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터널 선샤인>(미셸 공드리, 2004)에서 연인이었던 클레멘타인과 조엘은 이별 후 서로를 잊기 위해 기억의 일부분을 인위적으로 제거하기로 한다. 그들은 차례대로 기억을 지워주는 병원인 '라쿠나'(lacuna, 라틴어로 '잃어버린 조각들'을 뜻한다)를 찾는다. 영화는 이를 보여주는 과정에서 알렉산더 포프의 'Eloisa To Abelard' 시구절 일부를 대사로 사용한다.
결백한 수녀의 운명은 얼마나 행복한가 How happy is the blameless vestal's lot!
자신이 잊어버린, 그 세상에게서 잊혀가니 The world forgetting, by the world forgot.
순결한 마음을 비추는 영원한 햇빛이여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모든 기도는 받아들여지고 욕망은 물러난다 Each pray'r accepted, and each wish resigned.
영화의 제목인 '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은 '순결한 마음을 비추는 영원한 햇빛'을 뜻한다. '순결한 마음'이란 지리멸렬해진 사랑의 기억이 망각을 거쳐 다시금 결백해진 연인들을 지칭하는 문장이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신작 <키리에의 노래>(슌지, 2023)(이하 <키리에>)에 대해 말하기 위해 이십 년도 다 된 영화를 떠올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 두 영화 모두 '기억과 망각'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알렉산더 포프의 시구(詩句)가 재해의 기억을 소거함으로써 당시 겪은 감정의 극치를 자비 혹은 희망으로 치환해 낸 '루카(아이나 디 엔드)'의 내면을 지칭하는 문장으로도 썩 잘 어울린다고 느꼈다.
키리에로 살아가는 루카는 노래로만 소통한다. 루카는 유년기에 동일본 대지진이라는 재해를 겪고 천애고아가 되었다. 그녀는 가급적 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 않는 것인지, 못하는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에게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아요, 노래는 가능합니다.'라는 문장을 글로 써서 보여준다. 그리고 온 가족이 뿔뿔이 쓰나미에 삼켜진 사건 당시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라고도 답한다. 이러한 진술은 거짓이 아니라 진실에 가깝다. 말하자면 <키리에>는 어떤 의미에선 페이크 다큐다. 거대한 재해를 직·간접적으로 겪은 사람들의 그때와 지금 사이, 즉 '루카'의 잃어버린 기억을 중심으로 12년의 세월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키리에>는 생존자인 '루카'가 잃었거나 인위적으로 지워버린 기억의 자리를 등장인물 각자가 증언해 조각조각 퍼즐을 맞춰보는 영화다. 이야기의 전개나 시점이 다소 복잡하고 무질서하게 느껴질 수 있다. <키리에>는 개개인이 겪은 재해의 기억과 경험을 일본 전역을 톺아보며 다양한 시점으로 진술해 맞춰 나가는 '증언영화'이기 때문이다. 인물들의 진술이 그녀를 중심으로 모이는 동안, 루카는 기억의 여백을 '모든 기도는 받아들여지고 욕망은 물러나는' 21세기식 진혼곡인 '키리에'(Kyrie(Κύριε) Eleison는 유일하게 라틴어가 아닌 그리스어로 기록된 자비송이자 미사곡이기도 하다)로 치환해 부른다. 그러므로 <키리에>는 상흔의 기억을 그러모아 음악으로 증언하는 영화다.
이름 뒤에 숨은 이름
<키리에>는 첫 씬과 에필로그 전의 마지막 쇼트를 흰 설원으로 장식한다. 카메라는 백지 같은 눈밭을 씩씩하게 헤치며 걷는 고등학생 시절의 루카와 잇코(히로세 스즈)를 먼발치에서 내려다본다. 나란히 누운 소녀들은 말없이 숨을 몰아쉬며 하늘을 바라본다. 서로를 보며 웃다가 눈을 감는다. 감은 눈 사이로 스산한 그림자가 내려앉는다. 이때 잇코가 두른 푸른색 목도리는 모노톤으로 착각할 만큼 온통 백색인 화면 속에서 유난히 선명하게 클로즈업된다. 언뜻 두 소녀는 커다란 퍼즐 판에서 유일하게 제 자리를 찾은 두 개의 조각처럼 무결하게 비춰진다. 그러나 이와이 슌지 감독은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 사이 소녀들의 시간을 완전히 찢어발긴 채 세상에 내던진 후에 보여준다. 두 장면은 같은 장면이지만, 완전히 같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는 영화 속 주요 등장인물의 대부분이 두 개의 이름을 갖고 살아가므로 같은 사람이지만, 같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첫 장면 이후 루카는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언니인 '키리에'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거리의 가수가 된다. 키리에가 된 루카는 노래가 아니면 목소리를 잘 내지 못한다. 한편 잇코의 본명은 '마오리'다. 그러나 스스로 '이치죠 이츠코'라는 이름을 짓고 그 이름을 다시 줄여 '잇코'로 지칭하며 살아간다. 두 소녀는 각자 다른 '침묵의 계기'로 인해 본인의 의지로 이름을 버리고, 긴 시간 동안 서로 헤어진다. 그리고 우연히 만나 짧은 시간을 '거리의 가수'와 '아마추어 매니저'로서 함께 보낸다.
