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th JIFF] '돌을 찾아서' 시간의 리얼리즘
[24th JIFF] '돌을 찾아서' 시간의 리얼리즘
  • 김민세
  • 승인 2023.05.14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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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라는 찰나의 중심에서"

'요시카와'라는 한 여성이 시골 마을의 들판에서 난데없이 돌로 지어진 성을 찾는다. 그리고 자갈이 가득한 강가에서 정체 모를 남성 도이를 만나고, 그와 함께 목적과 의미를 알 수 없는 이상한 놀이를 계속한다. 도이는 강가에서 물수제비를 하다가 실수로 요시카와에게 주기로 했던 돌을 잃어버리고, 그 돌을 찾는 데 집착적으로 전념한다. 다음 날, 요시카와는 마을을 떠나고 도이는 어김없이 강물에 몸을 담근 채 돌을 찾는다.

이것이 <돌을 찾아서>가 보여준 서사의 전부다. 성을 찾는 여자와 돌을 찾는 남자. 해가 질 때까지 계속되는 이상한 놀이. 도이가 다짜고짜 넓은 강물을 가로질러 요시카와에게 다가가는 영문 모를 첫 만남의 장면을 제외하면, 영화의 서스펜스는 풀리지 않는 의문 속에서 서서히 힘을 잃고 무화(無化)되거나 이상한 방식으로 발현되기에 이른다. 결국, 이 영화의 서스펜스는 어떠한 명확한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는 모호한 기대를 관객에게 가져다준 채, 그 해소를 유보시키고 시간을 지연시키며 종국에는 불확실의 한가운데서 영화를 멈추어 버리는, 그리고 이 시간을 언제까지 지켜보아야 할 것인가라는 메타적인 의문으로 비롯한 긴장감과 지루함, 실망감에 가까운 정서를 갖고 관객과 씨름하는 영화의 난감한 태도에 있다.

 

ⓒ 전주국제영화제

'놀이'라는 무의미의 세계

<돌을 찾아서>에서 가능세계의 영역에 있는 메타포와 상징, 기호분석의 기회는 이상하게나마 무너져 내린다. 이미지와 서사라는 은유의 원관념이 될 맥락과 역사가 말끔하게 잘린 채 영화는 시작되고, 그 이후에 반복적으로 재현되는 '돌과 강의 풍경'과 '두 사람의 놀이'라는 이미지는 지시 대상 없는 이미지이자 단지 무의미로서의 2차원적 형상, 기의 없는 기표가 된다. 그 시간-이미지의 비밀과 내면을 해결할 실마리가 되라고 기대되는 후반부의 장면에서조차, 영화는 도이의 역사의 일부분을 은밀하게 '보여주는 것'과 명확한 진실을 '숨기는 것'을 통해 상상과 의미로 채워질 여백을 드러내기보다는, 관객이 가정할 수 있는 세계의 가능성을 폭력적이라 느껴질 정도로 허무하게 발가벗긴다. 도이가 자신의 일기장에 써내리는 글은 그저 우리가 이전에 보았던 한나절의 시간 그 자체의 기술(記述)이며, 그것에는 어떠한 정서적 개입이나 의미론적 요청이 없다.

그 문장들과 활자를 하나씩 적어내리는 남자의 건조한 몸짓은 단지 우리가 보았던 것이 '그저 그것'이며,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영화가 담아내고 있는 '요시카와와 도이의 놀이'가 이상하리만큼 긴 시간 동안 지속된다는 점, 그리고 그 긴 시간을 큰 생략없이 그대로 담아내고자 했다는 점 역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놀이'라는 행위의 본질적인 이유는 '심심함'이다. 즉, 주어진 시간이 있는데 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 긴 시간은 이들의 놀이와 카메라의 응시에 또 다른 제3의 목적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시간이며, 그렇기에 이 시간 앞에서 목적과 의미, 욕망은 의미없는 수식어가 되어버린다. 이는 결국, 요시카와가 정체 모를 도이의 돌발적인 행동에 위협을 느끼다가도, 도이의 놀이에 조금씩 참여하게 되는 이유가 된다.

그렇다면 놀이의 시간은 왜 남자의 손에서 다시 한번 반복되어야 하는가. '강가에서의 놀이'라는 사건은 우리의 눈앞에서 (또는 카메라 앞에서) 한번 행해지며, 남자의 손을 통해 다시 한번 기술된다. 이 반복은 여러 측변에 있어서 '효용'에 관련한 몇 가지 질문을 발생시킨다. 이들은 왜 이런 놀이를 하고 있으며, 도이는 왜 그 일들을 그저 그대로 적어내리는가. 영화는 왜 이런 놀이의 시간을 멈춤없이 바라보아야 하며, 도이가 그것을 적어내리는 것을 다시 보여주어야 하는가. 우리는 왜 이 시간을 보고 견뎌야 하며, 활자로 다시 그것을 상기해야하만 하는가. 

