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멕시코의 전신인 '아즈텍' 문명의 이름을 들었을 때, 대다수 사람들은 식인 행위나 인신공양 풍습을 떠올리며 잔혹하다, 야만적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철학자 조르주 바타이유는 관점을 달리하였다. 그의 관점에서 낭비나 사치는 대책 없이 소모만 하며 현재를 즐겁게 하고 미래를 위험에 빠트린다. 반면 저축과 생산은 현재를 희생하여 미래를 보장한다. 그리고 역사 속 대다수의 문명과 오늘날의 국가도 항상 미래를 염려하여 생산과 비축을 목표로 설정한다. 이렇게 저축하는 국가들 사이에서 바타이유가 바라본 아즈텍은 극단적인 '사치와 낭비'를 추구한 문명이었다. 생산 및 비축하는 국가에선 포로 및 노예들을 살려놓고 관리한다. 그들을 이용하여 미래로 나아갈 원동력을 만든다. 반면에 아즈텍은 인신공양을 위해 노예들을 학살하였다. 아즈텍 종교의 신은 항상 먹잇감을 갈망하며 허기진 상태인데, 아즈텍인들은 절대자에게 인육을 공급하며 현재의 '종교적인 즐거움'과 '말초적인 만족'을 누렸다. 이런 점에서 바타이유는 아즈텍이 현재에 충실한 문명이었다고 보았다.
그런 아즈텍에 기독교 국가 스페인이 들이닥쳤다. 이들에게 정복된 아즈텍은 스페인 식민지를 거쳐서 오늘날 멕시코로 거듭났다. 사치하던 땅은 하얀 정복자들로 인해 금욕하고 비축하는 땅으로 전락했다. 심지어 원주민들은 금욕하는 한편, 원주민의 공을 갈취하는 백인들은 사치의 즐거움을 누린다. 이로써 원주민은 현재도 미래도 없는 반면, 백인은 현재도 미래도 모두 만족스럽다. 이 불만족스러운 삶을 극복하려는 원주민들은 봉기하며 아즈텍의 피비린내 나는 사치를 오늘날에 다시 불러온다. 인종·계급 갈등이 불러온 아즈텍의 사치스런 폭력성이 2000년대에 데뷔한 멕시코 영화감독들 '카를로스 레이가다스', '미셸 프랑코', '아마트 에스칼란테', '나탈리아 로페즈', '로렌조 비가스' 등의 영화를 관통한다.
20세기 멕시코 영화의 선각자로는 '루이스 부뉴엘'이 있었다. 이후 'Three Amigos'로 묶이는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알폰소 쿠아론, 기예르모 델토로가 1990년대에 등장했다.
21세기에 데뷔한 오늘날 멕시코의 영화감독들은 'Three Amigos'와 확연하게 구분된다. 그들은 대체로 자국을 떠나지 않는다. 설령 멕시코를 떠나서 연출한다고 한들, 국경을 넘고 밀입국하는 멕시코인의 삶을 포착하기 위해서 '미국' 정도로만 로케이션 간다. 아마트 에스칼란테의 <나쁜 놈들>(2008)이 그렇다. 해당 사례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멕시코에 뿌리를 내려 자국의 현실을 리얼리틱한 픽션으로 승화한다. 그들은 멕시코의 실상을 반영하고자 현실의 시간과 동화되는 '롱테이크'를 활용한다. 반면 '탐미주의'를 지향하는 Three Amigos는 꿈의 공장 할리우드로 터를 옮겼다. 미국에서도 멕시코 영화감독임을 확연히 내세우던 에스칼란테와 달리, 이들은 할리우드에서 연출한 작품들은 출신 성분이 드러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멕시코 출신이지만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Three Amigos와 달리, 동시대 멕시코 영화감독들은 치열하게 멕시코에서 가능한 영화를 탐구한다.
