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벤 외스틀룬드] '영화의 사회학': 교육을 위해 카메라 불러오기
[루벤 외스틀룬드] '영화의 사회학': 교육을 위해 카메라 불러오기
  • 이현동
  • 승인 2023.05.16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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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테보리 3부작'을 중심으로

스웨덴 감독 '루벤 외스틀룬드'(Ruben Ostlund)를 수식하기 알맞은 단어는 무엇이 있을까. 그가 언급했던 것처럼 ‘영화 안에서의 사회학자’일까. 사회 문제를 소재로 하는 '켄 로치'나 '다르덴 형제'와 같은 영화가 있을지언정 루벤처럼 감각적인 영역 아래에서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하는 감독은 그리 많지 않다. <더 스퀘어>(2017)와 <슬픔의 삼각형>(2022)으로 황금종려상을 2번이나 수상한 그의 위상은 분명 그의 작품 세계에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하지만, 몇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그 독특한 작품성 때문에 쉬이 접근하기가 힘든 것도 사실이다. 특히나 <몽골로이드 기타>(2004)와 같은 초기작은 시네필과 같은 민감한 관객이 아니라면 쉽사리 작품에 몰입하기 힘들다.

 

ⓒ 영화 <프리 래디컬스2>(1998)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루벤 외스틀룬드의 작품 세계의 기원은 어디에 있는가' 맨 먼저 그가 제작한 첫 작품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공식적인 필모그래피에는 기록되진 않았지만, <프리 래디컬스> 시리즈(1997~8)는 20살부터 25살까지 루벤이 여러 유럽 리조트를 탐방하며 촬영한 스키 영상을 편집한 작품이다. 스키에 관심이 있었던 루벤은 스키를 좋아하는 친구들과 함께 작업에 착수했다. 카메라는 굉장히 높은 산 위에서 스키를 타며 하강하는 인물을 마스터 숏으로 담는다. 여기서 흘러나오는 활기찬 록 음악은 낭떠러지의 위험천만한 순간에도 불구하고 해학적인 이미지로 둔갑시키는데, 이는 루벤의 영화스타일을 반영한 사례로 표명된다.

이후 루벤이 추구하는 코미디와 풍자는 그의 영화 성격을 드러내는 핵심 레토릭이다. 그가 비교적 젊은 감독임에도 초기 영화와 지금은 분명한 차이를 지적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은 주제의 변화라기보단 '카메라 구도의 변화'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프리 래디컬스>는 그가 예테보리에서 영화를 전공하는 계기가 된다. 루벤은 한 인터뷰에서 과거를 회고하며 2학년 때 학교에서 감명 깊게 본 미카엘 하네케의 <미지의 코드>(2001)가 자신의 작품 세계를 바꿔놓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필자에게 <퍼니 게임>(1997)도 그러했지만, 하네케의 작품은 구도를 활용하는 것보단 스토리텔링을 실험적으로 활용한 사례로 여겨진다)

더불어 스웨덴의 영화 제작자인 칼레 보만(Kalle Boman)은 루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보만은 스웨덴의 거장 감독인 '로이 앤더슨'(Roy Anderson)과 '보 비던 버그'( widerburg)와 함께 작업한 바 있다. 칼레 보만은 루벤의 조력자이자 좋은 영감을 주는 동료였듯 그의 작품 활동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도 했다. 루벤의 첫 번째 장편 영화인 <몽골로이드 기타>를 촬영하기 전, 칼레 보만의 제안으로 <패밀리 어게인>(2002)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 작품을 하나 찍게 된다. 루벤의 부모님을 대상으로 한 이 영화는 그들이 이혼한 지 23년 후를 다룬다. 이 다큐멘터리의 의도는 카메라를 통해 그들의 화해를 이끌 수 있는지를 실험하는 것이다.

루벤은 "내가 영화 제작에 관심이 있는 이유는 움직이는 이미지가 인간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데 매우 강력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는 그가 자신을 사회주의자로 공포했던 것만큼 그의 영화의 동력은 행위를 요청하는 데 있음을 강조한다.

 

ⓒ 영화 <몽골로이드 기타>(2004)

예테보리 3부작

루벤 외스틀룬드가 최초로 ‘픽션’을 가장한 채 내놓은 첫 번째 작품인 <몽골로이드 기타>는 아이러하게도 픽션과 다큐멘터리의 경계 속에서 배회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이러한 배회는 영화란 속성이 장르의 범주 아래에서 공전하지 않으며, 그것은 결코 규정할 수 없는 이미지임을 강조한다. 비슷한 이야기로 <길리압>(1975) 이후 로이 앤더슨의 작품이 영화의 주요한 재료라 규정할 수 있는 서사를 배제한 작품을 만든다는 것을 떠올려 보자. 각각의 서로 다른 장면들의 배합이 관객의 상상에 의해 조합되는 구조라는 것은 ‘영화’라 상정하고 있는 일종의 장르적 관념을 해체한 어쩌면 초현실주의 그림에 가까운 것이다. 초기 루벤은 <몽골로이드 기타>를 시작으로 이러한 실험을 감행하길 그치지 않는다.

