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th DMZ docs] '어두운 밤 어디에도 없는' 경계 없는 아이들
[15th DMZ docs] '어두운 밤 어디에도 없는' 경계 없는 아이들
  • 이현동
  • 승인 2023.09.28 11: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적 상상력이 다큐멘터리와 만나는 경우"

<어두운 밤: 어디에도 없는>을 연출한 '실뱅 조지'는 철학을 전공하고 사회 복지사로 일하다 2004년 영화 제작에 뛰어들었다. 그는 "정치적 입장을 취하는 동시에 내용과 형식을 분리하지 않는 영화, 자신의 견해와 문법을 정의하는 것"이 자기 아이디어라 밝혔다. 그의 영화는 휴대전화로 촬영한 단편 <콩트>와 장편 다큐멘터리에 이르기까지 불안정한 사람들의 삶을 관찰하고, 그들의 투쟁을 은유적으로 묘사한다. 특히, 실뱅 조지 영화에서 주축이 되는 대상은 '이민자'이다. 다큐멘터리를 비롯한 이민자를 다룬 기존의 영화가 이민자의 힘든 상황을 보여주고, 인권을 호소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어 왔다면, 그는 조금은 다른 방식을 제안한다. 그는 이민자가 처해 있는 상황을 '탈국가적 상태'로 바라본다. 이민 문제와 이를 규제하는 법률과 정치와의 상관관계, 국경 시스템의 강화에도 불구하고, 그 경계에서 사는 이민자의 삶을 가까이서 다루는 데 집중한다. 종교, 민주주의, 인권, 자원 전쟁으로 피난을 온 이주민, 난민 등의 삶을 밀접하게 다루며, 이때 관객은 영화를 통해 그 여정에 동참할 수 있게 된다.

실뱅 조지의 영화가 흑백으로 촬영된 이유 또한 위와 같은 규칙과 예외의 구분이 없는 모호한 지대를 형성하려는 의도가 깃들어 있다. 세계가 하나의 보편적 지대라는 사실 속에서 그는 편만하게 침전된 일상을 다룬다. 더욱이 조형적, 물질적 미학적 착상이 영화에서 주요한 요소로 다가오는데, 이는 그가 규명하려는 내재성(immanence)의 작업에 해당한다. 그가 말하는 내재성이란 필연적이고 조형적이고 시적이다. 이러한 내재성이란 단어를 앞서 들뢰즈는 '사유의 이미지'로 규정하기도 했는데, 이는 사유를 활용하고, 사유의 방향을 잡는다는 의미가 무엇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지를 규명하는 작업이라고 했다. 기호의 폭력에 노출된 이미지는 문화, 사회, 정치 등의 모든 영역에서 이미지를 규정한다. 그는 장르의 경계도 지정학적 경계도 없이 배회하는 이들이 왜 그런 삶을 사는지를 거꾸로 소급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당면한 세계를 보여주는 데 관심이 있다.

덧붙여 실뱅 조지는 현실을 실제적이면서 우연적인 삶으로 바라보고, 여전히 영화를 탐험이 필요한 미지의 세계로 생각한다. 그는 어떤 방식보다 그 내재성을 법칙으로 정의와 평등을 복구하려는 시도를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영화는 필연적으로 정치적(The cinema is necessarily political)이라 말한다. 개념의 예술인 영화가 개인과 개인,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를 모색하고 있기 때문이며 감독은 그들의 이해관계 속에 펼쳐진 진실과 아름다움을 논하고자 한다. 특히, 그의 영화에서 인물과 배경이 끊임없이 교차 돼서 등장하는 건 혁명이란 인물뿐만 아니라 배경을 지목함으로도 얻을 수 있는 효과이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실뱅 조지는 고결한 시인이자 영리한 혁명가라고도 할 수 있다.

 

ⓒ DMZ다큐멘터리영화제

경계에서 도리어 자문해보기

영화 경력을 시작하던 2006년에 실뱅 조지는 스페인의 '멜리야'에 처음 방문했다. 우선, 유럽 이주 정책 문제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 그 이유로는 멜리야의 지리적 위치가 유로-아프리카 솅겐 지역에 위치한 남쪽 국경이자, 이주에 관하여 유럽의 공동 정책을 시험하고 있는 지역이 스페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경유하는 대부분의 청년과 미성년자는 모로코 출신의 가난한 계층 출신이다.

