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삼각형' 구조로 잇는 세 종류의 선
'슬픔의 삼각형' 구조로 잇는 세 종류의 선
  • 이현동
  • 승인 2023.05.23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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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사회주의는 과연 존재하는가"

제75회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슬픔의 삼각형>(2022)은 지금까지 루벤 외스틀룬드의 작품에서 가장 친절하고도 개방성을 지닌 작품이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서사를 작동시키는 방식'과 그에 따라 기용되는 '프레임을 나누는 방식'에 있다. 영화는 마치 관음하는 듯 인물과 사물, 배경을 중립적으로 응시했던 이전의 카메라가 인물을 촬영하는데 더욱 비중을 두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앞서 글(「[루벤 외스틀룬드] '영화의 사회학': 교육을 위해 카메라 불러오기」)에도 쓴 바 있지만, 예테보리 3부작이라 언급할 수 있는 초기작이 픽션과 다큐의 경계에서 '영화'라는 매체를 규정할 수 있는 원리가 형식이라 믿었다면, <슬픔의 삼각형>은 형식보다는 '메시지'에 주목한다.

 

ⓒ 그린나래미디어

어찌 보면 로이 앤더슨의 영화를 보며 성장해 왔던 루벤의 영화는 그와 반대로 가는 것처럼 보인다. 로이 앤더슨의 <스웨덴 러브 스토리>(1970)에서 <끝없음에 관하여>(2019)까지의 변화가 형식에 있다면, 루벤의 첫 장편 영화 <몽골로이드 기타>(2004)와 <슬픔의 삼각형>은 서사를 조직하고 편집하는 과정에서의 변화가 큰 차이다. 그 차이를 설명해 줄 수 있는 단어는 '예테보리'와 '남성'이다. 초기 '예테보리 3부작'은 거리의 영화, 즉 스웨덴이라는 공간을 설명하는 것이었다면, <슬픔의 삼각형>까지의 이후 작품들(남성 부조리 3부작)은 '인물'이 해당하는 남성 혹은 직업에 관한 의미를 풍자한다. 로이 앤더슨처럼 완전히 전복적인 스타일로 변화한 것은 아니지만, 이는 루벤을 지켜봤던 관객에게 긍정이든 부정이든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루벤이 축적해 왔던 형식에 대한 실망일 수 있고, 반대로 선명해진 메시지와 형식을 반가워하는 대중의 반응일지도 모른다.

루벤이 언급한 바 있기도 한데, <슬픔의 삼각형>과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2019)을 비교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이를테면 풍랑 때문에 선박의 변기가 역류하는 장면, 돌로 당나귀의 머리를 내려치는 장면 등이 있다. 또 이 이야기가 계급 서사라는 점을 지적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슬픔의 삼각형>에서 유의미하게 발견해야 하는 요소는 '영화의 요소가 얼마나 중립적인가'이다. 영화의 주제가 '선과 악',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하려는 정치적인 메시지가 있는지 없는지가 포인트로 작용한다면, <기생충>도 그렇지만 이 영화도 결국 인물보다는 '구조에 의한 풍자'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루벤이 갖고 있는 관심은 사회와 정치에 관한 풍자로, 특정 대상을 저격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회라기보다 '구조화된 인간'에 가깝다. <슬픔의 삼각형>에는 많은 이해관계가 충돌하지만, 정작 관객인 우리는 '어떤 인물이 몰입의 대상이 되어야 할지' 고민이 든다. 이는 감독이 대중과 영화의 요소에 해당하는 카메라, 서사, 대사 사이의 판단을 단언하지 않고 유보하기 때문이다.

루벤의 풍자가 보여주는 것은 결국, 중립지대에서 풍자의 대상이 구조의 구도를 과격하고도 명료하게 묘사하는 것이다. 영화에는 오로지 '영어'만으로 대사가 구성되어 있다. 각기 다른 국적을 가진 요트의 승객들은 모국어를 사용하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것은 언어를 통해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무인도라는 중립지대가 되는 3부에서 구조의 이탈은 또 다른 구조를 만드는 요소에 대한 풍자를 기획한다.

