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 북미최초의 영화관 스트랜드시어터가 문을 열었다.
회당 한 사람밖에 볼 수 없었던 '들여다보기 영화(키네토스코프)'의 한계를 극복, 3천 명에 육박(2,989석)하는 관객의 영화감상이 가능해진 기술혁신의 쾌거였다. 상승일로에 있던 영화의 위세는 13년 뒤 스트랜드시어터의 약 두 배(5,920) 규모로 세간에서 '영화 대성당(Cathedral of the Motion Picture)'이라 불린 록시시어터가 등장하면서 정점을 찍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을 맞아 주춤하던 관객 증가세는 1950년대 들어 이뤄진 TV의 보급으로 하향 곡선을 그리게 되고, 많은 영화관들이 폐업이나 업종 변경으로 내몰린다. 그렇게 1960년대 중반까지 전성기의 3분의 1규모로까지 줄어들며 바닥을 친 극장 수는 이후 다시 상승세에 접어들어 1980년대에는 2만여 개를 넘어선다. 1979년 토론토에 세계최대규모의 지점을 오픈하면서 영화산업의 패러다임 변화를 예고한 멀티플렉스 출현의 결과였다.
스포트라이트의 저편
경제사적 흐름은 한국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변화와 맞물려 롤러코스터를 타던 한국영화는 2000년 이후 멀티플렉스의 등장으로 산업화의 기반을 마련한다. 2023년 현재 한국의 영화관은 전국 625개관, 스크린 수 3,487개. 초기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실패가 이어지면서 클로즈드마켓 운운하는 비관론이 일던 것을 생각하면 실로 상전벽해다.
하지만 다양성의 측면에서는 어떨까. 이 대목에서 떠오르는 이름이 충무로 스카라극장이다. 한국 극장건축사의 산증인이던 이 극장은 문화재 등록이 예고되자마자 재개발 규제를 우려한 건물주의 손에 허물어졌다. <실미도>(2003)가 문을 연 한국영화 천만관객 시대의 바톤을 <태극기 휘날리며>(2004)가 이어받고, 다시 <왕의 남자>(2005)가 굳히기에 들어간 그해 12월의 일이었다.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개봉 29주년 당시 70미리 필름으로 복원된 데이비드 린의 <닥터 지바고>(1965)가 재개봉한 영화사적 사건의 무대이든, 심지어 문화유산이든, 오직 돈에만 초점이 맞춰지는 세태. 이쯤 되면 극장에서 어떤 영화적 가치를 지닌 작품을 상영할 지는 고려사항 조차 못된다. 이후 한국영화에 불어 닥친 '소품종 대량생산'의 광풍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설명하는데 이만큼 상징적인 사건이 있을까.
서울ㆍ수도권에만 전인구의 50.8%가 살고 있는 환경에서 대자본은 사실상 모든 핫 플레이스에 멀티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주요 선진국에 비해 저렴한 편인 교통비는 심야상영을 주중(weekdays)의 일상으로 가져왔다. 멀티플렉스에 가면 히트작 이외의 영화를 보기가 어렵다. 거의 모든 스크린에서 대략 이삼십 분 간격으로 상영되니까. 많은 스크린 수만큼 다채로운 프로그램? 압도적인 인프라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승자들은 항상 정해져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독립ㆍ실험영화의 최전선에 놓인 작품을 소개하는, 그것도 '대한민국의'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 한국감독의 작품도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사례가 부지기수다.
이 글에서 다룰 도쿄국제영화제 초청작 <트와일라잇 시네마 블루스>는 이러한 산업적 환경에서 멀티플렉스의 스포트라이트의 저편에 서 있던 것이 오히려 축복이었던 조조 히데오의 자기반영적 영화다.
장인(artisan)
<트와일라잇 시네마 블루스>의 무대이자 촬영장은 멀티플렉스로의 이행 대신에 미니시어터로의 전환을 택했던 실존하는 단관극장.