하지만 <어두운 밤: 어디에도 없는>에서 다루는 아이들은 오히려 경계를 파괴하고 세계의 가능성을 충만하게 바라본다. 난민이나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한 내용을 다루는 이야기에서 아이는 무엇보다 비극의 희생양이 되기보다 희망을 선취하는 존재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최근 눈에 띄었던 작품이 있다면, 전쟁으로 인해 우크라이나 동부 보육원 맡겨진 아이들이 일시적으로 부모님과 떨어져 사는 이야기를 그린 시몬 레멩 빌몽의 <파편들의 집>(2022)이었다. 밀폐된 공간에서 클로즈업으로 그리는 외로움과 아픔을 바로 옆에서 공감하는 사회복지사의 역할은 유일한 희망으로 그려진다. 또 한 작품은 사지드 칸 니시리, 에이피어 블랑케보르트, 엘스 반 드리엘의 <마인드 게임>(2023)이다. 이 영화는 성인이 되지 않은 주인공이 아프가니스탄에서 탈출하여 난민으로 승인을 받기까지의 과정을 다룬다. 그 과정에서 무슬림으로 겪는 폭력과 온갖 수모는 많은 나라의 국경을 건너면서 계속해서 이어진다. 유일하게 그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준 건 SNS로 상황을 공유했던 두 여성 감독이었다. 두 영화의 공통점이 이런 희망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라면, 실뱅 조지의 영화는 어떠할까. 이쯤에서 자문하게 되는 건 과연 온전하게 윤리적이며 정치적인 문제를 영화가 어떤 방식을 통해 다루어야 할지다.

 

ⓒ DMZ다큐멘터리영화제

<어두운 밤 어디에도 없는>은 특정한 서사가 없고, 감독의 인터뷰도 없다. 그저 하루가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끝나는 지만을 보여줄 뿐이다. 감독은 가련한 처지에 놓인 아이들을 향한 눈물 어린 증언과 호소로 카메라를 남용하지 않는다. 어려운 상황을 묘사하는 것보다, 불평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아이들을 카메라에 담을 뿐이다. 물론 구타를 당하고, 상처를 입기도 하고, 헤엄치던 중 어려운 상황에 부닥치고 사망한 친구 이야기를 담담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신기한 건 이런 장면들이 감정을 고조하거나 특정한 사건을 강조되는 숏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는 평등하게 다양한 숏을 구사한다. 여기서 몽타주의 역할이 주요하다. 영화에서 숏은 아이들의 정면 숏뿐만 아니라 빈번하게 롱 숏을 보여준다. 특히, 부감 숏으로 찍는 경우가 매우 많은데, 이 숏은 도시 어디에나 그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숏은 루벤 외스틀룬드의 영화 <플레이>(2011)에서 자주 보였던 숏이기도 하다. 다만 <플레이>의 부감 숏은 인물과 공간 사이를 등지고 관음 하듯이 찍고 있다면, 이 영화에서는 그들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도록 개방된 모습으로 찍었다. 그는 이러한 숏을 통해 경계를 활보하고 있는 아이들의 자유로운 욕망을 관객들에게 주지시킨다.

그뿐만 아니라 영화에서 파편적으로 보여주는 박물관과 도시의 건물, 동상이나 십자가와 같은 특정한 상징 등의 흔적은 공간에 퇴적된 시간을 은유하는 시적 기법으로 사용됐다. 전쟁에 활용되었던 대포, 빈 공간 사이로 덩그러니 놓여있는 파쇄된 사물들, 군사 박물관이 된 이 공간에서 한 소녀는 기념사진을 촬영한다. 그 주변에서 제트스키를 타기도 하는 이들과 담을 넘고 그 주변을 활보하는 아이의 모습이 드러나기도 한다. 반면에 영화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숏은 철조망과 담을 넘고, 신호를 무시하고 도로를 건너는 장면이다. 이는 아이들이 생각하는 경계의 모호성과 세계를 개척하려는 의지를 드러내는 장면이기도 하다. 방파제 옆에 움막을 짓고 만족해하고, 어떤 한 아이는 담배를 피우기 위해서 보호관찰소에서도 무단으로 담을 넘고 밖으로 나간다. 대마초에도 무방비로 노출된 아이들은 나라를 불평하며 연신 연기를 토해낸다. 떠돌아다니며 쓰레기 더미에서 찾아낸 음식들을 보관하고 음식을 함께 만들어 먹기도 한다. 쇼핑센터에서 훔친 카트를 끌고 도로 위에서 놀거나 공동체의 근거지를 만들기 위해 각종 재료를 가지고 제작하는 아이의 모습은 주도적이다. 오히려 그들은 경계를 넘는 것뿐만 아니라 경계를 만드는 개척자들이다.

