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K ABOUT] 한국 현대미술의 동시대성 : 영화관과 카메라의 수동성을 뛰어넘기
[TALK ABOUT] 한국 현대미술의 동시대성 : 영화관과 카메라의 수동성을 뛰어넘기
  • 박정수
  • 승인 2023.09.17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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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백 투 더 퓨처: 한국 현대미술의 동시대성 탐험기》
노재운 <버려진>(2009)
김세진 <되돌려진 시간>(1998)

그림, 조각, 사진에 비해서 '영화'는 분명 능동적이다. 전근대적 매체에서 제한된 '운동'이 영화에서는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영화는 수동적이다. 여기서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영화관에 의한 수동성이다. 비디오테이프, 동영상 파일, OTT 스트리밍 서비스가 차츰 발달하여, 관객들의 영화 관람 경험은 영화관 바깥에서도 가능하게 되었다. 하지만 20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심지어 2010년대만 하더라도, 가장 보편화된 영화 플랫폼은 영화관이었다. 영화관은 자신들이 설정한 시간표를 관객들에게 공지한다. 감상자는 원하는 시간을 자유자재로 정할 수 없고, 영화관이 제공한 특정 시간 중 그나마 알맞은 시간을 수동적으로 선택한다.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영사와 정지의 특권은 오직 '영사실'에만 있다. 감상자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영화를 잠시 정지하고 싶다 하여도 감상자가 영화관에 맞춰야지, 영화관이 감상자를 배려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다수 관객의 감상은 능동적일 수 없었다. 능동적인 감상의 특권은 영화를 상영하는 영사실이나, 영화를 창조하고 통제하는 영화감독 및 편집자만 가졌다.

또 다른 수동성은 카메라에서 발생한다. 카메라가 본격적으로 발명되고 보편화되었을 때, 화가들은 사진을 두고 '객관적으로 시각을 옮겨올 수 있는 도구'라 평했다. 촬영하는 대상을 왜곡하지 않는 카메라는 매우 엄정하고 객관적이다. 이를 흠모한 몇몇 화가들은 카메라의 태도를 몸소 따라해 보려고 애썼다. 한편 이러한 특성은 카메라가 절대 주관적일 수 없다는 것을 동시에 의미하였다. 피사체가 자신을 좌우하는 수동성의 숙명을 카메라는 떠안았다. 이는 주로 다큐멘터리에서 도드라진다. 영화감독, 촬영감독 등 카메라를 든 주체들이 분명 원하는 이미지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를 카메라가 만들어낼 순 없다. 카메라가 담고자 하는 피사체는 되레 창작자가 원하는 의도를 두고 협박 및 거래할 수 있다. 영화는 그만큼 자신들이 서있는 현실에 수동적이었다. 그리고 소위 '극장용 영화'들은 이러한 두 가지 수동성을 익히 안고 가고 있었다. 한계임과 동시에 본질로서 생각하며, 그러나 몇몇 미디어 아트의 경우 이 두 가지 수동성을 타파한다. 특히나 감상자의 참여와 능동성을 부각하는 '인터렉티브 아트'와 결합한 미디어 아트 유형이 그러하다.

 

노재운, 〈버려진〉, 2009, 웹 아트, 랜덤 액세스, ed. 2/3. ⓒ 부산현대미술관 소장

이번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백 투 더 퓨처: 한국 현대미술의 동시대성 탐험기》에는 능동적인 미디어 아트를 접할 수 있는 흥미로운 작품이 소개됐다.

가장 먼저 주목할 작가와 작품은 노재운의 2009년작 <버려진>이다. 그의 작품을 처음 접하면 흡사 외견이 '아파트'와 흡사하다 느끼게 된다. 널따란 직사각형 프레임 내에 작은 정사각형 프레임이 무수하게 분절되어 있는데, 그것은 여러 호로 구성된 아파트의 외관을 연상케 한다. 이 작품은 바로 그 호들을 클릭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영화관과 다른 인터렉티브 미디어 아트의 능동적인 특성이 발현된다. 정사각형을 클릭하면 고전 영화 푸티지가 재생되는데, 영상의 재생과 정지, 다른 영상으로 이어내는 특권을 직접 클릭하는 감상자만 지닌다. 

