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아무리 자신이 시네필이라 자부하더라도 왕빙의 영화를 진득하게 보는 것은 쉽지 않다. 그건 어쩌면 긴 상영시간을 제외하더라도, 왕빙이 탐구하고 있는 세계에는 '영화적'이라 할 수 있는 요소가 없다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왕빙의 영화는 영화라기보다 기록물에 가깝게 느껴진다. 다만, 여기서 영화적이 아니라는 건 대중을 겨냥한 편협한 수사처럼 여겨질 수 있겠다. 동시대 '영화적'이라는 표현의 내부에는, 자본과 대중을 고려한 획일화된 의식만이 남아 '영화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그렇다면 영화적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하는가. 더 나아가 왕빙의 영화, 즉 다큐멘터리는 특정 장르가 선취해 온 길에서 어떤 영화적 역량을 갖고 고증을 해결해 왔는가.
가장 먼저, '우리가 영화의 본래 형태가 무엇이었는지'를 소급해 본다면, 왕빙의 영화는 어쩌면 본질에 가까운 것일 테다. 세계 최초의 영화인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1896)이 '당시에 왜 파급력이 있었느냐'를 상기해 보면, 이는 특정 장르적 요소를 개발했다거나, 배우의 연기가 출중했다거나, 풍경의 아름다움 등의 외부 요소가 아니었다. 그저 정류장에 입장하는 기차가 스크린을 통해 관객들에게 전달되었을 뿐이다. 물론, 우리가 현재의 감각으로 1분도 채 안 되는 이 영화를 신기해하거나 '영화'라고 부를 수 있을지 의구심을 가진다. 그러나 그 당시의 관객들은 이 영화를 연출이든 비 연출이든 '영화적'이라 불렀을 것이다. 장르가 정립되지 않은 상태이긴 했어도 우린 이 영화를 굳이 구분한다면 '다큐멘터리'로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영화란 결국 무엇인가를 찍고 '기록'하고 '증거'하는 행위다. 특히 다큐멘터리가 '증거'(evidence)를 규명한다는 지점에서 법적 권위와 공식 문서로서 기능을 담당한다고 할 때, 왕빙의 영화는 마치 그가 속한 나라 중국을 감찰하는 눈과 같다. 여기서 왕빙은 중국을 단순히 고발하기보다 관찰하고 기록을 남기는 인류학자와 같다. 그러므로 영화를 보기 전에 '영화적'이란 수사를 넘어 부정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비로소 왕빙의 영화를 올곧이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다큐멘터리의 시간
시간은 세계와 얽혀있고, 세계는 시간을 망각하길 기원한다. 무엇보다 예리하고 민감하게 시간을 탐닉하는 이들은 역사학자가 아닌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그들은 시간을 계산하면서도 관찰자의 신분으로 세계의 변화를 포착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우발성을 지닌 세계에서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가기 마련이라 대상을 고심하여 선택해야 한다. 그렇기에 그들을 관찰자로 부를 수 있으며, 다른 종류의 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다른 감각이란 무엇인가를 끈기 있게 보는 능력이며, 더 주요한 능력은 마치 신께 기도하듯 희망을 염원하는 능력이다. 그 희망이란 영화의 흥미를 이끌 수 있는 사건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이 관찰하는 대상에게 온전한 평화가 깃들기를 바라는 것일 테다.
많은 다큐멘터리 감독이 그렇겠지만, 언제 끝날지 모를 시간과 사투를 벌인다. 찍은 다음에도 어떻게 플롯을 유기적으로 조합하고 관객들의 감응을 일으킬 수 있는 지도 어려운 문제다. 최근 가장 흥미롭기도 하고 모범적인 사례였던 다큐멘터리 작품은 파벨 로진스키 <발코니 무비>(2021)였다. 약 900일 동안 발코니 위에서 세팅된 카메라로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답하는 형식의 이 다큐는 모험적인 형식을 보여준다. 카메라를 한곳에 둔다는 점뿐만 아니라 파편화된 시간을 너무나도 일상적인 사건으로 환기하기 때문이다. 물론, 카메라를 한곳에 둔다는 점에서 제임스 베닝의 영화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베닝이 미세 조정된 풍광의 영화라면 <발코니 무비>는 거침없이 인물들의 태도와 변화를 관찰하고 발견하는 영화다. 중요한 건 이들의 영화들에서 시간의 흐름이란 인물과 풍경의 변화, 사건의 갱신 등으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의문스럽게도 그것이 실재인지 비실재인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는 점 역시 흥미롭다. 이는 영화적 시간으로 규격화하기 위한 시도 속에서 시간이 오로지 타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다큐멘터리는 영화적이기도 하면서 영화적이지 않게 된다.