이름도 무려 '(가와고에) 스카라극장'인 이곳은 잠시 문을 닫았던 5년을 빼고는 1905년부터 현재까지 쉬지 않고 관객을 맞았다. 일본영화산업에서 미니시어터의 위상은 '50석에서 100석의 규모의 다양성영화관'이라는 사전적 의미 이상이다. 소유주의 결정이나 입지문제, 다시 말해 '자의' 혹은 '타의'에 의해 산업화의 물결에서 이탈한 극장들은 경제적 풍요를 누릴 수는 없었으나 뜻밖의 혜택을 누렸다. 대형배급사로부터 자유로워진 지배인들은 CEO이자 프로그래머(심지어 군마현 다카사키시의 시네마테크 다카사키나 홋카이도 하코다테시의 시네마아이리스, 아이치현 나고야시의 시네마스콜레 등의 경우처럼 영화제작에까지 손을 대는 경우도 적지 않다. ※ 주)로 다양성영화에 주목했고, 그 결과 미니시어터는 예술성ㆍ실험성이 강한, 심지어 단편까지 포괄하는 작품들의 윈도우로 자리매김한다. 기존 독립영화감독은 물론 경험이 일천한 신인이라 할지라도 지배인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면 상영이나 데뷔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뿐인가, 스크린은 하나뿐이라도 시간대 별로 다른 작품의 상영이 가능한 운영방식 덕분에 극장마다의 개성을 어필함으로써 단골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 와중에 미니시어터 개봉작이 박스오피스에서 메이저스튜디오의 영화들과 경쟁을 벌이는 경우도 나타났다. 2019년 일본의 국내개봉작(1,292편 )가운데 미니시어터를 통해 관객을 만난 영화는 전체의 70퍼센트에 달한다.
하지만 우연히 태어난 바람직한 결과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지속성이다. 청년층의 이탈로 2010년 무렵부터 매출감소를 보이던 미니시어터는 2020년 코로나 19 사태 당시 방역당국에 의해 불요불급(non-essential)의 사업장으로 분류되면서 결정타를 맞는다. 독립영화인들을 주축으로 대대적인 미니시어터 지원 캠페인(Mini-Theater AID)이 벌어졌지만 OTT까지 관객의 발목을 잡는 상황에서는 역부족이었다.
<트와일라잇 시네마 블루스>의 시간적 배경이 되는 게 바로 이 무렵이다. 초췌한 몰골의 떠돌이가 되어 대학시절을 보낸 동네로 돌아온 주인공 콘도(코이데 케이스케 분)는 아직 아물지 않은 팬데믹의 상흔과 여기저기서 마주한다. 어제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다면서 극장 앞에서 가져온 선전지를 50엔에라도 사 달라 떼를 쓰는 홈리스(사토, 우노 쇼헤이 분), 이번 달 급여가 입금되지 않았다고 눈치를 주는 종업원들에게 일단 절반만 받고 며칠 기다려 달라며 읍소하는 지배인(카지하라, 후키코시 미츠루 분). 그리고 카지하라가 놀이터에서 종이박스를 덮고 자려던 콘도를 숙식아르바이트로 들이면서 '한 회 관객 다섯 명이면 나쁘지 않은 축'이라는 스카라극장이 서사의 중심으로 들어온다.
뚝심
흥미로운 것은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에서 우울이나 냉소가 아닌 짙은 그리움과 애정, 응원의 마음이 배어있다는 점이다. 아울러 이런 정서는 미니시어터로 인해 태어난 영화문화의 아이콘들이 펼치는 군상극(group performance)으로 형상화된다.
마작이나 하며 빈둥거리는 것 같던 카지하라는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스카라극장을 중심으로 침체된 거리에 활기를 불어넣을 이벤트를 마련해보자는 상인들의 권유를 받아들여 '스카라영화제'를 기획, 아버지에게 바치는 영화를 만든 신인감독(오노 리나 분)에게는 데뷔, 마무리작업만 남아있는 영화를 팽개쳐두고 방황하던 콘도에게는 재기의 기회를 제공한다. 전국 어디를 가든 마주할 수 있는 미니시어터 지배인의 모습이다. 소속사 없이 주로 다양성영화에 출연하는 무명배우, 다양성영화에 관한 글을 쓰는 영화저널리스트, 틈만 나면 극장에 와 시간을 보내는 시네필 등 단골들 역시 '전형적'이다. 그리고 결말부의 스카라영화제는 이 모든 사건과 인물을 아우르며 정갈한 만듦새의 착한영화를 완성한다.
