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예술로 다른 방식의 삶을 이야기하다
[Interview] 예술로 다른 방식의 삶을 이야기하다
  • 함윤정
  • 승인 2023.10.24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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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더 드리머> 아나이스 뗄렌느 감독

"동료 작가 및 감독 여러분, 어떤 인공지능도 만들 수 없는 독특한 서사를 만들어 나갑시다." 장편 데뷔작 <더 드리머>로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은 아나이스 뗄렌느(Anaïs TELLENNE) 감독이 올해의 '플래시 포워드 관객상'을 수상했다. 이 상을 '작가주의적 영화의 전망에 대한 믿음'으로 여긴 그는 감격스러운 소회와 함께 동료들을 향한 메시지를 외치기도 했다. 독특한 동시에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이야기, 곧 '좋은 의미로서의 대중영화'를 지향한 그에게 관객의 투표로 받은 이 상의 의미는 무엇보다 값졌으리라.

<더 드리머>의 주인공 라파엘은 사랑하는 여인이자 예술가인 가랑스를 위해 기꺼이 작품의 모델이 된다. 현실적인 시공간적 배경, 동화적인 드라마투르기, 절제된 풍경과 서정적인 음악까지. '사랑'이라는 보편적 소재로 관능적인 현대판 동화를 완성한 <더 드리머>는 그렇게 많은 관객의 이목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된 피에트로 마르첼로의 <스칼렛>에서 나무를 깎던 '라파엘 티에리(Raphaël Thiéry)'의 투박한 손길을 기억하는 이에게는 진흙으로 빚어진 그의 형상이 더욱 특별한 감흥을 주었을지도 모르겠다. 지난 10월 12일, 부산국제영화제의 마지막 인터뷰 일정을 아나이스 뗄렌느 감독과 함께했다. 이야기의 힘을 믿고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그의 마음이 또 한 번 좋은 영화가 되어 세상에 전해지길 바란다.

 

아나이스 뗄렌느 감독 ⓒ 부산국제영화제

함윤정

배우로 경력을 시작해 작가와 연극 연출가로 활동했다고 들었다. 영화 연출에 도전한 계기가 있나.

아나이스 뗄렌느

원래 연극을 공부했는데, 이론과 실무를 함께 배우다 보니 자연스레 '프랑스 국립 연극단'에서 일을 시작했다. 배우로 영화와 시리즈물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금세 카메라 앞에 서는 일이 불행하게 느껴졌다. 나의 자유를 보장받지 못하고 누군가의 지시에 무작정 따라야 한다는 점이 괴로웠다. 그래서 직접 창작에 도전하고 싶었는데, 막상 이직할 기회가 쉽게 생기지 않더라. 그러던 중 영화를 촬영하다 시속 70km로 달려오는 차량에 치이는 사고를 당했다. 이때 받은 보상금과 모아둔 돈, 갑자기 생긴 시간 덕에 오히려 마음에 담아둔 각본 집필과 연출 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프랑스에는 '나쁜 일 후에 좋은 일이 온다'라는 속담이 있다. 내 경우도 그렇게 일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함윤정

작품 전반에서 동화적인 분위기가 풍긴다. 극 중 배경인 저택의 지리적 특성이 이러한 느낌을 살린 듯한데, 로케이션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달라.

아나이스 뗄렌느

<더 드리머>의 촬영은 '부르고뉴-프랑슈-콩테(Bourgogne-Franche-Comté)'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사실 나와 라파엘 티에리 배우 모두 이곳 출신으로, 각본을 집필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꼭 여기서 이야기를 펼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지역은 숲이 매우 무성하고 지금까지도 프랑스의 유산이 잘 보존된 곳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산업이 쇠퇴하며 경제 활동이 좀처럼 이뤄지고 있지 않은 곳이기도 하다. 갈수록 인구가 줄어들며 버림받은 땅이 된 건데, 오히려 그래서 시간이 멈춘 듯한 특유의 매력적인 분위기가 생긴 것 같다.

함윤정

단편 <19 juin>(2018), <Le Mal bleu>(2018), <Modern Jazz>(2019)에 이어 첫 장편 <더 드리머>까지, 당신의 모든 영화에 '라파엘 티에리'가 출연한다.

아나이스 뗄렌느

'라파엘 티에리'와는 거의 10년째 일을 함께한 사이다. 그는 언제나 내게 큰 영감을 주는 존재다. 그의 이미지는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영화'의 본질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잔인하고 무섭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자상하고 부드러운 이미지가 역설적으로 공존하는 배우이지 않나. 무엇보다 그가 가진 '아름다움'과 '추함'이라는 이중적 이미지의 대비에 큰 매력을 느낀다. 물론 다음 작품에서도 함께할 예정이고, 쉽게 헤어지지 않을 인연이라고 생각한다.

 

ⓒ 부산국제영화제

함윤정

가랑스는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흘린 눈물을 병에 모아 이를 전시한다. 분출되는 감정의 한복판에서 자신과 거리를 두고 이를 '예술'이란 형식으로 승화시키는 건데, 이러한 창작 방식에 관한 감독 본인의 의견이 궁금하다.

아나이스 뗄렌느

가랑스 캐릭터를 만들 때, 저명한 두 명의 현대 예술가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바로 '소피 칼(Sophie Calle, 1953~)'과 '마리나 아브라모비치(Марина Абрамовић, 1946~)'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사생활을 예술의 소재로 삼는 예술가들이다. 그들의 방식이 매우 놀라우면서도 한편으로는 황당해 보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이를 단순히 우스꽝스럽다고 말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상황으로 인해 벅찬 감정을 느끼면서도, 그 순간 감정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이를 예술의 재료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 예술가로서 굉장히 큰 강점이라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방식이 감정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장치라고도 여긴다.