가령 <보이후드>(2014) 같은 작품이 12년이란 긴 시간의 기간을 두고 촬영을 감행하면서 점차 성장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점을 생각해 보자. 이것을 모른 채 중립적으로 보면 이 영화는 마치 다큐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큐멘터리가 시간을 의존하고 있음을 부정하기가 어렵다면 더더욱 시간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점을 훌륭하게 수행하는 감독이 바로 '왕빙'이다. 긴 촬영 시간과 더불어 몇몇 작품의 시간도 길기 때문이다. 왕빙이 우리에게 처음 보여준 몇몇 긴 작품을 떠올려 보면 <철서구>(2002) 551분, <원유>(2008) 840분, <광기가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2013) 227분, <15시간>(2017) 900분, <사령혼: 죽은 넋>(2018) 495분이 있다. 물론 그가 언급하고 있듯 영화가 길고 짧은 건 염두에 두는 사항은 아니다. 그의 작품 중에는 비교적 짧은 작품도 있다. 그는 시간을 특별히 생각하고 영화를 촬영하지 않는다고 밝힌 바 있는 것처럼 필요에 따라 시간을 조율한다.
아울러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제작 환경 역시나 크게 고려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증언한다. 그는 <철서구>를 촬영할 당시에 '소형 DV 카메라'로 촬영했으며, <광기가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는 두 달 반 동안 원난성 외딴 지역에 있던 정신병원을 배경으로 조심스럽게 촬영했다. 이 작품을 촬영하는 기간은 3주밖에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매일 아침 7시 혹은 8시에 기상하여 새벽 1시까지 일할 정도로 빠듯한 일정이었다고 한다. 점차 디지털의 발전으로 인해 카메라가 작아지고 촬영에 제한도 없어지면서 왕빙은 더욱 촬영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그는 제작진들과 함께 촬영하는 경우보다 자신이 직접 카메라를 들고 촬영하는 경우가 많고, 이는 그의 영화<15시간>의 제목처럼 15시간을 한 테이크로 촬영할 수 있는 동력이 되기도 했다.
왕빙과 사람
왕빙은 미국 영화매거진 'CINEASTE'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일은 스토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스토리를 만드는 감독이 아닙니다. 저는 보는 것을 좋아하는데요. 흥미로운 사람을 한동안 바라보다 보면 그 사람의 삶 속에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정작 왕빙의 영화에서 볼 수 있는 대상은 대부분 평범하다. (중국의) 공장 노동자, 노가다꾼, 트럭 운전사, 농민, 정신병 환자, 강제노동수용소의 수감자 등이다. 왕빙은 '어떤 장소'에서 사람을 만나고 영화를 찍는다고 말한다. 그가 찍는 대상은 모두 '산업화 이후 사라져가는 사람들'이다. 장예모 영화와 같은 중국의 논픽션 영화들, 선전주의 영화가 주류인 것을 생각한다면, 무감각하고 무정한, 심지어 죽어있는 것 같은 왕빙의 영화는 이를 대비한다. 이를 압축적으로 표현한 작품은 <이름 없는 남자>(2010)이다. 중국 남부에서 촬영한 이 작품은 이름, 출신 등의 아무런 정보도 없는 한 남자가 두더지처럼 동굴에 거주하며 흙을 나르고, 풀을 다듬고, 채소를 먹는 장면을 보여준다. 이러한 반복적인 남자의 행위를 통해 은연중에 우리는 이 영화의 지역성과 사람의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이 영화가 중국이 배경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더라도, 산업 사회의 저 먼발치에 있는 이들을 끄집어내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다.