 

ⓒ 그린나래미디어

풍자의 사례들

<슬픔의 삼각형>은 총 3개의 챕터로 진행된다. 각각의 장별로 발생하는 공간의 변화는 인간의 세계를 전시한다. 1부 '칼과 야야'에선 남성의 찌질함을 2부인 '요트'는 자본주의로 침몰하는 사회의 형태를 3부는 사회를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1부는 남성의 모습을 드러내는 점에서 <포스 마쥬어: 화이트 베케이션>(2014) 를 그리고, 2부는 미술계라는 특정 집단을 다루는 것에서 <더 스퀘어>(2017) 등을 복기하는 방식으로 보인다. 하지만 3부에서 무인도에서 발생하는 권력 구조의 전복은 그의 영화에서 가장 오리지널리티 한 실험이자 그가 말하려는 풍자의 기원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뷰티 업계에서 사용되는 '슬픔의 삼각형'은 미간을 찌푸릴 때 생기는 주름을 이야기하며 영화에선 모델 오디션을 보는 주인공 칼(해리스 딕킨슨)에 대한 심사위원의 평가로부터 제시된다. 모델이 모여있는 자리에 인터뷰어는 자본주의를 조소하는 풍자를 거꾸로 시행한다. 패션 브랜드인 'H&M'과 '발렌시아가'는 저가 브랜드와 명품브랜드로 분류된다. 이를 비교하는 제스처를 취해달라는 인터뷰어에 말을 따라 H&M이 호명될 때 따뜻한 미소와 자세를 취하고, 반대로 발렌시아가가 언급될 때는 진지한 표정과 딱딱한 자세를 취한다. 이러한 시작이 의미하는 건 '슬픔의 삼각형'이 이러한 자본주의에 의해 쉬이 경도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표정'과 '제스처'가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감정의 표현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물성이 분류하는 계급 격차에 대한 이야기를 신체적 제스처로 풀어내는 <슬픔의 삼각형>은 인간군상의 욕망과 무력함을 해학적으로 드러낸다.

1부에서 야야의 런웨이가 끝난 후 레스토랑에서 칼과 야야는 식사 계산 문제 때문에 서로 다툰다. 계산하겠다고 말한 것을 기억하지 못한 야야에게 돈벌이가 시원찮은 칼은 자신이 계산해야 하냐며 날을 세운다. 이 장면을 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우디 앨런의 영화에서 등장하는 찌질한 남성상이 떠오른다. 어쩌면 고루해 보이는 이미지지만, 이것이 풍자 요소로 자리할 때 남성과 여성이 설정되는 건 성별이 아니라 '자본'임을 알 수 있다. 영화의 대사 중 남성보다 여성 모델이 3배 이상을 번다는 대사가 나온다. 여성 모델보다 남성 모델들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카메라는 애초부터 이 구도를 염두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우린 모델의 겉모습보다 모델의 성별로부터 오는 자본의 차별을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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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의 상징인 대형 요트에서 풍자를 강건하게 만드는 역시 돈이다. 승무원들이 앉아 총괄 매니저인 폴라(비키 베를린)의 "돈, 돈, 돈"을 외치는 열정적인 강연에서 손님의 응대법은 모든 말에 "네, 손님"이라 대답하는 것이다. 여기서 요트가 갖고 있는 '부'의 이미지는 영화에서 언제 파괴될지 모를 요소이기도 하다. 요트는 현대 계급 사회를 함축하고 있는 공간이다.

먼저, 요트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보자. '똥'으로 돈을 번 드미트리(즐라트코 버릭), 스웨덴의 억만장자인 남성, 지뢰와 수류탄으로 돈을 번 영국인 부부, 자신의 신분을 과시하고 평안과 안락을 누리려는 다양한 사람이 대형 요트에 탑승한다. 요트에서 선장으로 등장하는 토마스 스미스(우디 헤럴슨)는 미국에서 태어난 마르크스주의자로 풍자의 주축이 되는 사람이다. 드미트리의 아내가 어느 한 여자 승무원을 불쌍히 여겨 자기 대신 수영을 하라고 말한다. 여자 승무원의 애매한 태도를 보며 그녀는 선박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을 불러 수영하라고 말한다. 이때 요리를 하는 직원들은 상하기 쉬운 해산물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채 나오기도 한다.

