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는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에서』, 파트릭 모디아노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중 가장 기대한 작품은 무려 31년 만에 복귀한 '빅토르 에리세'의 <클로즈 유어 아이즈>(2023)다. 빅토르 에리세는 스페인 영화의 전설적인 감독으로 원래는 영화평론가로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50년 가까이 감독으로 활동하면서 겨우 세 편의 장편 영화만 남겼다. 대신 그것만으로 그는 거장으로 불리기 충분하다. 정교하고도 아름다운 이미지를 조탁하고 그 안에 체계적인 은유를 정확히 담는 능력은 유일무이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소설의 문법보다는 시의 문법에 더 가까운 방식으로 무아지경을 그려낸다. 스페인 내전과 프랑코 독재 시대의 억압을 은유로 그려낸 <벌집의 정령>(1973)은 여전히 걸작으로 불린다. 이 영화는 훗날 기예르모 델 토로, 페드로 알모도바르 등 차세대 스페인어권 영화 거장의 자양분이 되었다. 이후로도 프랑코 독재 정권의 상흔을 암시한<남쪽>(1983), 매년 모과나무를 그리는 스페인 화가 안토니오 로페즈를 담은 다큐멘터리 <햇빛 속의 모과나무>(1992)까지. 그는 10년 단위로 영화를 찍었다. 이를 고려해보았을 때, '31년 동안 이어진 그의 침묵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를 가늠하면서 영화를 기다렸다. 탐정 영화라 볼 수도 있는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마법을 부린 듯이 아름다우며 여전히 그의 공력이 두드러지는 영화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은 영화 속 영화로 시작한다. 영화감독 미겔 가레이(마놀로 솔로)가 1990년에 촬영한 두 번째 영화<작별의 시선>의 도입부가 느닷없이 상영된다. 16mm 필름으로 찍힌<작별의 시선>은 1947년 프랑스 남부를 배경으로, 프랑코의 독재를 피해서 망명한 한 남성이 영화감독(훌리오 아레나스)을 불러서 상하이로 가서 생이별한 딸을 물색해달라고 의뢰하면서 시작하는 모험 영화다. 이 영화는 완성되기도 전에 훌리오 아레나스(호세 코르나도)의 실종으로 제작이 중단되었고, 미겔 가레는 친구의 실종에 충격받은 나머지 감독을 은퇴한다. 영화는 훗날 미겔이 2012년 실화 범죄를 다루는 TV프로그램 <미제 사건> 제작진에게 훌리오 아레나스의 행방에 대한 인터뷰를 의뢰받으면서 시작한다. 미겔은 훌리오 아레나스와 함께 일한 편집 감독, 그의 딸 아나 아레나스(아나 토렌트) 등과 만나며 훌리오 아레나스의 자취를 발견하려고 애쓰지만 실패한다. 어느 날 미겔은 훌리오 아레나스가 한 요양원에 산다는 이야기를 접한다. 훌리오는 기억상실증에 걸려서 더는 자신의 과거는 물론 이름까지 기억하지 못한다. 미겔은 훌리오 아레나스와의 추억을 되살려 그의 기억을 되돌리려고 하나 거듭 실패하고 만다. 훌리오를 아나와 만나게 하지만 그의 기억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2022년에 제작된 영화인데도 2012년을 배경으로 한다. 이는 영화가 찍힌 시대의 역사적인 맥락과 상응한다. 그가 지금껏 찍은 영화는 동시대성을 내포한 영화라 봐도 과언이 아니다. 1970년대에는 프랑코 정권의 독재의 억압을, 1980년대에는 독재의 상흔을, 1990년대에는 동독의 합병을 알리는 나레이션으로 냉전이라는 거대 담론이 사라진 시대에서 예술가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질문했다. 2022년에 2012년의 이야기를 찍는 것은 지금껏 그가 찍은 영화와는 상반된 행보라고도 볼 수 있다. 어쩌면 이는 감독의 전달 수단일 수 있다. 영화는 전적으로 속도감이 느린 편이며, 서브플롯도 복잡한 편은 아니다. 그저 미겔이 <작별의 시선>을 기억하는 여러 인물을 인터뷰하러 다니는 것이 전부다. SNS로 인해서 모든 이가 실시간으로 밀착된 시대에서는 누군가 기억상실로 사라져서 물색한다는 설정 자체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감독은 TV가 여전히 대중매체인 시대로 되돌아가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래야만 훌리오가 여전히 미스터리를 품은 존재로 남아 있어서다. 어쩌면 심연에 가까운 인간 실존의 탐구는 2010년쯤에 끝난 것일지도 모른다.
