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체제를 대표하는 '교황령'은 19세기에 이르러 권세가 급속도로 꺾인다. 당시에 프랑스 혁명, 산업혁명 등 '현대성'의 초석을 닦은 사건이 발발하였고, 이를 가능케 한 계몽주의, 합리주의 등의 이념이 태동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황청은 자신들의 몰락을 가만히 손 놓고 구경만 하진 않았다. 그들은 힘을 과시하고 세력을 넓히기 위해서 '유대인 아동 납치'를 주도하였는데, 이 중 역사학자 '데이비드 I. 커처'가 연구한 『모르타라 납치사건』이 제일 유명하다. 마르코 벨로키오의 신작 <납치>는 이를 영상화한 작품이다.
1939년 보비오 태생의 마르코 벨로키오는 오늘날 이탈리아 영화를 대표하는 노장 중 한명이다. 그의 영화는 자국이 낳은 위대한 천재 '카라바조'의 유산을 계승하는 '키아로스쿠로'(강렬한 명암대비를 자아내는 암흑양식)와 리드미컬한 '편집'이 도드라진다. 이러한 연출이 승화하는 소재는 '기억'이다. 쌍둥이로 태어난 벨로키오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던 소중한 형제의 자살을 막을 수 없었다. 그래서 벨로키오는 형제가 보존되어 있는 기억에 푹 빠지곤 하였는데, 이 자전적인 경험을 영화에 반영한다. 벨로키오의 영화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다들 영광스러웠거나 권세를 누렸던 과거를 현재에 재현하려한다. 여기서 사건이 발생한다. 누구에게나 다 똑같이 펼쳐진 현재와 달리, 각자가 회고하는 과거는 모두 제각각이다. 이에 몸은 현재에 똑같이 속하면서도, 정신은 서로 다른 순간을 바라보며 오해와 착오, 배신 등이 발생한다. 벨로키오는 바로 이 소동을 어둠 속에 파묻혀 있는 무언가를 취사선택하는 키아로스쿠로의 강렬한 '하이라이트', 잦은 '컷'에 반영한다.
<납치> 또한 벨로키오가 그간의 작품들처럼 빛과 어둠이 확연하게 구분되어 있다. 영화는 에두가르도(유년기 '에네아 사라', 청년기 '레오나르도 말테세')에게 몰래 세례를 준 하녀, '안나 모리시'(오로라 카마티)의 '시점 숏'에서 시작되는데, 맨 처음 안나는 어둠 속에 숨어 있다. 이후 빛이 풍부한 복도로 당당하게 걸어 나와서 연인과 입맞춤한다. 안나는 당대 교황령에서 신념을 훤히 드러내도 지탄받지 않는 '가톨릭교도'이며, 더욱이 교황령을 보호하기 위해 파견된 군인과 교제중이다. 즉 공식적이고 합법적인 '양지'에 속하는 그녀의 모습은 봐도 좋은 것이라는 듯 적나라하게 밝혀져 있다. 이후 키스를 마친 안나가 은밀하게 어둠 속으로 향한다. 거기서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에두가르도에게 유대교식 세례를 주는 장면을 목도한다. 그 장면은 슬쩍 열린 문틈 너머로 몰래 훔쳐보는 듯한 '관음적인 구도'이며, 겨우 드러난 전경조차도 어둠 속에 감춰진 '풀숏'이어서 형체가 잘 보이지 않는다. 해당 숏이 어둡고 흐린 이유는 가톨릭 문화가 양지인 이상, 자연스럽게 유대교 문화는 '음지'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피우스 9세(파올로 피에로본)가 에두가르도에게 "유대인은 그리스도를 살해한 죄인이기에 세례로써 회개해야 한다"라고 세뇌하듯, 가톨릭교도가 다수인 사회에서 철천지원수인 유대인은 죄인으로서 해를 입지 않고자 가톨릭교도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어두운 곳으로 숨어든다.