119분으로 편집된 한국개봉판에서 영화의 중반부 잠깐 등장하고 마는 잇코의 결혼사기 상대 중 한 명인 '나미다메'(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178분짜리 언컷버전에서의 그는 영화의 결을 바꿀만큼 매우 중요한 배역을 담당한다)의 경우에도 본명은 따로 있으나 스스로 지은 이름을 사용한다. 이때 '나미다메'는 키리에로 살아가는 루카를 만난 후 자신에게 본명이 있다고 설명하며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는다. "쓸데없는 이야기였죠?"라는 대사다. 인간은 종종 기억이나 지식의 한 단면을 전체로 믿어버리는 오류를 범한다. 그러한 판단은 가끔 '양심없는 행동'이 된다. 기억이란 인간이 가진 것 중 가장 신뢰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키리에> 속에서 주인공 '루카'를 제외한 인물들, 특히 가명을 쓰는 잇코와 나미다메는 위와 같은 의미에서 좀 양심이 없다. 대학 진학의 꿈을 꾸던 마오리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 잇코로 사는 동안, 학창 시절 자신이 제일 경멸하던 인간 유형 중 하나였던 결혼사기꾼이 된다. 사람 좋아 보이던 나미다메는 키리에로서 살아가는 루카에게 현재 가장 큰 위협이 되는 인물이다. 잇코는 성을 이용해 남을 등쳐먹고 산다는 지점에서 양심이 없고, 나미다메는 잇코에 대한 화를 루카에게 성적으로 보복하려 시도했다는 점에서, 결국 미수에 그쳤다고 하더라도 양심이 없다. (한국개봉판에서 나미다메 및 루카와 관련된 씬은 전부 고스란히 삭제되었으므로 장면에 대해선 따로 부연설명 하지 않겠다.)
그러므로 나미다메가 처음 등장한 씬에서 내뱉은 "쓸데없죠"라는 대사는 전혀 쓸데없는 말이 아니다. '이름'이라는 고유명사는 개체의 존재나 종류를 특정하기 위해 명명하는 것이다. 이름은 단순한 단어가 아니다. 이름은 각자가 존재해 온 생(生)만큼이나 거대한 시간을 끌어안고 타자와 나를 구분 짓는 단어다. 이름을 바꾼 세 명은 어떤 이유에서건 과거를, 기억을, 있었던 사실을 망각하기를 원하는 인물들이다.
한편, 재해의 상흔 속에서도 이름을 유지하는 '나츠히코'(마츠쿠라 호쿠토)는 루카의 언니이자 연인이었던 키리에와 배 속의 아이를 동시에 잃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는 미성년이었던 때 키리에와 사랑이라는 이름의 일탈을 한다. 둘은 계획에 없던 아이를 갖는다. 버거운 책임감의 이유가 되었던 키리에가 실종되자 나츠히코는 그리움과 후회로 괴로워한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으로는 영영 그녀가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그는 스스로 '양심 없음'을 고백하고 자신의 고해 같은 증언을 들어주는 사람 모두에게 기도하듯 용서를 구한다. 나츠히코는 앞의 세 명처럼 기억을 망각하거나 회피하는 인물이 아니다. 두려움이라는 공포 앞에서도 기억을 보존하고 인정하며 극복하길 원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처럼 이름으로 명명되는 기억은 인간의 근본적 한계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그러나 기억은 인간이 변화될 수 있다는 것과 학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도 한다. 니체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은 종종 한 가지 행동을 하기 위해 대부분을 망각하며, 이제 생겨나야 할 권리를 챙기기 위해 자신의 배후에 있는 것에 대해 불의를 행한다. 영화 속에서 진실을 회피하고 불의를 행한 자들은 모두 그에 응당한 대가를 받는다. 앞서 말했듯 언컷버전의 나미다메는 사랑에 속았다는 사실에 분노하며, 루카에게 돌이킬 수 없는 화풀이를 시도한다. 그러나 그마저도 실패하고 남성성도 사랑도 잃는다. 결과적으론 루카를 궁지에 빠지게 했던 잇코 또한 삶의 희망을 인과적으로 거세당한다.
