, 베레나 파라벨 Verena Paravel|2022

ⓒ 영화 <인체해부도>

다큐멘터리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감독 고유의 색채나 의도, 메시지를 가미하기 어렵다. 그러나 어려울 뿐, 불가능하지는 않다. 캐스팅-테일러와 파라벨 콤비는 '편집'으로써 객관적인 질료에 주관적인 시선을 투사한다. 행위 대신 이미지의 속성을 부각하는 나열, 의료 행위 이후의 결과를 상징적으로 이어내는 주관적인 시선은 긍정적인 아우라가 두텁게 비호하는 의료계를 감히 '의심'한다. 이로써 하나의 객관적인 이미지가 다양한 맥락 속에서 무수한 의미를 창출할 수 있음을 증명하며, 그야말로 편집의 힘을 낱낱이 보여주었다.

 

6. <찬란한 내일로 A BRIGHTER TOMORROW> 난니 모레티 Nanni Moretti|2023

ⓒ 영화 <찬란한 내일로>

오늘날 만인이 입을 모아 OTT 스트리밍 서비스의 장점을 논한다. 만인의 영상 접근권을 확대했다고, 또 OTT 제작 컨텐츠는 창작자의 자율성을 보장한다며 말이다. 이는 아주 달콤한 장점이다. 그러나 이 즐거움에 과다하게 젖은 나머지, 장점에 뒤따르는 단점이나 부작용을 그 누구도 논하지 않는다. 특히나 OTT 스트리밍 서비스의 배급권과 제작을 따내야 하는 창작자들은 더더욱 발화를 망설인다. 그러나 일평생 소신을 굽히지 않는 시네아스트, 심지어 서슬 퍼런 칼자루를 휘두르는 정치권력 앞에서도 당돌한 입을 닫지 않던 난니 모레티는 과감하게 OTT 스트리밍 서비스를 비판한다. 만인이 접근할 수 있는 만큼, 더더욱 만인의 공통된 취향에 봉사하느라 영화가 개성과 독창성을 잃게 되었다고, 이로써 OTT 스트리밍 서비스는 자율성을 보장하지 않는다며 말이다. <나는 자급자족한다>라는 작품으로 장편 데뷔한 난니 모레티, 그는 여전히 자급자족할지언정 제 소신을 굽히지 않겠다는 영화를 선보이며, 진정 자유로운 영화가 무엇인지를 입증한다.

 

7.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The Boy and the Heron> 미야자키 하야오 Miyazaki Hayao|2023

 

ⓒ 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예술은 때때로 교훈을 말한다. 그러나 설교만 하고, 정작 예술가 자신과 작품이 실천하지 않는다면 이는 무슨 소용일까. 때때로 그런 작품들이 있다. 선하라고 하지만 선하지 못한 작품과 예술가들, 그러나 하야오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달랐다. "삶은 자유롭고도 유연하게 이동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그의 가치관이 흠뻑 투영된 본 작품은 여러 세계를 흡사 꿈처럼 넘나들며 메시지를 몸소 실천한다. 그 결과물은 대중성과는 분명 거리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협하지 않은 하야오의 철학적 소신은 우직했고, 예술관은 그만큼 독보적이었던 작품이었다.

[글 박정수 영화평론가, green1022@ccoart.com]

박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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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현실과 차별화된 고유하고도 독립적인 차원입니다. 그중에서도 영화는 타 예술 매체와 구분되는 고유한 시각적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술만의, 오직 영화만의 경험을 독자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동시에 영화는 현실에서 비롯되고, 인간에게 이바지합니다. 그렇기에 현실-예술, 인간-영화를 이어내는 교두보와 같은 글을 제공하고자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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