벨로키오는 영화 내내 주류 문화이자 종교, 이념으로서 가톨릭을 환하게 비춘다. 성부인 태양, 성자의 빛, 성령의 열이 종합된 '촛불'이 가톨릭교도들을 훤히 밝힌다. 언제나 빛나는 그들은 타인을 밝히는 특권까지 지닌다.
영화 초반 모르타라 가족의 집에 교황청 헌병대가 들이닥친다. 그들은 모르타라 식구들의 이름을 일일이 호명하며 누가 유대인이고, 누가 세례를 받았는지 깐깐하게 색출한다. 이들은 개종자에게는 혜택을, 유대인에게는 차별을 공식화한다. 그나마 당대 유대인들은 영화에서 언급되는 '로스차일드 가문'처럼 한 나라의 재정을 쥐락펴락할 수 있을 정도의 재력을 갖추기 시작했기 때문에, 부조리한 법을 '뇌물'로써 완화하기도 했고, 이에 모몰로(파우스토 루소 알레시)가 유대인 공동체와 토의를 할 때는 빛이 꽤 환하게 든다. 반대로 빚을 갚지 못해 유대인에게 압박을 받아 허덕이는 교회가 어둡게 처리된다. 하지만 그런데도 여전히 유대교는 유럽 내에서 음지문화였다. 이에 영화에선 유대인 꼬마들이 꼭꼭 숨어서 색출당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놀이 '숨바꼭질'이나, 취침 기도를 어둠 속에서 하는 등 '그늘'로 당대 유대교의 입지를 드러낸다.
19세기 교황령에서 핍박받던 유대인들의 삶을 가시화하는 연출은 조명에서 그치지 않는다. 편집과 촬영도 반영한다. 영화의 도입부는 '롱테이크'에 가깝다. 즉 하나의 시퀀스는 긴 테이크로 구성되어 '컷', 곧 잘림이 없거나 매우 드물다. 이로써 도입의 숏은 '항구적'이고 '안정적'이었다. 롱테이크가 유지될 때는 안나가 가톨릭교도로서의 일상을 영위할 때다. 이런 그녀가 유대인들의 세례를 은밀하게 목도한다. 그러자 유대교식 세례가 담긴 롱테이크는 다급하게 잘려나가고 다음날, 어딘가에 바삐 방문하는 안나가 담긴 숏이 대신 이어진다. 상점으로 향한 안나는 상인 레포리에게 "아픈 에두가르도가 세례를 받지 않고 죽으면 어떻게 되느냐", '세례 하는 법' 등을 캐묻는다. 즉 이어지는 것은 가톨릭이요, 잘려나가는 것은 유대인이다. 유대교가 잘린 이후 대신 이어 붙여지는 것은 가톨릭교도들이 유대인을 개종하려는 합법적인 빛의 폭력이다.
모르타라 가족의 집에 헌병대가 들이닥친 숏 또한 롱테이크다. 더욱이 헌병대가 들이닥치기 바로 직전, 유대인 가정의 일상을 담고 있던 시퀀스는 컷이 아주 잦았기 때문에 더욱 극적인 대비를 이룬다. 해당 시퀀스에서 아이들은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는데, 숨었다가 발각될 때마다 컷이 발생한다. 즉 양지에서 안정적으로 밝혀져 있는 가톨릭교도와 달리, 유대인들은 박해받지 않고자 음지에 숨어있는데, 이조차도 색출하려는 교황청의 서슬 퍼런 눈초리가 숨은 상태를 잘라내며 유대인은 결코 롱테이크로써 연속될 수 없다. 물론, 모몰로가 헌병대에게 순순히 에두가르도를 내어주지 않아 교황청이 지속하고자 하는 롱테이크가 급박하게 중단된다. 심지어 교황청의 권위를 따르지 않는 컷은 점점 더 잦아진다. 영화 중반부에는 이탈리아 통일을 원하는 민중들에 의해서 교황령 주 중 하나인 '볼로냐'가 수복되는데, 이때 볼로냐를 점령하는 이탈리아 왕국군의 발걸음이 롱테이크에 담긴다.
