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켄 로치'(Ken Loach)의 영화는 쉽다. 플롯은 복잡하지 않고 편집이나 영상에 기교를 부리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 영화의 미학적 측면이라 부를 수 있는 형식적 아름다움이나 이야기의 새로운 양식은 관심 대상이 아니다. 1960년대부터 평생 영화를 만들어 온 감독이 일관되게 천착하는 테마는 본인의 영화처럼 심플하다. '노동'과 '아일랜드의 문제', 이 두 가지 키워드를 감독 켄 로치는 역사라는 이름으로 소환한다. <지미스 홀>(2014)이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이 아닌 근작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나 <미안해요, 리키>(2019)를 생각한다면 '역사'라는 단어에 고개를 갸웃할 수 있지만, 표준국어대사전이 기술하고 있는 두 번째 의미 '어떤 사물이나 사실이 존재해 온 연혁'이라는 의미로 본다면 분명 어색하지 않다.
켄 로치의 영화 속 인물들은 철저하게 세상에 던져진 개인의 입장을 드러내는데, 감독은 이를 '선형적 시간'과 '인과성'으로 플롯을 직조해낸다. 간혹 그의 영화에 '과대평가되었다' '뻔하고 촌스럽다'는 평이 따라붙는 이유도 여기에 기인한다. 그의 인물들은 공통적으로 육박해 오는 거대한 사회의 흐름을 미처 피하지 못한 채로 어그러지고 무너지는데, 영화는 이 과정을 우리에게 이해할 수 있게끔 잘라내 보여준다. 그렇기에 영화 속 사건은 다층적이고 풍성하다기보단 레고 블록을 쌓아 올린 것처럼 깔끔하고 매끈하다. 결국, 우리가 그의 영화를 통해 보게 되는 것은 '정치적 주제 의식'과 명확한 '적(지칭되는 대상이 인물이 아닐지라도 시스템, 단체의 대립과 같은 형태로 존재하는)'이다.
'세계란 근원적 원인을 알 수 없을 만큼 복잡다단하다'는 사실과 그리고 고전(Classic) 혹은 명작이라 평가받는 작품은 대개 '이러한 복잡성'을 한 꺼풀 벗겨내고 그곳에 은폐되어 있던 '어떤 진실'을 발굴해낸다는 점을 떠올려 볼 때, 켄 로치를 따라다니는 평이 그저 작품의 완성도를 폄훼하기 위한 말이 아님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점은 켄 로치의 영화에도 '어떤 진실'이 엄존한다는 것이다. 다만, 그에게 진실은 '발굴'해내야 하는 것이 아닌 '기억'해야 할 상태로 존재한다.
켄 로치는 "우릴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 일하고", "고용 기사가 아닌 서비스 제공자", "고용 계약 같은 거 없고 목표 실적도 없다"는 말 때문에 성실한 노동자가 어떻게 파괴되는 지를 <미안해요, 리키>로 기록한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굶어 죽기 전에 항고일 정을 구한다." "나는 다니엘 블레이크.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에 나는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는 말을 통해 시스템이 어떻게 사회 주변에 위치한 인간을 죽음으로 내모는지를 <나, 다니엘 블레이크>로 기록한다. 켄 로치의 세계관을 설명할 때 절대 빠뜨릴 수 없는 어휘가 '역사'와 '말'인 점이 여기에 있다.
"역사란 향수가아니다. 역사는 왜 우리가 지금의 모습인지, 우리가 누구인지, 왜 우리가 현재의 상황에 있는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역사가 향수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은 권력을 가진 부르주아들에게 적합한 말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이 계속 권력을 유지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역사는 우리가 지금 처한 상황을 설명해주며 따라서 역사를 탐구하여 민중들에게 그들의 역사를 되돌려 주는 것은 감독으로서 갖는 책임 중 하나인 것이다. 왜냐면 역사야말로 미래를 여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민중의 과거에 대한 생각을 조절할 수 있다면 당신은 그들의 현재를 재조정할 수 있고 현재를 조정하게 되면 결국 그들의 미래를 바꿀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과거에 대한 민중의 생각을 조정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켄 로치, 싸우는 작가주의에 대하여」, 『키노』, 1997.09
켄 로치에게 역사란 '우리가 지금 처한 상황을 설명해주는 것'인 동시에 '미래를 여는 열쇠'이며 시간의 잔상이 아닌 현재이고 미래의 가능성인 동시에 노스텔지어와 같이 미화된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다. 때문에 역사란 미화로 퇴색돼선 안 될, 보존해야 할 '어떤 진실'에 다름 아니다. 그에게 영화는 향수화된 역사를 '민중에게 돌려주기 위한 문제 제기'인 것이다.
언어권을 막론하고 역사(history)는 이야기(story)와 밀접한 상동성을 가진다는 건 잘 알려져 있다. 전자는 '사실'이고 후자는 '허구'지만, 역사를 아카이빙 하는 동안 다양한 선택과 배제가 이루어지며 축약과 과장이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또 서사를 내포하고 있는 작품이 창작을 통해 구현된 완벽히 새로운 현실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사실과 허구 두 방식으로 구분할 수는 없을 것이다.(노태훈 『현장비평』, 민음사, p.114) 이야기에 기반한 장르인 영화 또한 마찬가지이다.