영화의 말미, 잇코가 단말마의 비명 속에서 눈을 감기 전 불리웠던 이름이 '마오리'라는 것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이 장면은 상처를 부정하기 위해 기억 덩어리인 이름으로부터 도망쳐 온, 재해의 상흔을 마주보지 않고 극복의 의지를 외면하는 자들에게 이와이 슌지가 내리는 의미심장한 경고일지도 모른다. 잇코가 마오리였던 시절 그녀를 감싸고 있던 명징한 파란색 목도리는 키리에로 살아가는 루카의 푸른색 원피스로, 루카가 살아가는 드넓은 하늘로 전이된다. 잇코의 푸른빛이 루카에게 전이될수록, 잇코의 몸에 깃든 푸른빛은 점점 색이 바래어 간다. 둘은 바닷가에 나란히 누워있다. 잇코는 루카에게 노래를 불러달라고 청하고, 루카는 잇코에게 고백과도 같은 노래인 '혼자가 좋아'를 불러준다. "너를 좋아했었어. 둘이 함께 있을 땐 신기한 시간이었어. 나는 나일 뿐 혼자가 좋아." 루카는 분명히 잇코와의 시간을 기억한다. 잇코와의 시간뿐만 아니라 재해의 기억도 일부 떠올린 듯 보인다. 고요하기만 한 바다의 아름다운 풍광이 화면에 보여질 때(컷어웨이Cutaway), 루카의 목소리가 겹쳐진다. "어쩌면 모두 이 바다속에 함께 있을 것 같아. 따뜻한 느낌도 든다"는 그녀의 말은 모든 걸 받아들이고 극복하기로 한 듯이 느껴진다. 그러나 이러한 시퀀스 직후 이와이 슌지는 갑작스레 바다를 모노톤으로 채색한다. 나아가 미사에서 사용하는 진혼곡, 키리에 엘레지를 삽입한다.
오래된 비명이 자비의 노래가 될 때
노래란 무엇일까. 노랫말은 꼭 명징하고 확실해야 할까. 언어가 불완전했던 과거 인간의 노랫말은 아마도 무의미한 웅얼거림에 가까웠을 것이다. 영화를 보다 보면 이러한 웅얼거림이, 말로 나올 수 없는 절규와 비명이 한데 모여 노래가 되는 장면을 가끔 만난다. 이렇게 만들어진 노래와 숏트에는 하나의 겸연쩍은 조건이 있다고 보는데, 바로 노래를 공유하는 순간만큼은 비슷한 결의 기억이나 감정을 공유한다는 점이다.
셀린 시아마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20)의 경우도 그렇다. 귀족인 엘로이즈와 화가인 마리안느는 서로 다른 계급의 여성으로서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를 갖는다. 이들 아래에는 소피라는 하녀가 위치한다. 세 여인의 인생은 분명 다른 양태를 띌 것이므로 완벽히 동일한 정서를 공유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들은 이따금 비명의 기억을 나눈다. 나눈다는 행위가 애써 위로하거나 감싸 안는 것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세 여인은 서로에게 있어 최악의 순간을 목격해도 그러한 기억을 캔버스 위에 기록할 뿐이다. 그들은 서로에게 설익은 위로를 전달하지 않는다. 다만 깊은 밤 불가에 모여, 낯선 이들이 부르는 흑인 노예의 노동요를 따라 부르는 것으로 각자의 상흔을 연대하고 위무한다. 타오르는 불꽃 사이에서 짐승의 울부짖음처럼 들리기도 하는 이 사운드는 서로가 기억하는 것은 다르더라도, 이 순간 공유하는 감정이 완벽하게 평등하고 동등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분명한 노랫소리다.