이어 선장이 공식적으로 준비한 만찬 시간과 함께 몸 개그를 통해 거세게 풍자를 준비한다. 갑작스러운 폭풍과 함께 이 만찬은 엉망이 된다. 많은 사람은 풍랑에 의해 배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공황을 겪고, 분노하거나 구토하고, 객실로 돌아간 한 여성은 흔들리는 화장실에서 몸을 가누지 못한 채로 구토를 연발한다. 버디 무비가 공존하는 이 시퀀스에서 선장과 드미트리는 선장실에서 스피커로 사회주의자 혹은 자본주의자들의 발언을 읽으며 요트의 파멸을 함께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무인도에서 보이는 건 사회주의자인 선장이 아닌 러시아 자본가인 '드미트리'라는 것이다. 공산주의자인 어머니에게 영향을 받은 감독 루벤이 생존시킨 자본주의자는 이 영화에서 어떤 메시지를 주려 하는 것일까.

 

ⓒ 그린나래미디어

자본이 소멸하고 원시로 돌아가는 3부는 일종의 '사회 실험'처럼 보이기도 한다. 해적의 습격을 받고 무인도로 떨어진 7명의 인물에게 주어진 건 구조 신호를 보낼 폭죽밖에는 없다. 그러던 중 선박에서 화장실 청소를 담당하던 직원인 에비게일(돌리 데 레온)이 몰고 온 구명선에서 물을 보급 받는다. 에비게일은 자신이 희생하는 것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소유한 사냥 기술로 물고기를 잡고, 저녁에 사람들을 회유하여 자신을 선장으로 여기게 한다. 무인도에서 위계는 성별도 아니고 생존에 필요한 기술이라고 할 때, 이것은 사회주의라기보단 자본에 의해 구성되는 사회에 가깝다. 에비게일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성욕을 채우려 한다. 야야는 칼에게 스킨쉽에 대한 매뉴얼을 제시하지만, 결국 젊은 남자이자 모델인 칼을 구명선에 불러 욕망을 충족하고, 칼 또한 야야에게 거짓말을 하기에 이른다. 이 같은 관계를 처리하고 싶었던 칼은 에비게일을 설득하여 자신들의 관계를 밝히고자 하지만, 에비게일은 더욱 강경한 태도로 야야를 죽이려고 한다.

에비게일과 야야는 산을 오르다 발견한 이 섬의 정체가 고급 리조트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때 카메라는 위계가 붕괴할 위기에 봉착한 '에비게일의 표정'에 주목한다. 바다를 바라보고 있던 야야를 향해 다가가는 에비게일에게 야야는 자신이 다시 모델 활동이 하게 된다면, 자신의 비서로 일해 달라고 말한다. 여기서 영화는 그들을 향해 다급히 뛰어가는 칼을 트레킹으로 잡는다. 결과적으로 마지막 장면에는 에비게일의 돌에 맞은 야야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알 수 없다. 위계가 변주되는 순간에서 '에비게일의 표정'은 잔혹하다. 이는 그만큼 영화에서 '온전한 사회주의가 과연 존재하는 것인지'를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루벤의 시선으로 다가온다. 안타깝게도 야야를 연기한 샬비 딘이 실제로 숨을 거둔 건, 마치 이 영화의 뒷이야기를 연결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필자도 굳이 결말을 상상해 보자면, 야야가 죽었을 것이고, 만약 칼도 그 장소에 있었다면 그 또한 죽었을지도 모른다. <슬픔의 삼각형>은 풍자이기 이전에 '서늘한 사회 구조'를 주시한다.

루벤은 <슬픔의 삼각형>을 통해 물성을 지긋이 노려보며 식별이 불가한 유령처럼 사회를 구성하는 질료임을 말하고, 이러한 주제를 쉽고도 명료하게 잘 녹여냈다. 3장으로 구성된 구조의 선이 완성한 삼각형에서 너무나도 슬픈 자본을 보게 되는 것이다.

[글 이현동 영화평론가, Horizonte@ccoart.com]

 

ⓒ 그린나래미디어

슬픔의 삼각형
Triangle of Sadness
감독
루벤 외스틀룬드
Ruben Ostlund

 

감독
해리스 디킨슨
Harris Dickinson
찰비 딘Charlbi Dean
우디 해럴슨Woody Harrelson
돌리 드 레온Dolly De Leon
즐라트코 버릭Zlatko Buric
비키 베를린Vicki Berlin

 

수입|배급 그린나래미디어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147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3.05.17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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