켄 로치는 <당신은 어느 편인가>(1984), <1945년의 시대정신>(2012) 등의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도 했지만, 허구의 이야기로 세상을 기록하는데 훨씬 더 비중을 두었다. 이는 켄 로치가 허구로 현실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이 믿음의 연장선에 영화가 현실에 참여하고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걸 굳게 믿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여기서 반문할 수 있다.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이 왜 다큐멘터리가 아닌 이야기(story)인가' 일견 사실을 담보로 진실을 전달하는 다큐멘터리가 그에게 어울리는 형식이 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여기엔 두 가지 사족이 필요하다. 하나, 다큐멘터리가 어떤 사건을 객관적으로 기록하고 전달할 수 있다고 믿는 리얼리스트의 믿음과는 다르게 진실은 특정한 (권력)관습에 따라 만들어지는 산물이며, 다큐멘터리 또한 관습을 벗어날 수 없기에 권력의 산물이라는 구성론자들의 반박. 다른 하나, 영화는 예술인 동시에 오래전부터 부르주아들이 역사를 향수화 시키는데 사용한 도구였다는 사실이다. 당장 헐리우드 영화만 떠올려 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데, 이는 민중의 생각을 권력자가 조종할 수 있다는 의미지만 영화는 힘이 강하다 믿음의 '증거'로 해석할 수도 있다. 켄 로치는 '부르주아의 무기'였던 영화를 그들로부터 뺏어와 현재를 재조정하는 반란을 꾀한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의 극장 시퀀스는 위의 대목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투쟁의 결과를 보기 위해 사람들은 극장 안에 모여 있고 경쾌한 분위기의 피아노가 연주된다. 스크린 위에 상영된 "이로써 새로운 아일랜드 자유국 탄생"이란 말에 박수를 보내지만 "새 자유국은 대영제국의 자치령으로서 새로운 국회의원들은 모두 영국 왕실에 충성 서약을 할 예정이다"라는 말에 사람들은 분노한다. 이후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의 인물들은 영국과 대항이 아닌 내부 분열로 방향을 선회한다. 극장 스크린에 상영되는 문장 사이사이 끼어 있는 흑백 영상은 허구가 아닌 철저한 사실이었다. 문장의 내용 또한 거짓이 아니었지만, 진실도 아니었다. 켄 로치는 사실로써의 영화와 권력의 관계 그리고 영화가 가지는 힘을 한 시퀀스의 허구로 압축해 보여준다. 그리고 스크린 위에 있는 말을 촬영함으로써 영국이 은폐하고 싶어 하는 역사의 진실을 기록한다.
켄 로치의 아카이빙은 다양하게 이루어진다. <미안해요, 리키>의 중반부에선 벤에 딸을 태우지 말라는 감독관의 말에 리키는 "내 벤이고 내 보험에 내 딸이잖아요. 개인사업 아니에요?"라고 항변하지만, 감독관은 "그렇긴 한데 우린 프랜차이즈야(중략) 고객을 건드리면 안 돼"라고 답한다. 감독관의 말은 리키의 정당한 권리를 무화하는 동시에 "고용 기사가 아닌 서비스 제공자"라는 사측의 말이 얼마나 기만적인지를 기록한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중반부에선 구직 수당을 받기 위해 이력서 특강에 참여한 다니엘이 이렇게 말한다. "일자리 부족도 사실이오" 하지만 강사는 이렇게 말한다. "현실적으로 생각합시다. (중략) 눈에 띄십시오, 영리해지세요. 기술이 있다고 해서 잘되는 시대가 아니에요. 이제 증명해야 합니다." 강사는 정부에 의해 고용된 사람이기에 서사적 비약을 감수하고 말하면 정부의 생각을 말하는 사람이다. 정부는 일자리를 늘릴 고민 대신 실업자들에게 경쟁하라 지시한다. 영리해지고 증명하라, 고 명령하긴 하지만 구체적인 방법은 자신조차 모른다. 이처럼 켄 로치는 강자와 약자의 대화를 통해 역사에서 배제당한 목소리와 배제하고 싶은 목소리를 동시에 기록한다. 그의 영화는 철저하게 현실에 발 딛고 서 있다.
그렇기에 "예술 작품은 문화와 세속적 공간 너머에 있는 숨겨진 현실을 재현한다는 믿음에서 연유해 현실과 다른 무엇, 현실에서 얻을 수 없는 어떤 깨달음, 현실을 넘어서는 통찰 같은 말로 가치화된다"는 보리스 그로이스의 설명(보리스 그로이스, 『새로움에 대하여』, 현실문화, p.177)은 켄 로치의 작품을 필요 이상으로 축소 시키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애덤 맥케이'처럼 현실 문제를 테마로 다루면서도 미적으로 세련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영화'는 분명 '예술'의 영역이며 보다 더 미적인 '문제 제기' 또한 가능해질 것이라는 긍정적 낙관을 가능케 한다. 이처럼 영화는 스스로를 계속해서 갱신시킬 것이다. 다만 우리는 아직 완벽하게 미적인 영화를 보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로 완벽하게 현실적인 영화 또한 보지 못했다. 전자의 가치와 다른 층위의 가치를 가진 영화. 여기에 켄 로치만이 추구할 수 있는 후자의 영역이 있다. 그의 영화는 기억하고 재현하고 증언한다. 그의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을 뽑으라면 당연 관공서 벽에 다니엘 블레이크를 그래피티하는 순간일 것이다. 다니엘 블레이크는 자신의 이름을 새긴 뒤 이렇게 말한다. "내 예술품이오"
[글 배명현 영화평론가, rhfemdnjf@ccoar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