반면 컷이 발생하는 숏에는 허물어지는 피우스 9세의 흉상과 수복 소식을 듣고 졸도하는 교황이 담긴다. 여기서 양지와 음지를 구분 짓는 기준인 '권력'이 드러난다. 밝히고 이어내는 양지 문화가 힘을 잃는다면, 그 세계는 더는 연속되지 못하고 어두운 음지로 숨어야 한다. 이 여파는 카메라 워킹도 변화시킨다. 초반부에 카메라 워킹은 매우 안정적이었다. 스테디캠 위에 올라탄 카메라는 온화하고도 매끄럽게 '달리 숏'과 '트래블링 숏'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매끄러운 운동을 자랑하는 숏들이 편집으로 잘려나가더니, 이후 이어 붙여지는 숏은 '핸드 헬드'로써 괴괴하게 흔들린다. 에두가르도를 떠나보낸 어머니, 마리아나(바바라 론치)가 마차 안에서 쓰러지고 미쳐가는 모습을 보여줄 때 말이다. 반면 곤돌라를 타고 강을 거쳐서 로마로 이동하는 에두가르도를 포착할 때는, 대지를 포착한 숏보다 더 안정적이다. 지상이 강보다 더 탄탄하고 안정적임에도 불구하고 음지 문화라는 이유로 흔들리지만, 끊임없이 움직이는 액체의 유동성이 출렁거리는 핸드헬드를 발생시킬 법도 한데, 양지 문화의 특권이 불안정성을 해소한다. 즉 양지 문화는 불완전한 것도 완전하게, 반면 음지 문화는 완전한 것도 불완전하게 뒤흔든다.
모르타라 가족의 집뿐만 아니라 교황청의 아이들 또한 즐기는 숨바꼭질 규칙은, 숨은 아이들이 술래가 출발한 장소로 되돌아가서 모두를 해방시켜야 한다. 에두가르도는 모르타라 가정에서는 출발지로 되돌아가서 숨어있는 형제들을 해방시키는데 실패했다. 반면 교황의 권위 아래서는 출발지로 되돌아가 떳떳하게 야외를 활보한다. 이렇게 양지 문화는 개인에게 힘을 부여하지만, 이를 거저 내어줄 정도로 너그럽진 않다. 어린 에두가르도가 개종됨으로써 교황의 권위와 힘을 증명했기 때문에 가톨릭은 소년에게 '맛있는 음식'을 건네줬고, 장성한 에두가르도가 크나큰 굴욕을 참아가면서까지 교황에게 굴종하기 때문에 더 애틋하게 취급한다. 즉 세계는 자신에게 귀속되며 이득을 주는 '도구'에게만 부귀영화를 허용하는데, 그 과정에서 일종의 죽음이 동반된다.
영화 내내 기독교와 죽음은 한 쌍처럼 묶인다. 에두가르도가 곤돌라를 타고 로마로 가는 도중 목격하는 풍경은 '장례식'이다. 이를 '십자가'를 든 신부가 집행한다. 이후 도착한 로마 교리문답의 집엔 병약한 소년 시몬이 있다. 그는 결국 병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사망하는데, 신부는 차라리 이것이 잘된 일이라고 표현한다. 심지어 성인이 된 에두가르도의 '안색' 또한 매우 좋지 않게 표현되는데, 그들은 신도들을 영광으로 인도하는 대가로 개인으로서 자아를 거둔다. 개인이 개인으로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대리인으로서 행동하게끔 세뇌하고, 이에 따른 보상을 내어줄 뿐이다. 그래서 세계 속에서 자신을 잃어가는 이들은 '떳떳했던' 기억을 그리워한다. 이들 중에는 현대화의 물결 속에서 권세를 잃어가는 교황청도 포함한다. 벨로키오는 교황이 힘을 잃어간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가톨릭에 호의적이지 않은 만큼 유대 자본의 힘을 반영하는 몇몇 언론사는 피오스 9세를 비판하는 '삽화'를 신문에 적나라하게 싣는데, 가만히 멈춰 있던 그림이 교황의 눈에 살아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즉 가톨릭을 비판하는 세력이 교황의 날카로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발이 달려 이리저리 쏘다니며 몰락을 부추긴다. 또 부동하기에 '운동으로 가득한 현실'의 모든 진실을 반영할 수 없던 삽화는, 이제는 발이 생겨 운동함으로써 현실을 대체하기에 이른다. 이후 피우스 9세는 꿈을 꾼다. 유대인들이 제 남근을 '할례'하는 악몽을 말이다. 이렇게 피우스 9세는 유대 자본이 교황청이 잠식하는 사태를 두려워한다.