이 모든 질문 앞에서 대답할 수 있는 것은 '효용'의 측면에서의 '무의미'이다. 거꾸로 뒤집어 보자면 이런 질문을 해볼 수도 있다. 고작 몇 줄의 문장으로 설명될 수 있는 일을 왜 우리는 수십 분의 시간 동안 그들과 함께 지켜보고 있어야만 했는가. 이건 어쩌면 시간-이미지로서의 영화 예술에 대한 본질적이고 존재론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 전주국제영화제
ⓒ 전주국제영화제

'그때 거기에-존재-했던 것'의 재현

<돌을 찾아서>가 사건을 기록하는 방식은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영화 이미지로 그들의 시간을 담아내는 '응시'이다. 그 응시가 맺어지는 곳은 '돌과 강'의 풍경이며, 그 이미지는 곧 요시카와가 찾아 헤매던 '돌로 지은 성'의 잔상이다. 두 번째는 도이가 자신의 일기에 그날의 하루를 내려 적는 '기술(技術)'이다. 기술은 그저 종이 위에 쓰인 2차원적 물질, '활자'로 남으며 그 문장들은 요시카와와 도이의 '놀이'라는 사건의 흔적이다. 이러한 이상하게나마 정직한 두 가지 리얼리즘의 태도로부터 비롯한 결과물을 사건 그 자체의 재현이 아닌 잔여물의 기록이며, 그 과정에서 사건과 현실을 부분적으로 선택되고 축소된다. 여기서 현실과 재현의 복잡한 관계 안에서 직조된 세 가지 세계를 가정해 볼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성'이 존재하는 역사의 세계. '돌과 강'이 존재하는 풍경의 세계. 그리고 '몸과 행동'이 존재하는 사건의 세계. 잔여물로서 남은 역사의 세계는 카메라의 응시를 통해 풍경의 영화 이미지로 드러나고, 무의미로서 남은 풍경의 세계는 사건을 지목하는 활자와 텍스트로 드러난다. '돌과 강'은 존재하지만 (혹은 존재했지만) '보이지 않는 성'을 지목하고, '놀이라는 사건'은 지난 뒤에도 남아있는 (혹은 영원히 살아있을) '돌과 강'을 지목한다.

영화에서 일어나는 두 차례의 재현은 어떠한 세계가 무너져 내린 뒤인 사후에 일어나고, 그 이전의 세계를 뒤늦게 붙잡으며, 체를 걸러내듯이 시간과 이미지를 축소하고 분열시킨다. 영화라는 시간이자 이미지는 그 재현을 가능케 한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그 재현이 실행하는 것은 '그때 거기에-존재-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그 세계는 재현과 동시에 죽고, 죽어있는 것이 되어버린다. <돌을 찾아서>의 유희의 시간이 재현해내고 있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시간 그 자체'다. 그들의 놀이와 돌, 강이 만들고 있는 지속적인 풍경의 장소성과 연속적인 이미지성은 사진 이미지의 '정지'라는 특성이 푼크툼을 발견해내는 사유의 시간을 제공한다는 바르트의 견해에 따르듯이 정직하게 그리고 끊임없이 흐르고 있는 사유의 시간을 제공한다. '돌과 강'이라는 정지한 이미지는 거시적인 시네마(cinema)의 시간이며 요시카와와 도이가 보내는 하루는 필름(film)의 시간, 즉 시네마라는 거대한 우주 속 찰나의 중심이다. <돌을 찾아서>의 기이한 서스펜스는 도이의 정체에 관련한 삼류 미스터리 같은 서사의 비밀 같은 부분이 아니라, '그 시간을 어떻게 재현하는가'라는 끈질긴 고민이 만드는 진동에 있다.

[글 김민세 영화전문기자, minsemunji@ccoart.com]

 

돌을 찾아서
There is a Stone
감독
오타 타츠나리
OTA Tatsunari

 

출연
OGAWA An
KANO Tsuchi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104분
공개 제24회 전주국제영화제

김민세
김민세
 고등학생 시절, 장건재, 박정범 등의 한국영화를 보며 영화를 시작했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영화부에 재학하며 한 편의 단편 영화를 연출했고, 종종 학생영화에 참여하곤 한다.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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