함윤정

극 중 가랑스가 조각상을 만드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원재료를 깎아내는 기법이 아니라, 진흙을 어루만지길 반복하며 형상의 결을 세심하게 조정하지 않나. 그 손길이 마치 무용처럼 느껴졌는데, 해당 장면의 리듬을 구현하는 데 상당히 공을 들였을 것 같다.

아나이스 뗄렌느

촬영지가 진흙으로 굉장히 유명한 곳이라 해당 기법을 선택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우선, 진흙 특유의 감각적인 질감이 가랑스에 대한 라파엘의 마음을 잘 표현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 질료를 통해서는 내가 원하는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되더라. 특히 가랑스가 라파엘을 모델 삼아 조각상을 만들 때, 진흙으로 전달되는 손길이 '리비도(Libido)'와 '섹슈얼리티(sexuality)'를 전달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무용에 관해 언급했는데, 사실 나는 무용 전공자이기도 하다. 조각상을 만드는 모습을 영화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한정된 프레임 내에서 몸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많이 고민했다.

 

ⓒ 부산국제영화제

함윤정

극 중에서 라파엘이 연주하는 백파이프 소리가 상당히 매력적이다. 주인공을 전통 악기를 다루는 인물로 설정한 이유가 있을까.

아나이스 뗄렌느

라파엘이란 인물을 만들 때, 실제의 '라파엘 티에리'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의안을 착용한다는 점뿐 아니라 백파이프를 연주하는 것도 그로부터 차용한 특징이다. 나는 실제 인물로서 '라파엘 티에리'가 갖고 있는 그만의 정체성을 배반하고 싶지 않았다. 라파엘이 수영장에서 연주한 곡 역시 배우가 직접 작곡한 음악이다. 또한 극중 인물인 라파엘은 대개 조용하고 말이 많지 않은 사람인데, 백파이프는 캐릭터가 말로써 표현하지 못하는 많은 것들을 대신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악기가 곧 신체의 연장선에 있는 것처럼 말이지. 더해서 라파엘과 가랑스 사이에는 매우 큰 사회적 갭이 있지 않나. 개인적으로 '예술'이 둘 사이를 잇는 교량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면 했다. 악기 연주와 작곡 등의 설정을 통해 라파엘이 또 다른 예술가로서의 가랑스와 동등한 위치에 놓일 수 있겠다고 여겼다.

함윤정

앞서 언급된, 라파엘이 수영장에서 백파이프를 연주하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그가 악기에서 입을 떼고 있을 때도 음악이 끊이질 않던데, 소리가 화면 안팎 중 어디에 있는지 헷갈리다보니 장면이 더욱 몽환적으로 느껴졌다. 이는 악기의 특성 덕인가, 연출의 효과인가.

아나이스 뗄렌느

라파엘이 연주하는 악기 '백파이프'에는 가죽으로 된 공기주머니가 있다. 연주자가 주머니에 공기를 불어넣으면 그 공기에 의해 소리가 나는 원리다. 플롯이나 클라리넷처럼 내내 불어야 소리가 나는 게 아니라, 공기주머니만 차 있으면 입을 떼고 있어도 소리가 나는 것이다. 사실 음악과 화면이 어긋나는 해당 장면의 연출에 대한 호평을 종종 듣는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는 연출자로서 일말의 기여도 없기 때문에 조금 부끄럽다.

함윤정

극 중 등장하는 '테라 갈리카'라는 전통음악 밴드는 실제로 존재하는 지역 음악가 집단인가.

아나이스 뗄렌느

그렇지 않다. 영화를 위해 급조한 팀이다. 다만, '테라 갈리카'의 구성원 역할을 맡은 이들은 모두 실제 음악가다. 그들 중에는 라파엘 티에리 배우와 친분이 있는 전통음악 아티스트 '디디에 그리'도 있다. 개인적으로 그가 작품에 함께해 주어 무척 감사하고 영광스럽다.

 

ⓒ 부산국제영화제

함윤정

한 명의 예술가로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바가 있다면.

아나이스 뗄렌느

나는 '사회'라는 곳이 살아가기에 결코 쉽지만은 않은 환경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이는 여기에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버겁게 느낄 수도 있다. 다른 사람들의 리듬을 따라가지 못한다거나, 배척되는 느낌을 받는다거나, 또는 외형적으로 어긋나 있다거나 한 경우에 말이다. 그런데 '예술'이란 활동을 통해서는 사회가 요구하는 상에 부합하지 않은 채 이곳에 편입된 이들을 조명할 수 있지 않나. 무엇보다 '다른 방식의 삶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이 내가 예술가로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바이다.

함윤정

다음 작품 계획이 있는지 궁금하다.

아나이스 뗄렌느

미국의 한 제작사에서 '인상주의 작가'에 대한 영화를 연출해달라는 주문이 들어와 곧 작업할 예정이다. <더 드리머>에 이어 예술 혹은 예술과 관련한 테마를 다루게 된 셈이다. 이외에도 개인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한 두 번째 장편 각본이 있다. '아름다움'과 '추함'의 대비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첫 장편의 테마에서 크게 멀어지지 않을 것 같다. 다만, 이번에는 '예술'이 아니라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할 생각이다. '무위'를 추구하기보다, 계속해서 일을 하려는 사람들의 염원 덕에 사회가 어떤 모습으로 나아가는지 보여주려 한다. 말하자면 '일에 대한 사랑'을 다루는 영화인 거지. 이 작품으로 부산국제영화제를 꼭 다시 찾고 싶다. 각본 집필에만 1년을 잡고 있으니, 아마 3년 안에는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인터뷰 함윤정 영화평론가, badasal2@ccoa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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