이에 교황의 힘이 아직 건재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유대인 아동 납치를 변호하고, 심지어 볼로냐가 수복되자 에두가르도에게 '견진성사'를 내리는 등 가톨릭의 힘을 더 우악스럽게 과시한다. 여기서 볼로냐에서 진행되는 에두가르도 납치 재판과 로마의 견진성사가 '교차 편집'되어 하나의 시퀀스를 이루는데, 서로에 의해 잃어버린 영광을 되찾으려는 강한 반발과 아집이 편집에 반영된다. 납치 재판이 교황령 숏을 자르고, 견진성사가 담긴 숏이 볼로냐를 촬영한 숏을 중단하며 자신들을 이어내는 등 말이다. 그중 유대인의 회고는 실패로 귀결되고, 교황의 집착은 절반의 성공을 거둔다. 그 이유는 영토나 언어뿐만 아니라, 기억마저도 통합되지 못하는 유대인의 '디아스포라'에 있다. 가톨릭과 달리 유대인들은 좋았던 '공동의 기억'으로 똘똘 뭉치지 못한다. 당장 성인이 된 에두가르도는 자신을 구출하러 온 형 리카르도(사무엘레 테네기)와 반목한다. 리카르도는 가족으로서 좋았던 유대인의 기억을 재건하려 하는 반면, 에두가르도는 납치된 이후 교황 밑에서 지낸 기억을 찬란하게 여긴다. 가령 어떤 이는 유대인의 자긍심을 영광스럽게 평가하는 반면, 어떤 이는 보편적인 세계 속에 편입된 기억을 명예로 삼는다. 둘의 선호하는 기억이 상반된 이유는 유대인에겐 그 어느 기억도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족과 함께한 추억은 물질적으로 빈곤한 반면, 교황령에 복속된 과거는 정신에서 굴욕적이다. 가톨릭이 물질적 영광과 주체적인 자긍심 둘 다 가졌던 것과 달리, 유대인은 어느 하나가 좋으려면 다른 한 쪽을 포기해야만 했다.
에두가르도는 좋았던 것들 중 어느 하나를 온전하게 선택하지 못한 채로 미로를 헤맨다. 피우스 9세가 사망했을 때 교황을 '돼지'라 비난하는 무리에 잠시 동참하다가도, 마리안느가 사망하기 직전엔 그녀에게 세례를 시도하니 말이다. 결국, 유대인들은 어느 것도 완벽하게 밝히거나 이어내지 못한다. 현재와 과거, 그 어디에도 정착할 수 없는 역사와 기억이 그들을 앞으로도 와해시킬지 모른다. 벨로키오는 유대인들의 비극과 가톨릭의 야만을 조명과 촬영, 편집을 절륜하게 이용하여 가시화한다. 하지만 대체론 『모르타라 납치사건』을 정직하게 옮겨내는데 그치기에 책 대신 영화를, 특히 '벨로키오의 작품'을 봐야만 하는 이유가 희미하게 느껴진다.
[글 박정수 영화평론가, green1022@ccoart.com]
납치
Kidnapped
감독
마르코 벨로키오Marco Bellocchio
출연
에네아 살라Enea Sala
레오나르도 말테제Leonardo Maltese
파올로 피에로본Paolo Pierobon
파우스토 루소 알레시Fausto Russo Alesi
바바라 론치Barbara Ronchi
제작연도 2023
상영시간 134분
공개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