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화를 배제하려 한 <발레리나>의 시도 안에서 또 다른 판타지의 문제가 외면되지 않는다. 아무리 장면을 숨겨도, 그 밖의 다른 장치와 기능이 보수되어도 여성 서사, 여성 연대, 여성 대상 범죄... '여성적' 속성을 뼈대에 둔 이 영화는 몇 가지 오해를 복제한다. 지금까지 많은 여성(캐릭터와 서사)들은 범죄에 관한 경각심을 재고하거나 남성적 욕망의 폭력성을 지적한다는 명목하에, 그들의 욕망과 생각을 누르고 기어이 수동적인 피해자와 성애적 대상이 되어왔다. 이후 강도를 넘어선 분노에 휩싸이고, 연대의 과정에서 금기를 위반하여 괴물이 되는 일도 그녀들이 수행하고 분투해야 하는 무언가로 기울어져 있었다.
물론, <발레리나>가 작금의 역사를 의식하며 변화구를 형성한 부분도 있다. 범행 장면을 불필요하게 포획하지 않는다. 필요한 만큼 보여주고, 그 시선의 주인이 남성 주체임을 공고히 한다. 유죄한 남성의 폭력성을 죽음의 되갚음으로 단절하는 복수극의 형식이 주는 통쾌함도 있을 것이다. 적어도 '피해자 되기'의 과정이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형상은 없다. 그리고 죄짓고 서열 다툼하는 남성 집단과 조건 없이 연대하는 여성 집단, 성별로 정확히 반을 가르는 구도를 형성했고 서사는 그 경계를 깨부수는 여성의 움직임을 따른다. 물론, 멀리 갈 것 없이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2019), <프라미싱 영 우먼>(2020)에서 이미 봤던 것들이라는 게 앞의 요소를 가려버릴 너무 큰 걸림돌이 되어버리지만.
결국, <발레리나>는 표면의 스타일로 승부를 봐야 하는 영화가 되면서, 극소하게 설계된 사건 안에서 각종 극단의 상황에 부딪히는 여성의 판타지를 추출한다. 여기서 '인물'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성별 가르기로 접근하는 이유는, 이 영화의 세 명의 여성 옥주(전종서), 민희(박유림), 여고생(신세휘)이 남성일 때는 불가하거나 반감되던 기능을 가진 채 여성이라는 동질성만으로 간단하게 영화적 움직임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뚜렷한 죄 없이 죽기도 하고, 조건 없이 분노도 하기 좋은 대상이니까. 그리고 친구(혹은 가족, 연인)의 죽음에 분노하는 동일한 설정 안에 남성과의 대결이 펼쳐지려면 좀 더 복잡해질 수밖에 없는 집단, 공동체가 필요했을 것이다.
옥주는 여성이다. 이 단순한 사실이 피의 복수를 할 수 있는 몸이면서, 동시에 쉽게 위험해질 수도 있는 그녀를 매력적인 복수자로 만든다. 생물학적 몸 하나만으로 결핍이 분명해지므로. 남성 공동체의 장소 내부에 여성이 유입한 광경은 어울리지 않아서든 표면의 힘을 배반해서든 위태로워진다. 그러면서 그녀의 차가움은 새로운 것으로 오인된다.
굳이 빗대자면 옥주는 <아저씨>의 태식과 <악마를 보았다>의 수현의 감정선을 따른다. 고통에 즉각적으로 반응해온 모성의 눈물이 아닌 모든 행위를 마친 뒤 남모르게 흘리는 조용한 부성의 눈물을 여성의 육체에서 보려 한다. 여성적 분노와 슬픔이 가부장제에 근간한 남성적인 물리성을 갖추고 표출되는 형태. 이건 <콜>부터 감독 이충현이 배우 전종서에게서 보려 한 것이기도 하다. 그녀의 얼굴 근육이나 골격의 움직임은 날 것 그대로의 동물의 무언가로 수식되곤 했다. 그중 가장 근접한 동물은, 다름아닌 인간 남성이다.
그리고 이 간극은 두 여성의 우정을 판타지화하는 데 적극적으로 쓰인다. 무감하고 절제된 옥주와 가냘프고 사랑스러운 민희의 우정은 남성 사이에서 발견되지 않는 무언가이다. "꼭 복수해줘! 왠지 너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 게임 퀘스트 서문 같은 이 순박하고 명랑한 민희의 유언은 여성의 죽음(여성 대상 범죄로 인해 발생한)에 우정, 사랑, 유대와 연대를 너무 말랑하게 낙후시킨다.
몽환성이 짙은 우정은 지극히 현실적인 폭력마저 판타지로 만든다. 남성과 남성 사이의 우정엔 주로 분단과 이념 갈등, 구체적인 국가와 사회와 연관되고 정치적인 상황이 개입되었는데, 여성들은 그걸 벗어나 개인화된다. 사회 고발적인 내용이 연계되어도 개인적인 사연만 불거져 있다. 각자의 비극이 극심한 나머지 둘 중 하나는 죽거나 사회에서 배제되어야 하는, 그래서 연대는 위험을 수반하는 무언가 된다. 어느새 <성적표의 김민영>(2021)이 보여준 우정이 특이한 것이 되어버렸고, 급기야 지금의 관객들은 <고양이를 부탁해>(2001)로 회귀한다. 현실의 연대는 더욱 불가능해지고, 사랑과 우정은 알 수 없는 무언가로 변모한다.
무엇보다 이상한 건 옥주의 욕망이 희미하다는 점이다. 그는 같은 여성이란 이유로 분노한 것이 아니다. 범죄 사실에 대해 여고생의 가르침을 받는 건 외려 옥주다. 그녀에겐 여성인 민희와의 우정이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또 그녀는 강도 무리에 뛰어들어 기꺼이 남성 종업원을 난관에서 빼내어 주기도 하는 경호원으로서의 본성이 자기 목숨보다 앞선 존재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녀의 복수는 건조한 인생을 재밌다고 느끼게 해준 상대에 대한 최선의 애도인가. 혹은 인생의 전환점을 거쳐 도달하는 자기 구원의 맥락인가. 그도 아니면 여고생의 말 "언니가 올 줄 알았거든요. 제가 기도했어요", 그 기도에 응한 아무런 욕망 없이 그저 신격화된 표상으로 존재한다.
<발레리나>는 '옥주의 욕망은 애초에 쓸모없다'고 여겨버린 영화다. 옥주는 유독 여성에게 강조되었던 '(으)로 되기'의 행로를 이어받아 분투의 이미지로 실재할 따름이다. 욕망이 입체적이지 않기에 관객을 매혹하는 아름다운 도구에 불과하므로.
[글 변해빈 영화평론가, limbohb@ccoart.com]
발레리나
Ballerina
감독
이충현
출연
전종서
김지훈
박유림
신세휘
박형수
제공 넷플릭스(NETFLIX)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93분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공개 2023.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