 

ⓒ DMZ다큐멘터리영화제

영화는 철조망, 박스 옆에 있는 운동화, 상처를 클로즈업하기도 한다. 이어서 한 아이가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이 소령이었다고 담담하게 말하며 그 장소가 항구임을 밝힌다. 항구는 어떤 의미에서 진실로 경계다. 그 아이에겐 경계를 뚫기 위해서 어떤 훈장과도 같은 상처인 셈이다. 또 어떤 의미에서 이는 모험을 요구하는 장소다. '어떤 한 아이가 1시간 수영을 하고 항구에 도착했다'는 모험담은 그들이 비참한 상황에 처해있다고 말하기보다는, 일종의 놀이처럼 체감되기도 한다. 그러면서 영화에는 예수의 형상을 담은 조각상과 십자가 등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신의 뜻대로'를 종종 말하기도 하는 아이들에게 윤리와 도덕은 규율과는 늘 어긋나 있다. 한 일행은 어두운 밤에 유럽 나라로 탈출을 감행하고자 한다. 유럽을 동경하는 아이는 '멜리야 경찰은 차별주의자'라며 조롱하고, 난민에게 우대 정책을 펼치는 땅에 대한 조그마한 희망을 품고 있다. 성탄절 가까이 실행되는 이 탈출은 멜리야 시내에 있는 비싼 옷 가게 등을 구경하고 항구의 도착한 다음에 끝이 난다. 그들이 탈출에 성공했을지는 영화에서 불분명하게 다룬다. 배가 가고 오고 하는 장면에도 그 행방은 묘연하다. 마지막 장면에서 개선문 앞으로 나아가는 한 소년과 내레이션은 아이를 긍정하는 구절이 나온다.

"우리는 거친 아이들, 길들지 않은 동물, (중략) 우린 강하고 파도를 껴안는다. 파도는 우리를 위해 운다. 우리 손, 다리, 발처럼, 새로운 해안을 오른다. (중략) 난 이제 혼자가 아니니까. 신은 죽었고 아이들은 불 속에서 춤춘다."

여기서 단번에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쓴 "신은 죽었다"와 '아이를 긍정한 구절'이 떠올랐다. 간단히 말하면 인간이 외부로부터 규정을 받지 않는 존재인 초인이 되기 위해 그는 서구 정신사를 지배했던 기독교를 뛰어넘어야 했고, 이에 가장 해당하지 않는 놀이하는 존재, 최초의 운동, 거룩한 긍정을 '아이'로 보았다. 아이는 경계를 지배할뿐더러 개척하는 초인이다. <어두운 밤 어디에도 없는>은 아이가 경계에 속박되지 않고 자신의 활동을 끝까지 영위하려 한다는 지점에서 실뱅 조지의 영화 중 가장 윤리적, 정치적인 영화일 수 없다. 어른이 엑스트라에 불과한 이 영화가 아이들의 행위, 시적 허용, 이를 적절하게 배열하는 형식의 아름다움은 그가 이번에 다시금 개척한 영화적 세계라고 긍정할 수밖에는 없다.

[글 이현동 영화평론가, Horizonte@ccoart.com]

 

어두운 밤: 어디에도 없는
Obscure Night-Goodbye Here, Anywhere
감독
실뱅 조지
Sylvain GEORGE

 

출연
Malik B.
Reda B.
Amine C.
Hicham D.
Oussama E.

 

제작연도 2023
상영시간 184분
공개 제15회 DMZ다큐멘터리영화제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