아리 애스터의 <미드소마>(2019)의 후반부에서도 이러한 조건을 가진 장면을 볼 수 있다. 주인공 대니는 사랑하는 사람의 배신을 목도하고 지독한 상실감을 겪는다. 가족을 잃고, 친구를 잃고, 연인을 잃은 절망 앞에서 오열하는 그녀를 온전히 위로하는 건 그녀의 감정과 상반되는 따뜻한 포옹이나 다정한 말이 아니다. 공동체 '호르가'의 부족원은 대니를 안아주는 대신 눈물로 얼룩진 그녀의 일그러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강하게 감싸 쥔다. 그리고 그녀와 똑같이 울부짖는다. 일말의 대화 없이 이루어지는 이 불규칙한 비명 속에서 그들은 완벽하게 평등하고 동일한 감정을 공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키리에>의 루카는 스스로 의식하지 않은 기억이나 아직 의식 속으로 들어오지 않은 기억, 즉 무의도적 기억인 '잔재'를 노래로 꺼내놓는 것처럼 보인다. 루카는 자신의 취향이나 자아가 형성되거나 분별되기 전, 너무 어린 나이에 끔찍한 재해를 겪었다. 그녀는 자신이 아는 가장 가까운 연장자 중 친언니 '키리에'의 이름과 삶을 뒤집어쓴다. 하나의 존재로서 만들어낸 기억이 부족하거나 부재하므로 루카로선 말을 할 수 없다. 그러나 키리에로는 노래할 수 있다. 언니인 키리에는 루카에겐 없었던 자아가 있고, 취향이 있고, 의지가 있는 하나의 완성된 존재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덜 자란 루카는 '키리에'의 이름 뒤에 숨었다. 생존자인 루카가 고작 한두번 만난 게 전부였던 언니의 연인 나츠히코를 무작정 찾아간 이유도 아마 거기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루카가 노래로 베푸는 자비는 사실 키리에의 자비이고 인격이다. 루카의 무의식 속 잠재되어 있는 오래된 비명들은 키리에의 이름 뒤에서만 겨우 터져 나오는 노랫말이다. "하나의 도시는 여러 종류의 인간들로 구성된다. 비슷비슷한 인간들은 도시를 이루어내지 못한다."(sennett 1977)는 말을 증명하듯 루카가 거리에서 만나 관찰하고 수집한 개개인의 재해 경험과 기억은 서로 다른 크기와 모양을 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들의 상흔은 루카가 간직한 상처와 영원히 같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마음을 치유하는 완전한 위로와 공감은 불가능하다. 루카는 이미 그 사실을 안다. 때문에 타자에게 위로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루카는 그저 영원히 다독여지지 않는, 결국에는 개인의 상실일 뿐인 재해의 기억을 노래하기로 마음먹는다.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극장을 가득 채운 루카의 목소리는 나로서는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재해와 기억 사이의 여백을 노래하므로 그저 푸르고 시리고 아름다워서 잔인했다. 루카가 끝까지 키리에로 살아가도, 스스로 가둔 이름 속에서 늘 혼자라고 하더라도 외롭지 않기를 가만히 바랐다. '키리에'로 대표되는 모든 인간들에게 내리쬐는 햇빛이 무결하고 따뜻하기를, 루카를 감싼 푸른색이 마치 파랑새처럼 안전하고 좋은 길로만 그녀와 우리를 인도해 주기를, 부끄럽지만 좀 간절하게 빌었다.
※ 추신
필자는 지난 10월 초에 있었던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이 영화의 오리지널버전(178분)을, 10월 24일 진행된 언론배급시사회에서 한국개봉용으로 편집된 일반버전(119분)을 둘 다 보았다. 이 평론은 일반버전을 기준으로 작성되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두 영화는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나 정서의 결이 아주 다르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이와이 슌지 감독은 일반버전을 보고 오리지널버전도 봐줬으면 좋겠다는 메시지를 덧붙였다. 또한, 오리지널버전의 몇몇 장면에 대한 필자의 질문에 <키리에의 노래>는 <하나레 고제 오린>(시노다 마사히로, 1977)(한국명 <오린의 발라드>)의 오마주라고 강조하며 나라마다 정서와 문화가 다르니 그 영화를 꼭 봐달라고 당부했다. 서울로 돌아와 <오린의 발라드>을 봤고, 오리지널버전은 이 작품의 오마주가 분명히 맞았다는 점을 밝히고 싶다. 이에 대한 감상은 일반버전을 기준으로 쓴 이 평론에선 따로 언급하지 않겠다. 다만 이 글을 읽은 누군가가 오리지널버전에 관심이 생긴다면, 나 또한 마찬가지로 꼭 <오린의 발라드>도 같이 봐주길 권유하고 싶다.
[글 이지혜 영화평론가, leehey@ccoart.com]
키리에의 노래
KYRIE
감독
이와이 슌지Iwai Shunji
출연
아이나 디 엔드Aina the End
히로세 스즈Hirose Suzu
마츠무라 호쿠토Matsumura Hokuto
쿠로키 하루Kuroki Haru
무라카미 니지로Murakami Nijiro
마츠우라 유야Matsuura Yuya
수입 미디어캐슬
배급 이화배컴퍼니
제작연도 2023
상영시간 119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3.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