혹자는 이게 정말 핑크영화 베테랑의 노련함으로 점철된 두 편의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초청작(2022년 작 <신도들>과 2019년 작 <성의 극약>)을 만든 동일인의 작품인지 어리둥절해 할 수도 있겠지만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올해 도쿄국제영화제 특별전의 타이틀(“영화 장인, 조조 히데오라는 희귀한 재능”)에서도 드러나듯 조조 히데오는 '작가'보다 '장인'으로 분류되는 감독이니까. 작가적 신념에 어긋나는 기획을 사양하며 부업으로 생계를 해결하는 작가들과 달리 그는 기획이 제작으로까지 연결되는 사례가 열 편 중 고작 한두 편 정도인 일본영화계에서 어떤 재료가 주어지든 뭔가를 만들어내는 제이미 올리버(<네이키드 셰프>라는 방송으로 유명하던 영국의 요리사. ※주)다. 핑크영화와 V시네마의 편당 제작비는 보통 2백만 엔에서 최대 5백만 엔 이하. 필모그래피의 대부분을 미니시어터에서 상영된 영화들이 채우고 있는 그는 작품의 통일성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다소 잡미가 느껴지더라도 그건 그것대로 재미있을 것”이라 여긴다. 요 몇 년 새 비교적 규모가 큰 작품들도 만들었지만 그도 최대 3천만 엔을 넘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특기할만한 점은 보통 감독의 몇 배나 제작편수를 가능하게 해 준 동력이 단지 돈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흥행에 실패하더라도 제작사가 도산할 정도까지는 아닌 예산규모 덕분에 다양한 영화적 실험이 가능했다. 전주국제영화제 초청작 <전쟁과 한 여자>(2012)를 연출한 감독이자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 <아무 것도 우리를 멈출 수 없다>(2018)의 각본을 쓴 시나리오작가 이노우에 준이치의 자기규정처럼 '취미로서의 영화감독'이 아니라 '직업으로서의 영화감독'으로 살면서 '자유'라는 보상까지 거머쥔 것이다. 와중에 형성된 감독으로서의 뚝심은 도쿄국제영화제 인터뷰의 다음 발언에서 확인헐 수 있듯 단단하기 그지없다.
"어떤 장르든 주어진 일은 제대로 하고 관객을 지루하게 하지 않는 까닭에 ('장인'이라는 호칭이) 주어진 것 같은데, 그렇다고 저만의 영화철학이나 예술혼이 '제로'냐고 묻는다면, 아니라 답하고 싶습니다. (…) 예술성과 오락성의 대립하는 가운데 유지되는 균형을 생각하고 있거든요."
변증법
2003년 데뷔한 이래 100편 넘는 영화들을 만들었지만 국제영화제와는 거의 무관하게 활동해온 조조 히데오를 일약 특별전의 주인공으로 발탁한 것은 기타노 다케시의 대표작 <그 남자 흉폭하다>(1989)의 프로듀서이자 도쿄국제영화제 프로그램디렉터인 이치야마 쇼조다.
이치야마는 우연히 지난해 <신도들>을 보고 이전까지 도쿄국제영화제와의 연이라고는 시나리오를 담당한 <요다카의 첫사랑>(2021)이 '아시아의 미래' 부문에 초청된 게 전부이던 조조 히데오의 특별전을 기획한다. 프로그래밍 한 영화들은 <트와일라잇 시네마 블루스>와 사이비종교단체( “싱글벙글 인생센터”)에 소속으로 오지에서 생활하는 세 사람이 등장하는 <신도들>, 수도권 중소도시 헌책방을 배경으로 엇갈리는 두 커플의 관계를 다루는 <러브 논들레스>(2022), 고시엔 출전한 야구팀 응원석에 모여든 고교생들이 주인공인 <온 디 엣지 오브 데어 시츠>(2022).
