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K ABOUT ] '걷기, 헤매기' #2: 어떻게 걷는가, 어디를 걷는가?
[TALK ABOUT ] '걷기, 헤매기' #2: 어떻게 걷는가, 어디를 걷는가?
  • 박정수
  • 승인 2023.07.13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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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콘텍스트 전시 《걷기, 헤매기》
프란시스 알리스 <실천의 모순> 시리즈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울라이 <연인, 만리장성 걷기>

예술에 있어서 퍼포먼스는 '예술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표현하고자 하는 주관적인 행위에 주목해야 한다. 특히, 그 행위가 다중 스크린에 담겨있다면 관객의 감상은 꽤 다양하게 엇갈릴 수 있다. 「[미디어아트 in 시네마] 퍼포먼스 #1: 영상과 결합할 때」에 이어서 이 글에서는 '프란시스 알리스'와 '마리아 아브라모비치'가 보여주는 행위(퍼포먼스)에 관해 알아보겠다.

 

〈실천의 모순 1 (가끔은 무엇인가를 만들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1997. 행위 기록, 단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 4분 59초. 작가 및 페터 킬히만 갤러리 제공.
〈실천의 모순 5: 우리는 사는 대로 꿈꾸곤 한다 & 우리는 꿈꾸는 대로 살곤 한다〉, 2013 .
시우다드 후아레스, 멕시코 단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 가변설치, 7분 49초. 작가 및 페터 킬히만 갤러리 제공.

1959년 벨기에 안트베르펜 태생의 프란시스 알리스는 벨기에에서 태어나 1980년대 이후부터는 멕시코에서 활동하는 화가이자 퍼포먼스 예술가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Asia Culture Center)에서 개최되는 전시 《걷기, 헤매기》에서 소개되는 <실천의 모순> 시리즈에서 그는 한없이 걷고만 있다. 앉거나 눕거나 멈추는 법이 없는 그는 흡사 그리스 신화에서 언급되는 '시시포스의 형벌'(신들을 능멸한 시시포스는 그 대가로 무거운 바위를 끝없이 굴려야 하는 형벌에 처한다.)에 처한 것만 같다. 1997년에 만들어진 <실천의 모순 1: 가끔은 무엇인가를 만들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에선 거대한 얼음을 질질 끌면서 걸어가는 반면, 2013년 제작된 <실천의 모순 5: 우리는 사는 대로 꿈꾸곤 한다 & 우리는 꿈꾸는 대로 살곤 한다>에서는 비교적 정자세로 불덩이를 굴리며 걷는다.

알리스는 그냥 걷지 못하고 항상 무언가를 굴리면서 걷는 '고행으로서 걸음'을 수행하며, 이를 멕시코 노동자나 일반 국민들의 삶에 빗댄다.

<실천의 모순 1: 가끔은 무엇인가를 만들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1997)에는 한 멕시코 노동자(알리스, 작가 본인)가 거대한 얼음을 굴리고 있었다. 너무 육중하고, 또 몸서리 칠만큼 차가워서 등에 이거나 안아 들 수 없는 거대한 얼음이 걷는 사람의 자세를 역으로 규정한다. 얼음에 의해서 인간의 걸음은 불편해진다. 다행히 얼음을 굴리고 또 굴리다보니, 아스팔트 바닥과의 마찰, 멕시코의 더운 날씨에 의해 서서히 녹고 줄어든다. 허리를 굽힌 불편한 자세로 얼음을 굴리던 알리스, 다행히도 얼음이 작아져 이제 발로 툭툭 차며 가볍게 굴리고, 직립 보행하는 인간의 가장 편한 자세를 회복한다. 또 프레임을 가득 채우던 얼음의 부피가 줄어들면서, 그 여백엔 얼음을 굴리는 알리스와 그가 속한 도로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도로의 '적막과 쓰레기'들이 보인다. 인간이 고행에 처할 땐 '유의미한 노동'으로서 걷기가 화면을 한가득 채웠다면, 인간이 노동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운 걸음을 회복하자 쓰레기와 공허가 침입해온다.

1997년의 멕시코 노동자들은 프레임에 유의미한 것을 가득 채워내기 위해서, 고행을 기꺼이 자처해야만 했다. 고행을 포기하거나, 고행이 끝나면 그들은 무의미해지고 너절해진다. 고생 끝에 낙은 없었다. 하지만 알리스는 영상의 끄트머리에 쓰레기와 텅 빈 적막 대신, '아이들의 얼굴'을 이어낸다. 무한 노동해야만 유의미한 노동자의 삶이 아니라, 노동을 끝마쳐도 유의미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 노동자의 삶으로 나아가길 바란다는 듯이.

과연 그 노동자의 삶은 2013년에 이르러 개선되었을까, 알리스가 바라는 꿈은 실현되었을까. 상황은 더 암담해졌다. 1997년에 얼음을 굴리는 작업은 세계에 이바지하지 않았다. 얼음을 굴리고 또 굴려도 세계엔 쓰레기가 가득했으니, 오직 노동자 개인의 유의미한 가치를 증명하기 위한 노동이었다. <실천의 모순 5: 우리는 사는 대로 꿈꾸곤 한다 & 우리는 꿈꾸는 대로 살곤 한다>(2013) 속 노동자(이 또한, 작가 본인)는 개인의 가치를 증명함에 더해서, 세계를 밝히는 공익의 의무까지도 짊어진다. 노동자는 밤에 불덩이를 굴린다. 불덩이가 없다면 도시와 사람들은 어둠 속에 뒤덮여 잠식되어 버리리라. 그래서 노동자는 환하게 빛나는 불덩이를 굴려 칠흑을 물리치고, 그 안에 잠들어있던 건물, 인간, 동식물 등을 건져낸다. 그는 어둠이라는 망망대해 속 안전요원과 같다. 하지만 이를 위해 노동자의 하반신은 데이고 화상을 입게 될 것이다. 더욱이 불덩이는 얼음과 달리 쉽사리 녹거나 소멸되지 않는다. 즉 2013년 불덩이를 굴리는 멕시코 노동자의 고행은 더 끔찍해졌고, 얼음이 녹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화상을 입어 타들어가야지만 끝날 수 있다.