동시대 멕시코 영화감독들이 추구하는 영화미학 중 하나는 '교차 편집'이다. 인종과 계급을 엄격하게 분리한 백인의 정책이 사회 곳곳에 스며있는 멕시코, 이에 따라 분열된 백인/원주민, 부르주아/프롤레타리아의 세계를 교차 편집으로 가시화한다. 2000년대 멕시코 영화감독들 중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카를로스 레이가다스'는 극단적으로 양극화된 '성과 속'을 탐구한다. 멕시코의 어느 한 차원은 극도로 '낭비'한다. 무자비한 쾌락, 폭력, 불륜이 판을 치고, 목양의 신이자 쾌락의 신인 '판'이 등장한다. 반면 어느 한 차원은 극도로 '생산적'이다. 높디높은 고층빌딩이 하늘 높이 솟아 올라가고, '쾌락으로서 성'이 아닌 '생산으로서 성'의 결과인 아이들이 탄생하며, 경건한 기독교적 삶을 유지한다. 레이가다스뿐만 아니라 에스칼란테, 프랑코, 비가스, 로페즈 모두 다 인종, 계급, 젠더로 양극화된 멕시코의 갈등을 교차 편집에 반영한다. 이는 교차 편집에 강점이 있는 편집자이자 영화감독 나탈리아 로페즈의 공이 큰데, 그녀는 전 남편이었던 레이가다스의 작품뿐만 아니라 에스칼란테의 <헬리>(2013) 편집도 도맡았다. 로페즈의 장기는 그녀의 장편 데뷔작 <로브 오브 젬스>(2022)에서도 이어졌다.
이런 점에서 동시대 멕시코 영화감독들은 '루이스 부뉴엘'을 계승한다. 부뉴엘 또한 부르주아의 위선을 꼬집으며 계급의식을 탐구했고, 생산하고 비축하는 사회에서 숨길 수 없는 속된 성을 초현실적인 연출로 풀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대 멕시코 영화감독들은 그의 정신은 이어가되, 형식에서는 고유한 영화 미학을 실험한다.
앞서 언급한 특징들에 더해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들은 대체로 '비전문배우'를 기용하며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흐린다. 레이가다스는 배우가 아닌 자기 주변의 평범한 영화인, 친구들을 캐스팅하고, 에스칼란테는 <야생지대>(2016)에서 '페이스북'을 이용하여 일반인을 주연으로 즉흥 캐스팅했다. 프랑코는 이들에 비한다면 기성배우들과 적극 협업하지만, 원주민이나 프롤레타리아 역에 한에선 비전문배우를 기용한다. 베네수엘라 감독이지만 멕시코를 오가며 활동하는 로렌조 비가스 또한 <더 박스>(2021)에서 비전문배우의 실제 이름을 배역 명에 반영한다. 이들은 캐스팅한 비전문배우들을 멕시코의 현실을 농축해놓은 현장에 떨어트려놓고, 거기서 실제 삶에서 파생된 경험이나 반응을 유도한다. 그럼으로써 원주민, 프롤레타리아의 진실을 포착하고, 반면 기성 배우의 기술적인 연기는 부르주아의 위선이나 허위에 빗댄다.
비전문배우들이 처하는 현장은 매우 '잔혹하고 폭력적'이다. Three Amigos가 보여주는 할리우드식 폭력은 '감당할 수 있는 폭력', 타란티노스러운 '탐미적인 폭력'이다. 이와 달리 동시대 멕시코 영화감독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너무 끔찍하여 감상자를 '경악'시키는 참혹한 폭력을 묘사한다. 레이가다스의 <어둠 뒤에 빛이 있으라>(2012)에서는 남자의 목이 서걱서걱 썰리고, 프랑코의 근작들, <뉴 오더>(2020)와 <썬다운>(2021)에서도 인간에 대한 조금의 존엄도 없는 냉혈한 죽음이 판을 치며, 에스칼란테는 두개골이 사실적으로 으깨지거나 불로 고문당하는 현장을 적나라하게 비추며 가장 악명 높은 수위의 폭력으로 유명하다.