<몽골로이드 기타>에서 처음 마주하는 장면은 스웨덴의 국민가요인 알송 포 스칸센(Allsång på Skansen)을 부르는 남자 가수와 스웨덴 국기, 따라 부르는 관객들이다. 그다음으로 지직거리는 TV 화면과 잡음, 안테나를 고치는 사람이 서로 교차한다. 영화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이 장면에서 우리가 유추할 수 있는 건 이 영화의 배경과 주된 테마가 무엇인지다. 영화는 스웨덴을 호명하고 스웨덴이 ‘수리’해야 할 대상임을 지시한다. 이것이 첫 장편의 첫 장면이라는 점에서 우린 사회주의자인 루벤의 포부를 독해할 수 있다. 또한 영화는 길거리에 앉아 기타를 치는 주인공 격인 소년을 단 한 번도 가까이서 주목하지 않는다. 루벤이 말하듯 영화가 ‘픽션’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인물을 찍는 카메라의 구도는 사건을 마주하는 인물의 감정을 강조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클로즈업이 없는 이 영화는 구도의 변화를 의도적으로 생략한다. 이것이 영화적이라는 걸 의도적으로 감지하지 못하도록 하고 더 급진적으로 말해 아예 붕괴하려는 작법에서 도출할 수 있는 건 프레임 안에 있는 배경과 사물일 것이다. 스웨덴을 반사하는 이 영화는 마치 사회학을 교육하기 위한 예비 과정처럼 보인다.

교육학적 요소는 다음 영화인 <분별없는 행동>(2008)에서도 잘 드러난다. 먼저 그 전 작품과 차별점이 있다면 제목처럼 카메라가 무엇을 찍으려는 것인지 분별할 수 없는 장면들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그의 영화에서 자주 노출되는 (롱 숏으로 보이는) 앵글의 구도는 여전하지만, 장애물로 인해 은폐되거나 프레임 안과 밖의 경계에서 특정한 신체 혹은 사물 등이 강조되는 식이다. 각각의 주제를 이끄는 사건은 사회의 여러 단면을 보여준다. 인터넷이 발달한 시대에 조숙한 십 대 소녀는 자기 성적 어필을 위해 컴퓨터로 특정 부위를 촬영하고, 불꽃놀이를 하다 부상을 입은 파티 주최자가 자존심 때문에 이를 거절하며 방해되는 학생을 옹호하려다 동료들에게 냉대받는 선생님의 이야기 등을 다룬다. 지하철이 나왔던 전작과 마찬가지로 버스, 기차, 트램 등의 대중교통이 나오는데, 이는 사회를 감시하고 사람들이 지정된 경로로 이동하는 체제에 대한 이야기를 은연중에 암시하고 있다. 여기서 가장 강력한 메시지가 이미지로 동원되는 장면은 솔로몬 애쉬(Solomon Asch)의 동조 실험이다. 간단하게 말해 다수가 지지하는 내용이 아무리 불합리하더라도 그 결정을 동조한다는 것이다. 선생님이 한 학생을 불러 칠판에 부착된 선의 길이 중 긴 것을 이야기해 보라 말한다. 학생의 선택을 단체로 반발하는 나머지 학생들로 인해 거짓은 참이 된다. 이 장면은 사회 구조가 다수에 의해 선택되는 불공정한 체제임을 밝히는 메시지를 교육하는 대표적인 예시다.

 

ⓒ 영화 <분별없는 행동>(200)
ⓒ 영화 <플레이>(2011)

그리고 이어지는 <플레이>(2011)는 당시 예테보리 언론에서도 크게 다뤘던 스웨덴 예테보리의 십대 소년들이 또래를 2년간 40차례에 걸쳐 강탈한 청소년 범죄 사건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당시 도둑질을 시도하는 이들은 꽤 거대한 그룹이었다고 한다. 영화는 세 명의 소년(백인 2명과 동양인 1명)이 흑인 소년 다섯 명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이 영화에서 루벤은 아이들에게 역할극(role-playing)을 주문했다고 한다. 루벤의 많은 영화에서 발견되지만, <플레이>는 카메라가 인식될 수 있는 정면으로 찍기보다 인식하지 못하도록 관음하듯이 찍었다. 이는 그들이 역할극을 효율적으로 수행, 픽션 이상의 현장감을 보여주기 위함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도 등장하는 일상생활의 장소인 쇼핑몰, 트램, 거리, 공원을 찍을 때의 카메라는 인물을 바로 찍는 것이 아니라 인물과 공간 사이를 등지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쉽게 식별되지 않고 있다는 의미다. 또한 그들을 지켜보는 어른들은 무관심하고 심지어 회의적이기까지 하다. 이처럼 관음하는 카메라의 구도는 감독이 구상하는 독자적인 시선에 함몰되지 않고 관객에게 전가된다.

예테보리라는 지형학적 공간 안에서 루벤은 이 작품에서도 스웨덴의 현실과 인종, 계급, 이민자, 아이라는 연령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본격적으로 담론의 여지를 끄집어낸다.

루벤 외스틀룬드의 <몽골로이드 기타>, <분별없는 행동>, <플레이>는 '예테보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예테보리 3부작'으로 칭할 수도 있겠다. 이후 <포스마쥬어 : 화이트 베케이션>(2014), <더 스퀘어>, 곧 국내에 개봉할 <슬픔의 삼각형>은 지정학적 요소를 벗어나 교육적인 측면보다 '풍자의 요소'가 더 강하다. 가족 관계나 예술, 패션계의 환상은 관성적으로 인식하는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보기 위한 루벤의 시도다. '남성 부조리 3부작'이라 칭해지는 이 영화들이 우익 단체의 공공연한 비난의 대상이 되는 건 그만큼 파급력이 있기 때문임을 부인할 수 없다. (심지어 <슬픔의 삼각형>이 황금종려상 수상 발표 당시에 야유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고 한다) 그가 앞으로도 겨냥하게 될 사회가 어디로 이동하게 될지 무척이나 기다려진다.

[글 이현동 영화평론가, Horizonte@ccoart.com]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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