 

<연인, 만리장성 걷기>(The Lovers, The Great Wall Walk)
1988/2010, 2채널 영상, 컬러, 무음, 15분 45초, 1988년 퍼포먼스 기록, 90일, 중국 만리장성,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아카이브 및 LIMA 제공

1946년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태생의 마리아 아브라모비치는 '퍼포먼스 아트'라는 장르를 개척한 선구자다. 아브라모비치는 연인이었던 '울라이'와 함께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는 퍼포먼스 아트로 큰 주목을 받았는데, <연인, 만리장성 걷기>는 울라이와의 이별 직후를 기록한 작품으로 삶과 사랑을 사유한다.

아브라모비치는 만리장성의 공간적 특성을 삶에 빗댄다. 만리장성은 분명 '하나'다. 여러 개가 될 수 없고, 다른 존재가 되지도 못한다. 한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다. 그 자신은 여러 명일 수 없고 오직 한 명이듯이, 고유한 스스로는 결코 타인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이렇게 '개수'로만 따진다면 만리장성과 인간은 유한해 보인다. 하지만 아브라모비치는 만리장성의 '무한함'에 주목하며, '유한하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논한다. 아브라모비치와 울라이는 이별 직후 90일간 만리장성을 걸었고 그 과정을 본 작품으로써 기록했는데, 그들이 걷는 만리장성은 걸어도 또 걸어도 끝이 없고, 이동할 때마다 풍경, 기후, 계절이 시시각각 바뀐다. 유한하지만 무한한 만리장성, 그것이 곧 하나의 존재로서 유한하지만 그 속에 내재한 가능성은 무한한 인간과도 같다.

유한한 인간은 분명 끝이 있지만 무한한 만리장성을, 곧 삶을 묵묵하게 걸어간다. 그들이 걷는 길은 나만의 길이다. 아브라모비치가 담긴 왼쪽 채널, 울라이가 담긴 오른쪽 채널은 풍경이 항상 다르다. 분명 두 사람은 만리장성이라는 하나의 공통된 길을 걷고 있지만, 인간은 같은 공간에 속하더라도 '출발점'이 다르고 바라보는 '방향'이 다르며, 갈림길에서의 '선택', 걷는 '속도' 등이 현저하게 차이가 난다. 그래서 한 개인은 타인의 길을 걸을 수 없다. 각자의 길을 묵묵히 개척할 뿐이다. 그런데 서로 다른 길을 걷는 와중, 두 채널이 똑같이 겹쳐지는 황홀하고도 신비로운 순간이 이따금 발생한다. 너와 나의 마음이 일치한 순간에 아브라모비치와 울라이는 잠시 연인이자 예술적 동지로서 재결합한다.

각자는 필연적으로 다른 길, 곧 두 채널로 나뉜 각기 다른 만리장성을 걸어가지만, 이따금 마음이 일치하여 동일한 길을 걷게 되는 관계가 '사랑'이나 '우정'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온 마음이 일치할 순 없기 때문에, 그들은 만났다가 다시 헤어지고 흩어진다. 아브라모비치는 각자의 삶을 되찾기 위한 '이별' 또한 필연적인 것임을 환기한다.

 

<연인, 만리장성 걷기>(The Lovers, The Great Wall Walk)
1988/2010, 2채널 영상, 컬러, 무음, 15분 45초, 1988년 퍼포먼스 기록, 90일, 중국 만리장성,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아카이브 및 LIMA 제공

자신의 행위로써 알리스는 현실을, 아브라모비치는 인생과 관계를 환기한다. 이들의 퍼포먼스는 색다른 행위를 능동적으로 실천하고 변화를 불러오는 '운동'이다. 발이 달린 퍼포먼스는 걸어오며 우리에게 나타나지만, 그 발은 멈추지 않고 내달리며 이내 곧 시야에서 사라진다. 그래서 잠깐 나타났다가 영영 사라지는 퍼포먼스를 붙잡고자, 움직임을 기록할 수 있는 영상이 동원된다. 이들에게 영상은 자신의 행위를 기록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바로 이 점이 영상 자체를 행위로 삼거나, 자신이 아닌 타자를 포착하려는 시네아스트들과의 차이다. 하지만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양자의 유사성 또한 분명하고, 퍼포먼스 미디어 아트의 특징이 영화의 몇몇 사례에서도 발견되니, 둘의 관계는 자매나 형제는 아닐지언정 '사촌' 정도는 될 수 있지 않을까.

[글 박정수 영화평론가, green1022@ccoart.com]

박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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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현실과 차별화된 고유하고도 독립적인 차원입니다. 그중에서도 영화는 타 예술 매체와 구분되는 고유한 시각적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술만의, 오직 영화만의 경험을 독자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동시에 영화는 현실에서 비롯되고, 인간에게 이바지합니다. 그렇기에 현실-예술, 인간-영화를 이어내는 교두보와 같은 글을 제공하고자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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