오늘날 멕시코 영화의 수위 높은 폭력은 비축 대신 '낭비'를 부추기며 발생하는 '실종'과 결부된다. 폭력 이후 실종이 이어지거나, 아니면 실종된 대상을 찾았더니 참혹한 폭력에 시달리고 있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멕시코 영화의 보편적인 소재가 되어버린 실종이 발생하는 원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일단 백인 침략자들은 더는 포로 원주민들을 살생하지 않는다. 목숨은 붙여둔다. 대신 백인들의 안온한 삶을 위해서 원주민들에게 '끝없는 노동'이란 형벌을 부여한다. 에스칼란테의 <나쁜 놈들>, 레이가다스의 <어둠 뒤에 빛이 있으라>, 프랑코의 <뉴 오더>와 <썬다운>, 비가스의 <더 박스>에서 노동자로서 백인 부르주아에게 무한 착취당하는 원주민들이 등장한다. 묵묵히 노동하던 원주민들은 더는 참을 수 없는 임계점에 도달하여 백인 부르주아에게 반기를 든다. 원주민들은 백인들을 참혹하게 학살하며 본 과정에서 끔찍한 '살해 의식'이 부활한다. 이로써 자유와 쾌락을 되찾고, 자신이 손에 쥐었어야 할 물질을 거머쥔다. 이렇듯 멕시코 영화에서 도드라지는 첫 번째 실종은 '백인 실종'이다. 원주민들은 백인을 납치함으로써 박탈당한 자신의 삶을 고양한다. 하지만 현재만을 바라본 봉기는 오래 가지 못한다. 원주민들이 되찾은 만족은 진압되어 대체로 미래로 이어지지 못한다.
또 다른 실종은 '원주민 실종'이다. 비가스의 <더 박스>, 로페즈의 <로브 오브 젬스>에서 도드라지는 관점으로, 아즈텍 문화를 야만적이고 비인도적이라는 이유로 비난한 백인들 또한 원주민을 '제물'로 삼아서 본인들의 배를 불리고 있다. <더 박스>에서 백인은 원주민을 무한 착취한 이후 쓸모가 없어지면 죽여서 신분까지 도용한다. 백인은 원주민의 죽음까지도 착취한다. <로브 오브 젬스>에서 원주민의 실종은 '백인과 결탁한 경찰'이 수사하지 않는 반면, 원주민의 백인 납치는 항상 경찰이 신속하게 처리한다. 이로써 항상 사라지는 것은 원주민, 이득을 보는 대상은 백인이며, 백인의 원주민 납치에 반감을 품은 원주민들의 백인 납치가 이어진다. 그래서 멕시코 영화에서는 백인의 원주민 착취를 방관하는, 타락하고 부패한 집단 '경찰'이 비판의 도마에 자주 오른다. 알론소 루이즈팔라시오스의 <어 캅 무비>가 대표적인 사례이며, 프랑코는 부패한 공권력 경찰을 '군인'으로 <뉴 오더>에서 확장했다. 경찰은 대부분 원주민 프롤레타리아지만, 그들의 지원 사유는 백인 선망이다. 경찰은 뇌물을 주는 백인의 편에 서서 강자를 비호하고, 반면 백인에 해가 되는 원주민은 엄벌한다. 이에 백인의 원주민 납치는 끊이지 않지만, 원주민의 반란과 전복은 쉽게 진압된다. 멕시코 영화감독들은 경찰, 군인 등의 공권력이 양극화를 부추긴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경찰의 탄압에 굴하지 않은 원주민들이 백인이나 같은 인종을 납치하는 행위 또한 카르텔 수준으로 규모를 키워서, 멕시코 전반에 '인간 소비'가 일반화된다. 강자가 약자의 목숨을 유린하고 착취하는 인간 소비는 인종, 계급의 위계에서 주로 발생하고, 이에 더해서 남성-여성의 위계 또한 포함한다. 