이 미스터리는 영화의 문제의식과도 이어진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에 가장 가까운 작품은 영화가 아니라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한 프랑스의 작가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로 보인다. 그의 소설은 무의식적으로 연상되는 기억을 탐구한 프루스트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에서』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남성 기의 이야기다. 기는 물론 그의 본명이 아니라 그를 발견한 사립 탐정이 그에게 지은 이름이다. 본명은 물론이며, 과거마저 사라진 남성은 파리 곳곳을 헤매며 제 과거를 물색하려고 한다. 프루스트는 불현듯 생각나는 기억을 토대로 과거를 탐구하기에 기억이 감각적 이미지로 전환되어서 드러난다. 파트릭 모디아노는 추리 소설의 문법을 빌려서 공간과 만나는 이에 따라서 기억이 되살아나게끔 한다. 이는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아버지의 신원 불명, 한곳에 머무르지 못했던 가정환경, 청년기의 방랑)과 이어진다. 미겔이 훌리오를 물색하는 과정, 기억상실증에 걸려서 이름을 상실한 훌리오 등 여러 설정은 명백히 파트리크 모디아노의 문법을 생각나게끔 한다. 빅토르 에리세도 미겔을 통해서 마드리드 곳곳을 헤매며 개인적 기억을 탐구하기에 이른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개인적 기억의 탐구를 두 가지 주제를 포갠다. 하나는 빅토르 에리세 감독의 사적인 이야기다. 영화 곳곳에서 빅토르 에리세는 그간 자신이 찍은 작품이 인용하면서 자기반영성을 드러낸다. 특히, 영화의 주연 중 한 명인 아나 아레나스를 연기한 아나 토렌트의 경우, 그의 <벌집의 정령>에서 주연으로 출연한 배우이기도 하다. 영화 속 영화인 미겔의 <작별의 시선>을 둘러싼 맥락은 제작 과정에서의 트러블로 촬영이 중단되었다는 점에서 그의 전작인 <남쪽>을 생각나게끔 한다. <작별의 시선>도 마찬가지로 빅토르 에리세가 촬영한 영화를 생각나게끔 한다. 창 너머로 빛이 어슴푸레 들어오는 연출은 <벌집의 정령>때부터 이어진 그의 인장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의 엔딩에서 이 영화가 폐쇄된 극장에서 상영되는 것마저 <벌집의 정령>에서 프랑켄슈타인 영화가 상영되는 순간과 같다. 다만<벌집의 정령>과 달리 창문에는 프랑코 독재 정권의 억압을 은유하는 육각형의 창틀이 없다. 또한 영화 속 인물은 <벌집의 정령>과 <남쪽>과 달리 프랑코의 독재 정권에게서 망명했다는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내뱉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더는 복잡하고도 체계적인 은유로 독재를 이야기하지 않아도 되는 세계가 된 것이다. 영화 속의 <작별의 시선>이 감독의 영화와 미장센이 비슷하면서도 영화 안은 왜인지 텅 빈 듯하다. 슬픔의 왕이라는 저택의 이름까지도 모두 1차원적인 표현으로 보인다. 영화는 곳곳에서 영화가 죽어간다는 이야기를 직유로 건네기도 한다.
빅토르 에리세는 더는 은유를 쓰지 않는다. 되려 주제를 존 포드의 <리오 브라보>(1959)의 노래 '나의 라이플, 나의 당나귀, 그리고 나'를 인용하면서 드러내기까지 한다. 이러한 직유는 은유가 더는 관객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구시대의 유물로만 보인다는 것을 체감한 감독의 호소로도 느껴지기도 한다. 감독은 미겔과 자신을 포개서 더는 영화를 찍을 동력이 없는 그의 처지를 드러낸다. 다소 우울한 감정선 아래서도 감독은 <햇빛 속의 모과나무>의 안토니오 로페즈처럼 영화에 탐미하면서 관객을 설득하려고 한다.