영화를 통한 치유와 재생(<트와일라잇 시네마 블루스>), 믿음의 문제(신도들), 사랑과 욕망(<러브 논들레스>), 그리고 우정(<온 디 엣지 오브 데어 시츠>) 등 서로 다른 주제에도 불구하고 이 네 작품은 중심에 하나의 공동체가 자라잡고 있다는 공통점이었다. 이를테면 <신도들>의 싱글벙글 인생센터는 와해되어 가는 중이며 오퍼레이터(이소무라 하야토 분)와 부의장(기타무라 유이 분)은 둘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신앙에서 멀어진다. <러브 논들레스>의 타다(세토 코지 분)는 고교생 미사키(카와이 유미 분)에게 뜬금없는 청혼을 받지만 다른 남성과의 결혼을 준비 중인 잇카(사토 호나미 분)에게 정신이 팔려있다. 잇카의 약혼자 료스케(나카지마 아유무 분)는 웨딩플래너(미키, 코우리 유카 분)와의 불장난에 탐닉한다. <온 디 엣지 오브 데어 시츠>의 고교생 네 사람은 애초에 응원단도 아니었던 데다 야구부원 출신 후지오(히라이 아몬 분)를 빼면 경기규칙조차 잘 모른다. 하나의 공동체에서 나름의 정서를 공유하지만 그렇다고 구속감을 느낄 만큼 강하게 묶여있지는 않은 사람들. '작가정신'을 내세우기보다 예술성과 오락성의 변증법 속에서 스스로의 위치를 가늠해 온 캐릭터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그렇게 특유의 '19금' 이미지를 배우들이 부담스러워하는 탓에 시나리오를 몇 편이나 써놓고도 캐스팅에 어려움을 겪었다던 조조 히데오의 '순한 맛 콜렉션'은 누구나 찾아와 위로받을 수 있는, 초라하지만 따듯한 영화 공동체에 바치는 헌사(<트와일라잇 시네마 블루스>)로 대미를 장식한다.
글을 마무리하려다 문득 검색창을 띄우고 <트와일라잇 시네마 블루스>(2월 10일) 이후 개봉한 그의 세 작품을 흩어본다. 하이틴코미디쯤으로 보이는 <방과 후 앵글러 라이프>(4월 29일)가 눈에 들어오나 싶더니 역시나 핑크영화 냄새가 물씬 풍기는 <S 프렌즈>가 이어진다. 무려 파트 1(7월 21일), 2(8월 4일) 두 편이나. 과연 '빨리 찍기의 조조(《키네마준보》 등에 기고하던 영화저널리스트 나가노 타츠지가 붙인 별명. ※ 주).'
데뷔 20주년 축하를 특별전으로 받고, 거장 오즈 야스지로 탄생 120주년 기념드라마의 첫 에피소드까지 맡았던 2023년은 확실히 조조 히데오의 해였다. 허나, 그의 필모그래피에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은 것 같다. 그저 살아가겠지. 어떤 영화든 만들면서. 하지만 어떤가. 틈새에서 부지불식간에 옷을 적시는 가랑비처럼 넘쳐나는 필모그래피 속 보석 같은 작품들도 다시 쌓여갈 테다.
트와일라잇 시네마 블루스
Twilight Cinema Blues
감독
조조 히데오Hideo Jojo
각본
이마오카 신지Shinji Imaoka
프로듀서
쿠보 카즈아키Kazuaki Kubo
아키야마 토모노리Tomonor Akiyama
출연
코이데 케이스케Keisuke Koide
후키코시 미츠루Fukikoshi Mitsuru
우노 쇼헤이Syohei Uno
배급 스포티드 프로덕션 Spotted Productions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99분
현지개봉 2023년 2월 10일
정치학과 영상예술학 두 분야의 학위를 소지. 인문사회과학과 영화이론을 넘나드는 전문적 식견으로 한일 양국 매체에 분석기사를 쓴다. 파리경제대 토마 피케티와 『21세기 자본』 프로젝트를 진행한 도쿄대 연구실 출신.
프로듀서를 맡은 장편 다큐멘터리영화 <포 디 아일랜더스>는 2008년 제주영화제 개막작이었다.
2013년부터 월간 《게이자이》에서 담당하는 경제평론지면이 에히메대 와다 제미나르의 교재로 쓰인다. 국제영화비평가연맹(FIPRESCI) 지부인 일본영화펜클럽 회원. 『마르크스는 처음입니다만』 등 다수의 스테디셀러를 소개해온 번역가로도 유명하다.
일본국제교류기금이 선정하는 “세계의 영화인 7인” 중 1인이며 일본 TBS(채널 6) 주최 디지콘 6 아시아 심사위원, 《마이니치신문》 영화웹진 《히토시네마》 필진 및 마이니치영화콩쿠르 심사위원, 다카사키영화제 시니어 프로듀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어드바이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