더 직관적으로 중국 사회의 아픔을 드러낸 작품으로는 <세 자매>(2012)가 있다. 아버지가 도시로 일하러 간 사이 엄마에게 버려진 이 4살, 6살, 10살 세 소녀의 이야기는 마치 매 장면이 서글픈 중국의 얼굴처럼 보인다. 정신병원에서 200명을 따라다니며 촬영한 <광기가 우릴 갈라놓을 때까지>에서도 마찬가지다. 비좁은 숙소와 페인트가 벗겨져 어둡고 칙칙한 벽, 악취가 진동하는 침대에 눕거나 앉아 있는 사람들의 얼굴은 희로애락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유독 중국 정치와 역사를 겨냥하고 있는 작품인 <사령혼: 죽은 넋>은 그 전과 다른 형식을 선보인다. 이 영화가 클로드 란츠만의 <쇼아>(1985)와 비견될 수 있는 이유는, 비참했던 역사를 생생하게 복권할 수 있는 것이 당시 사람들의 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두 영화는 카메라를 담보로 다른 어떤 이미지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는다. <쇼아>에서 나치 수용소의 영상이나 스냅숏으로 과거를 영화의 파편으로 기용하려는 시도를 배제하고 오로지 현재의 풍경을 주시하고 생생한 증언들로 영화를 채운다는 것이 그렇다. 유사하게도 마오주의 정권의 옹호자들이 터무니없는 강제 노동으로 징집되고 죽도록 방치된 사건을 증언하는 이 영화에서 생존자는 3,200명 중의 20명도 채 되지 않는다는 걸 밝힌다.(바이두에 검색 결과 현재 중국에서는 감상할 수 없다)
영화에서 인터뷰가 등장하긴 하지만, 왕빙은 화자에게 특정 질문을 유도하지 않고 말한 내용이 반복되어 등장한다. 이는 왕빙의 영화가 주목하는 형식을 다시금 자문하는 계기로 요청된다. 얼굴을 반복적으로 노출하고, 그들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이 영화의 반복은 은유가 아닌 현실을 강력하게 지시한다. 지아장커의 영화가 고정적으로 주시하고 있는 중국의 모습은 비참한 사회 속에서도 조금의 서정성이나 희망을 주시하지만, 왕빙의 영화에서 중국은 중국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그 궤적을 묘사하고, 희망이 있을 것이란 전망은 존재하지 않는다. 미래를 보지 않고 현실을 보는 것이다.
인터넷으로도 공개가 된 <PORTRAIT WANG BING>(2017)은 독일 감독 Tobi Sauer통해서 탄생하였다. 5분 정도의 짤막한 영상에서 발견되는 왕빙은 두 종류의 화질인 16mm와 디지털을 오가며 찍혀 있다. 왕빙은 카셀에서 16mm 볼렉스 카메라를 구입하고 얼마나 오래 촬영할 수 있는지를 스톱워치로 실험했다. 왜 이러한 실험을 감행한 것일까. 단순하기 그지없는 이 영화에서 도출할 수 있는 것은 카메라와 필름, 곧 기술의 진보와 관계없이 왕빙의 관심이 현대에 이르지 못한 이들에 있음을 시사한다. 왕빙조차 자신이 찍히는 장면에서 현재는 사용되지 않는 카메라를 지켜보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우리가 왕빙의 영화(다큐멘터리)를 바라보며 깨닫는 건 무엇일까. 그의 영화는 시간의 흐름을 선취하기 위해 설치된 카메라는 미래를 전망하기까지 고된 숙고와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증언한다. 언제든지 파괴될 것만 같은 이 다큐멘터리라는 실체는 왕빙을 사회문제를 고발하는 고발자가 아닌 증인으로 세운다. 우린 이 서늘하고도 건조한 영상의 주인과 함께 시선의 관찰자가 되어 현재를 기록한다.
이처럼 왕빙의 카메라는 다큐멘터리의 특성인 윤리적이어야 한다는 강박이나 서사를 통해 감정을 증폭시키는 특성과 무관하다. 그의 영화 미학은 '가장 영화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발굴해 내는 솔직한 눈을 가진 시네아스트다. 그가 말하는 영화화란 극영화와 다른 정치, 재정 등의 다양한 측면에서 통제되지 않는 자유로운 방식에서 기인한다. 언제 어디서나 영화화될 수 있는 방식 말이다. 나는 이러한 왕빙의 작업 방식이야말로 대안적 시네마가 될 수 있을 것이란 예감을 하게 된다.
[글 이현동 영화평론가, Horizonte@ccoar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