멕시코 영화에서는 남성에 의해 잔혹하게 착취당하는 여성의 삶을 증언하는 '여성 영화'의 계보 역시 존재한다. 멕시코 여성 영화에서도 여성은 실종된다. 에스칼란테의 <나쁜 놈들>이나 <야생지대>에선 백인 남성에게 무시당한 원주민 남성들이 자신과 비교해서 신체적 약자인 '백인 여성'이나 '아내'에게 손찌검을 한다. <헬리>에서도 신체적으로 취약한 여성은 남성에게 납치된다. 에스칼란테는 무력으로 타인을 착취하는 멕시코에서 인종, 계급과 상관없이 여성이 가장 심각한 착취를 당한다고 진단한다. 멕시코 여성들의 삶을 영화로 승화하는 타티아나 후에조 또한 힘을 숭상하는 멕시코에서 항상 착취당하고 실종되는 여성들의 현실을 영화로 기록한다. 백인 남성은 원주민 남성과 여성 모두를 착취하고, 백인 남성에게 당한 수모를 분풀이하기 위해서 원주민 남성 또한 여성을 보편적으로 강탈한다. 쾌락을 위한 극도의 폭력과 낭비로 가장 큰 피해를 입는 대상이 여성이다. 이에 최근 멕시코에서는 여성 범죄를 따로 규정한 '페미니사이드'를 제정했다.
폭력, 실종과 더불어 멕시코 영화 속 낭비의 또 다른 축은 '에로티즘'이다. 멕시코의 시네아스트들은 에로티즘 또한 아주 극단적으로 묘사한다. 백인들의 멸시를 참고 또 참다가 결국 폭발한 원주민들이 분출하는 힘이 엄청난 것처럼, 멕시코 영화에서 성애 또한 참고 참아왔던 것을 극단적으로 폭발시킨다. 레이가다스의 영화에서 성은 번식을 위한 수단이 되어 '이성의 도구'로 전락한다. 이성이 억제해온 '쾌락으로서 성'은 어지간한 수준으로는 만족되지 않아 '불륜' 등 극한의 위반으로만 겨우 성에 찬다. 에스칼란테의 <야생지대>와 로페즈의 <로브 오브 젬스>에서는 '사도마조히즘'이 도드라진다. 백인에게 무시당한 원주민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노예를 자처하여 비축만 하고 즐거움을 미뤄온 백인 모두 제 삶이 권태롭다. 꾹꾹 참아왔던 욕망을 정상적이고 일반적인 체위로 만족시키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이들은 극단적인 가학성, 피학성을 갈구한다. 그렇게 극단적인 쾌락을 추구한 나머지 살해되거나 실종될 위기에 처한다.
이렇듯 백인 부르주아만이 만족스러울 수 있는 멕시코에서, 소외당한 사람들이 아즈텍의 옛 원리를 뒤적거린다. 에너지를 끝없이 분출하고 소비하여 자신을 되찾지만, 이와 동시에 또 다른 희생자가 만연함으로써 분열은 끊이지 않고 있다. 이러한 멕시코의 지옥도를 담아낸 영화들은 국내에도 적지 않게 서비스 중이다. 뿐만 아니라 영어 자막을 소화할 수 있다면, MUBI에서 전 세계 배급 중인 로페즈의 <로브 오브 젬스>와 비가스의 <더 박스>를 접할 수 있다. 여기에 타티아나 후에조, 아마트 에스칼란테의 신작이 올해 각각 베를린 영화제, 칸 영화제에서 프리미어되었고, 프랑코의 신작 <메모리>(2023) 또한 곧 열리는 베니스 영화제 초청 예상작 중 하나로서 시네필들과 만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글 박정수 영화평론가, green1022@ccoar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