본래 영화에 속했던 푸티지들은 반드시 '특정 시간', '특정 숏 사이'에만 위치한다. 푸티지의 의미는 누구에게나 동일한 고정된 맥락에 위치했기에 비교적 객관적이다. 그러나 <버려진>에서는 감상자가 '어떤 영상을 클릭하고, 다음에 어떤 영상을 잇느냐'에 따라, 푸티지의 맥락이 주관적이고 상대적으로 변하며 의미도 매번 새로워진다. 이러한 관람 방식은 재생과 정지를 감상자가 결정할 수 있는 OTT 스트리밍 서비스가 보편화되면서 오늘날에도 비교적 유효해졌으나, 노재운은 2009년에 감상자의 능동적인 체험을 부각했다는 점과 그간 선형적이던 영화의 흐름을 비선형적으로 뒤섞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김세진, 되돌려진 시간, 1998, 6채널 영상, 컬러흑백, 사운드, 2분 20초, 2분 34초, 2분 48초, 2분 22초, 2분 14초, 2분 55초. ⓒ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다음으로 주목할 작가는 김세진이다. 그의 작품 <되돌려진 시간>은 피사체는 어떻게든 주관적으로 구성해볼지언정, 촬영 자체는 객관적으로 '현재'만을 반영해야하는 카메라의 한계를 극복한다. <되돌려진 시간>의 화면은 매우 혼탁하다. 미장센과 화질을 고도로 왜곡·조작한다. 물론 관습적인 영화 또한 필터를 사용하거나 색채를 조절한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촬영했다는 흔적은 남게끔 과하지 않은 필터를 덧씌운다. 실험영화를 제외하곤 말이다. 그런데 김세진은 바로 그 객관적인 촬영의 흔적을 모두 말소한다. 촬영을 주관적으로 바꾸어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이미지로 재창조한다.

더욱이 김세진은 '되감는다.' 그럼으로써 눈물을 흘리고, 치킨을 먹으며, 땅에 흠집을 내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당연하게 '소멸'되는 현실을 눈물이 소모되지 않고, 치킨과 땅이 온전해지는 '생성'의 이미지로 탈바꿈한다. 물론 이러한 되감기의 사례가 영화에 없는 것은 아니다. 곧장 미카엘 하네케의 <퍼니 게임>이 떠오르지만, 되감기의 대표적인 사례가 손에 꼽을 정도이기에, 다수의 시네아스트들은 현재의 흐름을 객관적으로 반영하는 촬영을 고집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김세진은 객관적인 촬영을 주관적인 촬영으로 뒤집으며 주관적으로 표현하고 싶은 운동을 선보인다.

하지만 노재운과 김세진의 작품들 또한 온전하게 능동적이진 않다. 일단 노재운의 작품은 푸티지들의 연결은 능동적이나, 푸티지가 담고 있는 운동에 감상자가 개입할 수 없다. 즉 운동의 내용이 수동적이다. 김세진의 작품 또한 마찬가지로, 되감기로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위해서 원본, 곧 소멸하는 이미지를 빌려와야 한다. 그렇기에 김세진의 작품에서는 온전히 독립적이고 주체적일 수 없는, 무언가를 빌려오는 수동성이 발견된다. 이는 사촌으로서 영화와 공통점을 공유한다. 아무리 세트장을 세운다 한들, 현실을 빌려서 세트장을 건립하고,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배역들은 현실에 존재하는 배우의 육신을 빌려서 대신 말한다. 주관이 오롯이 능동적인 표현주의적이고 추상적인 회화나 조각과 달리, 카메라는 표현하고 싶은 대상을 빌려와야 한다는 문제가 있다.

 

하룬 파로키, <평행 I – IV>(2012-2014) 시리즈 ⓒ 국립현대미술관

한편으로 영화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미디어 아트는 '게임'에서 가능성을 발견한다. 《백 투 더 퓨처: 한국 현대미술의 동시대성 탐험기》와 함께 진행한 《게임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로는 '베를린파'의 정신적 지주인 '하룬 파로키'로 그는 독립적으로 시공간과 인물을 창조할 수 있는 게임의 능동성에 주목한다. '게임 사회' 전시에선 이를 직접 체험해볼 수도 있다. 감상자는 공간을 변형하거나 인물의 운동을 결정하는, 노재운의 <버려진>보다 더 능동적인 인터렉티브 아트를 경험할 수 있다. 막연히 앉아서 스크린을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수동적인 감상을 뛰어 넘어서 말이다.

관행적인 영화가 매체의 한계이자 본질을 부각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면, 미디어 아트는 그 관습을 뛰어넘는 방향으로 발전한다. 그럼으로써 주체적으로 상상하고 표현할 수 있었던 회화와 조각의 미덕을 'motion picture'로서 영화에 이식한다. 이로써 현실의 운동을 막연히 빌려오지 않고, 작품이 독창적인 운동을 창조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발전하는 미디어 아트는 작가 자신만의 창조물이 아니다. 인터렉티브 아트와 결합한 미디어 아트의 이미지와 운동은 일방적이고 수동적인 수용자에 그쳤던 감상자가 재규정하다 못해 창조하기에 이르며, 작품의 운동은 영영 미완의 상태로 무한 분열·증식한다.

[글 박정수 영화평론가, green1022@ccoart.com]

 

 

박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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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현실과 차별화된 고유하고도 독립적인 차원입니다. 그중에서도 영화는 타 예술 매체와 구분되는 고유한 시각적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술만의, 오직 영화만의 경험을 독자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동시에 영화는 현실에서 비롯되고, 인간에게 이바지합니다. 그렇기에 현실-예술, 인간-영화를 이어내는 교두보와 같은 글을 제공하고자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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