이는 시네마의 죽음이라는 시대적 상황과도 겹친다. 폐쇄 직전의 필름 현상소에 간다든지, 문 닫는 극장에 간다든지 하는 식으로 영화가 사라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넌지시 드러낸다. 미겔은 35mm 필름을 다루는 셀룰로이드 아키비스트로 살아가고 있다. 이는 필름이 아카이빙으로만 그치는 세계에 대한 한탄으로 보인다. 사라진 영화의 정령인 훌리오 아레나스는 TV쇼의 흥밋거리로만 소비된다. 빅토르 에리세는 시네마의 죽음이라는 시대적인 상황에 굴하지 않고 필름 영화를 찬미한다. 미겔은 훌리오의 기억을 되살리는 최후의 수단으로 필름 영화 상영을 택한다. 맥스가 발굴한<작별의 시선>의 미공개 릴이다. 거기서 미겔의 편집 감독이기도 한 맥스는 "칼 드레이어 이후의 영화의 기적은 없다"라는 한탄으로 고전적 영화가 사라져간다는 사실을 넌지시 언급한다. 끝에 이르러 훌리오의 기억이 돌아온 것인지 관객은 끝까지 알지 못한다. 감독은 기적이라는 단어를 언급함으로 혹시 그의 기억이 돌아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남겨둔다. 훌리오가 눈을 감고 다시 뜨는 순간에 기적이 생길 것이라는 기대는 영화 곳곳에 드러난다. 이 영화의 태도가 2020년대에 이르러서 쏟아진 여러 거장의 자전적 영화 중 가장 보수적인 태도이기는 해도 이 영화가 주는 감동을 해치지는 않는다.
빅토르 에리세는 회화적 프레임을 이어서 영화를 연출한 감독이었다. 감독은 프레임을 디졸브로 겹친다든지, 이미지의 유사성을 통해서 편집의 동선을 마련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하나의 에피소드, 혹은 의미 단위를 지니는 하나의 장면이 끝날 때마다 눈을 감았다 뜨듯이 페이드 아웃-인을 사용한다. 이는 장면 사이의 단절감을 강화하기도 하며, 모디아노가 기억을 그려내는 방식을 그려내는 데에도 효과적이다. 이 기억을 그려낼 때 그는 필름으로 찍은 그간의 영화와는 다르게 디지털카메라를 쓴다. 렘브란트의 회화를 보는 듯한 미장센, 고정된 카메라로 풍경을 드러내는 느릿하고도 차분한 연출을 중심으로 한 그의 필모와는 단절된 듯하다. 대신 그는 다큐멘터리를 연상케 하는 핸드헬드와 극단적인 클로즈업 등으로 현장감을 생생히 되살린다. 회화가 생각나는 풍경이 사라진 자리에는 쇠락한 인간의 표정이 있다. 영화 속 모든 인간의 얼굴이 마치 칼 드레이어의 <잔다르크의 수난>(1928)를 생각나게끔 한다. <작별의 시선>을 보다가 애상에 잠겨서 눈을 감은 훌리오의 얼굴도 마찬가지다. 훌리오가 기억을 회복하든 아니든 상관은 없을 듯하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를 본 관객에게 영화의 기적은 충분히 전달된 듯하니까. 영화 속 이미지가 훼손 불가능한 필름이야말로 실존의 미스터리를 담을 수 있으므로.
[글 김경수 영화평론가, rohmereric123@ccoart.com]
클로즈 유어 아이즈
Close Your Eyes
감독
빅토르 에리세Victor Erice
출연
마놀로 솔로Manolo Solo
호세 코로나도Jose Coronado
아나 토렌트Ana Torrent
페트라 마르티네스Petra Martinez
마리아 레온Maria Leon
헬레나 미쿠엘Helena Miquel
안토니오 드첸트Antonio Dechent
솔레다드 빌라밀Soledad Villamil
히네스 가르시아 밀란Gines Garcia Millan
제작연도 2023
상영시간 169분
공개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